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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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의 제19대 군주. 송장공의 아들. 송민공(宋閔公)의 동생.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송양공(宋襄公)의 아버지. 형을 살해한 남궁장만을 죽이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훗날 다시 송환공이 나타나는데, 후일의 송환공은 송후환공, 이 송환공은 송전환공이라고도 불린다.
2. 생애
2.1. 남궁장만을 죽이고 즉위하다
남궁장만이 자신을 놀린 송 민공을 바둑판을 던져 죽인 뒤 송공 유를 세웠다. 이때 다른 공자들은 소(蕭)나라로 달아나고 공자 어열은 박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소나라로 달아난 공족과 힘을 합쳐 남궁장만이 공자들을 죽이러 보낸 남궁우를 물리치고 오히려 송나라를 쳐서 남궁장만은 진(陳)나라로 달아났다. 송환공은 진(陳)나라에 뇌물을 보내 남궁장만을 속여서 포박한 뒤 죽였고,[2] 위(衛)나라로 달아난 맹획(猛獲)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공자 어열이 송나라 군주가 되니 그가 바로 송환공이다.
2.2. 제환공과 패자 자리를 다투다
송환공 원년(기원전 681년), 봄 송환공은 노(魯)나라, 제(齊)나라, 진(陳)나라, 채(蔡)나라, 주(邾)나라와 북행 땅에서 회맹해 송나라를 안정시켰다. 겨울에 송환공은 제나라의 군주 제환공(齊桓公)과 땅에서 회맹했다. 그리하여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송환공은 제후들이 공작인 자신 대신 후작에 불과한 제환공을 추대한 것에 한을 품고 곧 북행의 회맹을 저버렸다.
송환공 2년(기원전 680년), 봄 그 일로 인해 제나라는 진(陳)나라와 조나라와 함께 송나라를 쳤고, 천자국인 주(周)나라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여름 주나라는 선백(單伯)[3] 대(帶)를 보내 제후들과 만나 송나라와 화해한 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겨울에 송환공은 선백 대, 제환공, 위혜공, 정여공과 견 땅에서 회맹했다.
2.3. 제환공과 함께 망한 형나라를 일으키다.
송환공 3년(기원전 679년), 봄 송환공과 제환공, 진선공(陳宣公), 위혜공, 정여공과 견 땅에서 다시 회맹했다. 가을에 제후들이 송나라와 함께 예(郳)나라를 쳤다. 정나라 사람들은 송나라를 쳤다.
송환공 4년(기원전 678년), 여름 송나라, 제나라, 위나라, 제후 연합군은 송나라를 치는 정나라를 쳤다. 겨울에는 정나라와 화해했다. 송환공은 노나라, 제나라, 진(陳)나라, 위나라, 정나라와 유 땅에서 회맹했다.
송환공 14년(기원전 668년), 송환공은 노나라, 제나라와 함께 서(徐)나라를 쳤다.
송환공 15년(기원전 667년), 송환공은 제나라, 노나라, 진(陳)나라와 정나라와 유 땅에서 회맹했다.
송환공 16년(기원전 666년), 초나라가 정나라를 치니 송환공은 제나라, 노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구원했다.
송환공 20년(기원전 662년), 제환공은 초나라가 정나라를 쳐서 제후들에게 회맹을 요청했다. 여름 양구 땅에서 비공식 회맹을 가졌다.
송환공 23년(기원전 659년), 송환공, 제환공, 조소공은 섭북에 이르러 형나라를 구하러 갔다. 그런데, 형나라가 북적에게 망해버렸다. 여름 형나라를 위해 성을 다시 쌓았다.[4] 7월 초나라가 정나라와 가까워졌다. 제나라가 회맹을 배신한 정나라를 쳤다. 8월 송환공, 노희공, 제환공, 정문공, 주(邾)나라의 자작을 낙 땅에서 회맹해 정나라를 구원하려 했다.
송환공 24년(기원전 658년), 강나라, 황나라가 제나라에 귀의했다. 제환공, 송환공, 강나라와 황나라의 군주가 관 땅에서 회맹했다.
2.4. 제환공과 초나라를 치다
송환공 25년(기원전 657년), 송환공은 제나라, 강나라, 황나라, 3국의 군주와 양곡에서 만나 초나라를 치려했다.
송환공 26년(기원전 656년), 정월 제환공, 송환공, 노희공, 진선공, 위문공, 정 문공, 허목공, 조소공과 함께 채나를 치니 채나라가 패했다. 그리고 초나라를 치기 위해 형 땅에 주둔했다. 여름 초성왕이 굴완(屈完)을 보내 제후군 진영으로 가서 회맹에 참여했다. 12월 노나라의 공손자가 제나라, 송나라, 위나라, 정나라 군대와 함께 진(陳)나라를 치니 진(陳)나라가 화평을 요청했다
송환공 27년(기원전 655년), 송환공이 노 희공, 제환공, 진선공, 위문공, 정문공, 허희공, 조소공과 함께 수지에서 회맹했다. 주혜왕의 태자 희정(姬鄭)[5] 을 만났다. 그 이유는 주 왕실의 안정이었다.
송환공 28년(기원전 654년), 여름 송환공은 제환공 등 여러 제후들과 함께 정나라가 회맹에서 배신한 죄를 묻기 위해 정나라의 신밀 땅을 포위했다. 이에 초성왕은 허나라를 포위해 정나라를 구했다. 제후들은 허나라를 구하러 가서 초나라는 회군했다.
송환공 29년(기원전 653년), 7월 송환공은 노나라, 제나라와 영모 땅에서 회맹했다. 그 때 정나라를 치려 했다.
송환공 30년(기원전 652년), 정월 송환공은 주 왕실에 사자, 노희공, 제환공, 위문공, 허희공, 조공공, 정나라 세자 관과 조 땅에서 회맹했다. 겨울에 송환공이 병이 들자 태자 자보(子父)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 주려 하니 태자 자보는 서형인 공자 목이(目夷)에게 양보하려 했다. 3번이나 그랬음에도 공자 목이는 끝끝내 거절했다.
송환공 31년(기원전 651년), 3월 정축일 송환공이 병으로 죽어 태자 자보가 그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송양공(宋襄公)이다.
[1] 說은 사람으로 쓰일 때 설이 아닌 열이라고 읽는다.[2] 그 내용은 송민공(宋閔公) 항목과 송공유 항목에 나왔듯이 뇌물을 받은 진(陳)나라 군주가 미녀를 시켜 술을 꽐라가 되도록 먹인 뒤 송나라로 보내 송환공이 그를 처형했다.[3] 사람의 성씨나 나라 이름, 흉노 선우를 뜻하는 의미에서는 單의 음은 선이다.[4] 그런데, 그 후 수십 년이 지나 형나라는 북적과 짜고 위(衛)나라를 치다가 위문공에게 패해 나라가 완전히 망해버렸다.[5] 훗날의 주양왕(周襄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