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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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29대 국왕.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사이의 아들[7] 로, 선덕여왕의 조카다.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 골품제라는 신라의 특수한 사정상 즉위 직전까지 태자가 아니었고 마지막 성골인 진덕여왕이 승하한 후 화백회의의 합의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8]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관, 정치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서 태종 무열왕이라는 시호 외에 본명인 김춘추도 잘 알려져 있다.
신라의 정치사로 보면 제36대 혜공왕 대까지 이어지는 신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신라 중대 왕실의 시조격되는 임금이기도 하다. 태종 무열왕은 그의 행보와 업적에 대해 여러 상반된 평가들이 나오고 있지만[9]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7세기 당시 김춘추를 빼고 한반도 정세를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의 핵심 인물이라는 점은 반대 의견이 없어서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묘호와 시호
- 묘호: 태종(太宗)
- 시호: 무열대왕(武烈大王)
일본측 기록에 백제에서 도모왕(동명성왕 추정)을 태조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기는 한데 참고 수준이다. 다른 사서(史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태조대왕 역시 있지만 이 경우 역시 애매하다.
진흥왕 순수비에는 태조가 등장하며 문무대왕비와 흥덕대왕비에는 태조 성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태종이 있는데 태조가 없을리 없는데다가 당대 기록인 금석문에까지 태조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미루어보아 신라에 태조라고 불리는 왕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 다만 누가 태조인지는 알 수가 없어서 해석이 분분하다. 그리고 원성왕릉의 왕릉 사찰인 숭복사 비문에서 원성왕을 열조로 언급하기도 한다.
참고로 모든 군주에게 묘호를 올리는 관행은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에야 도입되었고 한반도에는 고려시대부터 처음 시작된 것이다[10] . 예를 들어 한나라의 경우도 몇몇 왕은 태조, 세조 등의 묘호가 있지만 삼국지로 유명한 영제나 헌제 같이 업적이 없었던 왕은 묘호가 없다. 따라서 신라에서 모든 왕이 아닌 일부 중요한 왕에만 묘호를 붙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 출생과 성장
《삼국사기》}}}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湌龍春【一云龍樹】之子也 【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母天明夫人 眞平王女 妃文明夫人 舒玄角湌女也
휘는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왕비는 각찬(角湌) 서현의 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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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는 제왕학을 배우며 왕위를 무난하게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폐위된 진지왕계로서 신라 정계의 비주류로 시작해 삼국의 다툼이 치열했던 7세기 삼국시대 후반이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에서 자신의 국제 외교와 정치적 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해 알천, 비담 등 경쟁자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고 그의 집권을 기점으로 신라는 여러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이루게 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김용춘)과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사이의 아들로 선덕여왕의 조카이자 6촌 남동생이다.[11]
진평왕의 외손자이자 5촌 조카로 직계 남성임에도 이모이자 6촌 누나는 물론 5촌 이모이자 6촌 누나보다 왕위 계승권이 밀렸고 심지어 진덕여왕 사후에도 알천의 양보가 없었다면 왕이 되지 못할 뻔했다. 이에 대해 김춘추의 혈통에 무언가 큰 결함이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는데 여러 설 중 조부 진지왕이 폐위된 후 후손인 태종 무열왕도 연좌되어 진골로 족강되었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12] 아니면 진평왕이 본인의 왕위계승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 동륜태자의 자손들만을 성골로 삼았기 때문에 그 이외 신분이었던 김춘추는 밀렸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아버지 김용춘이 진지왕의 정비 지도부인의 소생이 아닌 골품이 낮은 여자 소생의 서자라는 설도 있다. 설화 속 비형랑이 김용춘을 모티브로 했으며 실제로 김용춘이 서자였다는 추측이다. 비형랑은 폐주의 아들임에도 새롭게 즉위한 진평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는 김용춘과 유사하다.
이 외에 어머니 천명공주가 진평왕의 정비 마야부인의 소생이 아닌 비왕족 출신의 후궁이 낳은 서녀라는 설이 있다. 선덕여왕의 사후 천명공주나 천명공주의 아들인 김춘추가 아니라 사촌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천명공주의 생모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만약 천명공주가 진평왕의 서녀였다면 장녀였든 차녀였든 간에 마야부인 소생의 적장녀인 선덕여왕과 방계이지만 순수 왕족 혈통인 진덕여왕에게 계승권이 밀리는 것이 당연하다. 참고로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왕위를 잇는 방식이 자리잡힌 것은 조선 중기 이후로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서자는 왕위 계승권이 없었고 적자가 없다면 형제가 왕위를 잇는 것이 당연했다.[13][14][15] 같은 신분끼리만 혼인하던 신라의 풍습을 고려하면 천명공주와 용춘 모두 서녀 혹은 서자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태종 무열왕의 이름 춘추(春秋)는 당시 신라의 일반적인 작명법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유학적 성격의 이름이었다.[16] 이는 춘추의 아들 법민(法敏), 인문(仁問), 문왕(文王)도 마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름은 어떤 지향성을 띠는 것이 일반적임을 고려하면 이는 김춘추 본인이나 길게는 이름을 지었을 아버지 김용춘부터 일가 전체가 기존 불교를 대신할 유교적 사회 질서와 개혁에 관심이 많은 성향이었다고 해석하고 훗날 태종 무열왕이 비담의 난 평정 이후 실권을 쥐면서부터 있었던 당나라 제도 도입과 각종 개혁도 그 영향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유교적인 이름을 지은 김유신[17] 과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성향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풍채가 매우 특이했는지 당 태종은 김춘추를 보고 매우 기이하다고 평했다. 《일본서기》에서도 일본에 외교를 위해 넘어갔던 김춘추에 대해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담소를 잘했다(春秋美姿顔善談笑)고 기록되어 있으니 뭔가 사람을 끄는 외모와 언변의 소유자였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삼국유사》 기이 제1, 태종 춘추공}}}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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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춘추는 한끼에 쌀 세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는 대식가이기도 했다. 다만 그런데 이 구절은 다른 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18]
일례로 왕의 식사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있는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왕을 위해 차린 음식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왕이 혼자서 다 먹지는 않는다. 일부만 먹은 뒤 남은 반찬은 왕이 식사를 마친 뒤 밥만 바꾸어서 왕 밑의 대신들이나 그 밑의 신하들이 먹었다. 이걸 '물림상'이라고 하는데 현대인의 기준에서 이상한 풍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왕이 신임하는 사람에게 왕의 음식을 내려준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윗사람들이 먹을 때는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서 최대한 깨끗하게 반찬을 먹었다.
