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2호

'''3호'''

4호
옛 보신각 동종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image] '''대한민국 보물 제2호'''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소재지'''
탑골공원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1기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1471년
[image]
1. 개요
2. 내용
3. 바깥고리
4. 보물 제3호


1. 개요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왕의 명으로 처음 조성을 시작하여 성종 2년인 1471년에 완성한 한국의 석비. 현재 탑골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image]
높이 4.9m, 비신 너비 1.3m.
조선의 7대왕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으로, 당시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 터에다 원각사를 지은 후 1467년(세조 13)에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그 전후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고 성종 2년에 완공한 것이다.
세조가 간경도감에서 원각경(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여 십층석탑을 새운 뒤 그 내용을 새겼으며, 세조와 예종 때까지는 백제(百齊)를 원각사에서 지냈다. 연산군 10년에 왕의 명으로 기생들과 놀기 위하여 불상을 끌어내리고 공자의 입석을 세운 이후 쇠락하였고 중종 때 원각사를 불태우면서 내버려졌다.
비명인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는 강희맹이 썼고 비문은 김수온, 성임이 썼다.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썼다.
조선 전기 세련된 조각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한국 조형사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또한 조선 전기 화려하게 꽃피웠던 불교 문화에 대해서도 유추해볼 수 있는 문화재이다.

3. 바깥고리



4. 보물 제3호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0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