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가

 


荊軻
? ~ 기원전 227년
[image]
형가가 진시황제를 찌르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1]
1. 개요
2. 협객 시절
3. 진왕 영정 암살 시도
4. 후일담
5. 평가
6. 대중문화 속의 형가
7. 기타


1. 개요


此地別燕丹 이 땅에서 연단(燕丹)과 이별하면서

壯士髮衝冠 장사들의 머리칼 관을 띄웠도다

昔時人已沒 그 시절의 사람들은 이미 가고 없지만

今日水猶寒 지금도 이 강물 여전히 서늘하도다.

낙빈왕(640년? ~ 684년?), 역수 강의 송별(易水送別)

중국 전국시대협객이자 유명한 자객. 진시황암살하기 위해 갔으나 실패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생애에 대해 잘 알려진 것은 없으나 사기 자객열전 이나 십팔사략에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남아 있다. 특히 자객열전에 있는 형가의 부분은 중국 고서상 가장 스펙타클하기로 손에 꼽는 대목이다.

2. 협객 시절


형가의 조상은 제나라 간신이었던 경봉(慶封)이었지만 태어난 곳은 위나라(衛, 지금의 하남성 부근. 과거 은나라가 있던 자리)였고 본인이 사는 곳은 연나라(燕)였다. 왜냐면 경봉이 주살된 후, 후손들이 성을 바꾸고 여기저기 흩어졌기 때문이다. 꼬마 때부터 책읽기와 검술을 좋아했다. 검술로 당시 위나라 군주였던 원군(元君)에게 출사했으나 외면당했다.
형가는 감섭이라는 검객과 검술을 논하다 틀린 사실을 말했고, 말다툼이 일어난다. 개섭이 노려보자 말없이 도망쳤다. 한단에 머물 당시 노구천이란 사람과 장기를 두다가 말다툼을 했다. 노구천이 죽일듯이 위협하자 도망치고 사이가 틀어진다. 이를 두고 형가가 겁이 많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람도 죽여본 진무양이 벌벌 떨 때 태연하게 다가가서 칼을 휘두른 것만 봐도 용기와 담력이 어마어마한 사람이다. 사기 같은 역사서는 형가가 훗날 큰일을 맡을 뜻이 있어 사사롭게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싸움을 피했다고 본다.
그 후 시전 바닥에서 개백정인 아무개[2] · 축(현악기의 일종)쟁이 고점리와 띵가띵가 놀며 소일하였다. 그러다가 감정이 복받치면 셋이 얼싸안고 울다가 웃다가 했다고 전하는데, 이때 셋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주변에 신경쓰지 않고 행동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방약무인(傍若無人). 이는 원래 주변에 거리낌없는 당당한 행동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뒷날 의미가 바뀌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이렇듯 분방한 생활을 했으나 당시 연나라에서 은거하던 전광(田光)[3]이라는 사람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는 형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당시 이미 진을 제외한 6국 중 3나라(조,위,한. 춘추시대 최강국 진나라의 후예들이라 하여 이른바 삼진三晉으로 불림)가 멸망한 상태였고[4], 조나라를 평정한 진나라는 제나라를 매수해놓은 상태에서 초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연나라를 먼저 손보려 시기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3. 진왕 영정 암살 시도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전광에게 연나라 태자 단(丹)이 찾아왔다.
태자 단은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진에 대한 증오심이 깊었고 그 위험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국가의 멸망을 막기 위해 자객을 파견해 일거에 뒤집기를 하려는 단에게 전광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형가였다. 단이 암살 계획에 대해 절대 비밀로 해 줄 것을 당부하자, 전광은 형가에게 암살건에 대해 이야기한 뒤 "태자께서 나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하셨소. 그러하니 비밀을 알고 있는 내 입은 영원히 닫혔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하곤 망설임 없이 자기 목을 끊어버렸다.
형가는 태자 단에게 찾아와 조나라의 서부인[5]이라는 사람이 주조한 비수 상절(霜切)[6], 연나라의 곡창 지대인 독항 지방의 지도[7], 그리고 영정의 미움을 받아 망명한 진나라 항장 번오기(樊於期)의 목을 요구하였다. 비수와 지도는 즉시 준비되었으나, 다정한 성격인 단은 차마 번오기의 목을 내올 수는 없었다. 그러자 형가는 표표히 그의 집으로 가 '이러저러해서 당신의 목이 필요합니다' 라고 담백하게 용건을 말했다. 번오기는 "놈을 죽이는 데 필요하다면 가져가십시오" 라고 말하고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그 뒤에 필요한 것은 자신과 같이 보조를 맞출 담대한 부사로 13살 때 대낮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진무양(秦舞陽)[8]이란 장사를 선택한다. 형가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너무 멀리 살고 있어 제 시간에 오지 못했고, 진무양과 거사를 치르게 된다.
진나라로 가기 위해 역수(易水)를 건너며 형가가 남긴 노래는 아직도 남아 있다.

