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1. 경남 하동군 쌍계사
1.1. 개요
1.2. 역사
1.3. 문화재
1.3.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1.3.1.1. 바깥고리
1.3.1.2. 국보 제47호
1.4. 사건사고
2. 전남 진도군 쌍계사
2.1. 개요
2.2. 역사
2.3. 문화재
3. 전남 영암군 쌍계사지 터
3.1. 개요
3.2. 역사

한자 : 雙磎寺 / 로마자 : Ssanggyesa
홈페이지

1. 경남 하동군 쌍계사




1.1. 개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운수리)에 있는 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인근의 섬진강화개장터에서 이 쌍계사까지의 길에 피어있는 벚꽃들이 매우 유명하다. 그래서 벚꽃이 피는 봄철에는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1.2. 역사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스님이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스님의 정상(머리)을 모시고 귀국, 꿈 속에서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 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설화로 전한다.
그리고 840년(신라 문성왕 2)에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잇고 귀국한 진감선사가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다시 개창, 처음에 옥천사(玉泉寺)라고 불렀다. 그런데 헌강왕 때 한 고을에 같은 이름의 절이 두 개가 있어 혼동을 일으켰으므로, 문전에 흐르는 쌍계라는 시냇물에 연유하여 쌍계라는 호를 내려 주고 하고 최치원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磎石門)’의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 그 후 두 차례나 화재로 절이 불탔으나 1632년(인조 10)에 벽암(碧岩)[1]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에 의하여 복구, 중수되었다.

1.3. 문화재


경내에는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를 비롯하여 보물 제380호의 쌍계사 부도(浮屠), 보물 제500호의 대웅전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고, 이 밖에 5층석탑, 석등, 일주문, 팔상전, 명부전, 천왕문, 중국의 승려 혜능(慧能)의 두상을 봉안했다는 금당에 있는 육조정상탑과 나한전, 금강문, 칠불아자방, 마애여래좌상, 쌍계사 소장 불경 책판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1.3.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정강왕2년(888)
[image]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道不遠人, 人無異國)" 라는 비문이 이 비석에 새겨져있다.
신라 하대 선종에 큰 영향을 끼친 진감선사 혜소(774~850)가 입적한 뒤, 36년이 지난 888년(신라 정강왕 2년) 7월에 건립되었다.[2] 현재 남아있는 비문#s-1에는 위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부분이 훼손되어 있으나, 1725년(조선 영조 1년)에 만든 목판에 비문의 내용을 옮겨 적어놨는데 다행히도 비문이 훼손 되기 전의 내용이 이 목판에 남아 있어 진감선사탑비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
본래는 진감 선사의 입적 당시에 탑비를 건립하려고 했으나 진감선사가 생전에 자신의 탑비와 승탑을 남기지 말 것을 부탁하여 시행되지 않았다가 입적 후 30년이 넘은 후에야 탑비가 세워졌다. 입적 후 3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탑비 건립이 논해질 정도로 진감선사가 신라 하대의 선종 불교에 영향력이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진감선사는 속성이 최씨로, 선조는 중국 산동 지방 사람이었는데 고구려-수 전쟁에 끌려가 싸우다 항복해 고구려인이 되었고, 고구려 멸망 후 보덕국을 거쳐 금마군(지금의 익산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비문의 문장과 글은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작성했으며, 글자는 해서체로 2423자가 새겨져있다. 본 진감선사탑비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 글을 쓴 4개의 비문[3] 중 하나로, 초반부에는 유교, 불교, 도교삼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음을 적었고, 중반부에 진감선사의 생애와 업적을 적었으며, 후반부에는 쌍계사의 명칭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 탑비의 건립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탑비 자체가 지니는 가치와 더불어 금석문 내용 및 필체 등의 가치를 인정 받아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었다. 1100년 이상의 세월을 겪어온 탑이다 보니 탑신 일부가 깨져 있으며 이를 보강하기 위해 보수 공사가 이뤄져 있다.

1.3.1.1. 바깥고리


1.3.1.2. 국보 제47호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1.4. 사건사고


지리산 쌍계사 지진이라는 사건이 과거에 발생한 적이 있는데, 그 사건이 발생한 쌍계사가 바로 여기다.

2. 전남 진도군 쌍계사



2.1. 개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있는 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2.2. 역사


857년(신라 문성왕 19)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 양쪽으로 두 개의 계곡이 있다 하여 쌍계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후 부침을 거듭하다 조선 숙종23년에 중건되었다.[4]

2.3. 문화재


2016년 1월에 대웅전을 해체 보수하던 중, 서양화 기법의 탱화 19점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
절 뒷쪽으로 천연기념물 107호인 진도 쌍계사 상록수림이 있다.

3. 전남 영암군 쌍계사지 터



3.1. 개요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에 있던 절.

3.2. 역사


통일신라 문성왕 16년, 854년에 창건되었으며, 의 도움으로 쉽게 절을 중창할 수 있었다고 하여 덕룡사(德龍寺)라고도 불렀다.
그러다 조선 세조 9년인 1463년에 다시 절을 크게 중창하는데 이때 다음과 같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세조가 잠을 자던 중 에 한 노인이 나타나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를 보여 주면서 "덕룡사가 있는 곳은 나라의 혈맥이니 이 책을 만들어 덕룡사에 비치한다면 책이 있는 동안은 국가의 사직과 백성들이 평안해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세조가 잠에서 깨자마자 급히 신하들을 불러 법화경언해를 만들게 하고 전국에 책을 배포한 후, 절을 크게 중창하고 법화경언해 1권을 쌍계사에 직접 봉안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호연대사의 비 등 사찰의 많은 부분을 일본으로 반출하였고, 6.25 전쟁 직후 그나마 남아있던 삼층석탑 등도 모두 팔려 한조각씩 잘라 들고 갔다. 지금은 폐사지가 되었고 전남 민속문화재 제17호인 쌍계사지장승와 몇몇 지석만이 남아 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쌍계사 항목 참조.


[1]스님남한산성도 쌓았다.[2] 진성여왕 원년으로 보기도 한다.[3] 이를 4산비문, 혹은 사산비명이라고 일컫는다. 진감선사탑비 외의 나머지 3개는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제315호)가 있다. 이 중 대숭복사비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현전하지 않고 일부 파편만이 남아있다. 다만 숭복사비의 내용은 따로 후대 문인들이 기록으로 남겨 지금까지 전해진다. 현재 경주시 숭복사 터에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4] 대웅전의 상량문에 강희36년이라 적혀 있고, 이로 미루어보아 숙종 23년, 즉 1697년에 대웅전이 건립된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