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

 


徐居正. 1420(세종 2) ~ 1488(성종 19)
1. 개요
2. 내용
3. 애묘가
4. 바깥고리


1. 개요


조선 전기의 훈구파 문신. 15세기 관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시인 겸 문장가로 꼽힌다. 호는 사가정(四佳亭).[1]

2. 내용


본디 수양대군의 오른팔 중 하나[2]로,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당시 사명(辭命: 왕명을 전달하는 외교문서)의 대부분을 전담한 인물이다. 세조 때에는 공조참의ㆍ예조참의ㆍ이조참의ㆍ형조참판ㆍ예조참판ㆍ형조판서ㆍ성균관지사ㆍ예문관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연이어 제수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오행총괄(五行摠括),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사가집(四佳集), 역대연표(歷代年表),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 동인시문(東人詩文), 향약집성방언해(鄕藥集成方言解), 마의서(馬醫書), 유합(類合) 등이 있다. 법전ㆍ역사ㆍ지리ㆍ문학 등의 분야에 걸쳐서 활약했다고 할 수 있다.
1488년(성종 19) 향년 69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았다.
서거정의 역사 의식은 당대 정치권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데 먼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으며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하였음을 내세웠다.
『동문선(東文選)』에서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담았음을 표방했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한국의 독자성과 위대함을 알리는 쪽에 치중하였으나 훗날 성종의 왕명에 따라 사림파 인사의 참여 하에 내용들이 개찬되었다.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말년에는 대거 등용된 사림들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투합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성종대에 등용된 사림들이 작성한 실록에는 대단히 부정적인 소인배로 묘사되었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 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그를 작게 여겼다.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

15세기 훈구파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16세기 사림파의 시대가 열리는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구라고 할 수 있다.

3. 애묘가


출처 : 역사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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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깥고리



[1]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2] 김시습도 서거정은 배신자이니 뭐니 비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서거정은 과거급제 이전 나이 20대초부터 수양대군과 친하게 지내고 수양대군과 같이 24살 젊은 나이로 명나라로 다녀오는 비서직을 맡았을 정도로 처음부터 수양대군 밑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명나라로 가던 길에 서거정은 갑자기 깨어나 울었는데 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사옵니다라고 간청하여 조선으로 돌아와 진짜로 죽은 어머니 장례에 참가했다는 야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