風蕭蕭兮易水寒(바람 쓸쓸하고 역수 강물은 차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연(燕)나라 태자와 빈객들은 거사의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흰색의 의관을 차려 입고 송별을 나와 이윽고 역수(易水) 강변에 이르렀다. 노신(路神)에게 제사를 지내 장도를 기원한 후에 길을 떠날 때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타자 형가가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변치(變徵)의 곡조로 부르는 형가(荊軻)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또 곡조를 우(羽)로 바꿔 부르니 전송 나온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에 쓴 관이 다 들릴 정도로 머리털이 곤두섰다'''고 한다. 이윽고 형가가 수레에 올라타고 길을 떠났는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형가는 함양에 도착한 뒤 진왕이 총애하던 신하에게 뇌물을 바쳤고, 이에 신하는 연에서 항복하러 온 사절단이라며 형가 일행과 진왕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그렇게 아무 의심 받지 않고 당당하게 진왕 정 앞까지 온 형가였지만, 부사로 같이 온 진무양이 갑자기 낯이 새파래지며 바들바들 떠는 바람에 의심을 사고 말았다. 형가는 태연히 웃으면서

北蕃蠻夷之鄙人,未嘗[9]

見天子,故[10]振慴。願大王少假借之,使得畢使於前。

북번 오랑캐 시골뜨기가, 일찍이 천자를 뵈온 적 없으니, 떨며 두려워 합니다. 대왕께서는 작은 잘못을 용서하시어, 어전에서 사자의 임무를 마치게 하소서.

라고 둘러댔다. 그래서 진왕은 형가에게 부사는 놔두고 혼자 올라와 진상물로 가져온 독항의 지도를 올릴 것을 명했고, 형가가 편 두루마리가 끝까지 펼쳐지자 그 속에 숨겨둔 비수 상절이 드러났다[11]. 이에 놀란 진왕이 재빨리 일어나는 바람에 형가가 내지른 보검은 상처도 내지 못하고 진왕의 옷소매만 스쳤을 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형가가 짧은 단검을 휘두르기 위해 진왕의 옷소매를 잡아챘는데, 그 옷소매가 북 찢어졌다는 설도 있다. 형가는 원래 한손으로 진왕의 의복을 잡고 다른 손으로 단검을 쓰면 암살이 성공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추운 북쪽 나라라 두껍고 질긴 옷을 입는 연나라에 비해 진나라에서는 훨씬 얇고 부드러운 옷을 입었기 때문에 소매가 찢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未至身,秦王驚,自引而起,袖絕。

몸에 닿기 전에, 진왕이 놀라, 스스로 몸을 일으키면서, 소매가 떨어져 나갔다.

어쨌거나 형가는 포기하지 않고 비수를 쥐고 진왕 정을 쫓아 전상 단상 기둥 사이를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당시 진나라 국법에 대전에서 무기를 지참할 수 없었기에 검을 가진 사람은 진왕 혼자였고, 너무 위급해서 병사를 부를 겨를이 없었다. 진왕에겐 장검이 한 자루 있었는데 길이가 길고 마음이 급하니 자루에서 빠지질 않았다. 신하들이 맨손으로 형가에게 달려들었고, 어의인 하무저(夏無且)가 약주머니을 던졌다.

左右乃曰:「王負劍!」

좌우에서 외쳤다, 대왕께서는 칼을 등지십시오!

라고 신하들이 소리쳤다.[12] 결국 진시황은 칼을 뽑을 수 있었고, 짧은 비수를 들고 있는 형가를 내리쳤다. 형가는 쓰러진채 마지막으로 비수를 던졌으나 기둥에 맞았다. 그 틈을 노려 영정은 칼로 형가를 여덟 번이나 내리쳤다. 형가는 영정을 보고

事所以不成者,以欲[13]

生劫之,必得約契以報太子也。

'''"일이 실패한 것은 너(진왕)를 사로잡아 약속을 받아내어 태자에게 보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신하들이 달려들어 형가를 죽였다. 마지막에 한 말만 들으면 형가는 진왕을 죽일 생각이 아니라 붙잡은 후 협박해서 불가침조약을 맺거나, 빼앗긴 땅을 돌려받으려 한 것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노나라의 조말(曹沫)이 제환공을 칼로 협박해 빼앗긴 땅을 받아낸 적이 있다.
전상 아래에 있던 진무양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당연히 살해당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하무저를 '그대가 나를 위해 약봉지를 던졌도다!'고 칭찬하며 금 200일이라는 막대한 보상을 내렸다.
하무저는 공손계공(公孫季功), 동중서(董仲舒)라는 학자와 알고 지냈는데, 공손계공과 동중서는 사마천과도 알고 지냈다. 하무저는 현장에서 모든 일을 다 봤으므로, 사실적으로 두 사람에게 썰을 풀었고, 두 사람이 사마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덕분에 사마천은 틀린 점[14]들을 바로 잡으면서, 매우 박진감 넘치게 묘사를 해냈다. 사마천은 자객열전 말미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밝힌다.

