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두품

 


1. 개요
2. 상세
3.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씨 중 6두품의 후손
4. 나무위키에 등재된 6두품 출신 인물


1. 개요


신라 골품제의 약한 고리.

2. 상세


진골 밑 계급 중에서 가장 유력 계층. 성골과 진골이 넓은 범위의 왕족들인 것을 감안하면 왕족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서열이 높은 계층이다. 즉 금수저는 되는 계층이란 소리다. 대체로 6두품에 해당되는 계층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통합한 경주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던 중소 국가들의 지배층들이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삼국통일전쟁 후 멸망한 옛 고구려계 고위 귀족들은 고구려에서의 지위를 인정받아 6두품으로 편입되었다. 백제계의 경우 기존 지위를 모두 인정하려 하였으나, 이들 중 일부가 신라에서 주는 관위를 거부하는 초유의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대한 신라 지배층의 반응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대단히 격분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신라의 초기 기준으로 6두품에 해당하는 고위귀족층(대성팔족)은 백제 멸망 직후 당나라로 압송되거나 백제의 동맹이던 일본으로 도피하거나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했겠지만, 다수는 도망가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이후 기록을 보면 신라에서 백제의 살아남은 최고위귀족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설정하는 게 나오는데, 이 단계에선 백제왕실이 주도하는 부흥운동 따위는 꿈에서나 가능해졌고, 시도했다간 보덕국이 그랬듯 백제인들로 주로 구성된 청금서당, 백금서당 등에게 참혹한 진압을 받을게 뻔했기에 관위를 거부한다등 행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당해본 바 있는(?) 신라는 이 기준을 5두품으로 낮추었고, 이로써 통일신라에서 백제계 성씨를 대놓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대단히 적어졌다고 본다. 백제의 고위 귀족인 좌평 신분으로 신라에 투항한 충상은 6두품 아찬 대우를 받은 건 그나마 매우 용하게 받은 경우.
수도 출신들만 상위계급이었던 고대국가의 특성상 신라의 6두품 역시 대대로 왕경인 경주 출신이다. 하지만 진골들과는 달리 '''출세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1] 이래저래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하지만 득난(得難)[2]이라는 또다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이들도 신라에서 매우 희귀한 계층이었고 엄연히 자부심 넘치는 지배계층이었다. 6두품의 진급 상한산인 6등급 아찬이 우스워 보일지 모르지만 조선시대로 환원하면 종3품까지 진급이 가능했으니 무시할 만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흔히들 진정한 주류에 끼지는 못하나, 비주류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6두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 설명이 되어 있듯이 신라의 6두품 역시 '''신라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기득권층에 속한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신라 중대였다. 삼국통일을 전후로 6두품 이하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진골을 누르기 위해 '''중위제(重位制)'''가 전격 시행되었고 이 제도를 통해 6두품은 4중아찬까지 진급할 수 있게 되었다. 신문왕이 6두품을 적극 기용했다는 것은 중위제를 활용하여 이들을 기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6두품이 가장 많이 빛을 발했던 때가 삼국통일전쟁기부터 신라 중대 전제왕권기로 이 때의 6두품들은 유학을 배운 지식인들로 6두품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일종의 특진제도로 도입된 중위제를 통해 신라의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사실 삼국통일전쟁기 신라의 리더들인 태종 무열왕이나 김유신, 문무왕은 신라 역사에서 비교적 골품제에 크게 얽메이지 않았고 능력 위주로 인사를 단행하거나 논공행상을 벌였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6두품의 중위제는 제 아무리 오래 근무를 하든, 능력이 우수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뭘 해도 진골 출신보다 밑이었고 진골에게 숙여야 했으니 결국 골품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때문에 6두품이라는 말이 비유적으로 승진에 한계가 있는 고위직 간부 혹은 권력층의 신하라는 태생적 한계를 자조하는 뉘앙스를 현시대에도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권력 인맥, 학맥의 끝판왕인 서울대, TK, PK같은 것이 없는 고위직이 주로 6두품 취급받는다.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면서 중앙 진골끼리의 왕권 다툼이 격화되면서 신라 중대 왕실을 이룬 태종 무열왕계 진골들과 김유신 가문의 진골들도 하대에 이르면 원성왕계 진골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세력을 잃고 6두품으로 격하되었다.[3] 이러한 혼란과 한계 때문에 아예 당나라로 건너가 빈공과 과거에 합격해 당나라 관리로 재임하기도 했다. 최치원이 대표적인 케이스. 결국 신라 하대에 6두품은 '''지방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신라를 멸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씨 중 6두품의 후손


- 신라 6성
  • 경주 이씨: 족보에서는 진골 신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신당서에 따르면 귀족은 김씨 또는 박씨이고 이는 당대의 금석문에서도 교차검증되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 신라 건국 6부촌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양산촌(훼부)[4]를 거점으로 하던 성씨이다.
  • 경주 설씨
  • 경주 손씨
  • 경주 정씨: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피부,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량부를 거점으로 한 성씨다.
  • 경주 최씨: 삼국사기에 따르면 사량부, 삼국유사에 따르면 본피부를 거점으로 한 성씨다. 최치원의 사례로 가장 유명한 성씨다.
  • 경주 배씨
한편, 설요(薛瑤)의 묘지명(墓誌銘)에는 신라왕 김씨의 후손인데 신라왕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에게 ‘설(薛)’국을 식읍(食邑)으로 봉해주고 설(薛)을 성씨로 삼게 했다고 하였다는 구절이 있어 진골이 6두품으로 족강되면 신라 6성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5].

4. 나무위키에 등재된 6두품 출신 인물


학계에서는 진골이 아닌 것이 명백하나, 유명한 이들을 6두품이라고 뭉뚱그리는 경향이 있는데 급찬 이상 관등을 소지한 게 분명한 몇몇 인물들 말고는 사실 6두품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경우들이 많다. 아래 인물들 중에서도 실제로는 6두품보다 더 미만의 신분인 이들도 섞여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 강수
  • 설오유
  • 설계두
  • 설총
  • 시득
  • 왕륭[6]
  • 원효[7]
  • 신라삼최
  • 죽죽(사후 추증)

[1] 6두품은 신라 17관등 중 6위인 아찬까지 올라가는 게 한계였다.[2] 얻기 힘들다는 뜻으로 최치원의 저서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에 보이는 말이다.[3] 물론 모든 무열왕계 진골들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진골 신분을 유지하면서 왕의 국구로 대단한 권세를 누린 김양 같은 케이스도 존재한다.[4] 왕을 독점적으로 배출했던 동네다. 왕성인 박씨, 김씨가 훼부 출신이다. 신라 건국 6성씨(이씨, 정씨, 소씨, 손씨, 설씨, 배씨)가 초기 진골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경주 이씨를 제외하면 불확실하다. 화백회의는 진골 출신들만 참여할 수 있었는데, 초기 화백회의가 6부촌장들의 회의였다는 점에서 6성씨의 종가집안이 진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5] 이것과 별개로 묘지명에서 언급된 신라왕의 아들은 태종 무열왕의 외손 설총일 가능성이 있다.[6] 궁예에게 귀부하기 직전까지 신라의 송악군 사찬관등에 있었다. 다만 진짜 6두품이라기 보단 지방세력가로 6두품 취급해준것에 가까울 것이다.[7] 그와 함께 신라 불교의 쌍벽이라 할 만한 의상은 진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