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로왕

 


'''백제 제21대 건길지'''
'''蓋鹵王 | 개로왕'''
'''시호'''
개로왕(蓋鹵王)
'''별호'''
근개루왕(近蓋婁王)
'''성씨'''
부여(扶餘)
''''''
경사(慶司) · 경(慶)[1] / 개로(蓋鹵)[2] · 개로(盖盧)[3] / 개루(蓋婁) / 가수리(加須利)[4] / 개도(蓋圖)[5]
'''왕후'''
대후(大后)[6], 후궁[7]
'''자녀'''
왕자[8], 공주[9], , 부여사마(扶餘斯麻)[10]
'''부왕'''
비유왕(毗有王)
'''사망지'''
아차성(阿且城)
'''생몰연도'''
음력
? ~ 475년 9월
'''재위기간'''
음력
455년 9월 ~ 475년 9월 (21년)
429년 ~ 475년[11]
1. 개요
2. 재위 초기
3. 비참했던 최후
3.2. 고구려의 분노
3.3. 고구려의 침공 그리고 죽음
3.4. 뒤늦은 구원
4. 평가
5. 삼국사기 기록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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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난 우둔하고 밝지 못해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이렇게까지 되었다. 백성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위기가 오더라도 누가 기꺼이 날 위해 싸우겠는가. '''난 당연히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하지만 넌 이곳에서 죽어도 무익하다. 어려움을 피해 국통을 이어라.'''"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盍避難以續國系焉 ."

고구려가 백제를 함락하자 아들(혹은 동생) 문주왕에게 남긴 한탄의 말. 사실상 유언이나 다름없다.

백제의 제21대 국왕이자 건길지.
백제에서 의자왕 다음으로 안습인 왕. 책계왕, 성왕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은 백제의 세 왕 중 1명이다. 휘는 경사(慶司) 혹은 여경(餘慶)인데 여기에서 여(餘)가 성이고 이름이 경(慶)이다.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한다. 대체적으로 중국역사서에서는 경사(慶司, 또는 축약 표기인 慶), 일본서기에서는 개로(蓋鹵, 또는 원형으로 보이는 加須利kasuri)로 나온다.

2. 재위 초기


백제 여러 왕들이 기록이 부실하듯 개로왕도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는 즉위 원년 이후 무려 14년 동안 아무런 기록이 없다. 게다가 급작스럽게 사망한 아버지 비유왕의 유해를 임금이 된지 무려 21년만에 수습해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그동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발견 혹은[12] 수습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황이 보이는데 그 기록에 개로왕의 즉위년도가 429년으로 되어 있어 비유왕의 재위 기간을 그대로 누락시킨 것. 일본서기는 백제의 당대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따르면 당대 백제는 비유왕을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개로왕 집권 초기의 상황을 대략 유추해볼 수 있다. 즉위한지 1달만인 455년 10월 고구려장수왕백제를 공격했다. 고구려가 백제의 정세 불안을 즉시 포착하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 공격한 듯하다. 그러나 전왕 비유왕 때 맺어 두었던 나제동맹 덕분에 신라의 지원군과 함께 물리쳤다고 한다. 동맹을 맺은 두 나라가 고구려의 침입시 지원군을 주고 받으면서 상부상조한 1번째 사례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爲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並爲征虜將軍. 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並爲輔國將軍. 以行龍驤將軍沐衿·餘爵並爲龍驤將軍. 以行寧朔將軍餘流·麋貴並爲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並爲建武將軍.

이에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를 관군장군으로 삼았다. 이에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과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여훈(餘暈)을 모두 정로장군으로 삼았다. 행보국장군(行輔國將軍) 여도(餘都)와 여예(餘乂)를 모두 보국장군으로 삼았다. 행용양장군(行龍驤將軍) 목금(沐衿)과 여작(餘爵)을 모두 용양장군으로 삼았다. 행영삭장군(行寧朔將軍) 여류(餘流)와 미귀(麋貴)를 모두 영삭장군으로 삼았다.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 우서(于西)와 여루(餘婁)를 모두 건무장군으로 삼았다.