조선 시대와 신라 시대의 풍습이 같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보면 김춘추 혼자서 저걸 다 먹었다기보다는 왕을 포함한 궁중의 신료들이 먹은 음식 전체가 한끼에 쌀 세 말이라는 소리다. 태종 무열왕 본인이 대식가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태종 무열왕 치세 신라의 풍요로움(그만큼 밥이 많았기 때문에)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바로 아래로 이루어지는 구절과 연계해서 해석해 보면 더욱 그렇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음식을 남겨주는 것은 한국사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비슷한 풍습이 있어 빵을 요리를 담는 그릇으로 쓰고 왕이 요리를 먹은 뒤 남은 고깃국물 머금은 일회용 식기는 영주가 가난한 영민들에게 베풀었다.[19] 전근대 시대에 애초 전제가 하사하기 위해 일부러 많이 차리는 것이고 왕이나 되는 사람이 먹던 고급 요리는 적어도 남아서 버릴 일은 없었다.
4. 왕이 되기 전
4.1. 청년기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전해지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제18대 풍월주였다고는 하나 근거라고 있는게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뿐이라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사서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서는 김유신이 풍월주였던 때 풍월주 부제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풍월주까지 되었다고 한다.
4.2. 외교 활동
김춘추는 진골이었으므로 아직 성골 왕족이 많이 남아있던 젊은 시절에는 유력한 귀족 지위였고 스스로 학문을 닦아 왕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국제 외교가로 활동했다. 김춘추의 외교 활동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김춘추의 외교 활동이 결과적으로 신라의 난국 타개에 도움이 되고 신라의 삼한일통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교 활동을 전개했기에 7세기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적인 정치가였다.
김춘추의 딸 김고타소와 사위인 대야성 도독 김품석이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있었던 백제의 대야성 침공 당시 사망했는데 김춘추는 이를 듣고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백제 멸망을 맹세하면서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로 갔던 것이다. 김춘추의 고구려행, 어떤 경우는 나당동맹 체결이나 백제 멸망전의 동기 자체를 김춘추 개인의 복수심으로만 부각시키려 보는 해석도 있는데[20] 물론 그것이 하나의 요인일 수는 있지만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타격도 김춘추 고구려행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무래도 장인 김춘추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을텐데 김품석은 대야성을 백제에 빼앗긴 가장 큰 책임자이다. 대야성 전투의 전개 과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김품석이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백제군에 항복하려 했는데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11년(642년)}}}처음에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인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라 하고 곧 왕을 찾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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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전체가 신라인들에게는 전시 체제의 연속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임전무퇴 정신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는 아막성 전투, 반굴, 관창, 김원술 등 사례가 많아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런 와중에 비겁하게 항복하려 했다가 뒤통수나 맞은 김품석은 당시 신라인들에게 비난의 표적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런 김품석이 속한 라인을 이끄는 김춘추에게도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신라 정계는 김춘추가 654년 즉위하기 전까지는 비담, 알천으로 대표되는 귀족 견제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와 경쟁하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춘추로서도 백제의 공세로 초래된 자신의 정치적 위기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만한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다만 이건 김춘추 본인이 다시 살아 돌아와서 인증하지 않는 한 답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더 큰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국가적 위기는 대야성 함락의 결과가 일개 성의 함락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야성은 대 백제 방어선의 가장 중요한 축인데 이게 붕괴된 것이었고 이후 백제는 신라의 서부 지역을 맹공격한 결과 신라는 옛 가야 지역인 낙동강 서안 지역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이와 동시에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해서 신라와 당나라의 연결 통로인 당항성을 공략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당나라와의 교류가 막히고 한강 유역도 위험해지므로 신라에게는 만만치 않은 위기였다.
