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침례회

 


<rowcolor=#ffffff> '''기독교한국침례회
The Korea Baptist Convention'''
[image]
<colbgcolor=#404040><colcolor=#ffffff> '''영문명칭'''
The Korea Baptist Convention
'''한문명칭'''
基督敎韓國浸禮會
'''약칭'''
기침
'''설립연도'''
1889년
'''소속국가'''
[image] '''대한민국'''
'''총회장'''
박문수 목사
'''총무'''
김일엽 목사
'''표어'''
'''다가올 침례교시대!'''
'''교인 수'''
약 520,000명(2020년#)
'''위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6길 10, 12층 (여의도동)

/ 교회진흥원
1. 개요 및 역사
2. 교단 신학교
3. 지역 분포
4. 주요 교회와 목회자

[clearfix]

1. 개요 및 역사


한국의 침례회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 선교사 맬컴 펜윅(Malcolm C. Fenwick)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가 그 기원이다.[1] 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에 집중했다.[2] 또한 만주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펜윅의 신학과 성경관은 매우 보수적이었는데, 이러한 특색은 현재의 한국침례회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남아있다.
1949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교단명이 변경되었으며, 미국 최대의 교단인 남침례회 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와 1950년에 제휴하였고 6.25 이후 존 애버내시(John A,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등의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를 따르는 교인들과 동아기독교회 출신 토착 교인들 간의 신학적 논쟁으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구 동아기독교회 계열, 일명 포항파. 안대벽 목사 중심)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미국 남침례회 선교사 계열, 일명 대전파. 장일수 목사 중심)로 분열되기도 했으나,[3] 1968년 두 파벌이 합동하였다.[4]
그 외에 1950년 미국 남침례회를 탈퇴한 목회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독립적 교회들의 연합단체[5]인 '성서침례친교회'(약칭 "성침")도 1954년 미국의 아이작 포스터(Isaac Foster, 한국명 표수다) 선교사가 대한민국에 들어와 서울 왕십리에 성서침례교회와 신학교를 설립한 이래 작은 규모이지만,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2. 교단 신학교



한국의 수많은 개신교 교단이 교단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여럿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6]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신학교는 1954년 설립된 대전광역시 유성구 소재의 한국침례신학대학교가 유일하다. 1960년대에는 포항파가 설립한 대한침례회신학교도 있었으나 1968년 포항파와 대전파가 합동하면서 침신대에 흡수, 폐교되었으며, 수도권 내의 군소 신학교와 영남신학교 등 침례회 군소 신학교들을 통합하여 1981년 경기도 안성시에 4년제 학력인정 각종학교인 수도침례신학교를 설립하였으나, 2006년 침례신학대와 통합하여 안성캠퍼스로 개칭되었고, 침례신학대로 편입한 학생들을 제외한 수도침례신학교 잔류 학생들이 모두 졸업함과 동시에 2009년 폐교되었다.

