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공(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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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의 17대 군주. 송장공의 아들. 장군 남궁장만(南宮長萬)[1] 이 노(魯)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포로로 잡혔는데, 그 일을 가지고 남궁장만에게 모욕을 주어 꼭지가 돈 남궁장만에게 살해 당했다. 달리 송 후민공(宋後湣公)이라고도 한다.[2]
2. 생애
2.1. 노나라와의 전투에서 발리다
송민공 원년(기원전 691년), 4월 송민공은 아버지 송 장공의 시신을 안장했다.
송민공 3년(기원전 689년), 겨울 송민공은 노나라, 제(齊)나라, 진(陳)나라, 채(蔡)나라와 엽합해 위나라를 쳤다.
송민공 8년(기원전 684년), 노나라는 제나라를 장작 전투에서 이기고 2월에 그 기세로 송나라를 쳤다. 3월에 송나라 사람들이 숙읍에 옮겨 살았다. 6월 송나라 제나라와 힘을 합쳐 노나라를 쳤다. 이들은 승구 땅에서 전투를 벌였다. 제나라와 송나라 연합군이 패해 장군 남궁장만이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했다.[3] 이에 송나라에서 남궁장만을 풀어줄 것을 요청해 풀려나게 되었다.
2.2. 남궁장만을 놀리다가 살해당하다
송민공 9년(기원전 683년), 여름 송민공이 노나라를 치니 노장공이 친히 맞서 싸워 진땅에서 송군을 이겼다. 가을에 송나라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노나라의 장문중이 그것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송민공이 남궁장만이 포로가 된 것을 두고 놀려서 남궁장만은 그것에 앙심을 품고 송민공을 시해할 마음을 품었다.
송민공 10년(기원전 682년), 남궁장만은 송민공을 몽택에서 바둑판으로 쳐 죽였다. 구목이 남궁장만을 치면서 그를 꾸짖자 남궁장만은 구목마저 죽여버렸다. 그리고 태재 화독마저 죽이고 송공 유를 세웠다. 송나라의 공자들은 소읍으로 달아나고 송민공의 아우인 공자 어열은 박(亳)나라에서 망명했다. 남궁장만은 남궁우를 시켜 박나라를 치게 했으나 송나라 공자들이 남궁우를 쳐죽이고 공자 어열(御說)[4] 을 공작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송환공이다. 남궁장만은 진(陳)나라로 달아났으나 송나라의 뇌물을 먹은 진후가 남궁장만에게 미녀에게 술을 권하게 하여, 남궁장만은 크게 취했고, 그런 남궁장만을 단단히 포박해 송나라에 보내 송 환공이 그를 처형함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1] 일명 남궁만(南宮萬)[2] 다만 열국지 등으로 인해 송민공(宋閔公)으로 알려졌다.[3] 노나라가 아직까지는 강대국인 제나라와 강국인 송나라를 수비에서 압도적으로 이길 정도의 힘은 있다는 좋은 증거다.[4] 說자는 사람 이름으로 쓸 때는 설이 아닌 열이라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