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
1. 개요
勳舊派
조선 세조 공신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절대적 왕권을 숭상하는 왕당파 관료 집단. 정인지, 신숙주, 최항, 권람, 서거정, 양성지, 이석형, 강희맹, 이극돈 등이 있다.
흔히 관학파와 같은 의미 혹은 관학파의 한 갈래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훈구파 중에서는 관학파 출신은 일부였으며 한명회, 홍윤성과 같이 관학파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인물들이 다수였고, 관학파는 계유정난 때 대거 숙청당하거나 몰락하였다. 이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훈구파가 기반 잘 깔아놨더니 사림이 다 말아먹었다' 는 식의 틀린 인식이 널리 퍼지는 데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으며, 이는 붕당에 대한 오해로 연결되는 문제이다.
훈구파는 세조를 도와 세조를 반대하는 관학파를 몰아낸 뒷골목 건달들과, 변절한 관학파 세력[1] 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보면 된다. 도리어 이들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사육신과 같은 많은 관학파들이 갈려나갔으며 이들을 육성하는 데 핵심 역할이던 집현전도 폐지되어 예문관으로 이전되었다. 즉 관학파가 추구한 왕권과 신권의 조화 기반을 사실상 훈구파가 세조가 꿈꾸는 전제 군주제로 바꿔버린 셈이다.[2]
2. 치세
신권을 강조하는 사림과는 반대로 훈구파는 절대적 왕권을 숭상한 왕당파적 성향을 가졌다. 그리고 대부분 관학파 출신의 관료인 데다가 세조의 탈성리학적 성격으로 계유정난을 도운 그들의 노비들도 등용이 되었다. 당시 '실학'이라는 학문으로 명명하지 않았을 뿐이었지 법체계, 경제체제, 과학기술, 군사적 개혁과 정벌사업 등이 표상하는 실학주의 사상을 주류로 여긴 세력들은 나중에 지구 반대편에서 유럽이 200여 년 이후에 나타날 왕권신수설의 유럽의 절대왕정의 제후들과 아주 유사한 형태를 보였다. 어떠한 역사학자들은 만약 세조가 더 길게 재위했으면 조선이 평화주의의 원칙을 깨고 제국주의 노선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한다.
법체계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많아 세조 대에 새로 개정한 법전을 추진, 성종 때에 법전인 경국대전을 지어 법을 세우는 큰 업적을 보인다. 게다가 성종 대에는 성종이 추진하려는 중인계급 폐지와 기존 중인계급들의 양반 편입 정책에 대해서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유연한 사회적 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외교적 성향에선 관학파들의 대명 외교 방식은 '겉으론 숭상, 안으론 실리 추구'였지만 세조와 훈구 신하들은 민족주의적 정신을 고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대국의 예는 매우 형식적으로 수행하고 실제로는 대놓고 환구단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거나[3] 군사적 성향에서는 세조의 성향대로 화끈하게 밀고들어가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세종 대와 문종 대에 개발한 신 무기 체계와 전략 체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고구려 시절의 조상들의 영토인 요동 정벌 정책을 다시 추진하자고 하는 등 자주성을 표방하고 홍윤성 등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여진족과 왜구들을 토벌하여 안보 안정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내무적 성향에서는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의 교육과 문화 사업 정리가 이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상공업을 육성해서 시장이 확장되고 농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해안 간척지가 늘어나는 등의 공이 있다. 하지만 간척지마저도 여기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내수사와 이에 딸린 소작농들을 동원해서 나왔고, 이렇게 늘어난 토지는 다시 고리대에 이용되는 등 이들이 부를 축적하는 동시에 민생을 어지럽혔기에 민생은 어려워졌으며,[4] 조정에서 은퇴한 훈구 관료들이 유향소 직원으로 내려오는 등 지방 중소 지주 세력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다. 이에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성종 등의 이해와 맞물려 사림이 등용되었고, 이들이 충돌한 끝에 사화 등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3. 한계
