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푸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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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만샤 타케 보스탄의 부조
사산 왕조 제10대 샤한샤. 재위기간 309-379년[1]
'''샤푸르 1세를 잇는 천성 황제를 위해 태어난 명군'''
1. 개요
호르미즈드 2세와 이프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했을 때부터''' 왕위에 올랐다.
호르미즈드 2세는 임신 중인 아내 이프라의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샤푸르 2세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왕위계승자로 삼았다. 남편의 유언을 충실하게 지킨 이프라는 출산 전까지 왕관을 다리 사이에 뒀다가 태아가 태어나자마자 즉위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다만 이건 모후인 이프라가 호르미즈드 2세를 암살하고 유언을 조작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되었건 '''0살에 즉위해 역사상 최연소로 즉위한 군주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타이기록으로 알폰소 13세가 있긴 하다.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수복하기 위하여 337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또한 기독교도들을 박해하였으며 아르메니아 지역에 조로아스터교를 전파하고자 5년 여에 걸친 싸움을 벌이는 등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의 치세는 페르시아 문화와 예술의 첫 번째 흥성기이기도 하였다.
2. 이프라의 섭정
모후 이프라는 쿠샨 왕조의 왕녀로 호르미즈드 2세의 후궁으로 들어와 정궁을 폐출시키고 갖은 권모술수로 실권을 장악한다. 오죽했으면 호르미즈드 2세를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정도다.
325년부터는 이프라가 섭정을 거두어 친정을 시작하게 된다.
3. 업적
337년 샤푸르는 로마에게 빼앗겼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수복하기 위하여 티그리스 강 건너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것으로 20여 년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던 나라에 할배의 삽질로 기독교가 세력을 키워가자,[2] 자신이 전쟁에 나간 뒤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개종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샤푸르 2세와 정면 대결했던 동로마 제국은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두 속주를 서로마 제국에 떼어준 상태여서, 역대 동로마 제국 중 가장 최약체였다. 게다가 당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분명코 말해 장군으로서의 자질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물론이고 그의 이복형인 크리스푸스, 그리고 샤푸르 2세보다도 훨씬 떨어졌다. 샤푸르 2세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는 이전이든 이후든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상황이 좋았는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콘스탄티우스 2세의 중상모략 자질과 음모가적인 기질은, 페르시아 궁정에서 닳고닳은 샤푸르 2세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늘 전선을 순시하며 반역자가 등장하지 않게 숙군 사업을 활발하게 하면서도,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 다져진 거미줄 같은 요새 방어망에서 누수가 발생하지 않게끔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면서 샤푸르 2세가 바라는 정정당당한 야전 따윈 결코 해주지 않았다.
이러니 샤푸르 2세가 아무리 공세를 퍼부어도, 기껏 중요치 않은 요새 몇 개 떨어뜨리고도 로마군의 공세로 정작 진군은 못하다가 동북방이나 서남방에서 페르시아의 영토를 노리는 야만족[3] 경보가 울리면 할수없이 군대를 빼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때문에 샤푸르 2세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로마 영토를 넘보지 못했다.
358년 그가 메소포타미아 북쪽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자, 363년 로마의 마지막 비기독교도 황제[4] 인 율리아누스가 대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공격하는데, 이때는 콘스탄티우스 2세 대신 장군으로서는 더욱 뛰어난 율리아누스가 황제로서 직접 지휘해 올 때였고 또 율리아누스는 동서 로마 통합 황제였다.
