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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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가문의 문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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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왕조 전체를 상징하는 문장
Dynastie des Capétiens
1. 개요
2. 역사
3. 배출한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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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왕조이자 '''유럽 최대 규모의 가문.'''
루이 5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서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혈통이 단절되자 프랑크 공(Dux Franciae)이었던 위그 카페가 987년 프랑스 왕에 선출된 것을 기원으로 한다. 카페라는 이름은 라틴어 'Caput'에서 나온 것으로 '수장'이란 의미가 있는데, 당시에는 가문이라기 보단 일종의 별명이었다.
푸른 바탕에 노란 백합, 특히 이 백합 문양은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의 국기로서 쓰였다.[2] 다만, 샤를 5세(재위: 1364~1380) 때에 작은 백합을 여럿 늘어놓은 것에서 큰 백합 세 개를 그려넣는 것으로 약간 바뀌었다.

2. 역사


이 집안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카롤루스 대제 시절부터 궁정을 보좌했던 에스바이 백작 로베르(Robert de Hesbaye)에게 닿는데, 에스바이 백작가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 시절부터 왕비를 배출했고, 위그의 큰할아버지 외드와 할아버지 로베르카롤링거 왕조가 약화되자 바이킹의 침략을 격퇴하며 인망을 모아 서프랑크의 왕이 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위그는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의 딸인 헤드비게와 결혼하여 위그 카페를 낳았다. 이런 식으로 카페 가문이 왕좌를 차지했던 것 가능한 이유는 이 시기가 아직 중세적 상속 체계가 자리 잡히기 이전의 시절이었고, 군주라는 자리는 전임 군주의 명백한 직계 장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역 영주들이 합심해서 다른 가문 사람을 선출할 수도 있었기 때문. 요약하자면, 당시 서프랑크에서 꽤나 명망있는 귀족 가문이었다.[3]
초창기에 프랑스 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처럼 프랑스 내 여러 유력 귀족 사이에서 '선출된 왕'에 지나지 않았다. 카페 왕조 직할지로는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좁은 일드프랑스 지역과 오를레앙 정도였다. 다른 영주로부터는 형식상 왕의 권위를 인정받는데 지나지 않았으며 대영주들의 권력에 휘둘리는 처지였다. 하지만 서서히 왕권을 강화하고 다른 영주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면서 왕다운 왕으로 발전해나간다.
비슷한 시기의 신성로마제국 왕조가 단절과 재선출을 거치는 과정이 많았던 반면, 카페 왕조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단절을 거치지 않고 쭉 적장자로 이어졌다. 매우 운이 좋았으며 왕조의 권위를 누대에 걸쳐서 높여나갈 수 있었다. '일부일처제임에도 부계 계승이 수백 년간 끊어지지 않는' 거의 기적적인 카페 왕조의 연속 계승은 라이벌 왕조들에 비해 대단한 장점이었다. 만일 카페 왕조 초창기에 후계자가 단절되었더라면 프랑스 왕국 역시 신성로마제국처럼 선거왕제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혼인을 통해 영토를 넓혔으며 11대 국왕 필리프 4세 때까지 모든 국왕이 나이 40대 이상을 살거나 비슷하게 살아 왕권이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1316년 12대 국왕 루이 10세가 26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해 13대 국왕 장 1세가 '''생후 5일 만에 사망''', 1322년 14대 국왕 필리프 5세가 29세의 나이로 사망, 1328년 15대 국왕 샤를 4세가 33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등 요절 징크스가 연달아 터졌다. 다만 루이 10세와 장 1세는 정황상 의심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아 '''필리프 5세에 의한 고의적인 암살'''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샤를 4세가 적통 왕자 없이 공주만 남긴 채 사망함에 따라 결국 방계인 발루아 왕조로 인계되었다. 하지만 뒤를 이은 발루아 왕조[4], 부르봉 왕조[5], 부르봉-오를레앙 왕조[6] 모두 '''부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카페 왕조의 방계다. 또한 나바라의 에브뢰 왕조, 폴란드헝가리, 시칠리아 왕국의 앙주 왕조, 포르투갈의 보르고냐 왕조, 라틴 제국의 쿠르트네 왕조까지도 모두 카페 왕조의 혈통이며, 서자 출신 왕조들도[7]합하면 더 늘어난다. 따라서 보통 '''카페 왕조(dynastie des Capétiens, Capetian Dynasty)'''라고 하면 좁게는 이 문서처럼 위그 카페의 직계 혈통 남성이 계승한 프랑스 왕조만을 가리키지만, 넓게 보면 이런 방계 카페 가문이 즉위했던 다른 나라의 왕조까지 전부 통틀어 부르는 경우도 있다.[8]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고 사생아에게 계승권을 주지 않았던 당시 유럽에서, 카페 가문에 이렇게나 많은 부계 계승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2021년 2월 3일 21시 41분 기준으로 현재 카페 가문은[9] 스페인의 왕위와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가지고 있다.
참고로 독일의 비텔스바흐 가문하고도 부계쪽으로 먼 친척이다. 다만 이쪽은 카페 가문이 왕조로 등극하기도 이전, 프랑크 왕국의 로베르 시기에 서로 분가했으므로 아주 큰 연관성은 없다. 천 년 전 조상이 같다는 것 정도.[10]