'''송서 백제전'''

기록이 부족한 개로왕 초기 상황이 중국 역사서 《송서(宋書)》에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송서》에 의하면 개로왕은 즉위 3년되는 해(457년)에 유송에 사신을 보내서 진동대장군 관작을 제수받았다. 이듬해인 458년에는 개로왕의 신하 11명에게 관작을 제수해달라고 요청해 유송이 이들에게 장군직을 수여한 기록이 남아있다. 유송에게 관작을 제수받은 11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8명이 왕족부여씨이며 3명만 성씨가 다른 귀족이다. 귀족들의 성씨 중에 백제의 유력 가문들인 진씨[13]나 해씨가 없다. 아버지 비유왕 대에는 해씨가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것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 개로왕 초기 기록이 없고 비유왕의 유해가 자그만치 20여 년 동안이나 방치된 것을 보면 이 시기에 해씨 등 유력 귀족과 개로왕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고 개로왕은 권력 구조를 재편하면서 부여씨 왕족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유송에게 장군직을 제수받은 인물 중에는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 보국장군 여도가 있다. 이들은 바로 부여곤지문주왕이다. 좌•우현왕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흉노에서 보통 좌현왕은 왕태자를 뜻하는 명칭이라는 점에서 곤지는 개로왕의 태자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또한 문주는 상좌평에 올라 국정 전반을 총괄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족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사가제(私假制)적 질서를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귀족 세력들과의 갈등이 증폭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것. 이 좌•우현왕이 백제 초기에 있던 좌보•우보와 동일한 것일 수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도 개로왕 시기와 관련된 기록이 여럿 있는데 일본서기 특성상 황당한 윤색이 일부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지만 유랴쿠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채녀(采女) 사건으로 일본과 마찰을 빚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신찬에 따르면 개로왕이 즉위한 뒤 일본이 사신을 보내 여자를 물색했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14]의 딸 이케츠히메(池津媛)를 꾸며서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 하고 일본에 보냈다. 458년 이케츠히메가 불륜을 저질러 상대 남자와 함께 처형되었다. 3년 뒤인 461년 개로왕의 아우인 부여곤지와 대화한 뒤 백제는 일본에 여자 왕족을 보내는 정책을 폐기하고 남자 왕족을 보내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이후에 일본과의 관계도 다시 개선한 것으로 보인다.

3. 비참했던 최후



3.1. 북위에 고구려 침공을 요청하다


개로왕의 최후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 21년(475년)에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이 다시 크게 벌어질 것을 예감하여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고 469년 8월에는 고구려의 남부 지역을 선제 공격하는데 이는 광개토대왕 이후 백제가 처음으로 고구려를 선제 공격한 사건이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반격을 바로 대비해 10월에는 쌍현성을 수리하는 한편 고구려와의 사이에 요충지인 청목령(靑木嶺 : 현재의 개성특별시 부근으로 추정됨.)에 대책(大栅)을 설치해 방어 태세를 보강하였다.
472년 북위(北魏)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서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할 필요성과 그의 성공 가능성을 설득하려 했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침 세력을 분산해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것이 바로 개로왕 국서 사건으로 북위서 열전에 국서 전문이 실려있다. 다음은 그중 개로왕이 보낸 국서의 한 대목이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신의 조상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소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풍(馮)씨(북연)의 국운이 다하여 그 유민이 고구려로 도망하여 온 후로부터[15]

추악한 무리가 점점 강성하여져 끝내 침략과 위협을 당하여 원한이 얽히고 전화(戰禍)가 연이은 것이 30여 년입니다. 물자도 다 되고 힘도 떨어져서 자꾸만 쇠잔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천자의 인자(仁慈)와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급히 장수 한 사람을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匹夫)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개로왕'''

