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근유
1. 개요
소나무의 그루터기를 건류하여 뽑아낸, 테레핀과 파인유 계통의 유지류 물질이다. 송진을 증류해서 뽑아내는 일반적인 테레핀과는 송진이 아닌 아예 그루터기를 건류해서 뽑아낸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만들어진 송근유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2. 제조법
일단 유지류가 풍부한 적송이나 흑송 계통의 소나무를 잘라내어 그루터기(벌근)을 만들거나 산을 뒤져 찾아낸다. 벤 지 10년 정도 된 노령의 소나무가 애용되는데, 송명이라 불리며 고대부터 등잔 연료로 애용된 이들 고목들은 유지류를 많이 함유하였기에 20~30%의 높은 회수율을 보이기 때문이다.[1]
일단 이렇게 벌근을 모았다면 건류통에 집어넣어 약 300도까지 가열한다. 이러면 타르와 목초액 등이 마구잡이로 섞인 휘발성 물질이 발생하는데, 이를 송근조유라 부르며, 유정에서 막 뽑아낸 원유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발생한 송근조유를 액화통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타르를 뽑아내고, 냉각기를 통해 액화한다. 그리고 얼마간 놓아두면, 액화통에 모인 액체는 비중 차이에 의해 위의 조유와 아래의 목초액 2층으로 나누어진다.
아래의 목초액은 빼내서 재량껏 쓰도록 하고, 위층의 조유만 따로 모아 다시 증류하는데, 테레빈유를 파인유와 구분하여 수산화나트륨을 섞어 주고 정제하면 송근유 완성. 취득량엔 변동이 있지만 보통 소나무 벌근 1톤당 50~60리터 가량의 송근유를 채취할 수 있다고 한다.
3. 용도
테레핀유 성분은 각종 도료, 세척용[2] 성분으로 애용되며, 크레오소트를 만들 수 있다. 또한 400~450도의 높은 온도에서 백토를 촉매로 하여 가열하면 중질가솔린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을 주로 사용했던 곳이 2차대전기의 일본제국으로, 밑에서 따로 설명한다.
파인유 성분은 도료로 사용되는 것 외에도 고무 제조, 방향제 및 살충제의 성분으로 쓰인다. 300~360도가량의 온도로 증류하면 로진유를 얻어 전지 제조에 쓸 수 있다.
3.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에서의 용도
2차대전 말기, 미국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일제는 자원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원래 석유의 90%가량을 미국에서 수입하였는데 이제 그 물주와 대결하는 꼴이 되었으니... 뭐 남방작전을 통해 동남아의 석유 생산지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전쟁 말기쯤 가면 남방 점령지와 본토는 미군의 필리핀 탈환으로 사실상 단절된 상태였기에 있으나마나였다. 이 상황에서 1억 총옥쇄를 부르짖던 일제 수뇌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료를 구하고자 했고, 기름이란 기름은 다 짜냈다. 유채 기름, 정어리 기름, 귤껍질 기름(...) 등 온갖 바이오 오일이 닥치는대로 동원되었고 송근유도 그 중 하나였다.
본래 송근유는 그 쓰임이 많았기에 일본에 생산하는 민간 업체가 꽤나 있어서 임업시험장에서 송근유를 원료로 항공유를 제조하게 되었다. 1944년 10월 20일에 최고전쟁 지도회의에서 송근유 등 긴급증산대책 조치요강이 결정되었으며, 1945년 3월 16일에 각료회의에서 결의되었다. 하지만 원료인 벌근의 발굴과 소나무의 벌채엔 막대한 노력이 필요했기에 일제는 전국적으로 봉사라고 쓰고 강제노동이라고 읽는 벌근 채취 활동을 벌였다. 심지어 야타베 해군항공대의 연습항공대 학생들도 차출되었는데, 이 때 예비학생 14기로 종사했던 전 카노야 해군항공대 쇼와대 소속의 스기야마 유키테루 소위는 당시 "이런 걸 발굴해서 언제까지 버티려나..." 하고 저서에 술회하기도 했다. 센다이시의 소나무 가로수길에 늘어선 수령 300년 이상의 소나무도 벌목을 당했으며, 소나무 천국인 식민지 조선도 당연히 채취 지역이었다. 당시 어린 아이였던 우리의 할아버지들께 그때의 일을 물어보면 학교에서 하라는 수업은 안 하고 산을 돌아다니며 소나무를 베어오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3] 그리고 얻어진 벌근을 처리하기 위해선 대량의 건류장치가 필요하기에 계획 전에 2,320개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1945년 6월까지 46,978개로 대폭 증가시켰다.
