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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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콘스탄티우스 2세
'''휘'''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Flavius Iulius Constantius)
'''생몰 년도'''
317년 8월 7일 ~ 361년 11월 3일
'''재위 기간'''
337년 5월 22일 ~ 361년 11월 3일
1. 개요
2. 생애
2.1. 3형제가 통치하던 시기
2.2. 마그넨티우스의 반란 이후
2.3. 뛰어난 내치 능력과 탁월한 조직력을 겸비했던 황제
2.4. 기독교 통합 노력
3. 아미다와 니시비스의 후일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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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유명한 로마 황제 중 한 명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셋째 아들. 재위 337 ~ 361년.

2. 생애



2.1. 3형제가 통치하던 시기


원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사후, 제국을 그의 세 자식과 조카 둘에게 나눠 통치하게 하려고 했으나 자식들이 친척들을 살해함으로써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조카들의 담당 구역은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막내 콘스탄스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티누스 2세가 바로 옆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콘스탄스에게 북아프리카의 통치권을 요구했지만 콘스탄스는 무시했고, 결국 340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가 쳐들어왔다가 전투에서 패배하고는 살해되고 말았다. 해서 콘스탄티누스 2세가 통치하던 지역은 콘스탄스의 영역이 되고 이후에는 막내인 콘스탄스가 사실상 선임 황제가 되고 마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였던 반면 콘스탄스는 아타나시우스파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역대 동서 분할 제국 중 가장 크고 강력한 서로마 제국을[1] 통치하는 콘스탄스에게 압도되어, 생전에는 아타나시우스파에게 함부로 하질 못했다. 아타나시우스파를 탄압하자 콘스탄스가 대군을 이끌고 "항의"하러 왔을 때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조치를 철회해야만 했던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런 상황에서도 전력을 기울여 제국 방어에 전념하고, 그러던 중 콘스탄스가 350년도에, 야심만만한 휘하 장수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된다.

2.2. 마그넨티우스의 반란 이후


그 당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서둘러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반란 진압에 나선다.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당시에 도나우 강 중류를 담당하고 있던 사령관 베트라니오도 황제로 들어섰기 때문에 콘스탄스가 통치하던 지역에 황제가 둘이나 있었다. 베트라니오에 대해서는 항복을 권유하여 그 휘하의 병사들을 흡수했고 베트라니오 본인에 대해서도 관대한 처우를 했지만[2], 마그넨티우스에 대해서는 3년 동안 내전을 벌여 마그넨티우스 휘하의 병사들의 2/3 이상이 죽고 마그넨티우스는 결국 자살하게 된다.
그 사이에 혹시라도 있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해 콘스탄티우스 2세는 카파도키아 지역에 유폐해두고 있었던 사촌[4] 갈루스를 351년에 부제로 임명해 동방을 담당하게 했다. 하지만 갈루스는 오랜 유폐 생활로 콘스탄티우스 2세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혐오했으며, 결국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354년에 정제 살해 음모죄로 처형되었다.

2.3. 뛰어난 내치 능력과 탁월한 조직력을 겸비했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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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1세와는 달리 군사적으로는 영 자질이 없었지만, 조직력이 뛰어났고 책임감도 대단했다. 내치와 법률 집행에 관심을 두고 직접 관리했으며, 관료들의 탐학을 막는 법률도 여러 차례 제정했다. 또한 359년에 로마 시에만 있었던 로마 특별시장(Praefectus Urbi)[5][6]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설치하였으며 또한 Byzantine Senate(동로마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7]을 로마 원로원과 동급으로 격상시키고 정원을 2000명으로 확 늘림으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완전히 기존의 로마 시와 행정적, 법적으로 동급의 수도로 만들었다. 이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트라키아 속주로부터 행정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부황 콘스탄티누스 1세324년~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점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야전군 관리와 군인들 생활상에도 관심이 많아, 황궁의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던 동생 콘스탄스와는 달리 국경 지대 순행에 열의를 쏟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에 있던 시간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으며, 때문에 역시 콘스탄스와는 달리 야전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그를 자기보다 뛰어난 이들을 제거하는 권모술수만 능하고 자랑거리에 집착하며, 자랑할 건 혈통 밖엔 없고 능력 있는 장교 숙청에 열을 올린 암군으로만 묘사하고 있으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군사적 공헌을 무시하고 단점만 부각시키는 이런 짓은 왜곡과 오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거기서 묘사되는 특유의 성격적 결함과 음험함 그리고 군사 지휘력의 무능함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갈수록 강해지는 사산조를 상대하고, 중앙군을 강화하려면 황제 직속의 야전군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프레센탈 야전군을 제1프레센탈군과 제2프레센탈군으로 증설 개편하여 2배로 늘린 것은 바로 콘스탄티우스 2세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이 군 조직 개편은 이후로 무려 400년 넘게 기본 틀을 유지하게 된다! 또한 그전까진 그저 말을 탄 보병에 불과했던 제국 기병들이 정말로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되기 시작한 게 그의 치하에서부터며, 기병의 비율을 대폭 늘린 것도 그의 조치다.
아미다를 잃은 것이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집중적으로 부각되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가 다스렸던 동방 제국은 역대 동로마 제국들 중 최약체[8]였음을 유념해야 한다.
일리리쿰 속주가 없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속주까지''' 죄다 서방 제국에게 넘겨준 상태의 동방 제국을 가지고[9] , 한창 다시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대등한 승부를 벌인 것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조직력과 행정적인 수완 덕택이었다. 때문에 한참 전성기에 있었고 또 역대 가장 뛰어난 장군 황제를 보유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 샤푸르 2세[10]는, 성장 동력만 낭비한 채 세월만 보내게 된다.

