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127호

'''128호'''

129호
진도 남도진성
'''양주 회암사지'''
울주 천황산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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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박물관의 모형
현재의 모습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128호'''
'''양주 회암사지'''
楊州 檜巖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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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면적'''
323,117㎡
'''지정연도'''
1964년 6월 10일
'''제작시기'''
고려 충숙왕<재>15년(1347)
'''위치'''


1. 개요
2. 역사
2.1. 조선왕실의 원찰
2.2. 석물들의 수난과 새로운 회암사
3. 가람
4. 발굴
5. 바깥고리
6. 사적 제128호
7. 같이보기


1. 개요


'''檜巖寺(址)'''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에 위치했던 사찰.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행궁으로도 기능했으므로 그 모습이 궁궐 건축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폐사되어 지금은 터만 남았다. 숭유억불 정책과 관련된 좋은 예시이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명칭
소재지
천보산 회암사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회암동 4)
회암사지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96(회암동 21)
회암사지박물관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11(율정동 299-1)

2. 역사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 명종 4년(1174)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왔다 갔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있으므로, 회암사가 그 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 사람 지공(指空)화상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 날란다)를 본떠 266칸짜리 거대한 사찰로 중창했다고 한다. 충목왕 즉위년(1344)에 나옹懶翁 화상(1320-1376)이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다. 우왕 2년(1376)에 나옹이 회암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중창하였으나, 이 일로 탄핵을 받아 경남 밀양 영원사(靈源寺)로 가던 도중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숨을 거두었다.[1]

2.1. 조선왕실의 원찰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유학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불교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좋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 등에 힘입어 회암사도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 초기는 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신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또한 회암사는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더욱 특별히 보호받았다. 아무리 유교적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도, 한번 왕실의 전통으로 정착하면 단지 '왕실의 전통'이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명분을 획득하였다. "유교에 어긋나기는 하는데, 역대 선대왕님들도 인정하셨고 손 안 대셨잖아. 너는 지금 선대왕들께서 잘못하셨다고 주장하냐?" 하고 물었을 때, "선대왕들께서 잘못하셨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2] 아무리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선대왕들의 품위를 지켜가며 공격해야 하니 논쟁에서 불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신하들,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력해지자, 회암사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조선의 왕사'로 기능하는 이 거대한 이, 조선 유학자들의 눈에는 마치 레이드 떠야 할 보스급 몬스터처럼 보였을 것이다. 유생들은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리며 회암사를 공격하였다.
명종 20년(1565), 불교를 많이 후원한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문정왕후에게 지원받으며 회암사에 거처하던 승려 보우제주도귀양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 죽었고, 회암사 또한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16세기에 망했음은 임진왜란 무렵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선조 28년(1595) 6월 4일에 군기시가 아뢰었다. "각종 화포를 주조할 일을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중략(中略)... '''회암사(檜菴寺)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나''' 전체는 건재하며, 그 무게는 이 종보다 갑절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져다 쓰면 별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도감도 조총을 주조하는데 주철이 부족하니, 그 군인들과 힘을 합해 실어다가 화포에 소용될 것을 제외하고 수를 헤아려 도감에 나누어 쓰면 참으로 편리하겠습니다." ...하략(下略)...

즉 회암사는 1595년 이전에 망한 것이다. 물론 단순한 화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폐사된 시기가 원체 적절한 관계로, 유생들이 회암사로 레이드 가서 불을 지르며 조직적으로 파괴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는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고 하므로 명종이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명종 21년(1566) 4월 20일 "...중략(中略)..다만 금년 봄에 송도(松都)의 유생이 음사(淫祠)를 태워버린 뒤로 사방에서 그것을 본받아 유림(儒林)들이 한갓 혈기의 용맹을 부려 방자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소문을 들으니 여항(閭巷)에서 떠들썩하게 전파되기를, 혹은 '''회암사(檜巖寺)를 태우려고 한다'''하며...중략... "대사성으로 하여금 관학 유생에게 알아 듣도록 타이르게 하라."

심지어는 이 명종실록의 기록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의 의견인 "사신 왈(史臣曰)"이 있는데, "왜 밖에서 그런 소문이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게 해서 일을 못하게 했느냐?!"라는 식이다. '''한마디로 "회암사를 조용히 불태웠어야 한다!!"는 것.''' 이쯤 되면 무섭다.

사신은 논한다. 제왕은 안팎의 분별을 엄격하게 하여 말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 외간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구중 궁궐 깊은 곳에 날아들어 임금의 귀를 놀라게 하고 미혹되게 하기를 이와 같이 쉽사리 하였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간사한 말이 임금의 마음을 의혹시킴으로써 마침내는 왕의 말에 욕됨을 남겼으니 또한 애석한 일이다.

회암사의 석불 유물은 대부분이 목이 잘렸다. 사용하던 그릇들도 기단 아래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는 누군가가 그릇들을 계단 아래에 버렸다는 뜻이다. 사찰이 없어져도 재건하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회암사나 흥왕사처럼 큰 사찰이 조선시대에 재건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회암사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선대왕들이 인정하신 바이다"라고 하면서 절에서 역대 국왕의 제사를 지내게 했겠지만, 이미 불타 없어진 마당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큰 돈을 들여 절을 재건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후대의 조선 국왕들은 회암사를 잊어버렸고, 유학자들이 원하던 대로 종묘가 왕실의 사당으로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