대체로 '''유능하고 현실주의, 실학에 먼저 눈을 뜬 실질주의적 세력'''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 중기 국가 막장 테크에 책임이 매우 크다.[5] ''' 세조 시기 이들이 공신이 된 뒤 후대에는 권신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고리대와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의 이점 등을 활용하여 재산을 확대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민들은 유랑민 신세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이들은 왕실 내수사와도 연관되어 폐단이 되었으며 조광조 등 신진 사림 세력이 비판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그러나 훈구파에도 크게 두 가지 파벌이 존재한다. 한명회, 신숙주로 대표되는 정난공신파와 이후 이징옥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운 신공신파로 나뉜다. 정난공신파의 등쌀에 시달린 세조가 단종 사사후에 의도적으로 훈구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신공신파를 지지해준다. 신공신파의 대표 인물이 남이, 박원종이다. 예종 즉위 직후 남이가 역모로 몰려 죽은 것과, 예종 승하 후 예종의 적자 제안대군과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이 모두 임금이 되지 못한 건 정난공신파가 신공신파를 견제한 탓이다.[6] 정난공신파는 갑자사화때 완벽히 몰락하고 중종반정으로 집권 세력이 된 신공신파는 명종 때까지 권력을 누린다. 또한 그 외에도 훈구파는 계파갈등이 여러차례 있었는데 세조 초반 때 있던 집현전계와 정난계의 갈등도 있었다. 집현전계는 세종 때부터 관료였던 자들이 많았고, 정난계는 세조의 즉위를 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예종 때의 구공신파와 신공신파는 물론이거니와, 성종 때도 훈구파 내 계파갈등이 있었는데 5대 공신 세력(정난, 좌익, 적개, 익대, 좌리)과 일부 적개공신과 성종의 총신들이 합쳐서 결성한 왕실 친위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연산군 때도 연산군과 거리를 둔 부중파와 연산군 친위파인 궁중파가 나뉘어서 대립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이 워낙 도를 넘어서 계유정난으로 집권하며 취약한 정통성을 이들의 비호로 커버하기 위해 힘을 실어줬던 세조 본인조차도 치세 중반 이후로는 사림등 훈구를 견제할 사람들을 등용하나 때는 늦었고 훈구들도 반대파들을 족족 제거해버린다. 그와중에 세조 본인도 사망한다. 결국 예종, 성종 초까지 세조의 비 정희왕후와 결탁하며 위세를 떨친다.[7]
4. 사림 집권 이후
사림과의 대결로 훈구 세력이 축소된 것은 맞으나 엄밀히 말하면 훈구와 사림의 대결에서 사림이 훈구를 이긴 것은 아니었다. 훈구 세력이 소멸한 것(대윤으로 이어진 측에서는 변화한 것)은 명종 시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 등 외척(척신) 세력이 커지고 이 과정에서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 때문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과거 훈구파들은 외척 세력과 사림에 녹아들었지만 선조 이후 대부분 서인에 흡수된다. 그것도 지식층이면서 실질적인 관료 집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훈구파 영수였던 김국광의 후손이 대표적인 서인 가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림이 훈구를 공격해 무너뜨린게 아니라 훈구파는 그냥 훈구를 구성하는 권신들이 세월이 흐르며 권력을 잃고 중앙 정치계에서 밀리거나 늙어서 자연사하는등으로 와해돼서 사림에 흡수되는 방식등을 거치며 소멸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아버지는 훈구파고 아들은 사림파라는 식으로 나뉜 경우도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지역 기반 학풍과 선후배로 집단을 이룬 사림들과 달리 훈구는 계유정난의 공신 같은 거 외에는 이들의 구심점이 없었다.
5. 여담
- 훈구파라는 단체의 정의에 애매한 점이 있는데, 사림파는 학연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당파로서의 공통점이 있는 반면 훈구파는 훈구파 내에서도 이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공통점이 부족하며 이들의 존재는 사림파에 대한 반대축으로서 도입된 개념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도 있다. 당초 훈구란 단어는 오래된 공신이란 뜻인데 이 의미와 관계 없는 인물들도 많다. 심지어 이극돈의 경우 훈구 세력으로서 사림을 적대한 인물조차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기 직위에 맞는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사림파도 정치적으로 사리분별도 못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이중잣대에 협소적인 집단이였다. 사화가 있을 때 피바람이 일어나서 연산군이나 중종을 말리거나 사림파를 변호하고 죄형을 낮추려고 노력하거나 피해자 수를 줄이려 했던 것도 훈구파 대신들이었다. 사림파는 훈구파 대신들을 꼰대 소인배라고 비난하였지만, 조선 초중반실록을 보면 오히려 사림파가 꼰대에다가 소인배 같은 짓을 한 옹졸한 집단이었다.[8]
- 하지만 이러한 애매한 것은 사림파도 마찬가지였다. 애초 사림파들도 어찌됐건 같은 사대부들로서 서로 얽히고 얽힌 사이였다. 이항복은 서인으로 분류되고, 이덕형은 동인, 남인으로 분류되지만 이들의 우애는 굉장히 유명했다. 이산해는 북인 영수고 이덕형은 남인이지만 이산해는 이덕형의 장인이었다. 그리고 광해군 당시 대북이자 강경한 대비 폐비, 영창대군 사사를 주장한 이이첨은 이덕형의 친족이다.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걸고 극렬하게 영창대군 사사를 반대한 이덕형과는 대조적이다.
- 영화 <간신>에서의 훈구파 세력들은 연산군에게 피해를 받으면서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 혁명을 준비하는 사이다 인물들로 나온다. 하지만 이들도 나중에 변절될 수 있다는 씁쓸한 장면이 나온다.
6. 나무위키에 등재된 훈구파 인물
7. 훈구파의 주요 인물
- 정인지, 정창손, 이사철, 한확: 훈구파의 초대 영수이자 수장이며 세종 때부터 관료였다.