2.4. 기독교 통합 노력


당시 기독교는 선친인 콘스탄티누스 1세때부터 아리우스파아타나시우스파가 험악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대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심지어 같은 아리우스파끼리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는 등(아타나시우스파도 마찬가지) 각 지역의 기독교 세력가들끼리 사분오열되는 양상을 보였다.[11] 콘스탄티우스 2세도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의 신앙은 대체로 아리우스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종교성향이 그리 강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자신의 신앙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며, 자신이 로마 유일의 황제가 된 이후 당시 분열되어 있던 기독교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재임기간 동안 여러 번 공회의를 개최하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기독교 통합 노력은 신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안정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교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유연성이 있었다. 그 점은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았다. 그는 자주 공의회를 개최하여 주교들 간의 대화 기회를 늘렸으며, 아리우스주의와 아타나시우스주의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배제하고 온건한 주장들을 모아서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경(creed)을 작성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강경파들을 축출하고 성직을 박탈하는 한편, 유명한 기독교 명망가들을 적극 회유하였다.
이와 같은 시도는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으나 문제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건재하게 버티고 있었던 아타나시우스였다. 자신의 이름을 딴 교파의 맹주였던 그는 아리우스파와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였으며, 그것은 황제의 통합 의지에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5년 그를 반역혐의로 체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는 지지자들로부터 체포 계획을 미리 전해듣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쳐서 이집트의 사막지대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의 감시망을 피해서 이집트를 중심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고히 하였다.[12]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우스를 일시적으로나마 축출한 후, 시르미움 공회의(Sirmium Council)에서 선친 시절에 채택된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을 아리우스 주장이 많이 반영된 새로운 신경으로 대체하였으며 직권을 발동하여 채택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이 신경은 당연히 친 아타나시우스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아리우스파 강경파들은 반대로 하나님과 예수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부분이 너무 모호하다고 반발하였다.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 사후 이 신경은 유야무야 되어 버렸으며, 이후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한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지지세력들에 의해 니케아 신경이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교리로 다시 부활하였다.
한편으로 콘스탄티우스 2세는 기독교 선교에도 열의를 보였는데, 고트족(Goth) 선교로 유명한 울필라스(또는 불필라, Ulfilas, Wulfila)가 바로 이 콘스탄티우스 시대에 활약했던 선교사이다. 덕분에 콘스탄티우스 2세 시절에 다수의 게르만 부족이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14]
한편 로마 시의 원로원 내에 있었던 승리의 제단(Altar of Victory)를 폐쇄했다. 이는 율리아누스가 다시 살렸다가, 그라티아누스가 다시 없앴다. 다시 살리려는 로마 고위층의 여러 청원이 있었지만 그 뒤의 황제들에게 모두 거부당했다.

