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찬(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채찬
蔡燦'''
[1]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불명
충청북도 충주군 덕산면
(現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사망'''
1924년 9월 21일
중국 지린성 집안현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2]
'''학력'''
신흥무관학교 (졸업)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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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충청북도 충주군 덕사면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1907년 의병장 이강년의 부대에 가담하여 소백산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강년이 체포되어 처형된 뒤에는 숨어지냈고,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신흥학우단에 가담해 군사훈련, 자치 및 교육 활동을 전개했고, 동창생인 신용관 등과 의기투합하여 백서농장 결성을 주도했다.
1914년 백두산 서쪽 산기슭에 세워진 백서농장은 식량 문제를 해결할 둔전을 운영하고 군사훈련을 병행한 병농일치의 군영 농장이었다. 백서농장은 장주(庄主)에 김동삼, 훈독에 양규열, 농감에 채찬, 규율대장에 신용관 등이 간부로 활동했다. 농장은 이원체제로 운영되었는데 교육과 훈련은 훈독의 감독 하에 시행되었고, 작업과 농사일은 장주의 지휘아래 농감이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오지에서의 농장경영은 난항을 겪었고 식량부족과 영양실조로 질병이 속출하면서 훈련과 농사도 더이상 시행하기 어려웠다. 결국 백서농장은 만 4년만에 폐쇄되었다.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가 결성되자, 채찬은 여기에 참여해 의용대를 조직하고 만주와 국내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또한 압록강 건너편인 강계, 삭주 등지에 들어가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가 지휘하는 의용대 1중대는 1920년 5월 평안북도 강계군 문옥면 일제 경찰관서를 습격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이덕창(李德昌)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 권응규(權應奎)를 사살하게 했다. 이후 일제가 간도 참변을 단행하자, 서로군정서 본부는 지린성 액목현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채찬과 신용관 등이 지휘하는 잔여 병력은 남만주에 그대로 남아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했다.
1921년 8월 신용관이 병사하자, 그는 신용관을 대신해 중대장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다. 그는 대표적인 만주의 친일단체인 보민회, 조선인민회 등을 습격했고, 1922년 8월 23일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대한광복군영 등 8개 단체가 대한통의부로 통합되자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통의부 내부에 복벽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간의 이념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전덕원이 이끄는 복벽주의자들이 통의부를 이탈하고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뒤 통의부와 잦은 마찰과 대립을 벌였다. 채찬은 이런 상황에서도 통의부에 남았지만 내심 통의부가 무력 항쟁 대신 외교적인 방식을 체택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1923년 12월, 채찬은 통의부 제1중대장 자격으로 김원상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그간의 전말을 보고하고 임시정부 직할 군단이 될 것을 요청했다. 임시정부는 이를 크게 환영하여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과 이유필을 만주에 파견해 조직 사업에 협력하게 했다. 그결과 1924년 8월 통홯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가 결성되었다. 채찬은 즉시 최석순, 최지풍, 김명봉 등과 함께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의부에 가담시켰다. 참의부는 제1대 중대장인 채찬이 참의장을 겸임하고 5개 중대는 각 중대장이 중심이 되어 편제되었다. 참의부는 설립 초기부터 적극적인 국내 진공투쟁을 벌였는데, 이 시기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지대에서 전개된 전투의 대부분은 참의부가 수행한 것이었다.
1924년 초, 채찬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그해 6월 제국회의 개최를 앞두고 개최를 앞두고 식민지 통치체제의 안정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압록강을 따라 국경을 순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이의준, 장창헌, 김창균(金昌均), 현성희, 이명근(李明根), 김여하(金麗河), 전창극(田昌極) 등에게 결사대를 조직하고 압록강변에 매복했다가 사이토 일행을 습격하게 했다. 1924년 5월 19일, 결사대는 웅비호(雄飛號)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며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일행을 집안현 사랑곡 팔합목에서 습격하여 집중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호위선 비조환(飛鳥丸)의 경비병들과 수행원들이 대응사격을 가하면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사이토 일행을 태운 웅비호가 도주하면서 사이토 총독 암살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독립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독립운동세력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1924년 9월 21일, 통의부 유격대장 문학빈이 부하 백병준, 백세우로 하여금 참의부를 습격하게 했다. 채찬은 이 갑작스런 습격으로 절명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가 묻힌 장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채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1] 이명으론 백광운(白狂雲, 白光雲)있다.[2] 유해의 위치를 알 수 없는 터라 위패가 대신 봉안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