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왕

 


'''고구려 28대 국왕'''
'''寶臧王 | 보장왕'''
'''왕호'''
보장왕(寶臧王) / 고장왕(高藏王)[1]
'''성씨'''
고(高)
''''''
보장(寶臧) / 장(藏)
'''왕태자'''
고복남(高福男)
'''왕자'''
고덕남(高德男)
고덕무(高德武)[2]
고임무(高任武)[3]
'''왕손'''
안승(淵安舜)[4]
고보원(高寶元)[5]
'''부왕'''
대양왕(大陽王)[6]
'''생몰년도'''
음력
? ~ 682년
'''재위 기간'''
음력
642년 10월 ~ 668년 9월
(25년 11개월)
1. 소개
2. 생애
2.1. 재위 이전
2.2. 재위 기간
2.3. 항복 이후
3. 삼국사기 기록
3.1. 삼국사기 21권
3.2. 삼국사기 22권
4.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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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구려의 제28대 임금이자 마지막 임금. 망국의 군주이지만 재위 기간은 26년으로 긴 편이다.[7]

2. 생애



2.1. 재위 이전


보장왕은 평원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왕족인 고대양이다. 영양왕과 영류왕의 조카이며 태자 고환권의 사촌.
전왕인 영류왕 고건무는 태자를 비롯한 아들이 있었으므로 고보장은 본래 왕위에 오를 팔자가 아닌 평범한 왕족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쿠데타가 터져 영류왕이 시해당했고 연개소문의 옹립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8]

2.2. 재위 기간


막리지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권력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보장왕은 명목상의 국왕으로 추대되었기에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이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형제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라서 사실상 실권이 없이 보냈다고 보는 편이다.[9]
즉위 직후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 도교를 받아들이자는 연개소문의 진언에 따라 당의 도사를 초빙하여 도교를 장려한다. 불교 측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한다"고 대놓고 디스할 정도로 불교 측에서는 반발이 심했다. 현존하지 않는 구삼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성사는 원래 고구려 반룡사(盤龍寺) 스님이었는데, 보장왕이 도교에 현혹되어 불법을 폐기하자 성사는 방장(方丈)을 날려 백제의 고대산(孤大山)에 이르렀다. 후에 한 신인이 고구려의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패망이 며칠 안 남았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와 같다.

《대각국사문집》 권17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서 보덕성사의 영정에 예배함.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트집을 잡다가 연개소문에게 거절당한다. 결국 누적된 갈등은 폭발하여 고구려-당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645년에는 중국을 통일시킨 전쟁 영웅인 당태종이 온 국력을 기울여 직접 나선 전쟁이었다. 당군은 개모성, 요동성 등을 일시적으로 점거하는 등 강력한 무력을 보였지만 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 요동 외곽에서 격퇴당하여 초라하게 쫓겨나간다.
고구려는 당과 맞서는 동시에 백제와 함께 신라 공격에 열을 올린다. 신라의 김춘추는 직접 고구려 평양성에 와서 역사적인 외교 회담을 열었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똑같이 고구려에 패배의 아픔을 삭히면서 복수에 몰두하던 이세민과는 이해가 맞아떨어져 나당동맹이 성사된다.

