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제(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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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나라의 제21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6대 황제. 휘는 호(祜). 장제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청하효왕 유경이다. 직전의 상제만큼은 아니지만 13살의 어린나이로 황제로 즉위했다.
아버지 유경은 원래 장제의 태자였지만, 생모 송귀인이 피살된 뒤에 청하왕(淸河王)이 되었다.[2] 그러나 유경의 이복동생 화제의 아들 상제가 일찍 죽자, 화희황후는 화제의 장자 유승이 있었지만 그가 고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후계에서 제외하고 방계인 안제를 옹립하였다. 유경과 생모 좌씨는 화희황후의 붕어 이후 상주에 의해 효덕황(孝德皇), 효덕후(孝德后)로 추존되었다.[3] 삼국연의(1994)에 단역으로나마 잠시 나왔다.
2. 생애
안제의 옹립에 대해 화제의 장자인 유승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비판하는 의견이 소수 있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사공 주장(周章)이 폐립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자살하는 등의 모반도 발생했지만, 등태후의 섭정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안제의 정통성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107년, 흉노의 위협으로 인해 서역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111년, 중앙과 지방의 대신들에게 지덕이 겸비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했는데 그때 장형이 천거를 받게 된다.
105년, 고구려 왕자 수성이 다시 한을 쳐서 요동을 회복하는 등 요동땅을 둘러 싼 전쟁이 시작되었다. 121년에 안제가 파견한 유주 자사 빙환과 현토 군수 요광, 요동 태수 채풍 등이 모두 왕자 수성이 이끄는 고구려, 백제와 예의 연합군에 패했다. 121년, 왕자 수성이 채풍을 죽이고 한의 군사를 격파했다.
125년, 불과 32살에 안제는 지방으로 순행을 갔다가 낙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사망하였다. 안사황후 염씨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임조칭제하고 방계 황족인 소제를 옹립했지만 불과 200일 만에 죽었고, 환관 세력 등의 비호를 받은 정변을 통해 안제의 맏아들인 순제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안제 치세의 대부분은 등태후가 섭정하고 있었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 안제에게 권력을 돌려주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 안제가 통치한 기간은 재위기간 전체에서 3.5년에 지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안제 재위 시기 후한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등태후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안제는 3.5년에 통치기간 동안 암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충신 양진의 4번의 간곡한 상소를 모두 무시하고 여자에 빠지거나 간신과 환관에 말에 귀기울이거나 자신의 유모(乳母)를 위해 국고가 텅 빔에도 저택을 지어주는 등 여지없는 암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3. 둘러보기
[1] 190년 채옹의 건의로 취소[2] 이 청하효왕 유경은 한국의 강릉 유씨 출발이 되었다는 유전의 직계 선조이기도 하다. 안제의 형제인 유경의 아들이 유전의 선조로 되어 있다. 물론 유일한 근거는 한국 강릉 유씨 족보뿐이어서 신뢰하긴 어렵지만.[3] 사료에 성명이 좌희(左姬)이고 자가 소아(小娥)라 되어있다. 언니의 자는 대아(大娥)였다. 일족이 몰락하고 액정에 들어갔는데, 화제가 제왕들에게 궁인을 하사하면서 청하왕에게 가게 되었고, 왕의 총애를 받아 안제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