고구려로 가기 전에 김유신과 맹세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떠나는 김춘추를 향해 김유신은 '공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왕궁의 뜰을 짓밟게 될 것이오.'라는 패기가 흘러넘치는 말을 했고 김유신에게 '60일 이내면 돌아올 것인데 이 때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볼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김유신과 피를 나눈 맹세를 다졌다.[21]
4.2.1. 대 고구려 외교
당시 고구려는 보장왕은 큰 실권이 없고 사실상 고구려를 좌지우지하던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이 직접 김춘추를 대접해 주었다. 김춘추는 고구려 조정에게 양국이 그간의 상쟁을 중지하고 화해하며 고구려가 현재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를 도와 군사적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고구려의 보장왕은 "죽령 이북 땅이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22] 신라가 이를 돌려준다면 구원병을 보내줄 수 있다"고 답했다. 죽령 이북인 한강 유역은 신라에기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그걸 다 돌려주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약소국으로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고구려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위해 내세운 무리한 요구였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고구려 본인들도 신라가 땅을 돌려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고 단지 김춘추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김춘추가 답변하기 힘든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되어 있다. 이런 무리한 요구라도 들어주지 않으면 고구려로서는 신라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이 요구에 김춘추는 "이웃의 위기를 기회로 어찌 영토를 내놓으라 할 수 있습니까? 전 신하로서 어쩔 수 없으니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라며 이를 거부하였고 보장왕은 결국 김춘추를 붙잡고 구금시켜 버린다. 감옥에서 김춘추는 보장왕의 총애를 받는 고구려의 대신 선도해에게 청포 3백 보의 뇌물을 보내자 선도해는 김춘추를 찾아와 토끼전 이야기를 하였고 거짓말로 자라를 속이고 위험에서 벗어난 토끼의 꾀를 상기시키며 융통성 있는 대답을 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 대해 연개소문이 그냥 겁만 줄려고 안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대접한 일 밖에 없다. 쿠데타로 영류왕과 대신들 다 갈아마시고 1인 독재 실권자였던만큼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조종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증거는 없다.
한편 김유신은 김춘추를 구출할 결사대[23] 를 꾸려 한강을 넘어 북상해 고구려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이를 신라에 스님으로 잠입해 있던 고구려 간첩 덕창이 고구려에 보고했고 김춘추 역시 토끼전 이야기대로 보장왕을 다시 만나 신라에 돌아가면 왕을 설득해 고구려 옛 땅을 돌려주도록 하겠다고 일단 지르자 고구려는 땅을 돌려준다는 약속도 받았고 신라군과의 충돌도 우려해서 결국 김춘추를 그냥 내보내줬다고 한다. 이후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도중 황해 바다 위에서 고구려 순찰선을 만났는데 고구려군은 김춘추를 죽이려 했으나 김춘추를 보좌하던 온군해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으로 김춘추처럼 위장해 대신 죽어 김춘추는 무사히 살아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고구려는 김춘추를 죽이려 했고 김춘추는 거짓말로 겨우 빠져나왔으니 김춘추가 탈출한 뒤로 신라와 고구려의 외교 관계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4.2.2. 대 일본 외교
647년에 비담의 난이 김춘추 세력 주도로 평정되었고 상대등 비담을 필두로 하는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다.[24] 동시에 진덕여왕이 즉위했지만 나이든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혈통의 대가 끊길 것이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차기 국왕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이 바로 김춘추였기에 자연히 신라 최대의 권력자가 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구당서에서는 648년 김춘추가 신라의 국상(國相)이었다고 쓰고 있는데 국상을 섭정과 비슷한 직책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648년의 김춘추가 동궁(東宮)(태자)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렇게 국내 문제가 일단락되자 김춘추는 좌절된 고구려 외교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 현안 절충을 모색하였다.
김춘추가 일본에 다녀온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없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646년 9월 기사를 보면 왜 조정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 관료인 다카무코노 쿠로마로(高向玄理)[25] 를 신라에 보내 '질(質)' 파견을 요청한다. 이에 응해 비담의 난이 평정된 후 김춘추는 다카무코노 쿠로마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질'은 인질을 의미하는데 보통 상대국에 대한 굴종의 의미로 보내져 장기간 그 나라에 체류하는 사람이지만 김춘추는 곧 본국으로 돌아와 648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간다. 사실 김춘추를 인질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와 부합하는건데 신라 중대 왕실의 시조인 김춘추를 인질로 규정하여 '신라는 왜의 번국'임을 내세우려는 소산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는 인질이 아니었고 일본서기가 늘 그러듯 김춘추가 사신으로 넘어온 것을 인질로 과장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김춘추가 전통적으로 신라의 적대국이자 오히려 백제와 친밀했던 일본에 건너간 이유와 김춘추가 일본에서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지만 나름대로 일본과의 외교를 통해 다른 가능성을 탐색했던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26] 다른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지 않고 당시 신라 정계 최고의 거물인 김춘추가 직접 바다를 건너갔다는 점에서 신라가 일본을 대충 찔러본 게 아니라 상당한 기대를 갖고 갔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의 정세를 살펴보면 김춘추가 건너가기 직전인 645년에 친 백제계 가문 소가 씨가 몰락하는 다이카 개신이 일어나는데 김현구의 견해에 따르면 이 때 소가 씨를 몰락시키는데 큰 활약을 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가 그동안의 백제만 바라보는 외교를 벗어나 상대적으로 친 신라파였다고 보기도 한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써 있는 '훌륭한 풍채와 세련된 화술'로 여러 일본의 신하들과도 교류하며 신라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 협의를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일본이 654년 당나라에 견당사를 보낼 때 신라 땅을 지나서 가는 것을 신라가 허락해준 것을 볼 때 신라와 일본 양국간에 어느 정도 우호적 교섭이 논의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일본은 이후로도 근본적으로는 신라보다는 친 백제 외교 노선을 유지했고[27] 백강 전투 이전까지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김춘추의 대 일본 외교는 뚜렷한 결실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김춘추가 직접은 아니지만 일본에 몇 차례 더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김춘추는 당나라로 가서 648년 결국 나당동맹을 체결하는데 이 때 당나라의 중국식 관복을 받아들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51년에 신라에서 지만사찬(知萬沙湌)이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일본에 보내는데 지만사찬은 당연히 당나라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여기에서 일본 조정은 이것을 핑계로 사신을 꾸짖어 돌려보내고 신라 공격 논의까지 벌어지는데 나당동맹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53년 8월에 백제가 다이카 개신 이후 일본과 다시금 우호 관계를 맺어 진영이 확실히 갈리게 되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따르면 조선시대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駐蹕)하였던 곳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김춘추의 대 일본 외교 이후에도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험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로 태종 무열왕 재위기에 대마도를 토벌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고려 이전의 기록에서 교차검증되는 부분이 아니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고 있고 조선시대에 그런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근거는 된다.
