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융

 


'''구 백제 영토 통치자'''
'''扶餘隆 | 부여융'''
'''백제 작위'''
왕태자(王太子)[1]
'''당 작위'''
대방군왕(帶方郡王)[2][3]
'''당 품계'''
광록대부(光祿大夫)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4]
'''당 직위'''
행태상경(行太常卿) - 사지절웅진도독(使持節熊津都督)[5]
'''성씨'''
부여(扶餘)
'''이름'''
융(隆) / 숭(崇)[6]
'''자'''
융(隆)
'''생몰년도'''
음력
615년 ~ 682년
'''웅진도독
재임 기간'''

음력
665년 ~ 676년 (12년)
'''구 백제 영토
지배 기간'''

음력
677년 ~ 682년 (6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모국의 멸망과 피난
2.3. 굴욕적인 항복
2.4. 구 백제 영토의 통치자
3. 후일담과 평가
4. 가족관계
5. 대중 매체에서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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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자왕장남. 백제의 태자였으며, 당나라의 귀족, 장수이자 웅진도독부의 도독.
당나라 장수로서 백제부흥운동을 탄압한 인물이 부여융이었다. 그 상황에서 부흥운동을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친동생 부여풍.

2. 생애



2.1. 초기


부여융의 묘지명에 따르면 부여융은 615년의자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셋째 아들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가 대성팔족 중 하나인 사택씨를 모계로 두고 있기 때문에 초창기에 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부여융은 64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한편 구당서에는 647년인 정관 11년 12월에 백제 태자 융이 조공했다[7]는 언급이 있다.

2.2. 모국의 멸망과 피난


이상하게도 백제 멸망 당시의 기록에는 태자가 '부여효'로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아무래도 655년 정월에 일어났던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의 결과로 보인다. 부여효는 부여융의 배다른 형제로 추측되는데, 백제 말기에 전횡을 일삼았다는 군대부인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를 도와 권세를 잡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대부인 소생인 부여효가 부여융을 몰아내고 태자위를 빼앗아갔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이 군대부인이 은고부인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못하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웅진강 입구의 전투에서 당군에게,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양쪽에서 패배해 수도 사비성 공격이 눈앞에 다가오자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사비성을 탈출하여 북쪽 웅진성으로 피난했다. 부여융은 일단 사비성에 남아있었지만 동생 부여태가 의자왕이 없는 틈을 타 멋대로 백제왕 행세를 하자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문사와 논의 끝에 사비성에 이대로 남아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사비성을 탈출했다. 부여태는 탈출하는 이들을 보고도 어쩔 수 없이 막지 못했다.

2.3. 굴욕적인 항복


결국 부여태가 지키는 사비성,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가 들어간 웅진성이 차례로 나당연합군에 함락당해 부여융도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8] 이후 항복 의식에서 신라의 태자 김법민(훗날의 문무왕)이 뱉은 침을 맞는 수모를 겪었는데, 문무왕이 이런 행동을 한 직후 '''"네 놈의 아비 때문에 대야성에서 내 누이무참하게 죽었다. 오늘 너의 목숨은 나의 손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 걸 보면 분명 과거의 일에 대한 복수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 멸망 이후 부여융은 백제 백성 1만여 명과 함께 으로 압송되었다가 당나라의 신하로 활동하게 된다. 662년 당나라 수군을 이끌고 돌아와 당나라 장수 유인궤와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하는 백제부흥군의 수장이자 자신의 동생인 풍왕 부여풍을 공격했다. 이후 백제부흥군이 백강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와 내분으로 무너지자 당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삼았다.

