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르 큐이

 



'''세자르 큐이'''
'''Цезарь Антонович Кюи'''

[image]
''' 이름'''
세자르 안토노비치 큐이[1]
(Цезарь Антонович Кюи)
(Cesar Antonobich Cui)
''' 생몰년도'''
1835년 1월 18일 ~ 1918년 3월 16일
''' 출생지'''
리투아니아 빌뉴스
''' 사망지'''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국적 '''
러시아 제국
''' 가족 '''
@추가바람@
''' 직장 '''
육군 장교
''' 직업 '''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 악기 '''
피아노
''' 장르 '''
오페라 @추가바람@
1. 개요
2. 생애
3. 작품 성향
4. 주요 작품


1. 개요


러시아의 작곡가, 군인. 러시아 5인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동시에 가장 존재감이 약한 음악가. 국민악파 음악가 치고 독창성이 조금 약한 편이지만, 평론가로 활동하던 사람이라 국민악파의 활동을 옹호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2. 생애


세자르 큐이는 1835년 리투아니아빌뉴스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프랑스군 사관이었는데 1812년 나폴레옹러시아 제국을 침공해 벌인 조국전쟁 때 퇴각하던 프랑스 군인들 중 주변 국가로 탈영하거나 아예 눌러앉아 살게 된 군인들이 있었다. 이 때 부친은 폴란드프랑스어 교사로 정착하게 되었고, 리투아니아인 여자를 만나 빌뉴스에서 큐이를 출생한다.
아버지 혈통답게 군인이 되어 18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 후 모교 교수로 채용되어 수십년간 재직했는데, 니콜라이 2세 등 많은 제자들을 교육시켰다. 또한 교수로 일하는 틈틈히 음악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폴란드인인 타테우슈 모니우슈코에게 음악을 배워 프랑스 양식과 쇼팽의 계보를 잇는 세련된 작품을 남겼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러시아 5인조에 속해 있음에도 그의 음악은 러시아적인 민족성을 띄기 보다는 프랑스의 샬롱음악 분위기를 풍긴다는 평가를 받는다.
1855년 밀리 발라키레프를 만나게 되는데, 이 때가 바로 러시아 5인조의 시작이다.
여담으로 그의 본업은 요새 설계학으로 그는 페테르부르크 공병대학에서 교직에 종사했으며 1904년에는 육군 공병대장을 역임했다. 그의 연구는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1878)에서 활약하게 된다.
러시아와 하나도 상관없는 혈통으로 러시아 5인조의 한 자리를 꿰찬 특이한 인물인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3. 작품 성향


그의 작품은 위에서 거론했듯 러시아 5인조이긴 했으나, 프랑스 혈통답게 러시아적인 음악보다는 프랑스 스타일의 음악성을 띄고 있다. 오페라를 작곡할 때 프랑스어 대본을 채택하는 등 프랑스 느낌이 있다. 아마도 본인은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가 더 편했을 것이다.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도모스키> 지의 평론가가 되어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이태리식 오페라를 비판하며 민족주의 음악을 지지하는 논조를 보이고, 특히 차이코프스키와 루빈슈체인 형제의 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기존의 서유럽 음악 전통을 지지하는 음악가들에게 비판을 했다고도 한다. 이후 그는 음악가보다는 음악평론가와 군인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슈만과 쇼팽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 영향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힘찬 분위기나 큰 규모성보다는 슈만과 쇼팽 스타일의 아름다움이 조금 더 묻어난다. 둔탁하고 호방하며, 대륙적인 웅장함이 드러나는 다른 5인조와는 대조적이고, 여러모로 가장 개성이 빈약했던 인물. 다른 4명이 저마다 유명한 대표곡을 가진 반면 이 사람은 '이거다' 할 만한 작품이 없다. 프랑스 6인조에서의 루이 뒤레 격의 인물이랄까...

4. 주요 작품


  • Op.12 Tarantella
  • Op.50 Kaleidoscope for Violin & Piano[2]
  • Op.64 Prellude
  • 가극 '카프카즈의 포로'

[1] 국내에서는 보통 프랑스식 이름 Cesar를 따라 '세자르'라고 부른다. 러시아식 이름 Цезарь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체자리'이다.[2] 9번 orientale이 가장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