이세민 사후에도 계속 고구려와 당나라는 일진일퇴의 싸움을 계속하였고 신라에 대한 공세도 이어졌다. 나당연합군미증유의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기습하는데 백제가 의외로 빨리 멸망하면서 고구려를 양면에서 공격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661년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수십만 대군을 일으켜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에 일격을 시도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백제 부흥군, 와 연계하여 남쪽의 신라군을 견제하고 거란, 철륵 등과 연계하여 당나라군을 분산시킨 후 당나라 대군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하여 국력이 고갈된 당나라에서는 고구려에 대한 야욕을 재고하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도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쪽 지역에서의 안정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화친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666년에는 태자를 당 고종의 봉선 의식에 보내 친선 의사를 보였다.
연개소문의 죽음 이후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직위를 이었으나 연남생의 나이는 고작 32세에 불과하였고 연개소문에 재주가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게 되자 결국 그의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이 연남생의 직위를 탐내면서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연남생이 내분에서 패하여 국내성에서 항거하다 결국 국내성을 비롯한 요동 일대를 당나라에 바치면서 항복하였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도 신라에 항복하였다.
결국 이러한 내분에 힘입어 668년 나당연합군은 평양성 공략에 나서게 된다. 이 때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연남건을 물리치고 연남산과 함께 항복 사신을 보내는 데 찬성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평양이 포위되었을 때 98명의 수령을 거느리고 먼저 항복을 청했고 이때 신라 측 요인으로써 참전한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왕을 당나라군 총사령관이세적 앞으로 데려가 보장왕의 죄상을 열거하였다고 한다.
연개소문 일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일방적으로 연개소문에 휘둘리는 군주였다는 해석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연개소문이 전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겉으로는 협력하나 이면에서는 대립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권력은 지키면서 제 역할을 했다는 해석도 있다. 항복 이후에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키려 한 업적이 있기에 현재로서는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해석에 무게가 실리기도 하고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그려지는 편이다.

2.3. 항복 이후


'''당이 봉한 보장왕의 생전 관작'''
'''작위'''
<white,#1F2023>조선왕(朝鮮王)
'''품계'''
<white,#1F2023>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10]
'''직위'''
<white,#1F2023>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
<white,#1F2023>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로 압송되었고 당태종의 묘에 참배를 시켰다. 당시 정치가 자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당나라 입장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고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책봉되었다. 과거 고구려의 중심 지방이었던 요동 지방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이 거세지자[11] 그를 677년 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12]에 봉하고 안동도호부로 부임하게[13]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무마시키려 했다.
'''당이 봉한 보장왕의 사후 관작'''
'''직위'''
<white,#1F2023>위위경(衞尉卿)
요동에 도착한 보장왕은 기회를 틈타 말갈과 손을 잡고 고구려 부흥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실패하였고 681년(신문왕 1년) 고구려와는 대륙 반대편인 촉 땅[14]유배당했으며 죽은 후 위위경에 봉해지면서 돌궐힐리가한 무덤 옆에 묻혔다고 한다.
나라를 팔아 넘긴 연남생은 사후 시호를 받고 당나라 조정에서 제사를 치러주는 등 화려하게 살다 갔지만 보장왕은 나라가 망하고도 다시 1번 독립을 시도하다가 초라하게 죽었다. 허수아비 군주였지만 이후 고려, 조선 등 후대 왕조들의 마무리를 생각한다면 그래도 망국의 군주들 중에서는 선방하였다고 할만하다. 연남생의 증손자인 천비(연비)의 묘지명에서는 보장왕의 외손자 '왕휘'가 등장하는데 왕휘의 딸이 천비와 결혼했다고 한다.
보장왕이 죽은 뒤 보장왕의 손자인 고보원(高寶元)을 686년 조선군왕(朝鮮郡王)에 임명하였으며[15] 696년 거란족 반란의 여파로 인해 요동에 대한 지배권이 약화되자 698년 고보원을 좌응양위대장군 충성국왕(左鷹揚衛大將軍 忠誠國王)으로 임명해 요동에 부임시키려 했으나 무마되었다.
699년 당나라는 다시 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호부에서 격하된 안동도독부의 장관인 안동도독(安東都督)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외에도 보장왕의 후손들은 당의 수도에 머물며 고구려 유민들을 대표하여 고려조선군왕(高麗朝鮮郡王)을 세습하였다고 한다. 고덕무에게서 독립 정권소고구려가 탄생했다는 학설도 있다.
한편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고마신사'(高麗神社)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고구려 멸망 후 유민 1천 7백여 명을 데리고 보장왕의 아들 고약광(高麗若光·일본 이름 고마노잣코)이 일본에 와서 정착했으며, 현재까지 그 후손이 전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기사 출처 2017년에 아키히토 덴노, 미치코 황후 부부가 처음으로 이곳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이때 아키히토 덴노가 신사 관계자들에게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습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3. 삼국사기 기록


보장왕은 2권이나 될 정도로 기록이 많으며 고대사 인물답지 않게 기록이 매우 상세하다. 삼국사기에서 신라문무왕과 보장왕만이 혼자서 2권을 차지한 왕이다.[16] 기록 양이 어지간한 고려시대의 왕들보다 조금 적은 정도.[17] 보장왕은 고구려 왕 중에 최다의 기록을 보유했으나 안타깝게도 망국의 왕이 되었다.

