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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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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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빌뉴스 역사 지구
영어
Vilnius Historic Centre
러시아어
Исторический центр Вильнюса
프랑스어
Centre historique de Vilnius
국가·위치
리투아니아 빌뉴스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4년[1]
등재기준
(ii)[2], (iv)[3]
지정번호
541
빌뉴스 (리투아니아)

1. 개요
2. 역사
2.1. 중세
2.2. 르네상스 시대
2.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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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수도인 동시에 빌뉴스 주의 주도이기도 하며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북동쪽 380km, 벨라루스의 수도인 민스크에서는 북서쪽 180km 지점에 있다. 네무나 강의 지류 빌리야 강 양안에 위치하며 빌뉴스란 이름 역시 빌리야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발트 3국의 수도 중 유일하게 바다와 면하지 않고, 트램(電車)이 없는 수도.[4] 옛 이름은 빌나(Vilna)로 도시의 면적은 401제곱킬로미터이며 인구수는 2010년을 기준으로 560,190명이다. 별명으로 북쪽의 예루살렘과 리투아니아의 아테네가 있다.
양차대전 사이 폴란드계가 55% ~ 65%(최대 12만명) 가까이 치달은 적도 있으나 2001년 기준으로 리투아니아계가 60%인 반면 폴란드계는 20%로 10만명 전후다. 30~40%를 차지하던 유대계는 거의 사라졌고, 러시아계가 14%다.
빌뉴스 교외지역에는 지금도 폴란드계가 꽤 많이 산다. 소련 붕괴 직전에는 한 때 폴란드인 자치지역을 선포하기도 했다. 빌뉴스 시가지를 포위한 형국이었는데 이 때문에 소련 당국에서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해당 지역에 살던 폴란드인을 지원했지만, 레흐 바웬사 정부에서 해당 지역에 살던 폴란드인을 지원하지 않고 리투아니아 정부를 인정했고, 8월 쿠데타 이후로 소련의 통치력이 와해되면서 자치구역 선포 자체가 무위로 돌아갔다. 다만 이후의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보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많은 갈등이 있다.

2. 역사



2.1. 중세


빌뉴스 시는 1323년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가 성채를 세우면서 교황 요한 22세에게 보낸 서한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게디미나스 치세부터 빌뉴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질적인 수도는 루테니아인들의 도시 나바흐루다크폴로츠크였으나,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인 군사 귀족들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1387년 폴란드 국왕을 겸하게된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요가일라(야기에우워)가 빌뉴스에 도시자치법에 따른 권리를 부여함과 동시에 발트 다신교 성소들을 제거하고 빌뉴스의 리투아니아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본격적인 첫 걸음을 내딛었다.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초창기에는 가톨릭 개종에 반발하였으나, 폴란드에서 온 가톨릭 사제들이 성당을 근거지로 가톨릭 뿐만 아니라 세련된 폴란드어폴란드/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빌뉴스 시민들은 결국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있어서 폴란드의 귀족 문화는 매우 세련되고 매력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고.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인들 외에도 루테니아인(리투아니아 근방의 벨라루스인), 폴란드인, 독일인, 아슈케나짐 유대인과 카라임 유대인들이 모여살던 국제도시로서 문화의 용광로 같던 곳이었다. 빌뉴스에는 정교회가톨릭부터 시작해서 개신교, 유대교와 물론 비타우타스 치세에 토크타미쉬타타르족이 유입된 영향으로 이슬람 모스크까지 들어서 있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도시에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시설물은 거의 다 모여 있는, 말하자면 종교의 종합전시장이었던 셈.

2.2. 르네상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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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대학을 대표하는 황금문과 도서관
1503년부터 1522년까지 크림 칸국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9개의 성문과 3개의 성탑으로 된 성곽이 세워졌고, 도시의 독일인과 루테니아인(벨라루스인), 유대인을 위한 독립된 구역이 지정되었다. 1544년에 폴란드 국왕이었던 지그문트 2세가 잠시나마 궁정을 빌뉴스에 두었을 정도로 폴란드인들도 많았다. 1579년에는 빌뉴스 대학교가 설립되어 동유럽북유럽 지성의 산실 역할을 했다. 빌뉴스 대학교는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닌, 벨라루스 역사에도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빌뉴스는 대학 외에도 인쇄소로도 유명했다. 체코에서 인쇄 사업을 하던 벨라루스인 출판업자 프란시스크 스카리나가 1525년 빌뉴스로 이주하여 출판 사업을 시작하였다. 스카리나는 벨라루스어로 된 성경과 여러 가지 저작들을 인쇄하며 의학 등 다방면에 출중했던 사람으로, 오늘날 벨라루스에서 세종대왕 비슷한 존경을 받고 있다. 물론 스카리나의 인쇄소 사업은 벨라루스에게만 영향이 간 것은 아니었다. 스카리나가 운영했던 빌뉴스의 인쇄소를 시작으로 금속활자 기술이 빌뉴스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1529년 리투아니아의 첫 법령집이 편찬되었다.
16세기 개신교 교회의 부속기관으로 건설된 초등학교는 이후 예수회의 활동으로 가톨릭 미션스쿨이 된 이후에도 빌뉴스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잠시 빌뉴스 시에도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가 부흥하는 듯 했으나 이후 예수회가 경쟁적으로 부설 학교들을 세우고 교육 사업에 투자하면서 빌뉴스 시의 개신교 교세는 꺾이고 말았다. 다만 개신교와 가톨릭 예수회의 선교 경쟁으로 인해 빌뉴스 시의 교육 시설과 시스템이 크게 개선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원래 공용어는 루테니아어였지만, 폴란드와 동군 연합을 이루고 도시 문화가 계속 폴란드화함에 따라서 리투아니아인 주민들이 폴란드어를 배우고 폴란드인들과 통혼하면서 빌뉴스 시의 리투아니아계 주민 대다수가 폴란드인으로 동화되었다. 리투아니아 내전에 참가했던 리투아니아 대귀족 다섯 가문들이 전부 다 리투아니아식 성을 쓰지 않고 폴란드식 성을 사용했을 정도였으니...
1655년 대홍수 당시 러시아군이 빌뉴스를 함락시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고, 빌뉴스와 그 인근 지역의 인구가 급감하자 빌뉴스를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르네상스도 끝을 맺었다.

