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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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林寺
1. 개요
2. 문화재 목록
3. 국보
3.1.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3.1.1. 바깥고리
3.1.2. 국보 제44호
3.2. 철조비로자나불좌상
3.2.1. 바깥고리
3.2.2. 국보 제117호
4. 관련 항목


1. 개요


신라말 유행한 선종 9산 중 하나인 가지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송광사의 말사(末寺)로 860년경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권유룰 받아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하였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삼(三)보림이라 불리운다.

2. 문화재 목록


보유 문화재 수는 국보 2점, 보물 8점,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13점으로 1000년 고찰 답게 유물이 아주 많다.
* 국가지정 문화재
01. 국보 제 44호 -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02. 국보 제 117호 -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03. 보물 제 155호 - 보림사 동 승탑
04. 보물 제 156호 - 보림사 서 승탑 2기
05. 보물 제 157호 - 보림사 보조선사 탑
06. 보물 제 158호 -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07. 보물 제 745-9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월인석보 권제25
08. 보물 제 772-3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금강경삼가해 권제1
09. 보물 제 1252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제9,권제10
10. 보물 제 1254호 -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 4상
*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01. 유형 제 191호 - 장흥 전 의상암지 석불입상
02. 유형 제 194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계초심학인문
03. 유형 제 195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고봉화상 선요
04. 유형 제 196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금강반야론
05. 유형 제 197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06. 유형 제 198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대전화상 주심경
07. 유형 제 199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몽산화상 육도보설 2점
08. 유형 제 200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불설 사십이장경
09. 유형 제 201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육경합부 6점
10. 유형 제 202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언해판화 관계불서 16점
11. 유형 제 203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진언의식 관계불서 84점
12. 유형 제 204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선종불서 47점
13. 유형 제 205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경전불서 40점

3. 국보



3.1.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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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국보 제44호'''
'''장흥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 및 석등'''
長興 寶林寺 南ㆍ北 三層石塔 및 石燈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번지 보림사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3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경문왕10년(871)
두개의 석탑과 그 사이의 석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남탑이 5.4 m, 북탑이 5.9 m이고, 석등은 8각 형태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 양식으로 탑의 상륜부까지 온전히 남아 있어 가치가 높다. 1932년 도굴꾼이 사리장치를 훔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 때 쓰러진 탑신을 복구하던 중 탑신부 사리장치에서 사리와 함께 탑의 조성에 관한 탑지가 출토되었는데, 탑의 조성연대가 신라 경문왕 10년(870)이란 내용이 있었다.
석등은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여 빛으로서 그 뜻을 나타내는 조형물이다. 화엄사, 부석사를 비롯한 고찰의 경우 하나의 석등을 정전의 정면에 비치하여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는 조형물의 기능을 하였지만 후대에는 의미가 퇴색되어 조명기구로 전락하여 일반적으로 정전의 좌우에 하나씩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석등답게 본래 의미대로 석등 하나가 정전 중앙에 배치되었는데, 탑과 함께 온전한 세트로 보존되어 가치가 높다.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3.1.1. 바깥고리



3.1.2. 국보 제44호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體澄)이 터를 잡아 헌안왕 4년(860)에 창건하였다. 그 뒤 계속 번창하여 20여 동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절 앞뜰에는 2기의 석탑과 1기의 석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3.2. 철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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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17호'''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長興 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1963년 2월 21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헌안왕 2년(859)
신라 하대에 유행했던 철제 불상으로 상체에 비해 하체가 큰편이다. 왼쪽 팔 뒷면에 대중(大中)[1] 2년이라는 글이 있어서 신라 헌안왕 2년(858년)에 조성 된 것임을 알수 있다. 불상의 높이는 2.51m이며 9세기 후반의 불상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국보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3.2.1. 바깥고리



3.2.2. 국보 제117호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통일신라 전성기(8세기)의 불상에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4. 관련 항목




[1] 당나라 선종 시기에 사용한 연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