3. 지역 분포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내 5대 개신교 교파'''[7] '''중 지역적 편중(쏠림)이 가장 심하다.'''
교단의 하나뿐인 신학교가 수도권이 아닌 지방(대전)에 있다보니, 기독교한국침례회는 국내 5대 개신교 교단이고 총회가 서울 여의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속교회 지역편중이 심각한 수준이다.[8]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충청권 남부 및 경기도 남부, 전라북도 북부 지역, 부산경상북도 동해안 지역[9] 등에서 교세가 강하다. 특히 '''침례신학대학교가 위치한 대전과 인근 위성도시 지역에 교세가 가장 집중되어 있고''',[10] 그 외에 고양, 수원, 부산, 포항, 문경, 예천, 울진, 울릉도 등지가 침례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더욱이 이들 지역으로의 집중은 개교회주의가 강하고 교회 설립이 자유로운 침례회의 특성에 신학교 통폐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지역 거점 신학교의 소멸까지 겹쳐져[11]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12][13]
기독교한국침례회 홈페이지에서 지역별 지방회 목록을 살펴보면 다른 지역은 인구 990만명인 서울만 31개일 뿐 도단위의 경우 잘해야 도시별로 1개, 대도시의 경우는 많아야 4~5개 수준인데 비해 인구 154만 명에 불과한 대전에는 무려 15개의 지방회가 있다. 비슷한 인구수를 가진(151만 명) 강원도만 해도 지방회는 6개에 불과하며, 인접 지역인 충북(159만 명)은 7개, 충남(211만 명)은 12개다. 이를 지역별 인구수 대비로 환산해 보면 서울이 지방회당 31만 9천 명[14], 강원도는 지방회당 25만 1천 명, 충북은 22만 7천 명, 그나마 밀도가 높은 편인 충남도 17만 6천 명 정도 인구를 커버하는데 비해 대전은 지방회당 10만 3천 명 정도 밖에 커버하지 않아 그만큼 인구 대비 침례교회의 비중이 높다는 결과가 나와 침례회의 지역 편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당장 바로 아래 문단에 수록된 국내 침례회 주요교회 명단 중 5개 교회가 대전에 있다!!'''
국내에서 인구 대비 침례회 비중이 대전보다 높은 지역은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인구수 1만 명 남짓에 별도의 지방회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지역 교회의 절반이 침례교회이며, '리' 단위로 침례교회가 하나씩 있을 정도다.[15][16] 침례회의 교세가 약한 광주광역시, 전라남도[17] 인천광역시, 강원도, 제주도 등지에서는 침례회를 이단으로 오해하는 사례도 적지 않음을 감안하면 이는 심각한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교회주의 성향이 강하고 신학교 교수들이나 신학생들의 신학 노선도 천차만별인 침례회의 특성은 교세 집중 지역에 교회가 난립해도 통폐합하기 쉽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18] 교단 내에서도 수도침례신학교 폐교 이후 수도권 신학교의 부재[19]와 지역 편중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2010년대 들어 동두천 주한미군 기지 캠프 님블 부지에 침례신학대의 수도권 캠퍼스 설립을 추진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승인까지 얻었으나 뚜렷한 진전이 없이 계속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승인이 취소되고 말았다.[20]