3.1. 삼국사기 21권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상)'''
一年冬十一月 왕이 즉위하다
一年 신라의 김춘추가 와서 군사 지원을 요청하다
二年春一月 왕이 그 부친을 왕으로 봉하다
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조공하다
二年春三月 당에 도교를 구하니 노자도덕경을 보내주다
二年夏閏六月 당태종이 왕을 책봉하다
二年秋九月 신라가 당에 구원병을 청하다
二年秋九月十五日 밤이 밝은데 보름달이 보이지 않다
三年春一月 당이 상리현장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하다
三年秋七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다
三年秋九月 당 태종이 백금과 숙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
三年冬十月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다
三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고구려 공격을 위한 병력을 동원하다
四年春一月 당의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다
四年春三月 당 태종과 이세적이 출정하다
四年夏四月 당군이 고구려의 성을 공격하다
四年夏五月 비사성이 함락되다
四年夏五月 당군이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四年 백암성이 당 태종에게 항복하다
四年 개모성이 함락되다
四年 고구려 군대와 말갈 병력이 당 태종의 군대와 싸워 패하다
四年 당군이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여 돌아가다
四年冬十月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후회하다
五年春二月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이 실패한 이유를 묻다
五年夏五月 당 태종이 다시 고구려 정벌을 논의하다

3.2. 삼국사기 22권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하)'''
六年春二月 당군이 소규모 병력으로 다시 침략하다
六年夏五月 당의 이세적 군대가 쳐들어왔다 돌아가다
六年秋七月 당군에 패하다
六年秋八月 당태종고구려를 정벌하고자 배를 만들게 하다
六年冬十二月 왕자 임무를 당에 들여보내 사죄하다
七年春一月 당 태종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게 하다
七年夏四月 당 고신감의 군대에 패하다
七年夏六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다
七年秋七月 평양에서 머리가 2개인 아이가 태어나다
七年秋七月 당 태종이 배를 만들게 하다
七年秋九月 평양에서 노루이리 떼가 서쪽으로 이동하다
七年秋九月 당군이 박작성을 공격하다
八年夏四月 당 태종이 고구려 침략 전쟁을 포기하라고 유언하다
九年夏六月 보덕화상이 백제로 가다
九年秋七月 곡식이 서리와 우박 피해를 입다
十一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十三年夏四月 고구려 멸망을 예언하는 말이 떠돌다
十三年冬十月 거란을 공격하였으나 패하다
十四年春一月 신라의 33성을 빼앗다
十四年春二月 당이 공격해오다
十四年夏五月 당군이 요수를 건너와 큰 피해를 입히고 돌아가다
十五年夏五月 평양에 폭우가 내리다
十五年冬十二月 당의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다
十七年夏六月 당군의 공격이 실패하다
十八年秋九月 호랑이평양성 안에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다
十八年冬十一月 온사문이 설인귀의 당군에 패하다
十九年秋七月 평양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十九年冬十一月 당이 고구려를 공격해오다
二十年春一月 당이 평양을 향해 공격해오다
二十年夏四月 당이 고구려 원정을 중지하다
二十年夏五月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하다
二十年秋八月 소정방의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다
二十年秋九月 평양성이 당군에게 항복하다
二十一年春一月 방효태의 당군이 연개소문과 싸워 전사하다
二十五年 태자가 당의 태산 제사에 참가하다
二十五年 연개소문의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다
二十五年夏六月 연남생이 당으로 달아나다
二十五年秋八月 연남건막리지가 되다
二十五年秋九月 당 고종이 연남생에게 벼슬을 내리다
二十五年冬十二月 당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
二十六年秋九月 당군이 고구려의 성을 빼앗다
二十七年春一月 당이 유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임명하다
二十七年春二月 부여성 등 40여 성이 당에게 함락되다
二十七年夏四月 동북쪽에 혜성이 출현하다
二十七年秋九月 멸망하다
二十七年冬十月 당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가다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다
唐 高宗 摠章二年春二月 왕의 서자 고안승이 신라에 투항하다
唐 高宗 摠章二年夏四月 당 고종이 고구려인을 대거 옮기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명색이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다 보니 고구려 말기를 다룬 각종 소설과 영상물에 거의 빠지는 법 없이 등장한다. 이때 묘사되는 모습이 작품마다 다른데, 그 갈래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는 연개소문에 의해 의도치않게 왕좌에 올라 소심하고 찌질한 모습만 보이는 모습, 2번째는 꽤 강단있는 모습으로 등장해 연개소문과 함께 국정을 주도해 나가는 모습 등이다. 특히 보장왕이 연개소문과 결탁해 영류왕을 살해했다는 독특한 내용 전개도 나오고 있는 중. 특히 이후에 나온 창작물일수록 제법 영민하고 능력도 갖춘 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역사에서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니 마냥 나약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망국의 군주 중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처럼 재평가를 받는 케이스.