2.4. 구 백제 영토의 통치자


665년에는 당나라의 주재 하에, 한때 그에게 침까지 뱉으며 모욕을 주었던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명목상 대등한 위치에서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화해할 것을 맹세하는 '취리산 회맹'을 맺으면서 사비성 부근에 대한 지배권을 얻어냈다. 물론 당나라의 괴뢰정부이자 지방정부로서의 통치권이었지만, 부여융 입장에서는 이미 백제가 무너진 마당에 실현 가능성이 낮은 독립보다는 당장 백제인이 주도하는 자치권이라도 얻어내는 것이 유리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당나라는 이 취리산 회맹을 통해 부여융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옛 백제 주민들의 반감을 줄이면서 옛 백제 지역을 통치하려 했고, 신라에게는 이미 멸망한 백제가 멀쩡한 신라와 동격임을 강요하여 옛 백제 영역으로 침투하지 말라는 경고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후 670년 나당전쟁 발발 전까지 옛 백제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융의 통치가 이뤄졌다. 그러나 나당전쟁 개전과 함께 신라군의 대대적인 웅진도독부 공격으로[9] 부여융은 672년 백제 땅에서 바다를 건너 당으로 돌아갔고,[10]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신라군에 의해 당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되자 웅진도독부 간판은 백제와 거의 아무 상관도 없는 요동 땅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신라가 온전히 구 백제 영토를 점유함으로써 백제인 정권의 역사는 완전히 끝나게 된다.
676년 웅진도독부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한 채로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 지역 건안성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는 여기서 백제유민들을 모아 백제인의 자치구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훗날 신성의 소고구려와 비슷한 형태로 남게 된다. 일명 소백제. 이후 죽을 때까지 웅진도독으로 재직하다 중국땅인 낙양에서 사망해 북망산에 묻혔고, 사후에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받았다.

3. 후일담과 평가


의자왕과 그의 자손들이 당나라에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부여융은 당나라의 장수이자 웅진도독을 역임하며 최고위 귀족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부여융의 자손들은 웅진도독의 작위를 계승하며 소백제를 유지하였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있었다면 8세기 중반~9세기 초 요동에 진출한 발해에 신성의 소고구려와 마찬가지로 흡수되어 버린 것으로 추정. 최근(?) 밝혀진 부여융의 손녀 부여태비의 생애에서 당나라에서 부여융의 자손들이 누린 권세와 영예를 엿볼 수 있다.
여담으로 부여 서씨 측에서는 부여융이 당황제에게 서씨를 사성받은 후 내려온 것이 그들 가문이라고 자처하지만, 발견된 부여융 묘지명에는 사성받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11] 부여태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여융의 가문은 당나라에서 이어졌다.
총평을 하자면 망국의 비애를 겪은 백제 태자 출신으로 나름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당나라에 협조해 친동생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부흥운동을 자기가 토벌하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아이러니. 물론 부여융 입장에선 당나라의 꼭두각시인 웅진도독부의 도독이 되는 게 그나마 백제인이 중심이 된 자치정부이므로 신라의 변방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당전쟁이 터지자 부여융의 친당 노선에 반발해 도리어 신라에 편입되어 '백금서당'처럼 신라군으로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을 볼 때 모든 백제인들이 그의 노선을 찬성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덕분에 백제는 유민들이 단합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당군, 부흥군, 신라군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다 궤멸당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통일전쟁 이후에도 백제계는 옛 고구려계에 비해서도 낮은 대접을 받게 되어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후백제의 시조 견훤이 부여융의 9대손이라 하는데 신빙성은 낮다.[12]
충청남도 부여군은 사비백제시대 백제 왕가 묘역인 능산리 고분군 한켠에 부여융의 가묘를 만들었다.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묘를 조성하고, 무령왕릉 지석을 참고해 백제의 장례방식으로 묘지신에게 땅을 구입한다는 의미로 매지권, 그리고 중국 북망산에서 출토된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과 부여융묘 자리의 흙을 관과 함께 부여융묘에 매설하였다. 부여융이 죽고 천 년도 훨씬 지나 겨우 고국 능원에 돌아온 셈이다.