안습하다. 비굴하기까지 한 위 국서는 대를 이은 원수 고구려를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군과 신라군에 이어 중국군까지 도움을 받으려 전전긍긍했던 개로왕의 절실한 입장이 드러난다. 개로왕은 북위사신들이 탄 배가 백제로 오는 도중 폭풍에 난파당해 전원 사망했는데 고구려가 한 짓이라고 주장하며 잔해물 중에서 말 안장 하나를 건져 증거로서 북위에 보낸다. 그런데 북위 측에서 확인해 보니 그 안장은 중국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중국 것이 맞더라도 북위가 고구려와 전쟁할 마음이 없는 이상 "이거 우리꺼 아닌데?"하고 입 싹 닦고 치우면 그만이다.
어쨌든 개로왕이 보낸 위 국서는 북위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당시 북위는 이런 국서를 받고 일단 생각은 해 본 듯하다. 국서가 처음 도착했을 때는 고구려와의 관계가 비교적 나쁘지 않았지만 그 이듬해부터 고구려와의 관계가 냉각되었기 때문. 그래서 국서 도착 이듬해 북위 황제 헌문제 탁발홍은 다음과 같이 회답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의 조정에 번신(藩臣)이라 칭하며 직공(職供)하여 온 지 오래인지라, 그대들과는 오래 전부터 틈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아직 영을 어긴 허물이 없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여서 곧장 정벌하여 달라 요구하기에[16]

얼마 동안 일의 시비를 따져 보았으나 사리에 역시 맞지 않았다. (중략) 그래서 지난 해 (여)예[17] 등을 평(양)성에 파견하여 그 사유를 조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빈번한 주청(奏請)이 사리에 합당하였기에 사신이 그들의 청을 억누를 수 없었고, 법을 집행하는 관리도 무엇으로 죄삼아 책망할 수 없었다.(중략)'''사실은 고(구)려에 질서가 있으므로 아직 정벌을 계획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겠다.'''(중략) 경이 보내온 계책이 짐의 뜻에 합치하니, 군대를 출동하는 일은 앞으로 멀지 않을 것이다. 군사를 미리 준비하여 함께 일어나도록 시기를 기다리면서,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저들의 정황을 속히 알려줘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개로왕'''

한마디로, 우리도 너희랑 같이 고구려 치고 싶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 일단 준비는 하고 있고 정보를 보내 달라.
하지만 위의 표현도 상당히 백제에게 좋게 해석한 것이고 현실적으로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였을 가능성도 꽤 크다.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의 위상은 엄청나게 높아서 북위유송은 경쟁적으로 장수왕의 직위를 올려주고 백제보다 높이 대우하였다. 심지어 이 시기에 북위와 고구려는 정략결혼까지 맺게 되는데 처음 제안한 쪽은 북위였다. 오히려 고구려는 혼인 적령기에 이른 공주가 없으니 기다려 달라고 주장하며 차일피일 미뤘다. 이런 저런 사정을 고려하면 북위의 입장에서는 백제를 돕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고구려와 적대할 의도가 생길 수가 없다. 잘해야 혹시나 고구려가 약해졌다는 소식을 백제를 통해서 듣거나 고구려와 만에 하나 싸우게 되면 백제를 조공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정도를 고려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즉, 북위를 통해서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했던 개로왕의 의도는 시도해보기도 전에 틀어졌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때 개로왕이 보낸 국서 자체는 조선 초기의 동문선에도 실리는 등 상당한 명문으로 꼽혔으며 국서에 인용된 유교 경전이나 중국사에 대한 인식, 논리 전개 등에서 당대 백제인들의 학문 소양을 알려주고 있다. 애초에 백제인들이 직접 남긴 문학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기도 하다.
아울러 북위의 이 답장육로를 통해 백제로 전달될 예정이었지만 고구려에서는 북위 사신들이 백제로 가지 못하게 길을 막아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자 백제에서는 북위에 더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이 (북위를) 원망하여 조공을 끊어버렸다"고 적고 있다. 사실 답장 내용을 보면 백제로서는 받았어도 별반 다를 게 없었을 듯하다.