2.3. 근현대


1795년 폴란드 분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러시아가 설치한 구베르니야의 주도가 되면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해 북유럽에서 3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빌뉴스는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중심 도시이기도 했는데, 빌뉴스의 유대인 공동체는 하레디 유대인과 반대되는 세속주의 성향의 유대 공동체를 대표했다고 한다. 빌뉴스를 대표하는 대학이자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최대의 대학이었던 빌뉴스 대학은 폴란드,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3개국 모두의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 아담 미츠키에비치가 활동한 것을 기점으로 세 민족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서로 화합하는 기능을 했으나 1831년 폴란드 독립 봉기가 진압된 이듬해 1832년 러시아 제국 정부에 의해 폐교를 당했다. 빌뉴스 대학 강제 폐교에도 불구하고 이미 뿌리내린 리투아니아의 민족주의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빌뉴스 대학 폐교 조치에 쉽게 굴하지 않고, 프로이센 영토였던 "리투아니아 마이너"에 거주하는 동포들로부터 리투아니아어 책을 밀수하여 가정 내에서 리투아니아어 교육을 이어갔다.
1897년 러시아 제국의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빌뉴스 시 인구의 40%가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고, 폴란드인은 30.1%였으며 러시아인 20.9% 벨라루스인 4.3% '''리투아니아인 인구 비중은 2.1%'''에 불과했다. 물론 빌뉴스에 살던 리투아니아인들이나 벨라루스-루테니아인들이 다 죽거나 도망가거나 한 건 아니고, 귀족들 중심으로 폴란드인들과 통혼하고 계속 폴란드어를 사용하면서 동화되었던 것. 같은 년도에 빌뉴스 근교의 농촌과 소도시를 포함해서 낸 통계에서는 벨라루스인 56.1%, 리투아니아인 17.6%, 유대인 12.7%, 폴란드인 8.2% 러시아인 4.9%로 나온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1915년에서 1918년까지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러시아인 인구가 소개된 이후에 이루어진 1916년 독일의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의 50.2%가 폴란드인, 43.5%가 유대인이고 리투아니아인은 2.6%에 불과했다. 1920년 적백내전 당시 소련폴란드패하고 새로 독립한 리투아니아에 이 도시를 넘겨주었지만, 10월 9일 루찬 젤리고프스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군의 리투아니아·벨라루스 사단이 연출된 쿠데타를 통해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 시와 주변 지역은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독립된 국가로 선포했다가 1922년 2월 20일 합병해버렸다. 이후 리투아니아인들은 폴란드라 하면 이를 갈며 싫어하게 되었다. 리투아니아는 빌뉴스를 정식수도이자 수복해야 할 땅으로 선포하면서 임시수도를 카우나스에 두었다.
빌뉴스, 아니 빌노(Wilno)는 폴란드 제5의 도시로 Elektrit 같은 라디오 공장[5]도 보유하는 등 산업도 발달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당시 독일소련서로 체결한 비밀조약에 따라 1939년 9월 19일 빌뉴스는 소련이 장악하고 합병하였다. 1939년 10월 10일 소련의 최후통첩을 받은 리투아니아는 빌뉴스를 얻는 대신 소련이 리투아니아 각지에 군사 기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곧 수도를 카우나스에서 빌뉴스로 이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미처 끝내기도 전인 1940년 6월 소련이 리투아니아 전국을 점령하면서 빌뉴스는 새로 설립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1941년 6월에는 빌뉴스가 독일군에 함락되어 구시가에는 유대인 주민들을 위한 게토가 두 군데 세워졌고 빌뉴스의 유대인 인구의 95% 정도가 독일군과 그들에게 협력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살해당했다. 1944년에는 폴란드 향토군과 소련군이 차례로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는 다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로 소련에 합병되었고, 종전후 소련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농촌의 리투아니아인들과 소련의 타 공화국에서 러시아인들이 도시에 이주하면서 전후 빌뉴스는 주민 구성, 문화, 전통이 완전히 바뀌었다. 1931년 리투아니아인은 빌뉴스 인구의 0.8%에 불과했지만 1959년에는 34%로 증가하였고, 같은 기간 폴란드인은 65.5%에서 20%로 감소, 러시아인은 3.8%에서 29%로 증가, 유대인은 27.8%에서 7%로 감소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의 탈퇴를 선언하고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회복시켰다. 이에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 1월 9일 군 병력을 투입하여 이에 대응, 1월 13일에 국립 라디오·텔레비전 건물과 빌뉴스 텔레비전 철탑을 공격, 그 과정에서 민간인 14명이 죽고 700명 이상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에 소비에트 연방은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탈퇴를 인정하였고, 이후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의 수도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09년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됐다.

[1] 2012년 수정[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지하철은 발트 3국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빌뉴스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 어떤 도시에도 전차가 다니지 않는다. 21세기 들어 빌뉴스 지하철 건설 제안이 간간이 나오지만 착공은 언제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5] 1940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합병하면서 이 공장 시설도 민스크로 뜯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