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에판 보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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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고의 축구선수이자 예술가.
유고슬라비아 올타임 탑 스코어러.
2. 생애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보베크는 세 살 위인 형과 함께 12살부터 HSK 데르비 자그레브라는 팀에서부터 축구를 시작하였다. 1938년에는 SK 자그레브로 옮겨 본격적인 프로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촉망받던 유망주였던 그는 클럽 회장의 배려로 1941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아드미라에 유학 겸 임대를 다녀오기도 했다.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리차닌과 그라잔스키 자그레브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센터 포워드로 활동하였다. 전쟁 이후에는 육군에서 복무하느라 유고슬라비아 육군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육군팀은 임시 리그[2] 결승전에서 세르비아에 패해 아쉽게 고배를 들었지만 보베크는 앞선 2경기에서 8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국가대표팀에도 선발이 되었다. 그리고 육군팀은 12월에 FK 파르티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3]아마 당시에 자그레브에서 축구를 하지 못했다면 저는 전쟁에 징집되었을 겁니다.
-스티에판 보베크
1946년에는 헝가리 출신의 일리스 스피츠가 파르티잔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스피츠는 보베크의 드리블 능력과 빠른 몸놀림을 눈여겨보다 보베크에게 포지션을 센터 포워드에서 인사이드 레프트로 바꿀 것을 권유하였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팀이 전후의 첫 유고슬라비아 리그 챔피언이 된 것. 특히 1946년 6월 8일 니쉬와의 경기에서는 한 경기에 무려 9골을 넣기도 하였다.
특히 1952년 컵 결승전에서는 더비 라이벌 FK 츠르베나 즈베즈다과의 맞대결[4] 이었다. 여기에서 파르티잔은 6대 0의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넣은 골이 통산 425골. 당시에 스트라이커로 뛰었던 마르코 발로크보다 통산 골의 수가 오히려 앞서고 파르티잔의 역대 최다 득점자이다.[5]
2.1.2. 국가대표
보베크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으로 2차례씩 월드컵과 올림픽에도 참가하였다. 올림픽에서는 한 마디로 콩의 전설.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한 보베크는 16강부터 4경기에 출전하여 경기 당 정확히 1골씩을 적립하였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결승에서 그레놀리 트리오를 앞세운 스웨덴에게 패배하여 준우승. 다음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도 전 경기에 참가하였고 3골을 넣는 활약을 보였지만 팀은 매직 마자르 헝가리에게 또 밀려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16강 소련과의 시합이 백미였다.[6] 후반 30분까지만 해도 유고슬라비아가 5대 1로 앞서고 있었지만 15분 동안 소련에게 무려 4골을 먹히면서 5대 5로 추격을 허용하였던 것. 결국 재경기 끝에 소련을 3대 1로 꺾고 8강에 진출하기는 했다.
월드컵에서는 올림픽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1950년 월드컵에서는 개최국 브라질과의 예선 최종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조 2위를 차지하고도 예선 탈락의 쓴 잔을 받게 되었다.[7] 다음 대회인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프랑스를 누르고 브라질과 함께 예선을 통과했지만 대회 우승팀 서독을 만나 2대 0으로 패배하였다.
하지만 보베크는 10년간의 대표 선수 생활동안 38골을 넣어 구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물론 그를 계승한 세르비아 대표팀을 포함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2. 이후
1959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한 보베크는 폴란드의 레기아 바르샤바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하였고, 곧 파르티잔의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3연패라는 기록을 이끌어내며 선수와 감독으로도 성공을 맛본 축구인이 되었다. 계약이 끝난 후에는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 FC에 건너가 우승을 맛보기도 하는 등 감독 생활 역시 탄탄대로를 달렸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95년에 파르티잔 역대 최고의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기술과 시야, 득점력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유고슬라비아 역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이다.
푸스카스는 그가 자신에게 큰 영향력을 준 축구 선수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보베크의 볼을 다루는 기술은 비교를 불허한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라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신과 같은 드리블 능력과 뒤꿈치 패스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는 아직도 축구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 중 하나이다.
- 페렌츠 푸스카스(!?)
4. 여담
반면 이러한 드리블 기술에 관해 보베크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5. 수상
5.1. 클럽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2회: 1946–47, 1948–49(이상 FK 파르티잔)
-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4회: 1947, 1952, 1954, 1957
5.2. 국가대표
5.3. 개인
5.4. 감독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3회: 1960–61, 1961–62, 1962–63(이상 FK 파르티잔)
- 그리스 리그 우승 2회: 1963–64, 1964–65(이상 파나티나이코스 FC)
- 그리스 컵 우승 1회: 1967(파나티나이코스 FC)
- 유고슬라비아 2부 리그 우승 1회: 1979(바다르)
[1] 유고슬라비아 올타임 탑 스코어러.[2] 1940년 이후에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1946년에 다시 리그가 개막되었다. 1945년엔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는 팀들과 육군팀, 보이보디나, 슬로베니아 등 총 8팀이 토너먼트로 승부를 겨루었다.[3] 의외인 것은 보베크는 크로아티아인이라는 것. FK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 육군팀을 계승했기 때문에 서포터들은 대부분 세르비아인들이라는 것,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갈등과 역사를 감안하면 보베크가 파르티잔을 선택한 것은 참으로 의외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4] 파르티잔과 츠르베나의 대결은 전 세계를 통틀어 서포터들과의 사이가 가장 안 좋기로 손꼽히는 라이벌전이다.[5] 정식 리그의 득점은 118골.[6] 정치적으로도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였던 소련과 그들과 약간 거리를 두는 것을 원했던 유고슬라비아와의 사이 역시 좋을 리가 없었다.[7] 1950년 대회에서는 조 1위만이 결승 리그에 진출하여 다시 리그를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8] 상술했듯 임시 리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