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4세
1. 생애
프랑스 왕국의 국왕. 카페 왕조의 15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필리프 4세의 삼남이고 루이 10세, 필리프 5세의 동생이다. 프랑스 왕으로는 샤를 4세, 나바르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카페 왕조의 본가가 대가 끊기고 방계인 발루아 왕조가 이으면서 혈연이 끊어진 나바르의 왕위는 프랑스에서 분리된다.
형 필리프 5세가 상속자 없이 죽게 되자 왕위에 올랐으며 아버지 필리프 4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전제정치를 펼쳤다. 1326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와 결혼했던 그의 동생 프랑스의 이사벨라가 일으킨 반란에 참가하여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조카이자 이사벨라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즉위시키는데 공헌하게 된다. 물론 이게 이후 자기 사후 프랑스 왕위계승문제에 심각하게 작용할지는 역시 예측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1328년 즉위 6년 만에 33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상속자를 남기지 못했다. 필리프 4세의 아들 중 생존자는 그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카페 왕조의 직계는 끊기게 된다.
원래 샤를 4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인 1307년 부르고뉴 공작 오토 4세의 딸 블랑슈 드 부르고뉴와 첫 결혼을 했으나, 1314년 필리프 4세에 의해 간통 혐의로 블랑슈는 구속되었고 1322년 샤를 4세가 즉위한 후에도 구속되어 있다가 교황 요한 22세는 결혼의 무효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해 샤를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딸 마리아 폰 룩셈부르크를 맞이한다. 마리아와의 사이에서는 1323년 딸 마리가 태어났으나, 요절하고 1324년 마리아가 임신한 상태에서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 이 때 마리아로부터 급히 제왕절개로 아들 샤를을 출생시키지만 마리아와 샤를 모두 사망했다. 여전히 후계자가 없던 샤를 4세는 루이 데브뢰의 딸로 왕 본인과는 사촌인 잔 데브뢰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잔은 1326년 잔, 1327년 마리, 1328년 블랑슈 등 3명의 딸을 연달아 낳았지만 끝내 아들을 두지 못했다. 이 중 블랑슈는 필리프 6세의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필립과 결혼했으나, 후손을 두지 못했다.
2. 사후의 왕위계승분쟁
원래대로라면 카페 왕조의 유일한 정통계승자였던 루이 10세의 장녀 '''잔느'''가 왕위를 이어받았어야 했으나, 그녀는 이미 두 번의 왕위계승과정에서 살리카법에 의해 삼촌들에게 왕위를 넘겨준 상황이었다. 더불어 살리카법 때문에 샤를 4세 이후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는 나바르의 여왕 후아나 2세로 즉위했다. 그래서 남은 계승자는 셋으로 압축되게 된다.
우선 샤를 4세가 왕위에 올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있다. 그는 필리프 4세의 딸이었던 이사벨라의 아들로 샤를 4세에게는 외조카가 된다.
두 번째로는 필리프 4세의 이복동생인 루이 데브뢰의 아들 '''필리프'''가 있다. '''필리프'''는 위에서 언급한 카페 왕조의 마지막 남은 정통 계승자 잔느와 결혼한 남자다. 참고로 그의 누나가 샤를 4세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는 샤를 4세의 사촌이자 조카사위에 처남까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리프 4세의 동생인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필리프 드 발루아'''가 있었다. 그는 샤를 4세의 사촌이 된다.
이렇듯 세 사람이 왕위계승분쟁을 하게 되는데 살리카법에 의하여 '''필리프 드 발루아'''가 필리프 6세로 즉위하게 되고 그가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를 열게 된다.
한편 '''필리프'''는 아내였던 잔느가 여계상속이 가능했던 나바르 왕국을 상속받아 후아나 2세가 됨에 따라 역시 나바르 왕국의 공동왕 펠리페 3세가 되었다. 샤를 4세의 죽음으로 나바라와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2]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원래 필리프 6세의 왕위계승을 승인했으나, 이후 마음을 바꿨고 프랑스 왕위계승을 요구하며 백년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