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재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신광재는 1886년생이며 경상남도 양산군 출신이다. 그는 서울에서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해 의용군에 소속되어 의용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채찬, 이병철(李炳哲)·장창헌(張昌憲)·백설령(白雪岺) 등과 함께 평안도 대안 지역인 관전, 집안, 통화, 임강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21년 5월 중순에는 러시아 연해주에 있던 홍범도에게 부대를 파견했다. 그러던 1921년 8월 만주에서 병사했다. 이에 이상룡은 그를 위한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신광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오호라. 옛날 그대가 집안으로 가는 것을 전송할 때 내가 손을 잡고 말하기를, "임강과 집안은 만주의 외문에 해당한다. 강변의 경수와 마주하고 있어, 여름에는 뗏목을 이용하고 겨울에는 얼음을 타고 건널 수 있으니, 한 구역이나 마찬가지이다. 또 본영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군기가 다변하니, 미처 달려와 보고하지 못할 것이 있으면 일체 그대의 편의대로 하라." 하였다. 그 곳에 부임한 뒤로 집안에는 학교를 설립하고 범강에는 요새를 세우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강가에서 작은 전과가 있다는 소식이 이르렀다.
이에 나에게 축하를 하는 자가 있었는데, 나는 관례에 따라 포상하며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신군을 크게 드러내기에 충분하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 동쪽에서 온 자들이 모두 군을 칭송하면서, 무리를 거느리는 것에 방도가 있어 은혜와 위엄을 모두 고르게 하며, 당장의 효과에 급급해 하지 않고 먼 장래를 위한 계획을 몰래 쌓아가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대의 조치가 적절하여 내가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가을에 미친개 같은 왜놈들이 갑자기 난입하여 겁략을 자행하니, 통화와 유하 사이에서 뜨거운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제로의 인사들이 모두 두려운 마음에 각자 물러나 피할 생각을 하였는데, 군은 홀로 의연하게 흔들림 없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기다리다가, 막 깨물려고 하는 교만한 개로 하여금 뒷걸음질 치면서 감히 나아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제야 그대의 그릇과 식견이 남들보다 뛰어나 확실히 쓸만한 재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지난날 겉모습만으로 그대를 평가하던 자들이 모두 망연자실해 하였으며, 이미 암묵적으로 조만간 동쪽으로 건너갈 때의 선봉은 그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 그 의망의 중대함이 또한 어떠했겠는가?
금년 늦여름이 최석형 군이 내방하였을 때, 그대가 병으로 신음한 지가 넉넉히 몇 달이 넘었음에도 오히려 기무를 폐하지 않고 개연히 죽을 뜻을 품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근심스럽게 여겼었다. 그러나 심력이 확고한 것을 믿었기에 식소사변하더라도 공명처럼 될 우려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그런데 8월 임간에 우편으로 급보를 받았는데, 바로 그대의 잃음이었따. 오호라, 애석하도다. 그대가 어찌 이런 때에 죽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라의 땅은 한 떼기도 회복하지 못하고 강포한 무리들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는데, 그대는 어찌 이런 때에 죽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대는 양산인이다. 그 거주지가 바다 조수가 잠식하는 땅에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격설의 소리를 익숙히 들었을 터인데도 능히 우뚝하게 스스로를 지키고 물들지 않았다. 을사, 병인 연간에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나자, 그대는 문득 소매를 떨치고 정관여의 군진에 투신하였다. 온갖 어려움을 다 겪었으나 조금도 후회함이 없었으니, 품은 뜻의 확고함을 알 수가 있다.
압록강을 건너온 뒤로 그대의 성명이 잠시 형섭의 무리들에게서 떠들썩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처음 도착했을 때의 공음이었을 뿐이며, 그대의 주된 뜻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가 이립(30세)에 가까웠음에도 머리를 숙이고 취학하였는데, 익히는 것은 사격술에 그쳤다. 졸업하고 나자 마침내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고 어초[1]
의 무리들에 섞였다. 그러다가 저 만세 소리가 일어나게 되자 중대한 직책을 맡아 안으로는 어진 준재들을 맞이하고 밖으로는 침략을 막아 우뚝하게 서서 동요된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제 슬퍼서 상심하는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니, 이는 참으로 그대를 위하는 것이 무겁고 스스로를 위하는 것이 가벼워서이다. 내가 청컨대 다시는 슬퍼하지 않고 그대를 위해 노래를 하려 하니, 그대는 들어보시게나. 노래하노라.
하늘이 드넓은 옥토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너희 외인들을 배불리고자 해서가 아니라네.
여우같이 교활한 본성으로
남의 혼을 빼앗아 나라가 텅 비게 되었네.
이미 우리 팔도의 찬란한 금수강산을 차지하고
다시 우리에게 노비처럼 굽실거리라 하네.
만주벌판으로 떠돌다보니
온갖 풍상에 십몇 년이 훌쩍 흘렀네.
천시가 인사가 기약하지 않아도 회복되리라.
이상룡, <석주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