3. 배출한 군주


카페 왕조는 방계 혈통까지 포함하여 현재까지 다음과 같은 국가원수들을 배출하였다. 이것도 '''대공 이하의 작위는 생략한 것'''으로 유럽 최대 왕족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 36명의 프랑스 국왕
  • 16명의 나바라 국왕
  • 11명의 나폴리 국왕
  • 11명의 스페인 국왕
  • 29명의 포르투갈 국왕
  • 4명의 시칠리아 국왕
  • 4명의 폴란드 국왕
  • 4명의 헝가리 국왕
  • 4명의 양시칠리아 국왕
  • 3명의 라틴 황제
  • 2명의 알바니아 국왕[11]
  • 2명의 에트루리아[12] 국왕
  • 2명의 브라질 황제[13]
[1] 발루아 왕조도 1376년에 백합 무늬가 3개만 있는 문장으로 간소화하기 전까지 이 문장을 사용했다.[2] 카페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에 이르기까지 백합의 크기나 개수 등 작은 변화는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계속 동일한 문양을 사용했다.[3] 다만 남프랑스의 거의 1/3을 가지고 있던 툴루즈 가문이나 푸아티에를 중심으로 루아르 강 일대를 휘어잡고 있던 푸아투 가문이 지배지와 동원 병력 규모만 놓고 보면 카페 가문보다 더 강한 집안이었다. 본문에서도 후술하듯이 카페 가문의 직할지는 초기에는 오를레앙과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 드 프랑스 일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이야 이곳이 프랑스의 핵심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좀 인구가 밀집한 지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다만 푸아투 가문은 얼마 안 가서 단절되었고 툴루즈 가문은 후일 카타리파 이단 문제와 연루되어 발생한 알비 십자군의 진압 활동으로 인해 영지 지배력이 쇠퇴하면서 몰락했다. 그밖에 다른 가문, 즉 보르도를 중심으로 남프랑스의 패권을 휘어잡은 아키텐 가문이나 필리프 1세의 숙부가 시조인 카페-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 동부의 핵심 요충지인 부르고뉴 일대와 플랑드르의 상당부분, 심지어 포르투갈 왕위(14세기 후반까지 존속한 보르고냐 왕조)까지 차지했다. 그러므로 카페 가문은 필리프 2세 등장 이전까지는 직할 영지 규모나 군사력에서 상당한 약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4] 카페 왕조와는 필리프 3세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방계 가문이었다. 발루아 왕조의 필리프 6세가 카페 왕조의 루이 10세의 외손녀 블랑슈와 결혼하여 딸 잔을 낳았기 때문에 부계로는 카페 가문의 방계 혈통이던 발루아의 혈통, 모계로는 카페 가문의 직계 혈통이 계승이 되었지만 잔이 요절하여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5] 이쪽은 성왕 루이 9세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방계다.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가 발루아 왕조의 앙리 2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하여 모계 후손으로나마 발루아 왕조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둘 사이에선 결국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만약 후사를 남겼다면 부계로는 카페 가문의 방계 혈통이던 부르봉의 혈통, 모계로는 카페 가문의 방계 혈통이던 발루아의 혈통을 지닌, 더욱 강력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이미 당대의 프랑스 왕권은 유럽 최고 수준인지라 그닥 변한 것은 없을 것이다.[6] 부르봉 본가와 함께 루이 13세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부계로 갈라진 방계 가문이다.[7] 포르투갈의 아비스, 브라간사 왕조[8]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선 타국의 왕위까지 차지한 위그 카페의 후손들은 Capétiens 또는 Dynastie des Capétiens, 위그 카페의 후손들 중 프랑스 국왕을 세습하던 카페-발루아-부르봉-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은 Maison de France, 위그 카페를 시작으로 샤를 4세에 막을 내린 카페 왕조 직계는 Capétiens directs, 또는 Maison de Capet라고 한다.[9] 정확히는 카페 가문의 분가인 부르봉 가문의 스페인계 분가 가문인 스페인 보르본 왕가와 보르본 왕가의 이탈리아계 분가인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방계(...)인 룩셈부르크 부르봉-파름 대공가이지만(...)[10] 라는 설이 흔히 바벤베르크 가문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학자들은 로베르 가문과 관련 있는 프랑켄 바벤베르크와 비텔스바흐 가문과 연관이 있는 오스트리아의 바벤베르크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바벤베르크 가문은 대체로 바이에른 지방 출신으로 한때 바이에른 지역을 지배했던 뤼트폴딩 가문과 연관이 있을 거라 여겨진다.[11] 조구 1세가 건국한 알바니아 왕국이 아닌, 중세 알바니아 왕국을 의미한다.[12] 1801년부터 1807년까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존재했던 나폴레옹의 괴뢰 국가 에트루리아 왕국.[13] 포르투갈의 보르고냐 가문이 단절된 이후 사생아가 왕위를 이은 아비스 가문과 그 아비스 가문 출신의 사생아가 시조인 브라간사 가문까지 포함할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