4.1. 삼한지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서는 그야말로 나약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재위 내내 연개소문의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 늘 끌려다니기만 하는 모습만 보여준다(...).
다만 작중에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후에 보장왕의 아버지인 대양에게 눈물콧물 다 쏟으며 애걸복걸한 끝에(...) 보장왕을 옹립한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개소문은 진심으로 보장왕에게 충성을 다 하고 있는 듯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4.2. 연개소문


SBS에서 방영한 연개소문에서는 이배국[18]이 연기했다. 연개소문을 신격화하다시피 미화한 드라마인만큼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왕으로 나오는데, 연남건이 연남생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킨 뒤 선도해와 신성 등이 이 틈에 연씨 가문을 몰살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진언을 함에도 겁에 질린 나머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답을 하는 등 안습의 극치.

4.3. 대조영




4.4. 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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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꿈에서의 보장왕'''
KBS의 사극 대왕의 꿈에서는 안신우가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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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으로 즉위하는 보장왕'''
작중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롭게 왕위에 오르는 장면에 처음 등장하는데, 결연한 표정으로 왕관을 받아들여 자신의 머리에 쓰고 옥좌를 차지하는 장면이 인상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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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과 의논하는 보장왕'''
연개소문에게 휘둘리는 듯한 모습으로는 묘사되지 않으며 오히려 연개소문과 함께 국정을 의논하며 그와 뜻을 함께하는 등 상당히 친밀한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주인공이 신라 사람이기에 그 뒤로 큰 비중은 없고 연개소문과 국정을 논하는 장면에서만 가끔식 나오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고구려 멸망직전 신라한테 항복한다.

4.5. 칼과 꽃


[image]
'''칼과 꽃에서의 보장왕'''
KBS 사극 칼과 꽃에서는 온주완이 연기하였다.
작중에는 영류왕의 조카로써 왕을 보필하는 일종의 가신(家臣) 내지 호위무사와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역시 기존의 비실비실한 이미지는 어디에 던져버렸는지 몸이 날렵하고 무예에 능하며 용맹하면서도 현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영류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영류왕과 대립하는 연개소문 세력과 치열한 암투를 벌이지만 왕을 시켜주겠다는 연개소문의 꾀임에 넘어가 결국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동참하여 궁을 장악하고 주인공인 영류왕의 공주에게 칼까지 들이댄다. 여기서 과거가 드러나는데 실은 어려서부터 부모와 동떨어져 살며 영류왕의 직속 부하가 되도록 교육받았으며 이 때문에 꽤 오래전부터 영류왕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연개소문과 더불어 영류왕을 시해한 보장왕은 결국 처음에 약조한대로 연개소문의 지지를 얻어 왕위를 얻게 된다.
하지만 점차 연개소문에게 쏠리는 권력에 불안감을 느끼며, 도수 등의 귀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나, 도수 등이 연개소문의 휘하로 들어가면서 실패한다. 연개소문이 이 사실을 알게되면서 거의 모든 권력을 빼앗긴 허수아비가 되고 만다.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내관 복장을 입고 내관인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4.6. 평양성


