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성
國姓
예전 동아시아의 왕조 시절 왕가의 성씨(姓)를 지칭하는 것.
다른 일반적인 성씨와는 달리 일반 백성이 함부로 이 성을 일컫지 못하던 시대도 있고, 기본적으로 욕설에 섞어서 사용하면 불경죄에 걸려서 해당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보호받았다.
국성을 가졌다고 해서 다 왕족이나 황족 취급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왕족이나 황족은 따로 세밀한 족보가 있어서 족보에 기록된 사람에 한해서 왕족이나 황족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일반인이 국성을 멋대로 자신의 성씨로 사용하면 불경죄 등으로 처벌받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시대에 따라서는 왕이 큰 공을 세웠거나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에게 이 성을 내림으로써 그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신하와는 다르게 왕이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천명하는 수단 중에서 상급의 수단인 셈이다. 물론 이건 신하에게도 영광이므로 충성심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해당 성씨를 받은 사람을 국성야(國姓爺) 등으로 불러서 국성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삼간다. 국성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명나라의 국성야이자 대만 정씨 왕국의 1대 왕 정성공으로, 네덜란드인들은 그를 국성야의 중국어 방언 발음인 콕싱가(Koxinga)로 불렀고, 지금도 서구에서는 그냥 그의 이름 자체가 콕싱가로 부른다.[1] 한국사에서는 왕건이 김순식에게 왕씨 성을 하사해 왕순식이 된 예 등이 있다. 이렇게 국성을 하사하는 것도 일종의 사성정책에 속한다.
재미있는 것은 반역의 마음을 품은 사람도 국성을 정식으로 하사받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국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후 찬탈을 하더라도 역성혁명이 아니라 왕조 내부에서의 왕위 교체정도로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일단 행위는 동일하지만 왕위 교체 수준이라면 근왕병같은 저항세력도 덜 생기고, 차후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기도 쉬워진다.
같은 맥락에서 국경 외부의 야만족이 멋대로 국성을 차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자신의 부족 내부에서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 첫째 목적이고, 일이 잘 돼서 해당 국가의 영토를 잠식하면 자신이 침략자가 아니라 빼앗긴 권리를 되찾는 자 수준으로 사실을 왜곡하기 위함이었다. 이 경우로 흉노족 어부라의 아들 유표와 손자 유연이 한나라의 국성 유씨를 자칭한 것이 있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경우에는 국성이 없다. 정해진 국성이 없는 게 아니라 명목상 지배자인 천황은 인간이 아닌 신으로 치기 때문에 성씨 자체가 없고 이름만 있다. 일본 극우 측에서는 이게 천손강림의 증거라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실질적 지배자였던 막부의 경우 과거 조정의 권위를 바탕으로 지배했던 옛 가문의 성씨를 자칭이던 물려받던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얻어내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처음 세운 미나모토(源)/겐지나 타이라(平)/헤이지 등이 있다. 이를 외교 문서에서도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풍신수길)를 평수길(平秀吉)이라고 부르는 등의 사례가 있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에게 직접 성과 이름을 하사받는 것 자체는 일본에서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상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그 하사받는 이름의 글자가 높으신 분의 이름에도 있던 글자라면 더욱 의미있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야사 중엔 이항복&이덕형 콤비가 이 걸로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이덕형이 명나라 장수, 이여송[2] 을 응접하는데,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라는 걸 안 장수는 '같은 이씨와 혼인하다니, 짐승만도 못한 작자다'라고 크게 화를 냈다. 조선에선 본관이 다르면 성이 같아도 다른 가문으로 여기지만 중국에선 본관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서 이런 오해를 한 것. 그러자 이항복이 기지를 발휘해서 '이덕형은 본래 김씨 성인데 큰 공을 세워서 국성인 이씨를 받은 인물'이라고 거짓말했고, 명나라 장수는 '국성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라니 큰 오해를 했다'라며 사과하고 예를 갖췄다는 이야기.
서양에도 국성이 있다.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영국의 윈저, 프랑스 제국의 보나파르트와 부르봉 등이 있다. 다만 동아시아와 유럽 지역의 성씨에 대한 인식이나 왕위 계승 법칙 등은 상당히 다르므로 이 국성의 개념도 당연히 다르다. 여담이지만 프랑스는 위그 카페가 개창한 카페 왕조 이후 등장하는 발루아 왕가, 부르봉 왕가, 오를레앙 왕조 모두 부계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개념으론 모두 한 가문인 셈이다.
고대
남조
북조
중세 이후
고대
1. 개요
예전 동아시아의 왕조 시절 왕가의 성씨(姓)를 지칭하는 것.
다른 일반적인 성씨와는 달리 일반 백성이 함부로 이 성을 일컫지 못하던 시대도 있고, 기본적으로 욕설에 섞어서 사용하면 불경죄에 걸려서 해당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보호받았다.