4. 주요 교회와 목회자


  • 지구촌교회 : 최성은 목사(3대, 현 담임), 진재혁 목사(2대, 케냐 선교사 파송), 이동원 목사(원로)[21]
  • 수원중앙침례교회 : 고명진 목사(현 담임), 김장환 목사(원로)[22]
  • 대흥침례교회 : 정인택 목사(7대,현 담임) 조경호 목사(6대,원로) 안종만 목사(5대,원로)
  • 갈보리교회 : 원재춘 목사
  • 늘사랑교회 : 정승룡 목사[23]
  • 중문교회 : 장경동 목사[24]
  • 여의도침례교회 : 국명호 목사[25]
  • 삼호교회 : 안종대 목사[26]
  • 강남중앙침례교회 : 최병락 목사(3대, 현 담임), 피영민 목사(2대), 김충기 목사(원로)[27]
  • 연세중앙교회 : 윤석전 목사[28]
  • 서울교회 : 성도현 목사[29]
  • 서울제일교회 : 김형윤 목사
  • 신촌중앙교회 : 정인환 목사
  • 빛의자녀들교회 : 김형민 목사[30]
  • 영통영락교회 : 고흥식 목사[31]
  • 성광교회 : 유관재 목사(현 담임), 유병기 목사(원로)[32]
  • 열린교회 : 우경수 목사
  • 열음터교회 : 신광은 목사[33]
  • 로고스서원 : 김기현 목사[34]
  • 포도나무교회 : 여주봉 목사[35]
  • 은혜드림교회 : 최인선 목사
  • 부산침례교회 : 김종성 목사[36]
  • 영안교회 : 박정근 목사[37]
  • 해운대교회 : 안효원 목사(현 담임), 송성구 목사(원로)
  • 범일교회 : 최재훈 목사(현 담임), 최병산 목사(원로)
  • 새밝교회 : 강상원·강밝내 목사(공동담임)
  • 춘천한마음교회 : 김성로 목사[38]
  • 하늘비전교회 : 오영택 목사(현 담임), 오관석 목사(원로)[39]
  • 함께하는교회 : 김요한 목사[40]
  • 점촌침례교회 : 김위수 목사[41]
  • 울산소리침례교회 : 진영식 목사
  • 생수의강교회 : 천명원 목사[42]
  • 성림침례교회 : 김종이 목사[43]
[1] 선교 초기인 1895년 미국 보스턴 소재 엘라싱 기념 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E.C.폴링 선교사 부부를 파송,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 지역인 강경에 침례교회를 세웠으나 해당 선교회의 자금난으로 이들은 몇 년 못가 철수하였고 펜윅의 대한기독교회로 흡수되었다.[2] 실제 당시 동아기독교 소속 교회들은 경상도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교세가 집중되어 있었다.[3]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당시 침례회 총회장이었던 안대벽 목사를 불신임한 것이 분열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4] 사실 이게 말이 좋아서 합동이지, 엄밀히 말해 안대벽 목사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포항파가 급격히 힘을 잃어 대전파에 일방적으로 흡수당한 것이다. 충청권과 더불어 한국침례회의 2대 중심지격인 영남 지방의 침례회 교세가 오늘날 정체되고 대전 지역에 교세가 심하게 편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 합동이기도 하다.[5] 교단에 가까운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지만 소속 교회들이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데다 이름에도 '친교회'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교회를 총괄하거나 제재하는 기능은 없으며, 목회자들의 정보 공유와 신학적 동질성을 위한 친목 단체에 가깝다. 물론 문화체육관광부에는 개신교 교단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하다.[6] 다만 성결교회의 경우 기성, 예성, 나성 등 각 교단별로 신학교가 1곳 뿐이다.[7] 장로회, 감리회, 성결교회, 순복음, 침례회[8] 그나마 국내에서 지역 편중이 심한 교단들로 구세군, 예장재건, 예장고신, 루터교회, 대한예수교복음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교단의 태동 또는 총회 소재지가 지방이거나 국내에서 교세가 약한 군소 교단으로 서울에 총회를 두는 대형교단인 침례회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9]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구세군 대한본영의 교세가 강한 영덕군은 제외.[10] 그 이유는, 상술하였듯이 광복 후 재건된 침례회가 1959년 미국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대전지역 파벌(기독교대한침례회)과 펜윅의 동아기독교회 출신 교인들이 주축이 된 포항지역 파벌(대한기독교침례회)로 나뉘었고, 1968년 대전파가 포항파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동하여 지금의 기독교한국침례회가 되었기 때문이다.[11] 1981년 부산 영남침례신학교 폐교, 2009년 안성 수도침례신학교 폐교.[12] 한 예로,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이전 연기군 남면 나성리에 위치하고 있던 한 침례교회는 교회 소재지 일원이 행복도시 예정지에 편입되어 주민들이 이주하게 되자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종시에 정착하여 새로이 유입되는 지역 이주민들을 흡수, 발전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침례신학대학교 인근 대전 유성구 노은동 외곽 지역으로 이주, 그곳에 정착해 흔한 인대전 침례교회가 되어 버렸다. 