4.2.3. 대 중국 외교
648년 3월 당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에게 당태종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삼았고 이 문제로 김춘추는 진덕여왕의 아우이자[28] 신라의 이찬간(伊贊干)으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계기는 당나라가 신라에 태클을 거는 듯한 형태였지만 이는 명분이었고 실제 회담은 화기애애했는데 당태종은 김춘추를 극진히 우대했고[29] 김춘추도 장안에 머물면서 당태종과 담소를 나누었으며 당나라 조정 중신들과 교류하면서 양국의 이해 관계를 확인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이용해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했고 당나라는 이미 여러 차례 고구려 공격을 실패한 전력이 있어 고구려 배후의 신라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해 관계의 일치를 바탕으로 김춘추는 당나라 방문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였는데 3남 김문왕을 장안에 머물며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로 남게 하여 나당 외교의 거점을 확보했으며 김춘추 입장에서도 아들을 통해 최강대국 당나라의 유력자들과 계속 교류할 수 있었으므로 신라 정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태종과 만나서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후 평양 이남 지역은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흔히 나당동맹의 결성 시점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양국의 합의점을 찾아냈지 구체적인 시기나 계획 등은 나오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춘추는 단지 당나라의 힘을 빌리는 것뿐만 아니라 체계화된 당나라의 제도와 유학을 도입해 신라를 개혁하는 데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김춘추가 당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당태종에게 요청해 국학(당나라 국자감) 견학을 요청한데서도 드러난다. 당태종은 기뻐하며 직접 국학을 참관시켜 주었고 직접 지었던 온탕비문(溫湯碑文)과 진사비문(晉祠碑文), 직전에 본인이 직접 편찬에 관여해 완성한 역사서인 《진서》(晉書)를 김춘추에게 선물로 주었다. 김춘추는 귀국한 뒤 진덕여왕에게 요청해 신라 관복의 양식을 당나라의 복식과 같게 하였으며[30] 신라 고유의 연호를 없애고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신라의 대외 관계 방향성을 표방한 것으로 신라는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상징적으로 귀속하겠다는 점을 보여준 상징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31] 당나라는 649년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고구려에 대한 압박을 계속해 나갔고 거란과 요서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당나라에 온 백제 사신을 통해 백제가 신라에게 빼앗아간 성을 돌려주고 신라 공격을 계속하면 당나라가 개입할 것을 천명했으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신라를 지원할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는데 이로써 나당동맹은 명백히 표명된 셈이다.
4.3. 내정의 정비
비담의 난 진압 후 신라 정계의 최대 실력자로 떠오른 김춘추는 진덕여왕 치세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제도의 정비도 단행하였다. 이때 신라의 중앙 관서 조직은 크게 확충되었는데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와 입법과 형벌을 관장하는 좌리방부를 창설하였다. 또한 국가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 집행 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당의 복식 도입을 주도한 사람도 김춘추였다.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한 이후인 654년에는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세히 살펴 이방부의 법제 60여조를 정비했다. 김춘추의 이러한 조치들은 신라의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에 도움이 되었으며 신라에서 가장 왕권이 강대했던 시기라 평가되는 중대 왕권의 기본적 골격과 체제가 김춘추에 의해 다져지게 되었다.
5. 즉위와 백제 멸망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면서 비로소 성골 혈통이 완전히 끊기자 어쩔 수 없이 진골 중에서 왕을 추대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화백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김춘추 대신 당시 상대등이었던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견도 약간 있었지만 자신감이 없었던 알천이 건강이 좋지 않음 등을 이유로 스스로 양보하는 식으로 물러나[32] 김춘추가 순조롭게 첫 번째 진골 왕에 올랐다.
김춘추의 능력이나 세력도 세력이지만, 혈통을 따져 봤을 때도 진골 중에서는 성골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33] 별 문제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의 분류에 따르면 신라 중대의 시작이며, 일연의 분류에 따르면 신라 하고(下古)의 시작. 어느 쪽에 있어서도 중대한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진덕여왕 때부터 이미 무열왕이 실권을 가지고 추진했던 제도 개혁은 무열왕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대신들을 감찰하는 기관인 사정부(司正府)를 설치해 통치가 한층 정교해졌고 율령 체제도 좀 더 가다듬었다.
