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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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thuanians
  • Lietuviai
1. 개요
2. 기원
3. 역사
3.1. 아욱슈타이티야인
3.2. 사모기티아인
3.3. 프로이센의 리투아니아인
3.4. 리트바크 유대인
3.5. 립카 타타르
4. 문화
5. 언어
6. 작명법
7. 벨라루스인과의 관계
8. 여담
9. 출신 인물


1. 개요


리투아니아인은 발트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발트어파에 속하는 리투아니아어를 쓰는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인들은 대부분 가톨릭을 믿는다. 리투아니아에는 256만여 명이 거주하며 리투아니아 인구의 대부분을(80% 이상) 구성한다. 이웃나라 라트비아 내에는 공식 통계상으로는 2만 4천여 명이 거주한다. 다만 라트비아 동부 지역의 15만여 명 정도의 라트갈레인들은 리투아니아 지배의 영향으로 가톨릭을 믿고 리투아니아와 문화가 다소 흡사한 편이다.
미국 내에는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65만여 명이 거주하며, 이스라엘 내 거주하는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들도 많다. 영국 내에는 21만여 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이 거주하며 이들은 리투아니아 본국은 출산율이 매우 낮은 것과 다르게 2명대 이상의 양호한 출산율을 보인다. 독일에는 4만여 명, 캐나다에는 5만여 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이 거주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던 리투아니아 마이너(메멜란트 일대) 지역의 루터교회를 믿는 리투아니아인들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 내에서 3만여 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이 거주하며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중에서 리투아니아계 조상을 둔 경우도 꽤 있다. 폴란드벨라루스에도 리투아니아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이 거주한다.
이 밖에도 노르웨이에 4만 5천여명, 아일랜드에 3만 6천여 명, 스웨덴에 1만 5천여 명, 덴마크의 1만 3천여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이 거주한다. 실제로 북유럽 선진국에서 구직하는 리투아니아인의 인구는 이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2.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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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인의 조상을 이루는 여러 부족들은 중세 중기까지도 다소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토속 신앙을 믿고 있었다. 튜튼 기사단이 기독교 전파를 명분으로 발트 민족들을 침략하자 오늘날 리투아니아 내 여러 발트어족 부족들이 힘을 합쳐 하나의 공국을 이룬 것이 오늘날 리투아니아인의 기원이 된다. 중세 리투아니아인들은 루테니아인들을 상대로 능란한 외교를 펼치고 튜튼 십자군 대신에 일부러 폴란드로부터 가톨릭을 전래받으면서 민족 문화와 정체성의 기원을 만들었다.

3. 역사


리투아니아/역사 문서 참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 인구 조사 및 1910년대 프로이센에 의해 이루어진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리투아니아인은 120만여 명 + 사모기티아인 45만여 명에 달했으며, 리투아니아 마이너 내의 루터교회를 믿는 리투아니아인은 12만여 명에 달했다.

3.1. 아욱슈타이티야인


리투아니아의 고지대인 아욱슈타이티야(Aukštaitija)에 사는 리투아니아인으로 좁은 의미의 리투아니아인을 의미할 때는 아욱슈타이티야인만을 의미한다.

3.2. 사모기티아인


리투아니아인들이 제마이티야(Žemaitija) 사람이라는 뜻에서 제마이챠이(Žemaičiai)라고 부른 사모기티아인은 리투아니아인들의 친척 뻘 되는 같은 발트어족이다. 과거 러시아 제국에서는 사모기티아인을 별개의 민족으로 분류했으나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들을 리투아니아어의 방언을 사용하는 엄연한 리투아니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모기티아인들은 굳이 자신들을 리투아니아인들과 구분하려 들지는 않는다.
리투아니아인들이 킵차크 칸국들의 잔당들과 싸우며 영토를 넓히는 동안 사모기티아인들은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본토를 방어하였다. 한 번은 사모기티아인들이 1260년 라트비아의 두르베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을 대패[1]시킨 덕분에 리보니아 기사단 영토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사단이 일찍 망할 뻔한 적도 있었다.
“리투아니아인과 사모기티아인과 루테니아인은 상호간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 같은 성문에서 보듯이 사모기티아인은 인구가 리투아니인보다도 적었으나 중요한 대접을 받았는데, 리투아니아인들이 타타르인들과 싸우거나 루테니아인 유력자들과 외교전을 펼치며 영토를 넓히는 동안 사모기티아인들은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본토를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에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인들의 가톨릭 개종은 요가일라가 개종한 138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리투아니아의 저지대에 살던 사모기티아인들은 좀 더 보수적이고 반기독교 감정이 강해서[2] 15세기에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들 사모기티아인들은 폴란드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다른 리투아니아인들보다 더 보수적이었다.

