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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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당시의 달성 고분군의 분포도. 부립회생병원이라고 되어 있는 곳이 지금 대구의 대구의료원의 전신이다.[출처]
1. 개요
대구광역시 비산동과 내당동, 대명동 일대에 걸쳐서 형성되어 있었던 신라의 고분군. 고고학이나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유적이다.
2. 조사 내용
달성의 근처에 마치 경주의 대릉원마냥 거대한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어서 고분군의 이름도 이 달성(達城)에서 따온 달성 고분군이다.[1] 달성의 남서쪽으로 비산동과 내당동, 대명동 등에 걸쳐서 형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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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쇼와 6년) 조사당시의 모습.[출처] 사진의 가장 왼쪽이 지금의 달성이고 가장 멀리 보이는 산은 팔공산이다. 옆의 민가들의 크기를 통해 보더라도 상당한 규모의 고분군들이 조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진에 나온 비산동 37호분은 하나의 봉토 아래에 두 개의 횡구식 석실이라는 석곽처럼 생긴 석실이 2개가 같이 있는 구조이다. 두 석실 모두 높은 위계의 신라 금공품들이 출토되었는데 出자형 금동관과 금동제 관모, 관식[2] , 태환이식[3] , 경식[4] , 은장삼엽문환두대도와 삼루문환두대도[5] 등이 출토되었다. 이는 신라 귀족, 왕족들의 금은 장식품 착장 체계에 있어 상당히 높은 위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경주 이외의 지방에서는 거의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풀셋트이다. 여기서 나온 금동관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위계로 말미암아 대구 분지에 분포하는 고총 고분군들 ─ 달성 고분군, 불로동 고분군, 구암동 고분군, 그리고 주변의 문산리 고분군, 성산동 고분군과 같은 고총 고분군 중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고분군으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이 달성 고분군은 토기 양식적으로나 묘제적으로나 낙동강 중류역의 각종 고총군, 고분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역시 의성 금성산 고분군처럼 대구 방면에서는 가장 중심지적인 성격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추론된다.
또 한편으로는 일찍이 달성(達城)이라는 토성의 존재로 하여금 일찍이 원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세력이 성장하여 달성 고분군을 조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는 금호강변의 불로동 고분군이나 경산시의 임당 고분군하고도 유사한 고총군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양상이다.
대구시의 형성과정에서 일찍이 사라져(...) 버렸기 떄문에 인지도는 낮지만 지금도 재개발로 인한 구제 발굴의 수요가 생기고 있다. 발굴결과를 보면 여전히 고분군의 흔적들이 조사되고 있다.
3. 여담
일제시기에 고분들을 발굴하고 그 이후 개발되어 고분들이 사라졌기에 일제가 남긴 보고서가 유일하다. 이 당시 일제의 발굴 보고서는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것처럼 보고서가 두 장 짜리만 있는가 하면 제법 공을 들여서 쓴 것도 있었다. 다른 목적성이 있었다고 보이는 가야권이나 낙랑의 발굴과는 달리 소상히 발굴조사 보고서가 기술(記述)되어 있다.[6] 문화재에 대한 현대적인 인식 이전에 모든 고분들이 개발로 인해서 사라진 상황에서 유일하게 달성 고분군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 관련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고분군이 우리 손에 의해 체계적인 발굴이 이뤄진 후 잘 보존되었다면 문화재 하나가 아쉬운 대구광역시에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7] 개발이 안되었다면 고분군을 달성과 연계하여 경주 시가지의 월성처럼 고대 문화를 살리고 중구 경상 감영의 중세 문화를 거쳐 근대 골목에서 근대 문화까지 함께 체험하는 역사적인 도시가 되었을텐데 아쉬운 부분이다.
4. 관련 문서
[출처] A B 조선총독부, 1931, 『대정십이년도고적조사보고 경상북도달성군달서면고분조사보고』[1] 일제강점기에 지명이 달성이 위치한 이곳이 달성군이었다. 사실 여기서 따온건데 달성군 이름이 달성 자체에서 나온거니깐 그런거로 하고 넘어가자.[2] 이상 관 및 관을 장식하는 머리에 쓰는 장식품들이다.[3] 큰 고리의 귀걸이, 통상 태환이식이라함은 최소 도금이거나 금, 은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한다.[4] 가슴쪽 치레 장식[5] 각 삼엽문과 삼루문은 칼의 손잡이 부분의 장식 형태를 뜻한다. 삼루문은 클로버 모양, 삼엽문은 클로버 모양+인동초 장식이 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6] 일제 강점기의 관학자들의 연구들이 의도가 잘못되었을지언정 발굴조사 시스템은 당시 수준에서는 제법 높았다. 해방 이후의 한국의 문화재 관련 발굴조사 및 보고서 기술은 80~90년대 쯤 대학발굴이 흥기할 무렵에 일약 진전이 있었다. 60~70년대 발굴은 대부분 보고서나 서술적 측면에서 부족했었다.[7] 대구시가 주로 내세우는 역사 관련 관광 프로그램이 중구의 근대 골목과 동산병원의 선교사 건물들과 계산성당 등을 체험하는 '근대로의 여행'이다. 대구시가 근대 문화 컨텐츠를 밀어온 것은 대구의 근대 이전 역사 관련 유적 보호가 빈약하다는 한계점이 내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