2.2. 석물들의 수난과 새로운 회암사


폐사가 된 이후로 세월은 흘렀다. 순조 21년(1821)에 광주 사는 이응준이라는 유생이 '회암사 삼화상(三和尙)[3]의 비석과 부도를 없애고, 그 자리에 선친의 묫자리를 쓰면 대길(大吉)할 것'이라는 지관의 말을 듣고, 지공의 부도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다가 이응준은 지공선사비, 나옹의 부도, 무학대사비를 부수고 부도 안에 있던 금은으로 된 사리함도 훔쳤다.[4] 순조는 이 사건을 보고받고 범인을 유배 보냈다.
'숭유억불 국가인데 승려의 비석이나 부도를 부쉈다고 유배를 보내?' 하고 의아하게 여길 수 있지만, 조선왕실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학대사이성계의 건국공신인 데다가 비석도 태종이 명을 내려 친히 비문을 짓고 세운 것이기 때문이었다.[5] 태종의 명령으로 만들었고 태종이 글을 쓴 비석인데 박살내었으니 문제가 안 될까? 게다가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개국공신이므로, 무학의 사리탑을 부숨은 바꾸어 말하면 개국공신의 무덤을 훼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왕실의 권위와 체면이 달렸기 때문에, 범인을 모른다면 모르겠으되 아는 이상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당시 영의정 한용구(韓用龜)는 '사리탑을 부순 것은 관을 열어 시신을 본 것과 같고, 비석을 부순 것은 임금의 글을 훼손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극형이 마땅하므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 하였으나, 그나마 봐줘서 유배형을 내렸다. 결국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와 부도를 세웠다. 또한 회암사지에서 700 m 정도 떨어진 북쪽 골짜기에 다른 회암사가 새로 창건되었다. 당시 박살난 비석의 일부는 새로 세워진 비석 주변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현재의 회암사

3. 가람


본래의 회암사 터는 산 기슭에 있어 약간 경사가 있지만 대체로 평탄하였다. 북에서 남으로 퍼진 부채꼴 모양 부지를 8단으로 나눠 각 단마다 건물을 배치하였다. 돌을 쌓아 만든 수로가 절을 둘러싼다는 점이 특이하다. 근처 계곡의 물을 끌어와 지상을 흐르게 한 듯하다. 이러한 구성은 고려시대의 건축지에서 종종 발견되는 점이다.
회암사 복원도를 보면 느껴지겠지만, 건물배치가 경복궁 같은 궁궐과 흡사하다. 남문과 중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보광전(대웅전)과 그뒤로 몰려있는 주요건물들의 배치 등에서 그러한 냄새가 난다. 거기다가 보광전 주위에는 궁궐이나 종묘 등에나 있는 박석[6]이 깔려있었고, 궁궐에서나 쓰이던 비싼 청기와도 출토되었다. 이성계가 집무하던 정청에 청기와를 올렸다고 추정된다.
여말선초 때 문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회암사 중창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당시 완성된 건물의 총 칸 수는 262칸이었다고 한다.[7] 또한 "사옥(寺屋)의 굉장미려(宏壯美麗)하기가 동국(東國)에서 제일이다." 하였으며, "비록 중국이라도 이런 절은 많이 볼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4. 발굴


회암사 터가 어디인지는 예전부터 전해왔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큰 절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다. 1960년대에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몇 차례 조사가 있었지만 충분하지 못했다. 1997년이 되어서야 경기도박물관이 시범적으로 조사하여 비로소 회암사의 진짜 규모와 가람배치를 알게 되었다. 이후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2016년에 완료되었다.
이 무렵이 용의 눈물이 인기리에 방영된 시기와도 겹친 영향인지, 이 시점 이후의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선 회암사 복원이 양주시에서 공약으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회암사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양주시 재정으로는 어림없고, 경기도와 중앙정부의 지원이 필수지만 아직 구체화된 계획은 없다.[8]
2006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실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관련기사
2012년 7월 발굴한 유물 및 경기도박물관 등지에 있던 유물들을 모아 '''양주시립 회암사지 박물관'''을 개장하여 회암사지의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5. 바깥고리



6. 사적 제128호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52호)·어사대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82호)·맷돌(경기도민속자료 제1호)과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남아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수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회암사지 → 양주 회암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7. 같이보기



[1]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나옹이 우왕 4년(1378)에 중창하였다는 내용이 흔히 나오지만, 나옹은 우왕 2년(1376)에 사망했으므로 터무니없는 오류이다.[2] 참고로 대놓고 선대왕이 잘못했다고 지적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조광조이고, 그 선대왕은 세종이다.[3] 여말선초 시기의 고승 지공(指空), 나옹혜근(懶翁慧勤), 무학자초(無學自超) 3명을 가리킨다.[4] 무학대사의 부도는 그 전에 이미 도굴꾼들이 깨버렸다. 즉 회암사에 있던 유명한 석물 중 나옹의 비를 제외하면 다 깨져버린 것. 이때 무사했던 나옹화상비(선각왕사비)는 1997년 3월에 산불로 완전히 깨져버렸다. 이후 탁본과 사진자료를 근거로 그 자리에 앞에 모사해서 세워놓았는데, 돌이 새것이라 반짝반짝하다는 점을 빼면 원본과 같다. 깨진 원본은 경기도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5] 북한산에 있는 원증국사탑비에 태조의 휘가 쓰였다는 이유로 영조가 비각을 세우게 했을 정도다.[6] 정전 근처에 넓게 깔아놓은 바닥돌[7] "집은 모두 262칸이고, 높이가 15척이나 되는 부처가 7좌이고 10척이나 되는 관음상이 있었다."[8] 기실 복원한 다음도 문제다. 그 넓은 대지에 그 큰 건물을 재건한 다음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사람 손이 안닿으면 목조건물은 순식간에 퇴락한다. 재건한 사찰을 불교종단에 맡겨 실제로 종교시설로 기능하는 사찰로 유지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