흔히 진평왕 때부터 열세였던 신라가 무열왕이 즉위하자 다시 상승세를 타고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 사실 무열왕의 치세 전반부까지는 여전히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계속 파상 공세를 퍼부어 여전히 엄청난 위기'''였다. 당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냐면 백제, 고구려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신라는 곧 망할 나라'라는 인식이 돌았을 정도.
무열왕 재위 2년(655년)에는 고구려, 백제, 그리고 고구려에 개입한 말갈까지 신라에 연합 공격을 가해 33개 성을 빼앗아 나누어 가졌고, 재위 5년째인 659년에도 하슬라(강릉) 방어선이 말갈과 고구려의 위협을 받아서 남쪽의 실직(삼척)을 2선 방어 기지로 삼아야 했다. 무열왕도 이를 타개해 보기 위해 655년부터 당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아직까진 연락이 없었다.
일단 당나라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백제보단 고구려 정복이었는데, 신라 측은 고구려와 같은 편이자 고구려의 후방에 위치한 백제가 걸림돌이 되므로 고구려보다 먼저 멸망시켜야 한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었고, 실제로 백제 의자왕은 650년대 들어서 대놓고 반당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650년대 중후반 당시 당나라는 당태종 및 장손무기로 대표되는 관롱집단 출신 개국공신 세대가 저물고 측천무후와 그녀를 돕는 신진세력으로 세대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태종이 쭉 해왔듯 고구려 직공을 계속하는 것과 일단 백제부터 공격한 후 고구려 공략 둘 중 뭐가 먼저일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원정군 파견 결정을 미뤄두고 있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이 무렵의 무열왕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6년 기사}}}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不報 憂形於色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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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659년 10월, 무열왕의 꿈에 앞서 죽은 신하인 장춘과 파랑이 나타나 "당에서 내년에 백제를 친다고 합니다"라는 보고를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무열왕은 두 사람을 추모하는 불제를 열었고 그 자손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으며 한산주에 장의사(莊義寺)라는 절을 세워 이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물론 실제로 귀신이 나타나 정보를 알렸을 리는 없고 그만큼 양국의 이해관계가 극적으로 맞아떨어졌음을 이후 일화로 각색한 기록이다.
이듬해 660년 결국 당은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을 맡겨 황해를 건너 신라로 보냈고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660년에 백제를 단기간에 멸망시켰다. 대장군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주력 군대가 황산벌 전투를 거쳐 사비성, 웅진성 공성전에서 싸우는 동안 무열왕은 6월 29일부터 후방 금돌성(今突城, 지금의 상주시)에서 머물렀고 의자왕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660년 7월 29일 사비성으로 이동했다. 8월 2일에 열린 정식 항복식에서 의자왕이 직접 따르는 술잔을 받고, 과거 대야성 함락 때 백제군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백제에 투항한 배신자 검일과 모척을 처단해 딸과 사위의 복수를 했다.
그러나 백제 수도권을 속전속결로 공격해 무너트렸지만 아직 백제의 각 지방에는 여전히 지방세력이 남아있었고, 백제 남쪽 각 지방에서 부여복신, 도침 등이 이끄는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무열왕은 이전에 전장에서 직접 지휘하기보다는 전장은 김유신에게 맡기고 주로 후방에서 원격 지휘했던 것과 달리 태자 법민과 함께 친정해 10월 9일 이례성(尒禮城)을 쳐 곧 함락시키고, 이어서 백제의 20여개 성이 항복하였다. 10월 30일에 사비(泗沘) 남쪽의 산마루에 있던 부흥군을 공격하여 1천 5백 명의 목을 베었고 11월 5일에는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해 7일에 이겨서 7백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22일 신라 도성으로 돌아와 백제멸망전에서 신라군으로서 공을 세운 선복, 두질, 유사지, 설유 등과 신라에 투항해서 공을 세운 백제인 충상, 상영, 자간 등에 대한 논공행상을 벌였다.
결국 그가 원하던 삼국통일의 완성은 보지 못하고, 백제 잔여세력과 고구려, 당나라까지 정리할 역할은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661년 6월에 죽었다. 딸의 복수를 마치고 오래지 않아 죽었으니 일종의 복수귀 같은 인생인 셈.
묘호로 태종을 올렸는데 훗날 신문왕 때, 당태종과 묘호가 같아서 당나라에서 이것을 문제삼아 묘호를 고치라고 압력을 넣었고 신라 측에서는 이를 완곡한 어조로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6. 최후와 뒷이야기
흔히 병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백제 부흥군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도 구전되어 온다. 무열왕본기 마지막에 나오는 아래 기록을 근거로 상상을 더한 것이다.