이것들은 산지 근처의 마을에 설치되어 대량의 송근조유를 제조했으며, 그 양은 20만 킬로리터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일단 이렇게 야매로 만들어진 조유들은 근처의 정제공장에서 경질유와 그 외 성분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중 경질유는 따로 모아져 주로 미에현의 욧카이치시와 도쿠야마시의 해군 제2, 3 연료창의 본격적인 정제 시설에서 항공 휘발유와 배합하여[4] 항공유로 제조되었다. 그러나 욧카이치시는 거듭된 공습으로 인해 공정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으며 도쿠야마에서도 1945년 5월 14일부터 고작 500kL를 생산했다고 한다. 원유를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서도 정제를 못해서 놀리고만 있는 상황이었다는 건데, 군부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이는 전쟁 전인 1935년의 생산량인 6000kL의 발끝에도 한참 못 미치는 실적이다.
만들어진 송근유들은 시험을 거쳐 1945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될 것이었으나, 아시는대로 일본이 미국에게 결정타 두 방을 얻어맞은 관계로 그 전에 전쟁이 끝이 났다. 덕분에 전후에도 많은 양의 송근유가 남아 있었는데, 진주한 미군이 조정되지 않은 휘발유를 그대로 지프에 넣었더니 며칠만에 엔진이 고장나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기술이 J. B.코헨의 <전시전후 일본경제>에 등장하는 걸로 봐서는 그 알맹이가 어떨 지는 뻔하다. 결국 이렇게 폐급 기름이 되어버린 송근유들은 어선의 연료로 쓰이며 소모되었다고 한다.
오키나와에선 더욱 황당한 사례로 오키나와 전투 이후 가난한 환경에서 송근유 등을 사용한 엔진오일로 모빌 텐뿌라(モービル天ぷら)라는 튀김까지 해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대로 된 석유나 합성유 기반 엔진오일은 사실상 독극물에 가까워서 먹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시는 전쟁 말기라 연합군에게 점령지는 다 뺏겨서 그나마 근근히 퍼내던 동남아산 원유의 수급도 끊긴 상태였고 막장이 된 일본군답게 소나무에서 채취한 송근유 외에도 유채, 정어리, 귤껍질 등 '''각종 동식물에서 기름이란 기름은 다 짜내서''' 혼합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먹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것저것 섞어놓은데다 위생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생산되었으니 품질은 폐유 그 자체였고 인체에 좋을 리가 없었다.[5]
이 때의 흔적으로 영동지방 동해안 소나무 숲을 가보면, 조금 커보이는 소나무에는 모두 시멘트를 바른 듯한 모양의 상처가 나 있다.
4. 관련 문서
5. 참조 문서
[1] 송명이 아닐 경우(젊거나 벤지 얼마 되지 않은) 약 10%의 현저히 낮은 회수율을 보인다.[2] 특히 유화에서 많이 쓰인다.[3]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이 내용이 등장한다. 청도군 운문사 일대의 소나무들이 죄다 밑동 파인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4] 통상적으로는 송근 추출 경질유 10%:항공 휘발유 90% 의 비율로 제조하였다.[5] 실제로도 '''먹고 죽은 사례까지 존재'''한다. 복통이나 구토 등은 기본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