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침례신학교
1. 개요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용두리에 있었던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수도권 지역 목사들을 양성했던 신학교. 침례신학대학교와의 통합 후 침례신학대학교 안성캠퍼스가 되었으나 침신대 신학과에 완전히 흡수되며 안성캠퍼스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약칭은 수도침신이었다.
2. 학과
- 신학과
3. 역사
1981년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은혜신학교, 경기신학교, 영남신학교 등 11개 신학교를 통합해서 안성시에 수도침례신학교를 세운다. 그리고 5년 뒤에 4년제 학력인정 각종학교로 인가된다. 침신대를 제외한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 신학교들이 모두 뭉친 학교라서 나름 침신대와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침례회에서 신학교를 침신대로 일원화하자는 정책이 실현되어서 2006년에 침신대와 통합되었다. 장로회는 규모가 크고 교단이 다양하지만 침례회는 상대적으로 작고 교단이 적기에 신학교를 많이 둘 필요가 없고 기독교한국침례회의 파벌화를 막기위해 신학교를 합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더이상 학부생을 모집하지 않지만 기존의 수도침신 소속 신학생은 안성캠퍼스에 계속 재학하게 하는 방식으로 침신대 안성캠퍼스로 통합되었다. 2009년 2월 28일에 수도침신 소속 신학생이 모두 졸업하자 폐쇄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침신대는 수도침신이 폐교되고나서 동두천캠퍼스를 신설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수도권 진출을 위해 동두천캠퍼스를 신설할거였으면 차라리 안성캠퍼스를 없애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안성캠은 접근성이 낮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다르게 침신대는 안성캠퍼스를 이원화캠퍼스로 활용하려고 했으나 수도권정비계획법 때문에 안성캠퍼스를 활용할 수 없었고 결국 폐교했으나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으로 동두천 미군 부지에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동두천캠퍼스로 부활시키려고 했던거다. 하지만 예산 부족과 인구 절벽 때문에 회의적인 여론이 커지자 침신대 동두천캠퍼스는 결국 계획이 엎어지며 흐지부지된다.
교계 일부에서는 수도침례신학교가 침신대 출신과 충청권 교권 파벌에게 희생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기독교한국침례회에서도 선택지가 없었다는게 교계의 정론이다. 학령인구가 떨어지고있어서 신입생 충원률이 떨어지고 있는데 정작 침례회 신학과는 한국의 개신교 신학과에서도 입결이 하위권이니 어쩔 수 없었던듯.[1] 종합대학에 통폐합해서 입결을 올릴수도 없는게, 침례회는 종합대학이 한양대학교 밖에 없고 한양대마저도 재단이 다르고 침례회 직영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수도침신과의 통합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게다가 한양대는 미션스쿨이 아니라서 신학과 개설을 꺼렸다는 풍문이 있다. 어차피 신학과는 (신입생 충원률을 제외하면) 입결이 무의미하고 만약 통합이 일어났다면 지리적으로 가까운 에리카캠퍼스에 통합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만약 가장 성공한 대학 분교라는 호평을 듣는 에리카캠퍼스에 통합했다면 학생 정원에 목마른 한양대와 신학과 입결을 올리고 싶은 침례회 둘다 이득을 보았을 것이다.
비록 학교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동문회가 꾸준히 개최된다고 한다.
4. 통합 이후
2010년 11월에 침례신학대학교 직원 유모씨가 도서관 장서 1만 9천여 권을 몰래 단돈 25만 원에 고물상에게 팔아넘긴 사건이 있었다. 학교 측이 이 사건을 파악한 때는 무려 3년이 지난 2013년 11월.
원래 수도침례신학교 도서관에 있던 장서를 정리하여 묶어두고 언젠가 대전으로 옮겨올 예정이었는데, 유모씨가 이 장서를 학교 몰래 팔아버린 것이다. 1만 9천여 권을 고작 25만 원에 팔았으므로 권당 가격이 고작 13원에 불과했다. 2만 권에 가까운 책을 폐지 값도 안 받고 처리한 것. 학교 측이 사태를 인식한 것도 장서를 대전으로 옮겨오려고 직원을 안성에 보내 장서를 확인해보았기 때문이었다. 책만이 아니라 집기도구ㆍ컴퓨터 본체 및 모니터ㆍ중계기 등도 같이 팔았다고 한다.
학교는 유씨를 직위해제하고 3개월간 대기만 하게 하다가 업무에 복귀시켰다. 그러다가 2014년 8월에 사태가 커지는 기미가 보이자 유씨가 사표를 제출했는데, 한 달 뒤에 수리되어 퇴직금까지 받고 나갔다. 침신대 규정상 사표를 반려하지 않으면 한 달 뒤에 자동수리된다고 한다. 유씨가 학교법인 이사였던 목사의 조카였고 제대로 처벌도 받지 않고 나갔기 때문에 외압설이 나왔고, 몇몇 언론에까지 보도되었다.
배국원 총장은 외압설을 부정하고 “없어진 책을 어떻게 갖고 오라고 하느냐. 지금으로서는 민형사적 조치를 취할 계획이 없다.”라고 말했다 한다. 학교 조사위원회는 유씨가 처분한 장서의 가격만 대략 7천9백여 만원으로 추정했지만, 도서의 수명이 5년이라는 규정을 들어 2010년 당시 이 책들의 가치는 전부 0원이 된다고 해석했다.
당연히 학교 내에서도 그게 말이 되느냐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한겨레 기사
뉴스엔조이 기사
5. 출신인물
[1] 여담으로 미국 개신교에서는 정반대로 침례회가 대다수고 장로회가 적어서 상황이 정반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