2.5. 부제 율리아누스


갈루스를 처형한 다음, 355년에는 갈루스의 동생이었던[15]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하여 갈리아를 담당하게 한다. 이후 악조건에서도 율리아누스가 활약하는 동안, 도나우 강 일대와 동방을 담당하면서 정제로서 통치했다.
359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재침공으로 제국 동방 방위선에 있던 아미다가 점령당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반격에 나설 채비를 했고, 이 일환으로 부제 율리아누스의 주력 부대를 보내올 것을 요청했다. 이에 반발한 부제의 병사들이 율리아누스를 정제로 옹립하여 다시 내전이 시작되게 되었다. 율리아누스 측이 먼저 움직임으로써 도나우 방위선의 병력까지 접수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오던 와중에 중병이 들었고, 그 상태에서 세례를 받고, 쳐들어오는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 다음 향년 만 44세로 숨을 거두었다.

3. 아미다와 니시비스의 후일담


세베루스 황제 이후로 확고히 로마의 영토로 확립되었던 니시비스는 오히려 율리아누스의 원정 실패로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넘어간 후론 영영 로마의 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반면 아미다는 이후에 제국이 도로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아오게 되며, 아랍에게 빼앗긴 후에도 9~10세기의 반격기에 수복하여 적어도 바실리우스 2세치하까진 제국의 수중에 있게 된다.

[1] 동서 간에 늘 논란의 대상이었던 일리리쿰에, 아카이아마케도니아 속주까지 가지고 있었다! 동방의 경제력이 더 우세했다는 점을 미뤄보면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선 1:1로 나눠가진 셈이지만 군사력과 인구적인 면으로는 확실히 압도적인, 다시 말하자면 콘스탄티우스 2세에겐 극도로 불공평한 분할이었다. 315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패한 후 리키니우스가 통치한 영역과 거의 겹칠 정도이다.[2]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아버지'''라 불렀으며, 위로용 만찬을 크게 내어 대접했고, 아나톨리아의 프루사(현 부르사)에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게끔 노후보장도 해주었다고 한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마그넨티우스에 선택과 집중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3] 아버지가 어머니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를 버리고 정략결혼했던 그 테오도라[4]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둘 있었고[3], 이들 중 첫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에게서 난 두 조카(한니발리아누스, 달마티우스 : 이 둘은 동복이다)는 사후 공동 황제로 정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둘째 동생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자식들은 유폐되어 있었다. 사실 이들은 모계쪽으로도 친척이고 이렇게 보면 콘스탄티우스 2세가 두 형제의 당숙. 율리아누스 형제의 할머니인 테오도라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모친인 파우스티나의 씨다른 언니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계모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해서 족보가 꼬였다.[5] 뜻만 보면 도시의 총독/관구장이라는 뜻이다. 다른 Praefectus(영어로 Prefect)는 속주 상위의 대관구장을 뜻하는데, 수도 로마는 일개 도시이지만 수도이니만큼 드넓은 관구와 동급 취급을 해서 이 용어를 쓴다. 이런 점은 도와 동급인 우리나라의 특별/광역시와 같다.[6] 이 당시에는 원로원의 수장직을 겸했다.[7] 속주의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마다 원로원이 시의회마냥 있었다.[8]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한 차례 크게 패배하고 난 다음 317년에 보전했던 영역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9] 즉 유럽에는 트라키아만 영유한 상태로[10] 콘스탄티우스 2세 때문에 인생이 크게 꼬인 또 한명의 불운한 명군[11]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당시 나름 탄탄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교리상으로도 유일신 개념을 가진 기독교가 로마사회의 통합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예상과 달리 오히려 분열의 씨앗을 들인 셈이 됐다. 이들의 대립과 분열은 이후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부담을 안겨주었다.[12] 당시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지지세력을 부추겨서 폭동을 일으키거나 적대 인물의 고문/암살등을 자행했다는 혐의를 여러 개 받고 있었다. 때문에 경쟁자를 모두 물리치고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조차도 그를 쉽게 다룰 수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우스 2세가 아타나시우스를 그냥 성직에서만 내쫓은 상태로 적당히 방치했다는 견해가 우세한데, 굳이 그를 붙잡아서 처형할 경우 주요 도시의 지지자들이 그를 순교자로 떠받들면서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다. [13] 아직 이 때는 정교와 카톨릭의 분화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14] 사실 울필라스가 전파했던 기독교를 딱히 아리우스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당시 게르만족은 삼위일체니 단성론이니 따위의 복잡한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 설정은 선교에서 큰 쟁점이 되지 못했다. 다만 울필라스 이후 게르만족이 믿었던 기독교를 아리우스파로 규정한 것은 게르만족들이 동서로마 모두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소위 삼위일체 정통파(니케아-칼케돈)기독교[13]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측면이 강하다.[15] 이 둘은 또 이복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