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동음이의어)
1. 태양계의 6번째 행성
2. 크툴루 신화의 토성
하이퍼보리아에서는 사이크라노쉬(Cykranosh)라고 불렀다. 잿빛 사막, 광물성 식물이나 액화금속으로 이루어진 호수 등으로 이루어진 자연환경이 있다는 점부터 현실의 토성과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다른 행성.
털 하나 없이 검은 빛을 띄는 몸과 머리가 하나로 붙어있는 블렘프로임 족, 날개 없는 조인족(...) 드쥐비, 소인족 에피퀴, 지하에서만 사는 글롱 족, 이드힘 족 등이 서식한다. 차토구아의 백부인 그레이트 올드 원 흐지울퀴그문즈하도 토성에서 살고 있다. 차토구아와 아틀락 나챠도 토성 출신. 그 외 차토구아의 대신관 에이본이 피난오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크툴루 신화에서 자주 보이는 행성이다.
그분도 지구에 가기 전 잠시 들렀다고 한다.
3. 흙으로 만들어진 성(土城)
3.1. 개요
흙을 쌓아올려 인공적인 언덕을 형성해 방어에 용이하도록 만든 성이다. 보통 국가의 건설 단계에 쌓은 성이 많지만 조선시대에도 토성을 쌓은 기록이 있다. 왜냐면 석재나 벽돌로 만든 성들보다 흙이 훨씬 구하기 쉽고 쌓기도 쉽기 때문이다.[1]
3.2. 역사
3.2.1. 동양
오늘날 남은 토성 중 가장 오래된 형태인 중국 상나라 중기의 도읍지였던 정(鄭, 허난성 정저우시)의 도성유적을 보면 황하의 흔한 황토를 판축법을 이용해 우선 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황토를 채워 넣고 무거운 추로 다진 다음, 그 위에 다시 나무틀을 얹어 황토벽을 높이는 형태로 쌓은 성도 있다. 참고로 정의 성벽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10m, 가장 높은 곳은 16m에 이를 정도로 높으며 상당히 잘 보존되었다. 1950-1951년에 발견되었으며, 전체 성벽길이가 6960미터, 총 11개의 문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순수 인력으로 수천 수만명을 동원해도 평지에 흙을 일정 폭으로 높이 쌓는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구릉이나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그 위에 덧쌓거나 반대로 흙을 깎아내는 삭토법을 쓰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언덕만 달랑 쌓아놓고 끝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성벽을 추가로 세워 높이를 보강하고 방어군의 안전을 도모했으므로 토성은 곧 목조성이기도 했다. 사실 제대로 된 목조성치고 토성이 아닌 경우가 드물었는데, 평지의 경우 통나무벽만 세워서는 공격군을 저지할만한 충분한 높이를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언제 태워먹을지 모르는 나무벽보다는 언덕의 높이를 중시해 나무벽에 정성을 들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예외적으로는 어디서든 우주방어를 구현하고자 했던 일본 정도가 있다.
흙은 그 자체로만 높이 쌓아서는 내구력이 약하기 때문에 토성은 말이 토성이지, 여러재료로 쌓았다. 나뭇잎, 목재, 서로 다른 종류의 흙 등을 깔아서 먼저 다지고 층 사이에 겹쳐 쌓아서 내구력을 도모했다. 이런 건설공법은 동아시아의 경우 고대 중국에서 한반도, 일본에까지 전해졌으며, 삼국 모두에 같은 방식으로 쌓은 토성유적이 발견된다. 이외에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토벽에 불을 질러서 테라코타로 만드는 작업을 하기도 했으며, 낮은 석축을 쌓고 토성을 쌓거나 아예 돌을 섞어 쌓거나(토석혼축성)[2] , 목책도니성이라 하여 나무로 골조를 짠 뒤 진흙과 흙을 바르고 쌓는 토성과 목책의 중간형도 존재했다.