2. 상세
국성을 가졌다고 해서 다 왕족이나 황족 취급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왕족이나 황족은 따로 세밀한 족보가 있어서 족보에 기록된 사람에 한해서 왕족이나 황족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일반인이 국성을 멋대로 자신의 성씨로 사용하면 불경죄 등으로 처벌받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시대에 따라서는 왕이 큰 공을 세웠거나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에게 이 성을 내림으로써 그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신하와는 다르게 왕이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천명하는 수단 중에서 상급의 수단인 셈이다. 물론 이건 신하에게도 영광이므로 충성심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해당 성씨를 받은 사람을 국성야(國姓爺) 등으로 불러서 국성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삼간다. 국성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명나라의 국성야이자 대만 정씨 왕국의 1대 왕 정성공으로, 네덜란드인들은 그를 국성야의 중국어 방언 발음인 콕싱가(Koxinga)로 불렀고, 지금도 서구에서는 그냥 그의 이름 자체가 콕싱가로 부른다.[1] 한국사에서는 왕건이 김순식에게 왕씨 성을 하사해 왕순식이 된 예 등이 있다. 이렇게 국성을 하사하는 것도 일종의 사성정책에 속한다.
재미있는 것은 반역의 마음을 품은 사람도 국성을 정식으로 하사받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국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후 찬탈을 하더라도 역성혁명이 아니라 왕조 내부에서의 왕위 교체정도로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일단 행위는 동일하지만 왕위 교체 수준이라면 근왕병같은 저항세력도 덜 생기고, 차후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기도 쉬워진다.
같은 맥락에서 국경 외부의 야만족이 멋대로 국성을 차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자신의 부족 내부에서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 첫째 목적이고, 일이 잘 돼서 해당 국가의 영토를 잠식하면 자신이 침략자가 아니라 빼앗긴 권리를 되찾는 자 수준으로 사실을 왜곡하기 위함이었다. 이 경우로 흉노족 어부라의 아들 유표와 손자 유연이 한나라의 국성 유씨를 자칭한 것이 있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경우에는 국성이 없다. 정해진 국성이 없는 게 아니라 명목상 지배자인 천황은 인간이 아닌 신으로 치기 때문에 성씨 자체가 없고 이름만 있다. 일본 극우 측에서는 이게 천손강림의 증거라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실질적 지배자였던 막부의 경우 과거 조정의 권위를 바탕으로 지배했던 옛 가문의 성씨를 자칭이던 물려받던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얻어내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처음 세운 미나모토(源)/겐지나 타이라(平)/헤이지 등이 있다. 이를 외교 문서에서도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풍신수길)를 평수길(平秀吉)이라고 부르는 등의 사례가 있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에게 직접 성과 이름을 하사받는 것 자체는 일본에서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상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그 하사받는 이름의 글자가 높으신 분의 이름에도 있던 글자라면 더욱 의미있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야사 중엔 이항복&이덕형 콤비가 이 걸로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이덕형이 명나라 장수, 이여송[2] 을 응접하는데,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라는 걸 안 장수는 '같은 이씨와 혼인하다니, 짐승만도 못한 작자다'라고 크게 화를 냈다. 조선에선 본관이 다르면 성이 같아도 다른 가문으로 여기지만 중국에선 본관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서 이런 오해를 한 것. 그러자 이항복이 기지를 발휘해서 '이덕형은 본래 김씨 성인데 큰 공을 세워서 국성인 이씨를 받은 인물'이라고 거짓말했고, 명나라 장수는 '국성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라니 큰 오해를 했다'라며 사과하고 예를 갖췄다는 이야기.
서양에도 국성이 있다.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영국의 윈저, 프랑스 제국의 보나파르트와 부르봉 등이 있다. 다만 동아시아와 유럽 지역의 성씨에 대한 인식이나 왕위 계승 법칙 등은 상당히 다르므로 이 국성의 개념도 당연히 다르다. 여담이지만 프랑스는 위그 카페가 개창한 카페 왕조 이후 등장하는 발루아 왕가, 부르봉 왕가, 오를레앙 왕조 모두 부계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개념으론 모두 한 가문인 셈이다.