3.2. 고구려의 분노


역으로 이 국서 사건이 고구려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고 말았다. 일단 국서의 내용도 고구려를 꽤 빡치게 할 만한 내용인데, 고구려의 흑역사인 고국원왕 전사 사건도 오롯이 적혀 있고, 장수왕도 죄인이라고 까고 있다. 더군다나 고국원왕은 화살을 맞고 병상에서 죽었지 목 베어 죽지는 않았다.[18] 삼국사기에서조차 이를 과한 표현이라고 지적했을 정도. 역설적으로 정작 참수당하는 것은 개로왕이 된다. 게다가 보내는 방법도 처음에 백제로 사신을 보낼 때 육로로, 그러니까 '''고구려를 통과해서''' 보내려고 시도했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는 더 열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장수왕은 사신 일행을 통과시키기를 대놓고 거부했다. 장수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북위와 백제가 손을 잡는 걸 눈뜨고 지켜보고만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해로로 사신을 보내려고 했는데, 바다가 험해서 그것도 실패. 그러니까 '''답신을 결국 못 보냈다.''' 그리고 이 사건 바로 3년 뒤(서기 475년 9월)에 개로왕은...
어쨌든 북위서의 이 기사 덕분에, 장수왕 시절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왕권 강화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고[19] 그 힘을 바탕으로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20] 백제를 위협하고 있었고, 백제 또한 앉아서 당하지 않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는[21]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선 북위서에 실린 이 국서 사건을 옮겨 적은 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전면 공격 전에 도림이란 승려를 보낸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알고, 바둑을 통해 신임을 얻게 된다. 이후 전쟁 대비보단 왕권 강화를 위한 궁궐 수리 및 토목 공사를 건의하고 개로왕은 허가한다. 이로 인해 백제의 재정은 파탄날 지경에 이른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개로왕'''


3.3. 고구려의 침공 그리고 죽음


결국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 침공을 단행했다. 도림의 바둑 이야기는 이 때 언급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 전선이 죄다 무너지고 도성(위례성)마저 위협을 받게 된다. 한성 방어전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고구려군은 4방면으로 총 공격을 퍼부었고, 이마저도 실패하자 화공을 가했다고 한다. 화공은 성공적이었다.
개로왕은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의 태자 혹은 동생인 문주를 불러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는 형, 혹은 아버지[22]인 개로왕의 명을 거절하지 못하고,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를 데리고 남쪽으로 도주한다.[23]

20년(476년) 겨울에 고구려 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그런데 몇몇의 남은 무리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고 근심하여 우는 소리가 매우 심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정신을 잃습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그럴 수 없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국은 일본국의 관가(官家)가 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또한 그 왕이 들어가서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에서 모두 아는 바이다.”라고 말하니, 그만두었다.【'''『백제기(百濟記)』에서는 개로왕(蓋鹵王) 을묘년 겨울, 고구려(狛)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웅략기 20년.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없앰'''[24]

일주일 간의 방어전 끝에 성이 함락당하자 개로왕은 왕비와 왕자들 및 왕족들을 데리고 탈출하려다가 고구려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개로왕을 사로잡은 백제의 배신자 재증걸루와 고이만년[25]은 일단 말에서 내려 옛 임금인 개로왕에게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26]으로 끌고 가 참수해 버렸다. 정말 비참한 것은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왕인데 '''묘비도 없이 매장됐다'''는 점. 그 때문에 개로왕이 기록대로라면 아차산성 어딘가에 유해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다.
고국원왕 전사 때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고구려와 백제는 이후로도 왕을 죽이고 죽인 원수지간으로서 끊임없이 싸우게 되었다. 이는 신라의 진흥왕이 급부상해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서로 떨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3.4. 뒤늦은 구원


한편 앞서 탈출했던 문주는 나제 동맹에 따라 신라로 도망가서 자비 마립간에게 증원군을 요청, 신라 구원병 1만 명을 이끌고 오지만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한강 유역이 통째로 고구려의 손에 떨어진 것.[27][28] 더 안습한 것은 이 '''신라로부터 온 지원군이 백제의 귀족 지원군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당시 귀족들과의 사이가 꽤 나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4. 평가