《삼국사기》}}}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661년 6월에 대관사(大官寺)[34]
의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35]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wiki style="text-align:right"
익산 지방은 미륵사나 왕궁리 유적 등이 있던 백제의 주요한 지방이었기 때문에 정복된지 1년도 안된 661년에 신라의 왕이 그 곳에 갔다가 백제부흥군에 의해 시해되었음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 보통 삼국사기에서 암살, 숙청, 정쟁 등 정치적 격변을 그대로 기록하기보단 은유를 통해 나타낸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가능한 해석이지만, 교차 검토 가능한 근거, 또는 기록이 없는 이상 근거가 희박한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36]
일단 당시 일본 측 기록에 전혀 무열왕 암살을 시사하는 기록이 없는 것이 이 설의 주요 문제 중 하나다. 당시 백제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관심을 가지며 한국 기록보다 시시콜콜한 사정을 많이 기록했던데다 신라와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큰 일이 있었다면 은유로 숨길 필요가 없는 일본 측 기록에도 전혀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도 무열왕 암살설의 신빙성을 대폭 떨어뜨리는 점이다. 3년 간의 백제부흥운동은 일본의 지원이 컸고 결국 부흥에 실패한 뒤 많은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무열왕 암살 같은 '매우 큰 일'을 백제인이 했다면 일본에서 그걸 기록에 남겼을텐데 그러지 않았다. 신라와 사이가 대대로 안 좋아서 역사왜곡과 디스를 일삼던 당시 일본 입장에서도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닐 정도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추가로 백제 땅 한 켠에서 웅진도독부를 경영하던 중국 기록에도 무열왕이 암살당했다는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무열왕은 승하 당시 이미 환갑이 가까워지는 나이로 시대를 감안하면 이미 살 만큼 살았던 사람이었다. 특히 인생의 마지막 1년 동안에는 백제 사비까지 행차해 항복식을 치렀고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전장에서 여러 번 친정을 하는 등 수많은 일을 겪었다. 이 와중에 타지에서 과로로 인해 몸이 축났다고 가정해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그래도 창작물에서는 극적인 장면이 나오다보니까 이런 암살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삼국기에는 백제의 패장 윤충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남교의 <고백신조(高百新鳥>[37] 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로, 여기서도 무열왕이 윤충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는 백제의 왕족 부여궁, 이문영의 소설 취리산에는 백제의 유민 사충에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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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20호.
7. 평가
태종 무열왕은 여러모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전통사회에서는 김춘추를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영웅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에 대한 호평은 그가 살아있던 당시부터 존재했다. 김춘추가 외교관으로서 입국했을 당시의 일본, 중국 측 기록을 보면, 김춘추는 공통적으로 호감가는 외모와 화술을 구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신라의 동맹이던 중국 기록은 그렇다쳐도 신라의 적국인 백제의 동맹국으로서 김춘추를 좋게 평가해줄 이유가 없는 일본에서도 저렇게 적은 것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매력과 언변으로 그는 신라를 위해 열심히 외교술을 펼쳤고, 김유신 등 명장과 함께 정복전쟁을 벌여 몇백년째 서로를 위협하던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의 영토를 늘렸다는 것이 근현대 이전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 내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허나 조선 말 실학자들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은 삼국통일 과정 중 대동강 이북을 포기한다는 맹약을 당나라와 체결하였고,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당나라에 볼모로 넘기고 당나라의 연호와 복식을 따르는 어찌보면 굴욕적인 조건으로 당의 지원을 받아 삼국통일을 함으로써 중세 한국사 사대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 등을 비판하였고 이것은 21세기 현대까지[38] 까들에게 심심찮게 비판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39][40] 특히 지금의 북한 땅에 중심을 두었던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한국사의 정통으로 삼는 북한학계에서는 무열왕을 매국노라고 비하한다.
다만 이는 너무 현대인의 시각으로만 해석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당시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역시 삼국 바깥 수나라, 왜, 기타 북방민족 등 '외세'를 삼국간의 전쟁에 불러들여 이용하려 했으며 서로가 생존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 예를 들어 중국과 결탁하여 다른 삼국을 공격하려 했던 것은 신라보다도 백제의 오랜 외교 정책으로, 백제 개로왕, 위덕왕, 무왕 등은 중국에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백제가 협공할테니 제발 고구려를 쳐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바 있었다.[41][42] 그 외에 백제는 지식인을 대가로 왜군을 빌려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한 사실이[43] 광개토대왕릉비에도 기록이 되었으며, 고구려 역시 말갈인 군대를 백제, 신라와의 전쟁에 불러들였다. 그러던 중 '''삼국 가운데 오직 김춘추의 전략만이 성공'''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만 일정부분 억울하게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애초에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무슨 동질 의식 따윌 느꼈겠냐는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44] 결국 신라가 나당전쟁을 거치면서 삼국통일 사상이 완성되긴 했지만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삼국시대까지는 서로 동족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지 못하고 남남으로 보았던 것은 광개토왕릉비, 중원 고구려비 같은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 즉, 삼국은 서로 생존을 위해 철저히 대결, 경쟁할 수밖에 없는 적대 세력이었고 신라는 그냥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국을 멸망시켰을 뿐이라는 것. 거기에 19세기 이후에야 성립하는 현대 한민족 개념과 같은 인식 수준까지 넣어서 7세기 사람 김춘추를 가치판단하는 것은 전혀 객관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물론 신라의 생존이 최우선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더라도 당나라의 한반도 영향력을 너무 높여, 이후 나당전쟁에서 알 수 있듯 잘못하면 세력균형을 무너뜨린 김춘추 덕분에 신라까지 멸망 테크를 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근시안적인 도박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아들이 적절한 선제공격과 고구려부흥군 회유, 우주방어와 역습으로 간신히 나당전쟁에서 승리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신라가 이때 져서 당나라에 편입됐다면 늑대 잡을려고 호랑이 끌어들인 꼴이 되어 외교 천재는 커녕 오히려 바보로 기록'''됐을지도 모른다[45] .