3. 한국 역대 왕조의 국성
- 고조선: 한(韓)[3] , 위(衛)[4]
- 부여: 해(解)
- 고구려: 고(高)[5]
- 백제: 부여(扶餘)[6]
- 신라: 박(朴[7] ), 석(昔, 경주 석씨), 김(金, 경주 김씨)
- 가야: 김(金, 김해 김씨)
- 탐라국: 양(梁)[8] , 고(高)[9] , 부(夫)
- 발해: 대(大)[10]
- 태봉: 궁(弓) 혹은 김(金)[11][12]
- 후백제: 견(甄, 황간 견씨)[13]
- 고려: 왕(王, 개성 왕씨)
- 조선, 대한제국: 이(李, 전주 이씨)
- [14]
4. 중국 역대 왕조의 국성
고대
남조
북조
중세 이후
5. 베트남 역대 왕조의 국성
고대
- 어우 락(BC 257 ~ BC 207): 툭(Thục, 蜀)
- 남비엣(BC 207 ~ BC 111): 찌에우(Triệu, 趙)
- 리(Lý, 李): 544 ~ 602
- 응오(Ngô, 吳): AD 939 ~ 967
- 다이꼬비엣(大瞿越/대구월, 968 ~ 1010): 딘(Đinh, 丁)(968~980), 레(Lê, 黎)(980~1010)
- 리(Lý, 李): 1009 ~ 1225[22]
- 쩐(Trần, 陳): 1225 ~ 1400
- 호(Hồ, 胡): 1400 ~ 1407
- 레(Lê, 黎): 1428 ~ 1527, 1532 ~ 1789
- 막(Mạc, 莫): 1527 ~ 1677
- 떠이선(Tây Sơn, 西山): 1778 ~ 1802 : 응우옌 (Nguyen])
- 응우옌(Nguyễn, 阮): 1802 ~ 1945
6. 류큐 왕국의 국성
- 쇼(尚) 씨
- 제1 쇼씨 왕통: 1406~1469
- 제2 쇼씨 왕통: 1469~1879
7. 프랑스의 국성
[1] 동아시아인을 공식적으로 서양 언어로 부르는 흔치 않은 경우이다.[2] 참고로 조선계 명나라인 7세대(...)이다.[3] 위만의 찬탈 이전 준왕 계통 왕조의 성씨. 삼국지에서 위략을 인용한 부분에서 나타난다.[4] 위만조선. 단 위만의 衛가 성씨인지 아닌지 이설이 존재한다.[5] 오늘날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은 횡성 고씨가 된다.[6] 오늘날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은 부여 서씨, 의령 여(余)씨가 된다.[7] 밀양박씨가 가장 많아 대표적으로 알려져있지만 원래 모든 박씨(반남 박씨, 함양 박씨, 순천 박씨 등) 박혁거세가 시조다. 귀화 박씨는 박연뿐이다. 그러나 모든 박씨가 만들어지고 귀화를 했다.[8] 초기에는 良자였으나 이후 고쳤다.[9] 한자가 같은 고구려의 고씨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10] 오늘날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은 밀양 대씨와 후에 태(太)씨로 개명한 협계 태씨와 영순 태씨가 된다.[11] 기록상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불길한 징조가 있어 죽이라고 명했지만 유모가 빼돌리는 과정에서 실수로 아기 눈을 찔러 애꾸가 됐다는 이야기는 유명.[12] 현존하는 후손은 광산 이씨와 순천 김씨가 있다고는 하지만, 궁예의 자손은 모두 주살당했기 때문에 어떻게 후손이 남아있냐는 비판이 있다.[13] 단명한 왕조라서 인지도는 낮지만 의외로 지금까지도 멀쩡히 존속하는 성씨이다. 유명인으로 견미리가 있다. 참고로 견훤을 진훤이라 불러야 한다는 설이 있는데, 견훤 문서의 해당 단락 참조. 만약 견 자를 진으로 읽어야 한다면 현대 한국의 견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전부 진씨로 바꿔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제서야 독음을 바꾸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듯.[14] 취소선 쳤지만 북한은 사실상 왕조 국가이다.[15] 단 이는 후의 하나라의 후예인 기(杞)와 관계된 것으로, 사성(姒姓)이 당대에 쓰였을 가능성은 적다.[16] 영(嬴)성 진(秦)씨. 춘추 전국시대의 군주들은 성과 씨가 다른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나라이름이 씨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으로 제나라의 강태공 여상의 경우 강(姜)성 여(呂)씨 이다. 한나라 이후 점차 성과씨가 같은 개념으로 혼용, 통합되었다.[17] 한나라의 방계 황족(유방의 동생인 초왕)이 세운 나라로서, 유송은 한의 계승자 대접을 받게 된다.[18] 한삼걸 중 하나의 소하의 후손이 세운 나라. 제와 양은 둘 다 소하의 직계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19] 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으로 탁발씨에서 원씨로 바꿨다.[20] 패아지근[21] 애신각라[22] 남아있는 후손은 국내의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가 남아있다.[23] 사실 프랑스의 왕조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는 전부 카페 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왕가기 때문에 실제로 프랑스 왕들의 본성은 카페이다. 참고로 루이 16세도 처형당하기 직전에 루이 카페로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