3.3. 프로이센의 리투아니아인


튜튼 기사단이 침략한 메멜란트 일대의 리투아니아인들의 후손들이다. 계속해서 리투아니아 본토를 침공하던 튜튼 기사단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대패함 이후 사모기티아인 내 영토를 포기했으나, 메멜란트 일대는 튜튼 기사단의 성채 때문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쉽게 접수할 수가 없었던 것. 이렇게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반환되지 않고 튜튼 기사단의 봉지로 남으면서, 이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은 결국 튜튼 기사단의 후신인 프로이센의 주민으로 귀속되었다.
프로이센 지배 당시 이 지역의 루터교회를 믿는 리투아니아인들은 이등시민 취급을 받을 때도 많았으나 덜 엄격한 심의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발전 덕분에 리투아니아어로 된 책을 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었으며, 리투아니아어 서적을 러시아 제국 내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밀수하여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형성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 개혁 이후 자신들의 조국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아닌 프로이센으로 여겼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이를 흡수한 러시아 제국 내 리투아니아인들을 (이교도란 의미에서) 사모기티아인이라고만 부르고, 자신들이야 말로 참된 신앙을 믿는 참된 리투아니아인이라고 주장하였다. 1846년 리투아니아 마이너 지방 내 리투아니아인 인구는 155,674명에 달했는데, 이는 해당 지역 전체 인구의 38.9%에 달하는 비율이었다.
20세기 초 리투아니아 1공화국은 이들이 종파와 정치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들을 배제하면서 토사구팽 당하다시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 영토가 폴란드소련칼리닌그라드로 쪼개지고 극히 일부 영토가 클라이페다를 중심으로 리투아니아 SSR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이들은 대부분 독일로 추방되었으며 현재는 대부분 독일인과 동화되었다.

3.4. 리트바크 유대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에 살던 유대인들은 폴란드어로 '리투아니아 출신'을 뜻하는 표현, '리트바크(Litwak)'에서 유래한 '리트바크(ליטוואַק‏‎, Litvak)'라는 표현으로 지칭되었다. 폴란드의 하시드 유대인과 대립하는 사이였다.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고, 이후 러시아 제국 내 반유대주의가 심해지자 적지 않은 수의 리트바크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미국에서는 당시 리투아니아를 독립된 민족으로 생각하지는 않고 폴란드의 이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은 대개 폴란드계,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아슈케나짐 유대인 중 상당수가 주로 벨라루스에 거주했던 리트바크 유대인에 기원을 두고 있다.

3.5. 립카 타타르




4. 문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한 때 동유럽 일대를 석권했던 영향으로 중세 리투아니아인들은 자신들이 키예프 공국의 계승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인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가톨릭 문화 유입 및 모스크바 공국과 그 후신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영토 상실로 리투아니아인들은 점차 정교회와 러시아를 타자화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로마 제국과 가톨릭 그리고 서구에서 찾게 되었다.
한 편 르네상스 시대 프로이센에서는 리투아니아인들에게 개신교를 선교할 목적으로 리투아니아인들은 대학 입학과 교수 임용을 권장하고 성경을 리투아니아어로 번역하면서 리투아니아 마이너 지방을 중심으로 리투아니아어 문예 부흥이 이루어졌다. 이 이전의 리투아니아 내 연대기 등은 대개 루테니아어(중세 벨라루스어)나 라틴어로 쓰여졌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전통적으로 교육을 매우 중요시한 민족이었다. 이는 과거 한 때 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나라를 이루었던 자신들의 조상들 및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로 인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한 때 빌뉴스를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 상류층들이 폴란드에 사실상 완전히 동화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민족주의는 리투아니아 문화 내 폴란드 문화 잔재를 정리하고 재흡수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

5. 언어


리투아니아인들의 모국어는 리투아니아어이다. 리투아니아인은 리투아니아어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한데, 희소한 발트어파 언어인데다 고대 인도유럽어족 언어의 특징을 아직 많이 보존하고 있고[3] 근대 민족주의 부흥 이후에는 리투아니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와의 차별화를 위해 일부러 라틴어 어휘를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근대 리투아니아인들은 특히 민족어에 대한 교육열이 매우 높은 편이었고, 러시아 제국 내 민족 중에서는 문맹률이 유달리 낮았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러시아 제국, 소련, 프로이센 등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으로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 등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비중이 높은 편이다. 젊은 여성의 경우는 대부분 영어로 문제 없이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해외 구직을 위해 스웨덴어노르웨이어, 덴마크어를 따로 배우는 경우도 있다.

