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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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번지 성주사 터에 있는 통일신라 시기에 세워진 탑비.
신라 하대의 승려인 낭혜화상 무염(800~888)의 비문이다. 속세의 성은 신라의 국성인 김씨로 태종 무열왕의 8세손이다. 조상은 진골이었지만나 골품이 떨어져 6두품이 되었다고 해, 신라 골품제 연구에서 주목받는 비문이기도 하다. 13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수학하고 당나라 장안에 30여년간 유학하고 돌아와 헌강왕, 정강왕 시기에 신라 불교의 필두인 국사를 역임하며 능력있는 이를 등용해 쓸 것을 진언하는 등의 행적을 펼치다 진성여왕 때 89세로 입적했다.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 글을 쓴 4개의 비문[1] 중 하나이다.
현전하는 통일신라 비석 중에 가장 큰 규모[2]이며 조각이 수려하게 놓아져 있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글씨는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썼다. 특히 낭혜화상의 집안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 진골 가문에서 6두품으로 강등되는 과정이 적혀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의 골품제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서 평가 받고 있다.

[1] 이를 4산비문, 혹은 사산비명이라고 일컫는다. 지증대사탑비 외의 나머지 3개는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제8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가 있다. 이 중 다른 셋은 지금까지 비석 실물이 그대로 남아있지만 대숭복사비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현전하지 않고 일부 파편만이 남아있다. 다만 숭복사비의 내용은 따로 후대 문인들이 기록으로 남겨 지금까지 전해진다. 현재 경주시 숭복사 터에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2] 높이 4.5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