- 한명회, 신숙주, 권람, 구치관: 훈구파의 창업 멤버며 훈구파의 수장이자 영수였다.
- 홍윤성, 홍달손, 양정: 훈구파의 창업 멤버다. 홍달손과 홍윤성, 양정은 계유정난 핵심 멤버였다. 다만 홍윤성, 홍달손은 정승에도 오르면서 영수까지 올랐지만 양정은 변방을 떠돌다가 세조에게 양위를 권유하다가 대신들의 탄핵으로 훈구파에서 출당 및 제명되고 하옥된 뒤에 사형되었다.
- 박원형, 최항, 김질, 김국광, 한백륜, 성봉조, 심회, 조석문, 윤자운, 김겸광: 훈구파의 영수이며 수장 노릇을 했다.
-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 훈구파의 영수이자 왕실의 외척이고 훈구파의 상징이기도 하다.
- 이승소, 성임, 정난종: 훈구파의 중진이지만 성종의 신임을 받았다.
- 현석규: 훈구파이지만, 소장파이며 성종 친위 세력이었다.
- 이극증, 정효상, 이숭원: 훈구파의 핵심인물이자 훈구파의 중진이다.
- 서거정, 강희맹, 양성지: 훈구파의 영수이면서도 훈구파 상징들이며 명신이었다.
- 윤사분, 윤사흔, 윤계겸: 정희왕후의 외척으로 윤사분과 윤사흔은 훈구파의 영수였고 윤계겸은 훈구파의 상징이었다.
- 허종, 홍응, 정괄: 1세대 훈구파 대신들이 죽으면서 2세대 훈구파 대신들이 득세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이 그 서막을 알렸다.
- 이극배, 노사신, 한치형, 신승선, 윤필상, 성준, 이극균, 어세겸, 정문형: 2세대 훈구파 대신이자 영수이며 연산군 때도 살아있었던 대신들이다. 갑자사화 이전까지 국정을 주도했다.
- 이세좌, 이극돈, 윤효손, 홍귀달: 훈구파의 상징이자 중진이었다.
- 유순, 허침, 박숭질, 신수근, 강귀손, 김수동: 갑자사화 이후에 주류가 되었고 영수가 되었으며 국정을 주도했다. 중종반정 때도 신수근을 제외하고는 살아남았다.
8. 훈구파의 집권 기간
-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의 세조 즉위까지의 수양대군 내각: 계유정난 (1453년) ~ 수양대군의 세조 즉위 (1455년)
- 세조의 즉위 이후부터 예종, 성종, 연산군 등을 거쳐 중종반정 때까지의 훈구파 단독 집권: 세조 즉위 (1455년) ~ 중종반정 (1506년)
- 중종반정 이후 반정공신 3인방의 죽음 때까지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의 중종반정 공신 내각: 중종반정 (1506년)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의 죽음 (1513년)
- 반정공신 3인방의 죽음부터 중종 승하 때까지의 훈구파+온건사림의 공동 집권: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의 죽음 (1513년) ~ 중종 승하 (1544년)
- 중종 승하 이후 인종 즉위 때부터 을사사화 이전까지의 대윤 내각: 인종 즉위 (1544년) ~ 을사사화 (1545년)
- 을사사화 이후 문정왕후 승하 때까지의 소윤 내각: 을사사화 (1545년) ~ 문정왕후 승하 (1565년)
- 문정왕후 승하와 윤원형 실각 이후 선조 즉위 때까지의 심통원 내각: 문정왕후 승하와 윤원형 실각 (1565년) ~ 선조 즉위 (1567년)
9. 둘러보기
[1] 전자는 한명회, 후자는 신숙주가 대표적이다.[2] 단, 이는 세조 개인의 치세의 문제라 할 수 있는 부분이나 훈구파들은 세조의 패륜 행위에 가담하여 성립된 세력인 만큼 세조의 치세와 이들을 분리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3] 환구단이란 천지신명인 하늘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인데 이는 말 그대로 하늘의 아들인 천자의 나라 명나라 혼자만 올릴 수 있었고 주변 조공국들은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이 그런 성대한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세조와 훈구파의 강력한 민족적 독립성의 고취를 표현한다.[4] 흔히 세도정치기의 전유물로 알려진 삼정의 문란의 기운은 15세기부터 조선의 문제점으로 자리잡았다. 그나마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후 세제 개혁이 본격화되었으나 교과서에서 설명하듯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5] 대표적인 게 임꺽정의 난으로 대표되는 민생파탄,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고전한 원인이었던 국방력 약화에도 이들의 책임이 크다.[6] 예종이 중용한 인물인 월산대군의 처남 박원종도 신공신파.[7] 이거 때문에 성종보다 왕의 계승 서열에서 앞서는 제안대군, 월산군이 왕이 되지 못했다.[8] 물론 이극돈이 사람파를 싫어했던 건 사실이나 개인적 정치적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사림파들의 무능함과 사리분별도 못하는 옹졸함에 치가 떨려서 그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