사산조 페르시아로서는 정말 불리했고, 율리아누스는 승승장구하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까지 진군하였다. 이때 샤푸르 2세의 이복형인 호르미즈드가 로마군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특히 사산조는 수도인 크테시폰이 로마군에게 공격당하여 그야말로 존망의 위기에 몰린다. 이에 샤푸르 2세는 크테시폰에서 나와 로마군을 격퇴하려고 시도했으나 오히려 참패하고 성안으로 퇴각해야 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적의 영토 너무 깊숙히 진군하였으며 보급로가 길어지자[5] 샤푸르 2세는 친정하여 율리아누스를 요격하였다. 장군 메파이발라타스는 율리아누스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하였으며, 선봉장 클라비에이타스는 율리아누스를 유인하여 전사(!)(혹은 로마군 내부 기독교도의 배반, 암살)시키는 전공을 세웠고, 페르시아군이 대승하였다.[6] 율리아누스 죽음 후 제위를 이은 기독교인 황제 요비아누스는 30년 동안 휴전할 것과 로마 제국의 5개 주를 양도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 5개 주는 그의 조부인 나르세스 1세 시절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들이었다.
그러나 후일담이긴 해도,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서 빼앗았던 아미다는[7]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측에게 다시 빼앗기게 된다.
4. 전성기
샤푸르 2세는 기독교 지역인 아르메니아에 조로아스터교를 전파하려고 5년에 걸친 싸움을 벌여 자신의 뜻을 이루는 등 다양한 군사 전술과 외교적인 시도를 통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기 이후 오랜기간 동부 전선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전력은 로마 제국에 우위를 점하게 된다.[8]
그리고 350년에 이란 동쪽 국경을 공격한 훈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또한 이시기에는 문화, 예술또한 부흥하였고,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9] 이러한 치세는 그의 친척 동생인 아르다시르 2세까지도 계속 된다.
정말 상승세에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였고, 앞서 말했듯이 샤푸르 2세도 손꼽히는 장군 황제였다. 샤푸르 2세는 사막 지대에서는 정말이지 기동하기 힘든 그 전형적인 페르시아 중기병들을 데리고 사막 한가운데까지 쳐들어가 아랍 야만족들을 박살내고 돌아왔는데, 이것은 보통 재능 없인 아주 힘든 일로, 이것만 보아도 그의 장군으로서의 역량과 인내심 그리고 통솔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로 사산조 페르시아가 한참 동북방 야만족들에게 시달릴 때도 아랍인들은 잠자코 있었는데 이것은 샤푸르 2세의 가혹하고도 확실한 실력 행사에 크게 빚진다.
사산조 페르시아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기회로, 샤푸르 2세는 콘스탄티우스 2세 때문에 전성기만 낭비했으며, 율리아누스 덕택에 만회는 했지만 이후에는 샤푸르 2세만한 군주가 나오지 않았던데다 동북방 국경이 크게 어지러워진다. 때문에 로마와의 대결에서 우세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는 한참 뒤로 미뤄진다.
또한 아들이 아닌 방계 황족에게 제위가 돌아간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궁중 암투가 자행되어 샤푸르 2세가 아무래도 말년에 권력 누수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다.
5. 참고항목
[1] 태어나자마자 황제였기 때문에 말 그대로 평생을 황제로 지냈던 사람이다.[2] 자세한 건 나르세스 1세 항목 참조.[3] 이란계 유목민과 투르크인들이다.[4] 정확히 말하자면 아니다. 이후에도 한 명 더 등장한다. 알렉산드로스 2세. 다만 이 사람은 제대로 된 통치 행태를 한 바 없는 찌질이 황제라 치지 않을 뿐[5] 게다가 페르시아 측이 청야전술을 썼기에 약탈을 통한 보급도 어려웠다.[6] 사실 이 때 전투 자체는 분노한 로마군의 반격으로 페르시아군이 패퇴하여 페르시아의 패배였지만 '''황제'''가 죽었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7] 하지만 페르시아 측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일단 아미다가 견고한 요새였고 로마군의 격렬한 저항과 청야전술로 아미다를 공격하던 10만의 페르시아군은 전사자가 무려 3만이나 나왔을 정도였다.[8] 하지만 이것은 로마-페르시아 전선 한정. 전체적인 국력은 서로마 멸망 후에도 언제나 로마가 우위에 있었다.[9] 일설에는 이시기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유행하였다고 하지만 확실한 물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