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동 고분군

 



[image]
불로동 고분군의 2016년 전경[1]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262호'''
'''대구 불로동 고분군'''
大邱 不老洞 古墳群

[ 펼치기 · 접기 ]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335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면적'''
312,239㎡
'''지정연도'''
1978년 6월 23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1. 개요
2. 조사내용
3. 바깥고리
4. 사적 제262호


1. 개요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있는 신라의 고분군. 사적 제262호.

2. 조사내용


대구지역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고총 고분군 가운데서 가장 양호한 상태로 잔존해 있는 고총 고분군[2]으로 고분군의 서쪽으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18호분과 22호분이 조사되었고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활발해지는 80년대 즈음하여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갑, 을호분에 대해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1978년 사적지정이 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가 되었다. 정비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는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91호와 93호를 발굴조사하였다.
모두 장방형의 평면형태를 갖는 석곽을 채용하고 있으며, 하나의 석곽 안에 격벽(隔壁)을 두어 주곽(主槨)과 부곽(副槨)을 구분하였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다.
불로동 갑호분에서는 상어뼈가 출토된 바 있다. 조선시대 제례 문화에 있어 경북지역의 특징으로 돔베기를 올리던 것의 시원적인 양상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대구지역의 분지는 영남지역 어디의 분지보다도 거대한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3] 다른 분지들이 딱 하나의 집단이 자리하기에 알맞은 크기인데 반해 대구의 분지는 하나의 세력만이 차지하기에는 큰 분지이다. 청동기시대 대구 분지의 고인돌 및 관련 유적 분포가 삼국시대 신라의 고총 고분군의 분포와 유사한 점이 주목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원삼국시대의 소국 또는 소집단을 상정할 수 있는 근거가되는 토성(봉무토성, 검단토성)이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자리에 지속적으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취락이 형성된다. 지금의 대구 이시아폴리스 자리가 바로 봉무동 취락 유적이 있던 곳이다.[4]

3. 바깥고리



4. 사적 제262호


대구시 불로동과 입석동 구릉 서남면에 있는 수십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다.

무덤의 지름은 15∼20m, 높이 4∼7m 정도가 보통이며,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판판하고 넓적한 돌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돌방이 있으며, 그 위에 자갈을 얹고 흙을 덮었다. 껴묻거리(부장품)로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무기 무늬를 새긴 토기 등 많은 출토물이 있다.

이 무덤들은 대개 5세기 전후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불로동 무덤들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돌로 지은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 계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질이 신라와 유사하여 이 지역 세력의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1] 출처 : 한국문화재연구원, 2016, 대구 불로동 1157-5번지 유적.[2] 달성 고분군은 개발과정에서 사라졌고 구암동 고분군은 도굴의 피해가 극심하다. 욱수동 고분도 규모가 가장 컸지만 유물만 보존되고 개발과정에서 사라졌다.[3] 여담으로 신문왕대에 대구로의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다. 대구가 지형적으로 성장에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다.[4] 이시아폴리스 한켠에 모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