토성이 석성이나 벽돌성보다 좋은 장점은 언급했듯이 다른 성에 비해 건설이 빠르고 비용이 적게 들며 쉽다는 점이다. 그외에 다른 장점을 굳이 찾자면 흙으로 된 매끄럽고 경사진 토성의 성벽은 수직으로 서있는 다른 성들의 성벽처럼 적군이 사다리를 놓고 오르는게 의미가 없으며, 적군이 걸어서 오르기도 힘들다는 점이다. 경사에 따라 다르겠지만 45도 이상의 각도로 된 언덕은 현대의 전투화 같은 마찰력 좋은 신발을 신고도 오르기 힘들다.[3] 하물며 고대의 짚신이나 가죽신 같은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투석기 등 공성무기가 성벽을 공격해도 폭이 두꺼운 흙벽이 충격을 완화하여 단발로는 유의미한 공격을 주기 힘들다. 돌성벽의 경우 투석기의 공격을 받으면 충격을 그대로 받아 깨지거나 맞은 성벽부분의 석재가 빠질 수 있으나, 흙성벽은 투석기가 던진 돌이 박히거나 자국만 내고 굴러떨어지기 때문. 물론 장시간 공격하면 성벽이 무너져내릴 것이나, 그동안 성 안에 있던 수비군이 반격할 시간을 벌기 때문에, 어쨌거나 공략하기 까다로운 건 매한가지였다. 무너진 부분도 보충하기 쉽다는 점 역시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3.2.2. 서양
서구권에도 토성은 있었다. 다만, 서구권에서도 중동은 흙의 입자가 너무 고와서 단단하게 뭉쳐지지 않아서, 흙은 그냥 벽돌로 만들어서 성벽을 쌓는데 쓰였으므로, 순수한 의미의 토성은 없었다[4] . 그래서 서양의 토성은 유럽에서만 잠깐 발달하고 끝났고, 대개는 목책을 두르는 게 대세였다[5] . 유럽의 토성은 모트 앤 베일리(Moat and bailey)라고 하여, 방어용 해자(moat)와 그 가운데에 영주들의 성[6] 이 입주한 원추형 언덕(bailey)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성의 외벽은 주변을 파서 해자를 만든 후에, 거기서 나온 흙으로 벽을 쌓아서 그 위에 목책을 둘러친 전형적인 토성이었다.
하지만, 동양권에서는 16세기 경에도 토성이 대거 애용된데 반해, 서양에서는 중세 초중반에만 토성이 발달하고 금방 석성으로 갈아탔는데, 이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석조 기술이 급속도로 확산된 것과 더불어, 바이킹이나 이슬람 군대, 몽골 제국이나 셀주크 튀르크 등의 아시아계 유목민같은 외적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이다. 성벽 대신에 그 너머의 궁궐이나 군사시설같은 주요 시설만 골라서 공격하는 트레뷰셋같은 투석기나 벽을 타고 넘기 위해 고안된 공성탑 등이 대거 등장한데다, 봉건제로 인해 유럽과 중동 전체가 여러 영주와 군주들이 실사판 북두의 권을 찍는 난세가 되어 허구헌 날 전쟁이 벌어졌기에, 흙으로 쌓은 성으로 방어하는 건 어림도 없는데다, 이런 문제점을 상쇄할 만큼 질 좋은 흙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7] 토성이 금방 도태되었다. 러시아에서만 유일하게 13세기까지 토성이 살아남았으나, 하필이면 남송이나 고려, 금나라같은 축성술의 끝판왕들과 질리도록 싸워대면서 공성전에 이골이 난 몽골 제국의 침공을 받은 바람에 죄다 개발살이 나버렸고[8] , 결국 이를 계기로 서유럽의 축성기술을 벤치마킹해서 죄다 석성으로 갈아탔다. 몽골의 침략 이후에 건설한 러시아식 석성의 대표적인 예가 모스크바를 포함한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건설된 요새 겸 궁전인 크렘린이 있다[9] .
대신 옛날의 모트 앤 베일리같은 토성을 짓는 방식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도 야전에서 임시 진지를 세우는 용도로 꽤 쓰였다. 특히 대포를 방열하는 포대를 주변을 파서 만든 참호에서 나온 흙을 이용해서 급조하거나, 참호 자체를 이용해서 방어선을 구축할 때 흙을 자루에 담아서 만든 모래주머니로 펜스를 둘러치는 식이었다. 전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치세까지 쓰였고, 후자는 20세기 초중반에 쓰인 방식이다. 하지만 이건 영구적으로 기능하는 방어시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선 구축을 위한 임시 시설에 불과해서 이미 성(castle)이나 요새(stronghold)라고 하긴 어렵다[10] . 게다가 이걸 돌파하기 위해 탱크와 공군이 등장하면서, 이런 현대식의 급조 토성은 금방 쓸모가 없어졌다.
서구권에서 진정한 의미의 토성이 부활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다만, 더 이상 유력자의 성을 짓는데 흙을 쓰진 않았고, 15세기 이후에 축조된 토성은 철저히 군사용으로만 지은 것들 뿐이다[11] . 그게 바로 성형 요새로, 당시에 대포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12] 기존의 성과는 달리 요새들마다 대포에 대응하기 좋은 구조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래서 중세 중기의 석성들과는 다르게 성벽의 높이를 낮추는 대신에 벽 자체에 60도 정도의 경사를 만들어서 포탄을 튕겨낼 수 있도록 건설했다. 그래서 돌이나 벽돌과는 달리, 무너져도 언제든지 복구할 수 있는 흙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13] . 그래서 성형 요새들은 토성인 경우가 많으며, 대표적인 경우가 나르당 요새다. 다만, 기존의 전통적인 토성과 달라진 점이라면, 주변에 방어용으로 해자를 파서 접근 자체를 어렵게 했다는 것과, 일반 석성처럼 둥그런 형태나 직사각형으로 성벽을 쌓은 게 아니라 성의 모양을 별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별의 꼭지점 부분에 대포를 발사할 포대를 설치해서, 다가오는 적을 양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것도 역시 일반적인 토성처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는 탱크와 공군의 등장으로 인해 무의미해졌다.
