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렌츠 푸스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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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전 축구선수이자 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으며, 1993년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다.
1950년대 초중반 전 세계에 위세를 떨쳤던 전설의 팀 매직 마자르를 이끌었던 주장이다. 축구 역사상 최다 득점 4위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3]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혼베드 FC에서 자신의 최전성기를 보냈으며,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부다페스트 혼베드 FC
페렌츠 푸스카스는 1943년 부다페스트 혼베드 FC에 데뷔한다. 그러나 원래 팀은 부다페스트 혼베드 FC라는 명칭이 아니었는데, 키슈페스트라는 팀이 1949년에 헝가리 국방부에게 매각되었고, 군대의 산하 클럽이 되었다. 따라서 부다페스트 혼베드 FC 소속 선수들은 군대 계급이 주어졌고, 푸스카스는 계급이 소령이었다. 그래서 푸스카스는 '질주하는 소령'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푸스카스를 비롯한 졸탄 치보르, 산도르 코츠시스 등 당시 무적을 자랑하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선수들을 소유한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헝가리 리그에서 5번이나 우승을 차지한다. 푸스카스는 헝가리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으며, 월드사커에서 선정한 한 해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며, 자신이 유럽 최고의 선수라는 것을 각인시킨다. 이때의 활약으로 훗날 푸스카스의 10번은 부다페스트 혼베드 FC의 영구결번이 되었다.
이후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일어난 반공 봉기가 소련군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침 친선 경기 때문에 스페인에 나가 있었던 푸스카스는 스페인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스페인 정부는 푸스카스의 망명을 허용했지만 2년 동안 축구를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다시 축구를 할 수 있게 된 1958년, 푸스카스의 나이는 무려 31살이었다.
2.1.2.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에 입단한 푸스카스는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투톱을 이루었고, 프란시스코 헨토, 호세 산타마리아 등 뛰어난 선수들이뭉친 레알 마드리드는 '저승사자 군단'이라고 불리우며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유러피언컵 5연패를 달성한다. 특히 1960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결승전에서 디 스테파노의 해트트릭과 푸스카스의 4골로 7:3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1960–61, 1961–62, 1962–63, 1963–64, 1964–65 시즌 동안 라리가 5연패를 달성하고, 1959–60, 1960–61, 1962–63, 1963–64 시즌에는 4번의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엘 클라시코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번이나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등 레알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활약했다. 1966년에는 레알 마드리드가 6번째 유로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는데 힘을 보탰으나 결승전에는 출전하지 못했고, 이후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1945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푸스카스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6골을 기록하고, 룩셈부르크, 알바니아 등 여러 팀들을 상대로 수많은 골을 득점하며 매직 마자르[4] 의 에이스를 차지한다.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푸스카스가 4골을 득점하여,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이후 1953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난도르 히데구티, 요세프 보직,그리고 페렌츠 푸스카스 본인이 득점을 올리며 6:3으로 잉글랜드를 박살냈는데, 이 경기에서 푸스카스는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득점을 올렸으며, 드래그 백으로 당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자 잉글랜드의 주장이었던 빌리 라이트를 드래그 백으로 농락하면서 축구 종주국이자 세계최강이라고 뽐내던 잉글랜드를 완전히 농락했다.