다만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도 그렇지만 특히 백제는 틈만 나면 신라를 침공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라가 위기 의식을 느낄 정도로 고구려와 백제는 맹공을 해왔고 특히 의자왕 즉위 후 백제는 신라 공세에 광적으로 열을 올렸다. 물론 이건 신라의 업보 탓도 있는게, 백제는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 전투 이래 신라를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46][47]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가면서 침공해 오는 것에 대해 버거움을 느끼고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백제와의 전투에 올인하려 했으나, 고구려에 자청해서 사신으로 건너갔다가 오히려 투옥당했던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의 밀접한 관계를 눈치챈다. 이후 김춘추는 일본에도 건너가 보았지만 일본 역시 백제와 친분이 있던 탓인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결국 당과의 동맹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삼국 사이에 민족 의식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은 실제 학계에서도 관심사다. 우선 백제, 고구려의 경우는 백제의 지배 계층이 많이들 알다시피 주몽의 아들로 불리기도 하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 출신이기 때문에 신라보다는 연계 의식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또한 그런 게 있었다고 쳐도 중앙 귀족들에게 한정된 의식일 뿐, 민간에서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48]
게다가 신라의 경우엔, 충주 고구려비에도 나오지만 당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고 부르며 대놓고 오랑캐 취급했고, 건국설화 역시 부여에서 이어지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나 가야는 전혀 다른 쪽이다. 다만, 학자들 중에서는 삼국 간의 교류와 접촉이 늘어 남에 따라 후반에는 어느 정도 비슷하게 인식하는 의식이 있지 않았냐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 전쟁을 펼칠 때, 일통삼한의 기치를 내세우며 백제,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려 하였다.[49]
어쨌든 그렇게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형식적으로는 하나의 민족이라고 선전했으나 민간에서 실질적인 동족 의식이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이후 알다시피 2백여년이 지나 후삼국시대가 열린다. 물론 후삼국시대가 일어난 것에서 동족 의식이 희박했기 때문이라 추론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지 신라 말기 중앙 권력의 약화와 이에 따른 지방 호족들의 대두로 인한 것일뿐 민중의 민족 의식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보기도 한다. 신라가 2백년간 동질성을 주입했고 고려왕조 역시 그걸 이어받아 수백년간 유민의식 통합을 진행하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한 대몽항쟁 시기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급격히 진전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 '민족적 위기'라는 몽골 침략 기간에서도 백제 부흥을 기치로 반란을 일으킨 이연년 형제의 난 같은 사례가 있을 정도로 삼국간 의식은 개인따라 지역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김춘추는 주로 대외 외교가 면모로 주목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신라의 낡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신념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골품제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는 편이었는데, 비록 성골은 아니더라도 그 자신이 진골 귀족이라는 특권층 출신임에도 비주류인 가야계 가문과 혼인하고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격이 낮다고 할 수 있는 김유신, 강수, 원효를 중용하는 등 신분과 혈통보다는 능력 위주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갔을 때도 가장 먼저 한 일이 고등교육기관 태학을 견학하는 일이었으며 비담의 난을 평정하고 정계의 1인자로 떠오른 진덕여왕 시대부터 여러가지 제도 개혁을 시작했다. 이런 성향은 문무왕과 신문왕 시대까지 이어졌고 고대국가의 성격이 강하던 신라의 체질을 개선해 향후 수백년간 나라가 유지되는 토대가 되었다.
사서에 드러난 기록들로 볼 때 당시 신라를 이끌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 개인적인 희생을 여러 번 감내하였던 인물들이었다. 김춘추는 목숨을 걸고 몸소 고구려와 왜, 당 등에 건너가 외교 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위인 김흠운도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후에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김유신도 자신의 조카인 반굴과 둘째 아들 원술을 전장에서 희생시켰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의 침공으로 죽은 개인적인 원한을 이후의 외교와 전쟁의 주요 동기로 부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래도 극적인 장면이 필요한 창작물에서 그러는 경향이 있다. 물론 실제로 개인적 복수심이 한 요인이었을 수는 있으나, 결정적인 요인이라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김춘추가 더욱 적극적으로 몸을 사리지 않는 외교를 한 것은 대야성이 함락당하면서 백제와의 전선이 수도와 더욱 가까워진 국방 위기와 관련이 있다. 가령 딸과 사위가 살아 도망쳐나왔다고 해도 대야성을 함락당한 그 당시 상황에 백제와 신라가 앞으로도 계속 싸우지 않을 상황도 아니었다. 물론 일종의 말놀이 비슷한 느낌인게, 둘 다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다만 신라 내부적으로 보면 당시 신라 정계에는 비담, 알천으로 대표되는 김춘추 이외의 귀족 계파가 존재했는데, 사위의 뻘짓(...)으로 대야성을 잃어 김춘추와 그가 주도하는 근왕파는 정치적 위상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당시 신라 사회는 임전무퇴를 귀족의 미덕으로 여겼고, 이것을 실제로 지킨 인물들이 삼국사기 본기와 열전에서 숱하게 등장해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김춘추의 사위씩이나 되는 인간이 항복하려다가 속아서 죽었다는 것도 그야말로 나라의 비웃음거리였을 것이다. 때문에 이걸 덮을만한 뭔가 큰 업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정치적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다.
