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6세

 


'''이름'''
필리프 드 발루아 (Philippe VI de Valois)
'''생몰년도'''
1293년 ~ 1350년 8월 22일 (57세)
'''재위기간'''
1328년 2월 1일 ~ 1350년 8월 22일
'''출생지'''
-
'''사망지'''
프랑스 왕국 노장르루아
1. 개요
2. 즉위과정
3. 재위기간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초대 왕이다. 아버지는 샤를 드 발루아로 필리프 4세의 친동생이다.

2. 즉위과정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이 차례로 즉위하였지만 모두 단명하여 후계자가 없게 되어, 필리프 드 발루아가 이전의 왕위계승에서 사용되었던 살리카법에 의해 필리프 6세로 즉위하게 되어 발루아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사실 그는 살리카법이 아니었다면 왕위와는 거의 연관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우선 루이 10세의 장녀인 잔느가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 번의 왕위계승전에서 모두 삼촌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거기서 이유로 단 게 살리카법이었다.[1]
샤를 4세의 사후 프랑스 왕위에 근접했던 사람은 그 말고도 잔느의 남편이자 그의 사촌이었던 필리프, 그리고 필리프 4세의 외손자가 되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있었다. 살리카법을 적용하면 외손자인 에드워드 3세 역시 제외가 되었고 사촌 필리프의 아버지 루이 되브레는 필리프 3세의 6남으로 서열 자체가 밀렸다.[2] 그런 의미에서 그가 프랑스 왕실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친족이 되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전왕인 샤를 4세와는 가장 사이가 멀었다. 당장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샤를 4세의 외조카가 되며 필리프(나바르의 펠리페 3세)는 샤를 4세의 조카사위이자 처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필리프 4세의 조카이자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의 사촌에 해당한다. 즉 전왕과의 사이가 가장 멀었지만 살리카법에 의하여 오르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 다시 왕위계승에서 밀린 잔느는 여성승계를 허용했던 나바라 왕국을 얻게 되면서 나바라와는 동군연합이 해체되었고 에드워드 3세는 초기에는 필리프 6세의 즉위를 인정했으나, 이후 다시 번복하며 백년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3. 재위기간


재위 초창기에는 안정적인 운영을 했다. 플랑드르 지방의 반란도 진압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복종도 받아냈다. 하지만 1333년 에드워드 3세와 대립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해오고 이에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를 방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여기에 에드워드 3세가 반기를 들었고 1336년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자칭 프랑스 왕>이라는 공개도전장을 보내고 이에 필리프 6세가 1337년에 아키텐을 몰수하자 결국 백년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백년전쟁은 초기부터 프랑스에 상당히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도버해협의 재해권이 잉글랜드로 넘어갔고 이로 인해 전쟁은 프랑스 영토 내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345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직접 노르망디로 상륙하면서 이끌고 온 잉글랜드의 장궁부대가 프랑스 기사군을 크레시에서 격퇴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1347년 칼레가 함락당하고,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중 흑사병까지 번지게 되었으며 그야말로 프랑스 전체가 혼란에 빠진 상황이던 1350년 죽게 된다.

[1] 물론 잔느의 어머니가 루이 10세가 간통죄로 가둔 마르그리트라는 점도 있었다.[2] ''' 서자'''(1번 항목)가 아니다. 두 번째 왕비도 왕의 정식부인이면 '''왕비'''였다. 이런 식으로 했으면 카스티야의 펠리페 3세 (4째 왕비의 아들. 심지어 장자도 아니다.)는 절대 왕이 되지 못했다. 6남인 건 요절하거나 사산아 포함이고, 루이 되브레는 1~5남과 그 남계 후손(서계 제외하고)이 전멸해야 프랑스 왕관을 받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되브레 가가 발루아 가보다 오래 못 가는 바람에 가문에서 프랑스 왕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결국 우월한 유전자 '''앙리 4세''' (카페, 발루아(직계, 방계 둘 다 포함됨), 되브레, 그리고 부르봉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다.)가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