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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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왕족. 의자왕의 증손자로, 부여융의 손자. 부여융의 아들로는 부여문선,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 부여덕장(扶餘德璋)이 확인되지만 두 사람 외에도 아들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아버지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단, 부여융 사후 부여문선, 부여덕장이 살아있었음에도 그들을 제치고 부여융의 손자인 부여경이 대방군왕에 임명된 점을 본다면[1] 그들의 형 혹은 적장자의 아들로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2. 행적
677년 당은 백제 웅진성에 있던 웅진도독부를 요동에 있는 고구려 지역의 건안성으로 옮기면서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 유민들도 함께 이주시키고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熊津都督 帶方郡王)으로 삼아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백제 전역을 이미 671년 전후로 신라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682년 부여융이 사망한 후, 측천무후가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동국통감 권9 신라기에 따르면 686년 고구려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이 조선군왕(朝鮮郡王)을 받은 시기와 같다.
구당서 현종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725년 내신으로 번국의 고려조선군왕과 함께 백제대방군왕이 언급된다. 이 '백제대방군왕'이 부여경과 동일인물인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3. 기타
677년 건안성으로 옮겨진 웅진도독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서 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2009년 이도학 교수는 발해가 8세기 중반 ~ 9세기 초반에 요동반도에 진출했을 때 발해에 흡수되어 사라졌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건안성으로 옮겨진 백제 유민들이 당으로부터 자립해서 소백제를 형성했을 가능성은 적다. 구당서 현종본기 725년 기사에서 신라, 말갈[2] , 일본은 조회하러 온 국가로 기술한 반면 고려조선군왕, 백제대방군왕은 당나라의 내신으로 외국으로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고구려설이 아직은 학설 수준에 머무는 것처럼 건안성의 백제 유민들이 '소백제'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