면소재지인 종촌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 통합 교회가 행복도시가 건설되면서 종교용지를 분양받아 새롭게 단장하고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자리잡은 것이나, 인근 송담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 합동 교회가 임시로 조치원읍으로 이전했다가 세종시 건설 이후 원래 지역으로 복귀하여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13] 참고로 말하면 대전에 최초의 침례교회인 대전제일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 직후인 1954년이다. 이는 1907년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회(유성교회), 1919년에 세워진 최초의 성결교회(대전중앙교회), 1937년에 세워진 최초의 구세군교회(대전중앙영문)는 물론 1938년에 세워진 최초의 장로교회(대전제일교회)보다도 훨씬 늦다. 애초에 동아기독교회의 선교구역에 대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6.25 이후 미국 남침례회 소속의 존 애버내시(John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선교사가 대전에 성서신학원을 세운 것이 대전 지역 침례회 선교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교단 중 대전에 진입한 시기가 가장 늦은 침례회가 신학교를 등에 업고 대전 지역에서 개신교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라 할만 하다. [14] 언뜻 보면 지방회 수가 많아서 서울의 침례교회 비중이 가장 높아 보이지만 인구 대비로 계산해 보면 의외로 침례교회 비중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 중의 하나가 서울이다. 그나마 서울 지역의 침례교회는 한강 이남, 특히 서남부권(통칭 영등포권) 및 강남권에 집중되어 있고, 동북부권(통칭 성북권)에는 매우 드물다.[15] 이미 1910년대에 침례회의 모태인 펜윅의 대한기독교회가 울릉도에 상륙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 활동을 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 울릉군보다는 밀도가 낮지만 울진군도 대전보다 인구 대비 침례회 교세가 강한 곳에 속한다. 다만 워낙에 인구수가 적은 오지 지역이다 보니 침례교회 밀도만 높을 뿐 대전처럼 메가처치급 교회를 배출할 정도는 아니다.[16] 물론 시도 단위에서 시군구 단위로 범주를 더욱 좁혀 지방회 소재지에 따른 침례교회 지역 분포를 확인해보면 인구수 대비 침례교회 비율은 단연 대전광역시 유성구가 1위이다. 침신대 인근인 유성구 노은지구 일대만 살펴보아도 개척교회 포함 20개 가까운 침례교회가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17] 전라북도, 특히 대전과 인접한 전북 지역은 호남 지역 침례교회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을 정도로 침례회의 비중이 높다. [18] 예장 통합, 예장 합동이나 감리회의 경우 교회설립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교단법을 통해 어느 정도 거리 제한을 두어(통합/합동 300 m, 감리회 200 m 등) 특정 지역에 같은 교단의 교회들이 몰리는 것을 막는 반면 성문화된 교단법 자체가 없는 침례회의 경우 이러한 제한이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침례회의 비중이 높은 대전의 경우 같은 동 관내에 불과 50 m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침례회 개척교회가 몇 개씩 난립하는 현상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둔산신도시와 노은지구. 심지어는 침례교회가 입주해 있는 한 건물 바로 옆 건물에 또다른 침례교회가 있는 사례도 실제 존재한다![19] 참고로 기독교한국침례회 측은 전체 한국 침례교회의 절반이 수도권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20] 침신대 동두천 캠퍼스 건설로 인해 침신대의 중추 기능이 수도권으로 옮겨가고 결국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대전 지역 교권파 정치목사들이 의도적으로 캠퍼스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로비를 벌여 방해했다는 의혹이 있다.[21] 흔히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목사와 더불어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린다. 교계에서 존경받는 원로목회자 중 한명이다. 현재는 담임목사직에서 은퇴하여 원로목사가 되었다. 2대 담임목사였던 진재혁 목사는 2019년 5월 26일부로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9월부터는 타코마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였던 최성은 목사가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22] 극동방송의 사장이며, 세계침례회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나는꼼수다김용민과 마찰을 일으켰다. [23]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주축의 교회로 성장하다가 유성선병원 옆으로 이전하였는데, 지하에 건축된 예배당으로 일명 '카타콤'교회로도 불리기도 한다.