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제(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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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나라의 제23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8대 황제. 시호는 효순황제(孝順皇帝). 본명은 유보(劉保).
2. 생애
115년, 후한의 황제 안제와 궁인이었던 공민황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태자가 되었지만 황후였던 안사황후 염씨 등에 의해 생모는 짐독으로 살해당하고, 그 역시도 모함받아 제음왕(濟陰王)으로 폐위되었다.
안제 사후 북향후가 염황후에 의해서 황제로 옹립되었지만 불과 즉위 200일 만에 사망한다. 그뒤 염태후를 비롯한 그녀의 일족들은 북향후의 사망을 숨기고 다른 방계 황족을 비밀리에 옹립하려고 하였지만, 안제의 맏아들이자 비록 폐위되긴 하였으나 유일하게 황태자로 재위했었다는 명분이 있었던 순제는 뜻있는 관료들과 환관들의 지지를 받아 친위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정당한 지위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접전이 발생한 와중에 염씨 일족은 환관 손정 등에 의해서 몰살되고 염태후 또한 이궁으로 유폐되었다가 이듬해에 분사하였다. 북향후 또한 황제의 지위에서 추폐(追廢)하고 제왕의 예로서 매장하였으며,[2] 부황인 안제가 자신을 황태자에서 폐위하여 제음왕으로 내치는 조서도 회수하여 기록에서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즉위를 위한 정변에서 공을 세운 환관 19명을 후작에 봉하고 양자를 들여 작위를 세습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는 후한말 환관 세력이 강화되어 전횡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양기의 여동생을 황후로 책봉하니 바로 순열황후 양씨이다. 그녀가 황후가 된 이후 양기가 외척보정의 자격으로 대장군이 되었는데, 양씨 일족은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삼갔던 화희황후 등씨의 일족과는 정반대의 성향으로 횡포를 부려 환관과 함께 후한 중후기의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139년, 강족의 반란이 일어나서 사실상 순제의 즉위 말까지 지속된다. 이때 이 강족의 기세는 실로 대단해서 삼보 일대를 휩쓸며 노략질했고, 정서장군 마현(馬賢)이 이끌던 관군까지 격파한다. 강족은 장안 일대를 휩쓸며 심지어 서한 황제들의 묘역도 여러개 불태울 정도였다. 전임 황제들의 묘역까지 탈 정도로 수도권이 유린당했으나 인구 감소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30년대 중반부터 140년까지 강족 외에도 제국 곳곳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날 정도의 혼란상이 있었다.
3. 후비와 자녀
- 순열황후 양씨
- 귀인 양씨(순열황후의 고모)
- 귀인 두씨
- 귀인 복씨
- 미인 우씨[3] > 태고(大家)[4] > 헌릉귀인(憲陵貴人)[5]
- 충제
- 무양장공주 유생
- 미인 우씨[6]
- 생모 미상
- 관군장공주 유성남
- 여양장공주 유광
4. 둘러보기
[1] 190년 채옹의 건의로 취소[2] 그래서 북향후를 세계에서 제외하여 순제를 제7대 황제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3] 虞氏. 충제의 생모이다. 아래의 미인 우씨와 한자가 다르다.[4] 충제가 요절하였고, 순열양태후를 바탕으로 양씨 일족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태고라 칭하였을 뿐이라고 후한서 황후기에 기록되어 있다. 태고는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한자음인 대가로 읽지 않고 태고라 한다.[5] 희평 4년에 질제의 생모 발해효왕비 진씨와 함께 격상되었다.[6] 이름은 우통기(友通期), 바로 위의 헌릉귀인 우씨와는 한자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