고구려도림과 관련된 설화적 기록 때문에 암군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백제의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하기도 했고 북위와 연계하여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해 외교적으로도 안간힘을 썼다. 개로왕은 당시 왕권을 과시하고자 했고 큰 궁을 짓고 별 짓을 다했으나 당시 대성팔족을 비롯한 귀족 세력의 반발이 거셌고 결정적으로 장수왕의 공격 크리가 터지면서 망하게 된 것.
개로왕 시기에 공주 지방 세력들이 위례성은 고구려와 가까우니 수도를 안전한 웅진으로 옮기자고 여러 차례 PR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넘어가자 문주왕이 공주로 옮긴 것인데 이에 대한 증거는 수촌리 고분군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쳐들어왔을 때 문주를 피신시키면서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서 죽겠지만 너는 살아서 나라의 계통을 이어야 한다"며 한성에 끝까지 남았던 점이나 개로왕이 피신시킨 문주가 백제의 다음 왕으로 즉위하면서 수도 한성을 잃은 백제가 아주 멸망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냥 암군으로 보기는 어렵다. 훗날 의자왕 이후 백제부흥운동 과정과 비교하면 문주가 개로왕의 명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추대된 풍왕에서 오래 인질 생활을 했는데 장남도 아니고 의자왕에게서 합법적인 루트로 정통성을 인정받지 않은 상태였기에 정통성 측면에서 다소 취약했다. 이런 이유로 풍왕이 거국적인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다소 부족했던 것과 달리 문주는 왕이 되기 전에는 상좌평으로써 개로왕을 보좌해 실제 국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문주는 개로왕이 직접 "너는 부디 살아남아서 나라의 계통을 이으라"고 문주의 왕위 계승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풍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통성을 가졌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바둑에 빠져서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한다.[29]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연 바둑 때문에 나라를 말아먹었는지 의문이 든다. 도림은 "... 성곽과 궁실은 수리되지 않아 방치되어 있고 선왕(비유왕)의 해골은 빈 들판에 가매장 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범람하는 강물에 무너지니..."라고 말했다. 궁과 선왕의 능을 축조한 것 외에 성곽을 축조하고 한강변을 따라 둑을 건설하게 한 것 등은 백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이었고 고구려의 남하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궁과 능을 증건한 것 역시 단순한 사치라기보다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경우에도 후자의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사실 (도림이) 백제 사람인 것을 속일수 없잖아요. 사투리 때문에, 지금보다 사투리가 10배는 심했을 거에요. "제가 백제사람입니다."라고 하지는 못하고, 고구려에서 지금 죄를 짓고 도망왔다."(라고 했을 거에요.) 굉장히 높은 지위여야 (백제)왕하고 놀수 있겠죠? 다만 반역죄 정도로 튀었다고 이야기 했을 것이고, 그 전에 고구려장수왕대에 내전이 났으니까 "도림이 아마 장수왕의 반대편에 나보다."하고 판단 했을 거에요. (중략) 그럼 백제에서는 뒷조사를 했을거 아니에요. 그 결과 개로왕이 도림을 믿게 되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아마 개로왕은 고구려의 정세를 듣기 위해서 도림과 함께 했을 수도 있어요. 사실 뭐 바둑을 좋아했겠어요? 서로가 서로의 정세를 보기 위해서 그랬겠죠.'''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史 45부 삼국시대1 - 한강을 점령하라 中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장수왕이 귀족 세력을 숙청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개로왕이 고구려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명문장으로 유명하며 《동문선》에도 실려 있다. 결국 개로왕은 힘에 부쳐서 고구려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지 도림의 꼬임에 빠져서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는 선대부터 워낙 먼치킨이 된 감이 있으며 국경을 지키던 장수인 재증걸루고이만년이 고구려로 투항한 것도 컸다. 