4. 가족관계


  • 아버지 의자왕
  • ?[13]
  • 아들 부여문선
  • 아들 부여덕장
    • 손녀 부인 부여씨[14]
    • 손녀 부여태비

5. 대중 매체에서


삼국시대 말기를 다룬 사극에서 몇 번 등장했는데, 대부분 백제 왕실 내에서 그나마 사리분별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삼국기에서는 이경영이 연기했다. 직접 무열왕과 소정방에게 항복을 청하고 신라 태자 법민에게 모욕을 당하는 장면은 나오지만,[15] 그 와중에도 백제 백성들의 목숨은 살려줄 것을 청하는 왕자로 등장한다.
대왕의 꿈에서는 공정환이 연기했다. 의자왕의 태자였으나 신라를 얕잡아보는 아버지에게 간언을 하다가 아버지의 눈 밖에 나서 태자 자리를 빼앗기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자기 욕심 채우기에나 바쁜 다른 형제들이나 자만심에 빠진 아버지 의자왕과는 달리 나당동맹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황산벌에서는 박수현이 연기하였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향하고 있다하자 패닉에 빠지고 아버지 의자왕에게 소정방에게 뇌물을 주자고 했다가 도리어 박치기 당하는(...) 코믹한 역할로 등장.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백제의 역대 국왕'''
31대 의자왕 부여의자

'''대방군왕 부여융'''

대방군왕 부여경

'''당 작위 역대 대방군왕'''
신규 책봉

'''초대 광록 부여융'''

2대 부여경
[1] 의자왕 재위 3년에 봉해졌으나 재위 20년 차에 폐태자 된 것으로 추정.[2] 대방군은 한사군 중 하나로서 백제의 주적 중 하나였다. 또한 대방군은 중국 왕조가 우리 왕조를 부를 때 쓴 별칭 중 하나였고 이에 융에게 봉해졌다.[3] 비슷하게 연남생은 당으로부터 변국공(卞國公) 작위를 받았는데 변국은 바로 변한(弁韓)을 이른다. 삼한 문서에서 설명되어 있듯 삼국시대 후반기쯤 가면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대입하는 것으로 의미가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4] 사후 추증. 더불어 시호도 추증됐으나 묘지석에서 보이질 않는다.[5] 당의 도독직에는 세가지 분류가 있는데 사지절도독, 지절도독, 가절도독이 있다. 부여융은 웅진의 사지절도독인셈. 웅진도독은 당연히 웅진도독부의 장관이다. 당은 기미책의 일환으로 현지 유력자를 바지사장인 도독으로 앉힌 뒤 당인을 차관으로 앉히고 실권을 행사하게 했다.[6] 《당회요(唐會要)》에 나온 이름인데, 당현종의 이름 피휘 때문에 기록한 이름이다.[7] 百濟王遣其太子隆來朝[8]충청남도 공주시 신원사(사찰)(新元寺)의 부속 암자인 고왕암(古王庵)에 백제 왕자가 도망쳐 숨었다가 잡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정확히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부여융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때 부여융은 고왕암과 가까운 웅진성이 아닌 사비성에 있었다.[9] 동시에 요동 방면으로 설오유가 지휘하는 신라군+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 연합군의 공격이 있었는데, 이는 웅진도독부(옛 백제 지역)에 주공을 하면서 당나라의 시선을 한반도 남부와 북부로 분산시키는 일종의 별동대였다.[10]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에 패퇴한 시점은 기록의 모호성으로 672년설과 676년설이 있다.[11] 부여서씨가 진짜 부여융의 후손이라면 부여융의 후손 중 누군가가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숨어지내면서 부여씨를 서씨로 개성했던 것을 후에 후손들이 사성을 받은 것이라고 윤색했을 경우가 훨씬 개연성 있다.[12] 견훤의 조상 계보는 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룡(지렁이)설, 신라 진흥왕설도 있다. 후삼국 계보 자체가 좋아보이는 건 다 가져다붙이는 수준이었다보니 외지인인 견훤이 백제 유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만들어낸 계보일 가능성이 크다.[13] 부여문사라는 설도 있지만 부여문사의 경우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에 따라 부여효의 아들로 본다.[14] 당현종 대의 관리인 길온(吉溫)의 어머니라 한다.[15] 법민이 아예 칼을 빼서 죽이려는 모습까지 보였으나, 부왕인 김춘추(무열왕)가 만류하여 목숨을 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