[24] 기독사랑실천당 대표를 할 뻔 했었다. 물론 본인이 안 한다고 해서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베뢰아 아카데미 출신.[25] 고 한기만 목사가 1972년 창립한 교회. 강남중앙교회, 연세중앙교회와 더불어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침례회 대형 교회이다.[26] 서울의 대표적인 침례회 대형교회 중 하나. 1976년, 방배동의 삼호아파트 상가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27] 전 담임목사였던 피영민 목사는 본래 침신대 교수로, 칼뱅주의 역사신학자로 유명했다. 장로교의 이재훈 목사가 피영민 목사의 설교를 그대로 베껴서 설교한 것이 드러나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설교 표절의 피해자. 참조.[28] 서울의 대표적인 침례회 대형교회 중 하나. 1986년 연세대 후문 근처 상가 지하에서 개척해 현재는 구로구 궁동에 있다.[29] 6.25 이후 미국 남침례회가 최초로 설립한 교회로 현재 한국침례회 주류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이다.[30] 2017년 '대학연합교회'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참고로, 담임목사는 이름과 달리 여성이다. 배우 최강희가 다니는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31] 한때 에덴수도원의 후신으로 알려져 이단 논란이 있었던 명인교회 자리에 들어섰다. 고흥식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하였다.[32] 1966년 서울 성산동에서 천막교회로 시작하여 1990년대 고양시로 이전하였다. 유관재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33] 2014년 2월에 한국 개신교의 기형적인 구원관을 비판하는 저서'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출판하여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박사과정 수학중이며, 다수의 신학서적을 번역, 저술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서적이 한국교회의 대형화, 기업화를 비판하는 '메가처치논박'이다.[34] 평신도에게 다가가기 쉬운 다수의 신학서적을 번역, 저술한 작가로 더욱 유명하다. 작가로 더 유명한 김기현 목사와 신광은 목사는 성향상 재침례파(재세례파)에 가깝다.[35] 미국 남침례회 출신이며, 초교파적 연합 선교단체인 새물결선교회의 회장. 그가 담임하는 포도나무교회는 새물결선교회의 집회와 교육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사실상 새물결선교회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6] 동아기독교 재건의 주역이었던 안대벽 목사가 1951년 설립한 부산 지역 침례회의 모교회. 침례회 분열 시기에는 포항파의 본산 역할을 하였다. 동래구 안락동 동래봉생병원 인근에 있다.[37] 부산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형 침례교회. 가야동 본당과 센텀(재송동)에 지성전을 두고 있다.[38] 김성로 목사는 본래 체육교사 출신으로, 뒤늦게 침례회 신학을 공부하여 40대 후반에 목사 안수를 받고 강원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마음교회를 개척하여 춘천의 대표적인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으며, 2013년 7월 대동 · 대한운수 차고지 맞은편에 있던 예배당을 인수, 이전하였다. 그러나 소위 '부활복음'이 지나치게 비성경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2016년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을 중심으로 이단성 연구조사가 진행 중이다. 침례회에서는 문제가 있는 부분의 수정을 약속했다며 김성로 목사를 옹호하고 있지만, 예장합동은 김성로 목사의 신학사상을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고 아예 이단으로 낙인찍으려는 분위기. . 결론적으로는 예장합동 제 104회 총회에서 이단성 없음으로 결론짓고 교류금지를 해제하였다.[39] 서울중앙침례교회 월드비전교회 → 하늘비전교회로 교회 명칭이 변경됨. 참고로 담임목사는 원로목사의 아들이다.[40] '함께하는공동체'를 표방하며 4개 교회의 공동체 모임을 각자 가지며 문화사역에 힘쓰고 있다.[41] 구한말인 1909년 설립되어 110년의 역사를 가진 문경시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1957년 석조로 건축된 현 예배당은 문경시내에서 '돌교회'로 유명하기도 하다.[42] 김기동 목사로 유명한 서울성락교회에서 부목사와 베뢰아아카데미 원장 등을 하다 탈퇴를 하고 개척한 교회이다. 초기에는 부천에 있었으나 서울 금천구로 교회를 이전하였다. 기독교 한국침례회에 정식으로 회원가입을 하고 지방회에 소속된 것으로 보아 신학적으로는 베뢰아 요소들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43] 1987년부터 2005년까지 베뢰아 소속이었다. 그리고 2020년 8월 26일 기준으로 해당 교회에서 광주광역시 코로나 집단감염이 추가적으로 발생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한 신도가 광화문 집회 참가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