1953년 중부 유럽 컵에서는 헝가리를 이끌고 만점활약을 하며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한 푸스카스는 조별리그에서 홍덕영 골키퍼가 버티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2골을 넣으며, 9:0 대승을 이끌었고, 서독 전에서도 1골을 넣으며 8:3 대승을 이끌었지만,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8강전과 4강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헝가리는 여전히 강했고, 브라질과 우루과이를 잇달아 꺾고 결승전에 진출한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서독과 다시 만난 헝가리는 푸스카스가 6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고, 전반 8분에는 졸탄 치보르가 골을 넣으며 2:0으로 앞서나간다. 이후 전반 10분에 막스 모어로크에게 실점을 허용하고, 전반 18분에 헬무트 란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2:2 동점으로 전반을 종료한다. 후반전, 헝가리는 다시 리드를 잡기 위해 파상공세를 퍼부었으나, 서독의 수비에 막히며 번번히 무산되었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했던 투렉은 속죄라도 하듯이 환상적인 선방을 연달아 보여주며 헝가리의 추가 득점을 막아냈다. 그리고 경기 종료 6분을 남겨놓고, 헬무트 란이 기가 막힌 중거리 슈팅으로 팀의 3번째 득점을 뽑아내었다. 헝가리는 동점을 만들기 위해 파상공세를 일으켰고, 경기 종료 2분을 남겨놓고 경기를 다시 동점으로 만드는 듯 보였으나 오프사이드가 선언됐다. 그렇게 경기는 서독의 우승으로 끝나며 헝가리의 무패 기록을 종식시켰고,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축구 역사상 최대의 이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여담으로 베른의 기적의 실상은 사실 서독 선수들이 약물을 이용하여 매직 마자르의 무패행진을 종료시킨 것이었고, 헝가리 선수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서독 선수들의 눈이 풀려있었다고 했는데, 하프타임에 서독 대표팀이 암페타민을 먹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5][6]
이후 헝가리는 4년 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을 준비했으나,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고 소련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결국 푸스카스는 스페인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매직 마자르는 붕괴되었다. 이후 푸스카스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뛰면서 1962년 칠레 월드컵에 출전하나 스페인은 1승 2패로 1라운드에서 광탈하였고 푸스카스는 스페인 국가대표팀으로 단 4경기만 뛰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2.3. 지도자 경력
1966년에 은퇴한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북미 축구 리그의 산 프란시스코의 감독으로 지도자 활동을 시작했으며 2년후 스페인으로 다시 복귀해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의 지휘봉을 1년간 잡기도했다. 그후, 1970년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강호 파나티나이코스 FC로 감독직을 옮겼는데 첫시즌만에 팀을 '''유로피언 컵 결승'''까지 올려 놓는 대활약을 했다.[7]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그리스 클럽 역사상 첫 유럽대항전 결승 진출이며 지금까지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파나티나이코스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현재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뮌헨으로 평가받는 올림피아코스 FC가 단 한 번도 8강을 가보지 못한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대단한 업적. 그 후 파나티나이코스에 있는동안 두번의 리그 우승도 달성하였으나, 나머지 2년을 무관으로 보내자 결국 경질되며 다시 스페인으로 복귀하였고 그후 칠레의 콜로-콜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대표팀이나 클럽팀을 맡기도 하였다. 호주의 사우스 멜버른 감독 지휘봉도 잡는등 유럽, 남미, 중동, 호주 등등 다양한 국가에서 감독 생활을 이어갔지만 별다른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 이후 헝가리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귀국해서 1993년에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1년간 잡은 후 축구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 후 노년을 조용히 보내다가 2006년 11월 17일 작고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강력한 왼발슛이다. 슛도 패스도 심지어 개인기까지 지독하게 왼발만을 고집했기에 별명이 '''악마의 왼발.''' 더욱 무서운 것은 '''85경기 84골을 29세 이전에''' 이룬 것이라는 것.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와 경기했던 우리나라의 홍덕영 선수에 의하면 그의 슈팅은 너무 강력해서 선방하면 갈비뼈가 부러질것같은 고통을 주었고 골대에 공이 맞으면 한참동안이나 흔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문제점은 지독한 왼발 고집이다. 오른발로 밀어넣어도 될 상황에서 각도까지 바꿔가며 굳이 왼발로 차려는 움직임을 보여줬다. 영상은 찾을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많은 골을 놓쳤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래도 푸스카스는 어마무시한 득점기록을 남겼다.[8] 이런 기록만 보면 최전방 스트라이커일것 같지만 드리블도 수준급이었고 연계,기회창출능력 역시 뛰어났다. 매직 마자르의 'MM 포메이션'에서 그는 포메이션상 코치슈와 스트라이커위치에 있지만 실제로는 제로톱에 위치한 폴스 나인 역할의 중앙 공격수였던 히데구티 만큼 내려오며 공격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또한 레알에서도 그렇고 팀원들과의 유기적인 공격연계에도 아주 뛰어났다.