투항 후 급하게 국경으로 다른 장수들을 보냈지만 야전 사령관이 둘이나 이탈해서 투항했으니 군의 사기야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장수왕이 침공했을 때 문주가 구원군을 요청하러 간 곳이 백제의 지방이 아니라 신라라는 사실에서 승부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백제 지방이 아닌 다른 나라로 지원을 요청하러 간 것은 이 시기 백제 중앙과 지방 간의 연대가 거의 없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백제의 지방은 중앙 정부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도 문제가 된다. 결국 노력은 했으나 현실은 시궁창. 정리하자면 개로왕이 못했다기보다는 고구려가 그 모든 노력들을 씹어 먹을 정도로 국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다는 설명이 더 타당하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개로왕 본기'''
一年秋九月 개로왕이 즉위하다
十四年秋十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秋八月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다
十五年秋十月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하다
二十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표문을 전하다
二十一年秋九月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
20년간 재위했음에도 기록이 거의 없다. 475년 한성 함락으로 백제 측 기록이 소실된 점과 일부 기록이 개루왕 시기로 올려졌다는 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 개루(蓋婁)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도미 열전에 나오는 개루왕을 이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하는데, 이는 도미 부부 설화에 묘사된 시대상이 백제 초기 시기인 개루왕 대와 거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말했듯이 개로왕의 별칭이 근개루(近蓋婁)이기도 하다.
  • 백제는 진사왕 때 잃은 황해도 지방과 경기 북부 영토를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성왕이 잠시 되찾으나 곧 신라의 진흥왕에게 빼앗긴다. 한강 유역이야말로 백제의 옛 수도이자 고토였는데,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동성왕 ~ 무령왕 시기 한강 일대 지역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대한 점유나 황해도 공격같은 기사 있어 학계 내에선 제, 여 간의 한강 유역 영유권에 대한 논란과 논의가 진행 중에 있다.
  •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도 개로왕의 최후 부분에선 '오자서의 고사'를 인용하여 배신자들을 꾸짖는다.
  •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5년(461년)조'에 따르면, 개로왕은 아우인 곤지를 왜(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30]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자 곤지의 새 아내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후쿠오카현 북쪽에 있는 섬인 가카라시마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출산했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 당나라 사서인 《양사공기(梁四公記)》에 신라 왕이 "우리 땅도 넓혔는데 캐간지나는 궁 하나 지어야 되지 않겠냐? 너네가 보거나 들은 건물 중에 좀 멋진 거 있으면 이야기 해봐라."라고 하자 신하들이 고구려의 수정성과 더불어 '개로왕의 바둑 두는 정원'이라고 조언했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인데 작가 곽재식이 쓴 소설에 나오는 지어낸 이야기를 착각한 것으로 곽재식 본인도 지어낸 소설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 소설에서는 진사왕 대에 왕궁에 큰 못을 파 바다처럼 꾸미고 바다 가운데 산을 쌓아서 신선부처가 노는 신선 봉오리로 꾸며놨고 진사왕이 온갖 동식물과 신기하게 생긴 바위들을 옮겨놔 모습이 장관이었는데 개로왕이 그곳에 누각을 쌓고 더욱 화려하게 꾸며서 안에서 바둑을 두고 놀았다고 한다. 거기다 몸에 글자와 그림을 그린 미녀들이 돌아다니며 바둑을 두는 사내들이 그녀들을 차지하기 위해 바둑 내기를 하는 등의 일들이 일어났는데 한성이 불타면서 그곳이 사라졌다고 되어 있다.
