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경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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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9년(1463) 간경도감에서 만든 변상도 판화. 현재 총 20종 남은 15세기 조선시대 왕실판화 중 하나이다.#, ##, ###
刊經都監. 조선 세조 7년(1461) 세조의 왕명으로 설치된 관립 도서편찬 기관.
세조 7년(1461)에 세조가 만든 공립 도서편찬 기관으로 성종 2년(1471)까지 약 11년간[1] 한시적으로 존재했던 임시기관이었다.
과거 고려시대의 교장도감(敎藏都監 1086~1101), 대장도감(大藏都監 1236~1318)의 전통을 이어 설치했다. 다만 세종-세조조에 금속활자 기술과 인쇄술이 발달하여 고려 시절 두 도감보다 존속기간이 훨씬 짧았는데도(존속기간 97년vs11년) 인쇄물은 더 많이 찍고 배포했다. 목판 대장경 판각 역할만 했던 과거의 도감들과는 달리 간경도감은 금속활자 제작, 훈민정음 연구, 책 번역 및 한글보급 사업, 불교진흥 사업, 고려시대 불경 복원[2] 등 다양한 학문 연구기관 및 인쇄소의 역할을 겸했다.
전국적인 기관으로 서울에 본사를 두었고 지방에 개성부, 안동부, 상주부, 진주부, 전주부, 남원부 등의 분사를 두었다. 거의 대부분의 업무를 세조가 관장하였고, 세조가 재위 14년(1468) 9월 사망하고 3년이 지나 성종 2년(1471) 성종이 유학자들의 철폐상소[3] 를 받아들이면서 폐지되었다.
당시 전례가 없을 만큼 책을 엄청나게 활자로 뿜뿜 찍어내 전국으로 뿌려댔기 때문에 아직도 남아 전하는 간행물들이 많다. 몇몇 학자들은 만약 간경도감이 철폐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면 한국의 인쇄술이 유럽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기도 한다.
당시 많은 책을 찍어냈지만 훗날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 수많은 전란을 거치며 대부분이 사라졌고 남은 서적은 아래의 것이 전부다.
세조 9년(1463) 간경도감에서 만든 변상도 판화. 현재 총 20종 남은 15세기 조선시대 왕실판화 중 하나이다.#, ##, ###
1. 개요
刊經都監. 조선 세조 7년(1461) 세조의 왕명으로 설치된 관립 도서편찬 기관.
2. 내용
세조 7년(1461)에 세조가 만든 공립 도서편찬 기관으로 성종 2년(1471)까지 약 11년간[1] 한시적으로 존재했던 임시기관이었다.
과거 고려시대의 교장도감(敎藏都監 1086~1101), 대장도감(大藏都監 1236~1318)의 전통을 이어 설치했다. 다만 세종-세조조에 금속활자 기술과 인쇄술이 발달하여 고려 시절 두 도감보다 존속기간이 훨씬 짧았는데도(존속기간 97년vs11년) 인쇄물은 더 많이 찍고 배포했다. 목판 대장경 판각 역할만 했던 과거의 도감들과는 달리 간경도감은 금속활자 제작, 훈민정음 연구, 책 번역 및 한글보급 사업, 불교진흥 사업, 고려시대 불경 복원[2] 등 다양한 학문 연구기관 및 인쇄소의 역할을 겸했다.
전국적인 기관으로 서울에 본사를 두었고 지방에 개성부, 안동부, 상주부, 진주부, 전주부, 남원부 등의 분사를 두었다. 거의 대부분의 업무를 세조가 관장하였고, 세조가 재위 14년(1468) 9월 사망하고 3년이 지나 성종 2년(1471) 성종이 유학자들의 철폐상소[3] 를 받아들이면서 폐지되었다.
당시 전례가 없을 만큼 책을 엄청나게 활자로 뿜뿜 찍어내 전국으로 뿌려댔기 때문에 아직도 남아 전하는 간행물들이 많다. 몇몇 학자들은 만약 간경도감이 철폐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면 한국의 인쇄술이 유럽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기도 한다.
당시 많은 책을 찍어냈지만 훗날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 수많은 전란을 거치며 대부분이 사라졌고 남은 서적은 아래의 것이 전부다.
3. 현존하는 서적 목록(1994년 기준)
4. 바깥고리
[1] 세조 14년(1468)에 세조가 사망한 이후부터 책 인쇄작업을 더는 하지 못했으므로 실제 활동기간은 8년이다.[2] 다양한 고려 불경 중에서도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초조대장경(1011-1087)에서 누락된 것을 모아서 1090년 즈음에 편찬한 교장(일명 속장경)을 복원하는 일을 중점으로 삼았다. 초조대장경은 그 후신이라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이 있었을뿐더러 이미 세조 4년(1458)에 팔만대장경 전문을 50부 필인하여 전국으로 배포하는 사업을 마무리했기 때문에, 대장경 다음으로 가치있는 기록유산인 교장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후 임난, 호란, 양요, 6.25 등을 거치며 상당수 다시 소실되어서 그렇지 기록으로 보면 세조가 의천의 교장 5천여 권 대부분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3] 유학자들이 불교를 거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활자로 책을 개나 소나 마구 찍어낸다고 반발하던 심리 탓도 있었따. 지금은 잘 이해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이 신분제를 관통하는 한 가지 큰 힘이었다. 남들 익히기 어려운 한자를 향유하면서 훈민정음 쓰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던 것이나, 조보같이 아랫것들이 대중적으로 활자 만들어 찍어내는 행위를 크게 제재했던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한 몫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