마치 요한 크루이프가 토탈 풋볼을 잘 이행해낸것처럼 그 역시도 '소셜리스트 풋볼' 정립에 있어서 크나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정말 아쉬운것은 헝가리 혁명이다. 축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헝가리 혁명이 없었다면 축구강국은 브라질이 아닌 헝가리였을 수도 있다. 월드컵 결승에는 정말 많은 비극과 기적이 있었지만 푸스카스에게 있어서 최악의 비극은 당연 '베른의 비극', 또 스페인으로 귀화했을때는 운없게도 4경기밖에 못뛰고 다시한번 국대은퇴를 선언했어야 했으니...... 2009년에는 올해의 골 상의 이름을 푸스카스상으로 변경해서 발롱도르와 함께 수상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면 축구사의 푸스카스가 남긴 발자취가 대단하단것을 알수 있다.
또한 푸스카스는 드래그 백의 창시자인데 위 동영상에서 골을 넣기 전의 플레이가 바로 드래그 백이다. 경기 이후 그는 연습한 적이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 기술이라고 인터뷰했지만 거짓말이고 실제로는 심혈을 기울여서 연습했다고 한다. 동료들은 실전에서 쓰지도 못할 걸 뭐하러 연습하냐고 비웃었지만...
참고로, 저 기술이 나온 경기는 그 유명한 잉글랜드가 헝가리에게 6-3으로 패배를 당한 웸블리 참사. 드래그 백에 속아서 굴욕적으로 넘어진 수비수도 잉글랜드 축구의 레전드로 명성이 있던 빌리 라이트였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저 쉬운 드래그 백 기술을 저 때까지 안 썼단 말야?" 하고 놀랄 수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발전된 과학기술로 개발된 축구화는 푸스카스의 전성기 시절 나온 물건이고 그 전에 축구할 때 쓰던 신발은 묵직했기 때문에 저런 기술을 잘못 사용했다간 볼 컨트롤도 제대로 못하고 빼앗기게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고 한다.
4. 평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선수로, 일반적으로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 등이 함께 묶여서 거론될 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묶이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는 저 넷에 비해 역대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는 순위에서 탈락하는 일이 잦은데 그도 그럴 것이 시기상으로 보면 저들보다 훨씬 이전에 활동했고 그 당시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준으로 정확하게 평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9] 그렇다고 해도 축구 역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선수 중 하나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디 스테파노와 비교하자면 헝가리 축구의 맥이 끊겼고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기 전 축구를 2년이나 쉰 데다가 유러피언컵 5연패 당시 팀 내 비중면에서 디 스테파노보다 조금 밀렸는데 이 때문에 한 수 아래로 평가되어 저평가되는 원인이 되었다.