3.3. 예시
한국에는 처인성,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이 토성에 해당하며, 고대에 쌓은 성들은 웬만하면 다 토성이었다. 한국 이외의 토성으로 유명한 것은 네덜란드의 나르당 요새나, 일본의 고료가쿠, 중국의 만리장성[14] 등이 있다. 문서가 있는 토성에 대한 것은 달성,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을 참고.
4. 지명
지명에서 일컫는 뜻은 상술한 '土城(흙으로 쌓은 성)'이다.
[1] 석성들 역시 바깥 부분에 돌로 쌓고 안쪽은 흙을 다져서 쌓은 구조가 전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어서 이 또한 다르게 보면 토성의 업그레이드 형태로 볼수도 있다. 다만 이런 성들은 토성이 아니라 확실히 석성으로 분류된다.[2] 이 경우 석성이랑 헷갈리기도 한다. 전술했듯 한국의 석성은 안에 흙을 채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3] 군대의 탄약고를 둘러싼 외부 경사면을 올라본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탄약고는 외부로부터의 포격 및 폭격, 내부 폭발에 대비해 건물위에 마치 신라와 가야의 거대고분 마냥 흙으로 쌓여져 피해를 대비하도록 되어 있다.[4] 고대 시대에 이미 중동 지역이 대거 사막화되었기 때문이다.[5] 아메리카의 경우는, 그냥 목책만 대충 둘러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석성으로 지었을 뿐, 토성은 전혀 발달하지 않았다. 이는 공성전이 벌어질 만큼 문명이 발달하거나 군사기술이 발전한 곳들은 죄다 정글지대나 평야 지대 내지는 산악 지대뿐이라서, 토성을 지을만한 마땅한 성질의 흙도 구할 수 없는데다, 대신 주변에 바위나 나무는 널리고 널렸으므로 딱히 흙을 쓸 이유도 없었다.[6] 오늘날 노이슈반슈타인 성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화 속의 성같은 것이나, 십자군 원정기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크라크 데 슈발리에같은 그럴싸한 성채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중세 초중기의 서유럽에서 발달한 성은 킵(keep)이라고 하는데, 별거 아니고 그냥 돌로 어마무시하게 쌓아올린 탑에 불과하다. 영국의 런던 탑이 대표적인 케이스다.[7] 중국이나 한반도의 토성들은 흙에 칼슘 성분이 많아서, 대포로 포격을 해도 버틸 만큼 단단했으나, 서유럽이나 러시아의 토성을 짓는데 쓰인 흙은 그렇지 못해서, 투석기로 조금만 때려줘도 금세 와르르 무너졌다.[8] 이 시기의 동북아시아 왕조들은 진작에 석성으로 갈아탄 뒤였고, 몽골 제국은 이런 나라들과 혈전을 벌이면서 성장했다.[9] 흔히 크렘린이라고 하면 모스크바의 것을 가리키지만, 원래 러시아어로 크렘린은 도시 내에 구축한 성관(castle)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다.[10] 이 시기의 진짜배기 요새는 콘크리트 요새라고 따로 있었다.[11] 네덜란드의 보르탄허 요새처럼 토성 내부에 마을이 조성되어있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는 처음부터 민간인이 살았던 게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쓸모가 없어진 토성 내 군사시설을 민간에 주거용으로 싸게 분양하면서 마을로 전용된 것뿐이다.[12] 물론, 15세기의 서양 대포는 대단히 원시적인 형태의 것이라서, 이걸 공성전에 써먹기는 힘들었다. 옛날의 투석기마냥 대포에 큼지막한 돌을 넣어서 발사하는 식이라서, 성벽이 무식하게 두꺼우면 여전히 뚫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도 성벽을 직접 무너뜨린게 아니라, 우연히 열려있던 성문 쪽으로 뚫고 지나가서 공략에 성공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내 대포의 성능이 크게 개선되고, 포탄도 돌 대신 맞으면 폭발하는 탄을 쓰게 되면서, 더 이상 기존의 성들은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13] 물론, 성형 요새는 흙 대신 돌로 지은 것도 많이 있다. 그냥 석재가 풍부한 지역은 돌로,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흙으로 지었다고 보면 된다.[14] 정확히는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에 조성된 부분 한정이다. 명나라 때 조성된 대부분의 만리장성 구간들은 토성이 아니라 벽돌로 쌓은 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