[1]송서》, 《위서》.[2]일본서기》에서도 개로라 써있다.[3] 충주 고구려비. 다만 동일인인지는 불명이다.[4]일본서기》. 훈은 '카스리'.[5] 오우치씨 족보.[6] 이름 미상.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 사망했다.[7] 부여곤지와 공유. 대후와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불명.[8] 일본서기 유랴쿠조의 주석에 실린 백제기(『百濟記』)에서 "을묘년(乙卯年: 475) 겨울 코마(狛)의 대군(大軍)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밤낮을 공격하였다. 왕성(王城)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한 것을 보아 475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9] 이름 미상. 472년 북위로 보내는 국서에서 언급됨. 한편 그녀와 동행한 불사후 부여례의 관직명 중 부마도위(駙馬都尉)가 있는 점을 봐서는 그와 부부관계였으리라고 추측되는데, 이는 백제사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근친혼 기록이다.[10] 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부여곤지의 손자에 해당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 일단 일본서기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면 개로왕의 서자이지만 당대에는 부여곤지의 정당한 후사로 인정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어머니의 본남편인 개로왕은 적부, 측실인 부여곤지는 서부인 것.[11]일본서기》. 삼국사기 기준 '''비유왕의 연대를 그대로 흡수하였다.'''[12] 고구려공작원 도림은 그가 들판에 가매장되었다고 한다.[13] 다만 위에서 나오는 미귀에서 미를 세로쓰기 과정에서 축약된 것으로 간주하고 추미(麁米)로 파자해서 보면 진씨로 볼 수도 있다. 진을 음차한 것으로 추정되는 표기가 조미(祖彌)로 자음이 ㅈㅁ로 수렴되기 때문.[14] '무니하시카시'라는 훈이 달려 있다. 의자왕의 대부인(大夫人)에게도 '하시카시'라는 훈이 달렸다.[15] 북연이 북위에게 멸망당했을 때 황제 풍홍(馮弘)을 비롯한 지도층이 고구려로 망명한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다.[16] 풀이하면 "'''백제 니들은 이제 막 우리한테 사신 보내면서 가장 먼저 꺼낸다는 소리가 전쟁 좀 벌려달라는 요구냐?'''"[17] 북위에 도착한 백제 사신. 육로는 고구려에 막혀 있기 때문에 험한 바닷길을 건너 북위까지 도착한 근성의 사나이다![18] 삼국사기에서도 전투 중 날아온 유시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9] 지금 연(璉, 장수왕)의 죄로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豪族)들의 살육(殺戮)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20] 개로왕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30년 간[21] 원래 백제는 남조와 손을 잡아왔었다. 이 개로왕 국서는 백제가 정식으로 북조에 사신을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22] 문주는 삼국사기에선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일본서기에서는 동생으로 나온다.[23] 참고로 다산 정약용은 직산 위례성설이 《삼국유사》에 언급된 이유로 당시 문주가 도망가면서 잠시 머물렀던 곳이 직산이어서 이런 오해가 생겼을 것이라 주장했고 이는 현재 사학, 고고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24] 일본서기 아니랄까봐 덴노 신하 이야기가 나온다.[25] 이 둘은 원래 백제인이었으나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가서 앞잡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26] 지금의 아차산성.[27] 허나 고구려도 이후 돌궐 발흥 등 국제 정세의 변화로 한강 유역을 점유했을 뿐 강력한 통치를 하거나 남진 기지로 삼지 못했다. 도리어 백제의 중흥과 맞물려 일시적으로 백제가 한강 이남을 회복하기도 했다. 격전지가 되어버린 까닭에 고구려가 아차산 일대에 보루를 세운 것이다. 아차산 일대와 자양동 한양 아파트 부지에 고구려가 세운 보루 유적이 많다. 참고로 가장 처음 발견된 구의동 유적이 지금의 자양동 한양 아파트 부지.[28] 앞 각주에 대한 반론: 문헌에 따르면 백제가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회복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고학 자료에서도 고구려는 서울 몽촌토성, 성남 창곡동 및 판교동, 화성 청계리, 안성 도기동, 대전 월평동 등 유적이 드문드문 확인되고 있어 제대로 된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약 30년 만에 다시 이루어진 서울 조사에서는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남진 기지로 활용한 모습이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은 1980년대 단편적인 조사에서 고구려 건물지와 토기가 확인되었고 2014년부터 조사된 바에 따르면 고구려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도로를 구축한 후 다수의 건물을 지었던 것과 다량의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고 있다.[29] 알까기를 하다가 군대를 말아먹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강조와 함께 잡기를 경계하는 이야기로 손꼽힌다.[30] 여기서 부인(夫人)은 삼국 시대 당시 왕비를 일컫는 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