역대 최초의 월드 스타라고 할만한 선수로서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중반까지 헝가리 국대와 부다페스트 혼베드 소속으로서 세계를 제패, 그러다가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국가 대표 팀이 공중분해되자 스페인으로 이주. 이에 따라 망명으로 인한 출장 정지 2년을 받고 31세가 된 1958년에야 레알 마드리드 CF 소속으로 뛰게 되는데, 이때부터 디 스테파노와 더불어 5연속으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요컨대 무려 20년 가까이 세계 축구계의 정점에 있던 선수로, 요즘으로 치면 99/00~01/02 시즌 즈음에 데뷔해서 지금까지도 메날두와 동급의 활약을 보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
5. 기록
5.1. 대회 기록
- 부다페스트 혼베드 FC (1943~1956)
- 헝가리 리그: 1949-50, 1950, 1952, 1954, 1955
- 레알 마드리드 CF (1958~1966)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60
- FIFA 월드컵 골든볼: 1954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4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59-60, 1963-64
- 라리가 득점왕: 1959-60, 1960-61, 1962-63, 1963-64
- 헝가리 리그 득점왕: 1948-49, 1949-50, 1950, 1953
- 센트럴 유러피언 인터내셔널컵 득점왕: 1954
- 헝가리 올해의 축구 선수: 1950
- FIFA 100: 2004
- UEFA 주빌리 어워드[10] : 2003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레알 마드리드 명예의 전당: 1966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53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0, 1961, 1962, 1963
- 레키프 20세기 유럽 최고의 선수: 1999
- IFFHS 20세기 헝가리 최고의 선수: 1999
- 포포투 헝가리 역대 최고의 선수: 2010
- 골든풋: 2006
- IFFHS 레전드: 2016
6. FIFA 푸스카스상
7. 푸스카스에 대한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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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여지 없이 특별한 선수였다. 헝가리가 어떻게 1954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놓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왼발 슈팅이 골대에 맞으면 딩~ 하는 소리가 한참동안 들렸다.'''
'''우리 중 푸스카스가 최고였다. 축구에 관한 육감이 있는 것 같았다.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천 가지 해결책이 있다면, 푸스카스는 천한번째 해결책을 찾아냈다.'''
난도르 히데구티(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동료)
'''푸스카스가 자서전에서 컨디션이 좋았다면 우리를 상대로 12골도 넣었을 거라고 했더라. 완패하기는 했지만 그런 헝가리를 상대한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
길 메릭(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
'''푸스카스는 헝가리에서 완벽한 선수 생활을 보내고 레알 마드리드로 가서 이를 한번 더 재현했다. 세계 최고 수준이 아니라 꿈같은 수준이다.'''
졸라 그로시치(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동료)
'''푸스카스는 실로 훌륭한 선수였다. 살이 쪘는데도 왼발 슈팅만큼은 완벽했다. 어느 시대에 뛰었어도 최고로 활약했을 것이다. 축구를 진정으로 즐긴 선수이자 인간이었다.'''
'''푸스카스는 30~35미터 거리에서도 상대 골키퍼를 겁에 질리게 했다. 슛이 강력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기까지 했다. 그는 진정한 천재였다.'''
'''푸스카스의 재능은 특별했다. 그는 좋은 친구이자 선수였다. 이 말이 푸스카스를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를 향한 추도사
'''보비 찰튼, 데니스 로, 푸스카스와 함께 호주에 유소년 교육을 하러갔다. 아이들은 푸스카스가 뚱뚱하고 나이가 들어 그를 우러러보지 않고 놀려댔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코치 중 하나와 크로스바 맞히기 내기를 하자고 했고, 아이들은 당연히 푸스카스를 골랐다. 데니스 로가 아이들에게 10번 중 몇 번이나 성공할 것 같냐고 묻자 대부분이 5번 이하로 답했다. 그러자 푸스카스는 9번 연속으로 성공한 뒤, 마지막에는 공을 띄워서 어깨와 머리로 트래핑하고 발꿈치로 띄우더니 발리 슈팅으로 강하게 차서 크로스바를 강타했다. 다들 놀라서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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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공격수들 중 3위에 이름을 올렸다.
분류
- 1927년 출생
- 부다페스트 출신 인물
- 2006년 사망
- 헝가리의 축구선수
- 헝가리의 축구감독
- 스페인의 축구선수
- 스페인의 축구감독
- 공격수
- 복수국적자
- 1943년 데뷔
- 부다페스트 혼베드 FC/은퇴, 이적
- 레알 마드리드 CF/은퇴, 이적
-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역대 감독
- 파나티나이코스 FC/역대 감독
- AEK 아테네/역대 감독
-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헝가리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스페인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참가 선수
- 1962 FIFA 월드컵 칠레 참가 선수
- 헝가리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