8. 가계
- 아내: 문명왕후 김문희
9. 인척 관계
김유신과 정치적으로 동맹 관계였으며, 나중엔 그의 여동생 문희와 혼인도 했다. 이후 김춘추의 3녀 지소부인(智炤夫人)은 김유신에게 시집간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고타소는 《삼국사기》에선 문희의 소생으로, 《화랑세기》에선 첫째 부인인 보라궁주의 소생으로 되어 있다. 덧붙여서, 화랑세기에선 아예 보희를 첩으로 삼아 아들 둘을 뒀다고 나온다(...).
또한 무열왕은 원효대사의 장인이기도 하다. 원효가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지을텐데"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니자 무열왕이 이를 듣고 일찍 과부가 된 차녀 요석공주(瑤石公主)를 원효와 맺어주기 위해 원효를 데려오라고 했는데, 일부러 원효가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원효를 인솔하던 관리가 요석궁으로 원효를 데려가 옷을 말리게 했는데, 여기서 요석공주와 눈이 맞아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난 아이가 바로 신라의 대학자로 유명한 설총. 즉 설총은 무열왕의 외손주가 되는 셈이다.
한편 기록상으로는 조선 왕실의 가문인 전주 이씨 가계와 간접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은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김은의(金殷義)[55] 의 딸과 혼인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총서 1권) 및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에 나와 있다.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주 의견. 이렇게 성씨와 가계 족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고려 중기 이후이기 때문이다. 즉, 조선 왕실에서 가문의 이름값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태종 무열왕의 가계와 연결시켰다는 해석이 성립하는 것. 물론 전주 이씨가 기어코 이한의 무덤을 찾으려고 하였고 실제로도 있어서 실존 인물일 가능성도 있기에 진짜로 혼인했을 수도 있긴 하다.
10.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태종 본기'''
一年春三月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다
一年夏四月 왕의 죽은 아버지를 추봉하다
一年 죄수를 사면하다
一年夏五月 율령을 가다듬어 정하게 하다
一年 당에서 사신을 보내다
一年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一月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年 고구려가 북쪽의 변경을 침략하다
二年春三月 당이 고구려를 치다
二年 법민을 태자로 삼다
二年冬十月 우수주[56] 에서 흰 사슴을 바치다
二年 굴불군[57] 에서 흰 돼지를 바치다
二年 왕의 딸인 지조를 김유신에게 시집을 보내다
二年 월성 안에 고루를 세우다
三年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오다
三年秋七月 문왕을 당에 보내다
四年秋七月 일선군에 홍수가 일어나다
四年 토함산의 땅이 불타다
四年 흥륜사의 문이 무너지다
四年 바위가 부서져서 쌀이 되다
五年春一月 중시인 문충을 이찬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하슬라[58] 를 주로 삼다
六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서 군사를 요청하다
六年秋八月 아찬 진주를 병부령으로 삼다
六年秋九月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치다
六年 공주 기군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죽다
六年冬十月 장춘과 파랑이 당의 소식을 전하다
七年春一月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다
七年春三月 당 고종이 백제를 치게 하다
七年夏五月二十六日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다
七年夏六月十八日 남천정[59] 에 다다르다
七年夏六月二十一日 태자 법민이 소정방을 맞았다
七年秋七月九日 김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으로 진군하다
七年秋七月九日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七年 백제의 왕자가 당의 장군에게 글을 보내다
七年秋七月十二日 당과 신라의 군사들이 소부리 벌판으로 나아가다
七年秋七月十二日 백제의 왕자가 가축과 음식을 보내다
七年秋七月十三日 의자왕이 밤에 도망하다
七年秋七月十八日 의자왕이 항복하다
七年秋七月二十九日 왕이 소부리성에 이르다
七年秋八月二日 주연을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다
七年秋八月二日 모척의 목을 베다
七年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다
七年秋八月二十六日 임존의 목책을 공격하다
七年秋九月三日 낭장 유인원이 사비성을 지키다
七年秋九月二十三日 백제의 나머지 적병이 남잠성 등을 차지하다
七年 당 황제가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삼다
七年秋九月二十八日 왕문도가 조서를 전달하고 갑자기 죽다
七年冬十月九日 왕이 이례성을 치다
七年冬十月十八日 이례성을 빼앗아 지키게 하다
七年冬十月三十日 사비의 남쪽에 있던 군대를 공격하다
七年冬十一月一日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다
七年冬十一月五日 왕이 왕흥사잠성을 공격하다
七年冬十一月二十二日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다
八年春二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을 바치다
八年春三月五日 품일이 군영을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다
八年春三月十二日 대군이 두량윤성을 공격하다
八年夏四月十九日 군사를 돌이키다
八年夏五月九日 고구려가 술천성을 공격하다
八年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다
八年夏六月 대관사 우물물이 피가 되다
八年夏六月 왕이 죽다
재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 재위 기간에 삼국 통일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역대 신라 왕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기록이 많은 왕이며, 특히 왕이 되기 전의 활동까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신라 임금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삼국시대의 왕들 중 가장 많은 기록을 가진 왕 중 하나로 봐도 될 것이다. 그만큼 태종 무열왕이 가진 역사적 입지는 평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삼국사기 5권은 선덕여왕부터 시작하여 태종 무열왕에서 끝난다.
11. 삼국을 통일한 왕(?)
'삼국을 통일한 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은 편이다. 다만 무열왕은 어디까지나 즉위 전에 일본과 중국과 고구려를 넘나든 외교 활동이나 즉위 후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이고, 백제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정리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군대를 격파해 신라의 삼국 통일을 완수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문무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