영화 평양성에서는 정규수서북 방언을 살려 가며 연기하였다.
실권자인 연개소문과 그 자식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으로 인해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나약한 전형적인 허수아비 임금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풍자와 개그가 많은 영화다보니 시도때도없이 촐랑대고 호들갑 떤다.
제대로 된 왕으로 지내 본 적이 없어서인지 명분보다는 생존을 우선하는 데다, 당군에 수도가 포위된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결사 항전하려는 연남건에게 "내래 살고 싶어!"를 외치며 성문을 직접 열고 고구려 중신들과 함께 제일 먼저 당군에 투항한다.
[1] 보장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장왕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한다. 망한 나라의 왕이라 시호가 없다. 보장왕은 이름 + 왕. 의자왕도 마찬가지다.[2] 안동도독(安東都督).[3] 둘째 아들, 막리지를 지냈다.[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舜)이라 기록되었고 신라본기에서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舜)이라 기록되었으며 신당서 고려전에서는 보장왕의 외손자 안순(安舜)이라 기록되었다. 따라서 서자 혹은 외손자.[5] 조선군왕(朝鮮郡王)→좌응양위대장군 충성국왕(左鷹揚衛大將軍 忠誠國王).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불명확하나 확실한 것은 고덕무는 아니라는 것이다.[6] 고구려의 추존 왕[7] 고구려 왕가의 재위 기간으로 인해 별로 긴 편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신빙성이 의심될 정도로 긴 태조왕 같은 왕들은 둘째치고서라도 장수왕의 존재와 이외에도 30년 정도는 깔고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8]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유는 영류왕의 소극적인 대당 정책 및 무능함이었는데 그에 비해 영류왕의 이복형이자 전왕이었던 영양왕은 수나라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며 내정도 문제없이 이끌었다. 그런 영양왕의 동복동생 고대양의 아들 고보장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연개소문은 무능한 정권을 끝내고 훌륭한 혈통의 새로운 왕을 통한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9] 권력이 삼국지헌제처럼 거의 없었는지, 나름대로 발언권은 있었는지 정도의 이견은 있지만 그래도 실권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0] 천비묘지명 기록.[11] 당시 고구려부흥운동의 구심점은 신라로 망명해 고연무, 검모잠 등에 의해 한성(황해도 재령군)에서 새로운 고구려 왕으로 추대된 안승의 고구려국이었고 안승을 새로운 고구려 왕으로 인정함으로써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의 보호자이자 후원자라는 헤게모니를 선점한 것에 대한 대응책이었다는 지적도 있다.[12] 조선고조선을 말한다.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었으므로 훗날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전까지 조선이라는 말은 평양과 그 근처의 지명 비슷하게 썼다. 비슷한 호칭을 받은 사례로 조선국공 이자겸이 있다.[13] 주의해야할게 안동도호로 임명된건 아니다.[14] 지금의 중국 쓰촨성.[15] 동국통감 권9 신라기에 따르면 백제 의자왕의 증손자이자 부여융(扶餘隆)의 손자인 부여경(扶餘敬)이 웅진도독 대방군왕(熊津都督 帶方郡王)을 받은 시기와 같다.[16]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신라 왕은 문무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백제는 의외로 시조인 온조왕이다. 문무왕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모든 왕들 중에서도 기록이 가장 많아서 명실상부한 No.1이다.[17] 고려의 왕들은 고려사 덕분에 보통 매년 기록이 3개 이상 남을 정도로 상세하다.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 덕분에 연, 월 단위가 아닌 일 단위 기록이 남아 있다.[18] 같은 작가가 집필한 야인시대 2부에서 휘발유를 연기한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