6. 작명법


리투아니아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성/여성명사처럼, 남자 이름은 무조건 -as/-is/-us/-ys 가 붙어야 하고, 여자이름은 -a/-ė가 붙어야 한다. 성씨도 이를 따라 남성형/여성형으로 나뉘는데, 여성형 성씨는 미혼형/기혼형으로 또 나뉜다. 남성형 성씨는 -a/-us으로 끝나고, 미혼형 여성 성씨는 -aitė/-utė/-ūtė, 기혼형 여성 성씨는 -ienė로 끝난다.
쉽게 말하자면, 카즐라우스카스(Kazlauskas)라는 성씨를 가진 리투아니아 남자가 있다고 치면, 아내의 성씨는 카즐라우스키에네(Kazlauskienė)이며, 딸의 성씨는 카즐라우스카이테(Kazlauskaitė)이다. 만약에 이 딸이 자라서 파울라우스카스(Paulauskas)라는 성씨를 가진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면 남편의 성의 기혼여성형인 파울라우스키에네(Paulauskienė)로 변한다.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성씨들로 예를 들자면,
남성형(원형)
(미혼)여성형
(기혼)여성형
Kazlauskas
Kazlauskaitė
Kazlauskienė
Petrauskas
Petrauskaitė
Petrauskienė
Jankauskas
Jankauskaitė
Jankauskienė
Stankevičius
Stankevičiūtė
Stankevičiienė
Vasiliauskas
Vasiliauskaitė
Vasiliauskienė
Žukauskas
Žukauskaitė
Žukauskienė
Butkus
Butkutė
Butkienė
Paulauskas
Paulauskaitė
Paulauskienė
Urbonas
Urbonaitė
Urbonienė
Kavaliauskas
Kavaliauskaitė
Kavaliauskienė
외국에서 기원한 가문 성씨들도 마찬가지의 변화를 거치는데 이를테면 흔한 폴란드계 성씨 주코프스키[4]의 여성형 주코프스카(Żukowska)의 경우 폴란드인 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주카우스케(Zukawskė) 같은 성을 쓴다면 리투아니아인 정체성이 강한 사람의 경우 주카우스카이테(Zukauskaitė), 주카우스키에네(Zukauskienė) 같은 성을 사용하게 된다.


7. 벨라루스인과의 관계


중세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라는 한 나라에 속했다. 언어와 종교는 달랐지만 초창기에는 리투아니아 역사 연대기가 중세 벨라루스어(루테니아어)로 쓰이고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귀족 사이의 통혼도 활발하였다. 이 때문에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와 벨라루스 민족주의는 현대 이전에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는 과거에는 국가 주도의 공교육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인 것도 있고, 민족보다는 계급(귀족 or 상공업자 or 농노)이 더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루블린 조약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주도한 대귀족 가문들은 대부분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5] 루테니아인과 리투아니아인의 통혼으로 형성되었으며 폴란드어로 된 성씨를 사용했다. 20세기 초반 폴란드인 농부가 글을 배우고 신문을 읽고 나서야 자신이 폴란드인이라는 점을 알았다는 일화(이 말은 폴란드 상류층들이랑 농민들이 서로 담쌓고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등 이를 증명하는 사례들은 차고 넘친다.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민족주의가 상당부분 겹쳤던 것과는 별개로 오늘날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사이의 국민 감정은 상당히 좋지 않다. 다만 2020년 벨라루스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리투아니아인 상당수가 반 루카셴카 여론을 지지하면서 상호간 국민 감정이 급격히 가까워지기도 했다.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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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우크라이나와 함께 미녀가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이른바 국제 미인 대회를 석권하는 대표적인 나라인 베네수엘라의 경우 전문가들의 정밀한 가공 작업을 거쳐 사람을 새로 만들어내는 편이지만(...) 리투아니아의 경우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일반인 중 60%는 다른 나라 기준으로 모델 수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남미녀 비율이 대단히 높다. 이 점은 다른 발트3국 국가들도 마찬가지.
의외로 유럽답지 않게 연애할 때 상대방의 종교를 물어보는 편이다. 어느 정도 친해졌다 생각되면 “Are you Catholic?”하면서 물어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 본인 종교가 개신교 또는 정교회거나 혹은 무슬림이거나 하면 진짜 난감해진다. 실제로 종교적 신심이 강하여 같은 가톨릭 신도 아니면 잠깐 사귀다 지나쳐가는 대상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결혼은 같은 가톨릭 신도끼리만 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종교로 개종하거나, 가톨릭 신자이되 나일론 신자인 경우가 아닌 이상... 그래서 리투아니아의 러시아계 주민들은 정교회 신자인 관계로 가톨릭 신자인 토착 리투아니아인과 결혼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결혼하거나 해외의 정교회 신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 출신 인물



[1] 리보니아 기사단의 '''마스터''' 포함 기사 150여명이 두르베 전투에서 전사했다. 보병 전사자 수는 미상이다.[2] 메멜(클라이페다) 지방 바로 옆에 있던 위치 때문에 튜튼 기사단과 가장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지역이었다.[3] 현재도 산스크리트어와도 비슷한 어휘가 꽤 남아있다.[4] 러시아식으로는 종종 주코프[5] 물론 훗날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 그 후손이 다시 정교회로 개종한 경우도 있었다.[6] 일명 리투아니아의 투신. 168cm라는 격투가로서는 작은 신체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날렵하고 저돌적인 스타일에 암바를 건 상대를 집어들어서 링에 내려찍어 바로 병원에 보내는 등 폭발적인 힘과 화끈한 경기 내용 덕분에 제법 팬도 많았던 선수이다. 한국에서는 K-1 MAX에서 이수환선수를 KO시킨것으로 조금 알려졌다. K-1에서 활동하기 전의 ZST등에서 찍힌 하이라이트를 보면 양학수준으로 패고다녔다. 2016년12월21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자택 근처에서 신원불명의 남자에게 살해당했다. 자동소총으로 7발을 맞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