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보레 1700
'''GMK Chevrolet 1700'''
1. 개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GMK에서 생산했던 차량. 홀덴 토라나 LJ형을 기반으로 시보레 브랜드를 내세워 배지 엔지니어링이 이루어진 차량이었다.
2. 제원
3. 상세
3.1. 1세대(1972~1978)
1972년 9월에 출시되었으며, 조선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레코드 1900과 함께 국내 최초의 신차발표회를 연 차량이다.
원판 차량인 홀덴 토라나와 다르게 5도어 스테이션 왜건 사양이 존재했다. 파워트레인은 직렬 4기통 1.7ℓ(1,698cc) 엔진으로 최고출력 79마력/5,600rpm, 최대토크 13.0kg·m/3,500rpm의 힘을 냈으며 4단 수동변속기로 최고시속 140km의 성능을 냈다. 출력은 당시 경쟁 모델이었던 현대자동차의 코티나 (1.6ℓ 75마력)나 아시아자동차의 피아트 124 (1.2ℓ 65마력)보다 강했다. 또한 앞뒤 서스펜션 모두 코일 스프링을 달아 승차감을 높였고 충격흡수식 스티어링휠과 2중 브레이크 시스템 등으로 안전성도 높였다. 출시 당시의 값은 기본형이 179만8,000원, 디럭스가 193만8,000원 (2016년 물가 환산 시 약 3,000만원)이었다. GM코리아는 대대적인 TV 광고[2] 와 함께 전국 주요 33개 도시를 돌며 새 차 이벤트를 열고 당시로는 보기 드문 24개월 할부 프로그램과 월 1.081%의 국내 최저 할부이자율 등으로 마케팅 또한 공격적으로 펼쳐나갔다.
출시 당시 튼튼하고 뛰어난 성능으로 치열한 판매 경쟁이 예상되었으나 정작 시장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았다. 경쟁차종에 비해 연비가 좋지 않았는데, 지엠코리아에서는 연비가 14.5km/ℓ 라고 알림과 동시에 차량에 Z-세이버라는 연료 절감장치를 부착하고 세간의 인식만큼 연비가 나쁘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서울에서 추풍령까지 시험 주행도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번 박힌 나쁜 연비 이미지를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한가지 단점은 바로 낮은 지상고. 당시 포장률이 오늘 날에 비해 극히 낮았던 국내 도로 사정을 고려하지 않아 비포장길에서 바닥을 자주 긁어대어 소비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3] 그 결과 판매 실적은 물론이고 지엠코리아의 시장 점유율까지 하락하는 원인이 된 끝에 1973년에 일어난 1차 오일 쇼크, 1974년 기아 브리사와 1975년 현대 포니의 등장이 결정타가 되어 결국 1975년 말 단종되고 만다. 1972년 출시부터 총 3년 4개월동안 8,105대가 생산되었다.
3.2. 카미나(1976)
시보레 1700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시보레 1700을 기반으로 1976년에 페이스리프트 사양인 카미나를 출시한다. 상세 정보는 새한 카미나 문서 참고.
후속 차종은 새한 제미니이며, 스테이션 왜건 사양은 새한 캬라반이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