4. 후일담


이 사건 직후 분노한 진왕 영정은 왕전왕분, 이신을 보내 연나라 침공을 시작한다. 연나라왕 연희는 수도 계성까지 함락당하자 조가(趙嘉)의 주장을 받아들여 암살을 주도한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 진나라로 보내지만 진나라는 무시하고 계속 연왕을 추격했다. 또 다른 설로는 도망친 단을 이신이 수천 기의 병사만을 데리고 추격하여 잡아왔다는 얘기도 있다. 연왕은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넘을 시도들 했지만 직전에 진나라 군대에 따라 잡혀 연나라왕은 포로가 되었다.[15]
형가전의 후일담에 의하면 형가와 장기를 두다가 다툼으로 사이가 벌어진 노구천(魯句賤)은 형가의 진시황 암살미수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 그가 칼로 찌르는 법을 [16]

배우지 않은 것이 애석하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 예전에 내가 그를 꾸짖었을 때, 그는 나를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형가가 죽고 연나라가 망하자 형가의 벗 고점리는 머슴이 되어 송자(宋子) 땅에 잠적하지만 축솜씨 때문에 정체가 알려지고, 고점리의 축솜씨가 진시황에게 알려지자 진시황은 고점리를 용서하는 대신 고점리의 눈을 멀게하고 악공으로 삼았다. 악공으로 일하면서 진시황과 가까워진 고점리는 축에 납을 넣어서 암살기회를 노리다. 어느 날 연주 도중 진시황의 목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축으로 쳤으나 눈이 멀어서 빗맞았고, 결국 친구의 뒤를 따르게 된다.[17] 형가와 고점리에게 죽을 뻔한 진시황은 다시는 멸망당한 나라 사람을 자신에게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

5. 평가


이처럼 멸망당하고 멸망당하기 직전인 6국의 한을 풀려는 듯한 형가와 태자 단의 의기로운 모습은 후에 많은 시인들과 서사가들에 의해 칭송되거나 협객이라고 평가되었다. 시황제와 통일 진나라가 통치를 잘했으면 몰라도 그 정치가 매우 가혹하고 심하였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후에 나오는 장량(전한)창해 역사와 더불어서 노래되고 많은 협객들과 호걸들의 그의 모습을 따라하고자 하였다. 장량 또한 형가와 태자 단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대의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형가에 대해 안 좋게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 진시황은 통일전쟁을 수행하며 중국의 혼란을 잠재웠으므로 형가의 암살 기도는 결코 대국적인 행위가 못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한족이란 개념이 생긴 게 전한 때였으니, 통일을 이루어낸 진시황에 대해 좋게 평가한다면 형가의 평가는 나빠질 수밖에 없다.
반면 형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당시에 강대한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대로 병합하는 상황을 저지하여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강압적인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본다면 진의 통일 역시 부정적인 것이 되므로 형가의 평가는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형가의 행위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소 엇갈린다. 결국 이 문제는 진의 통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진의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형가는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고, 반대로 진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형가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한편, 진시황이나 형가나 둘 다 각자의 입장이 있으므로 반드시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는 식으로만 이야기할 것도 없다. 실제로 진시황의 통일 공적과 형가의 의협심을 둘 다 좋게 여기는 평가도 있다.

6. 대중문화 속의 형가


장예모가 주연을 맡은 홍콩 · 중국 합작 영화 진용(1989)에서 형가 고사를 가지고 역사 개그씬을 연출했다. 환생한 옛 연인 한동아를 맡은 공리를 보고 반가워한 진나라 낭중령 몽천방을 맡은 장예모가 이름을 부르며 기뻐하지만 환생한 그녀는 당연히 그가 누군지 모르고, 진나라 사람이라는 이야기에 맹강녀이니 서시니 춘추전국시대 유명한 사람들을 호명하나 전혀 몰라한다. 한번 송나라 장군인 악비 이름을 말하지만 당연히 진시황 치세로부터 1000여 년이나 지나서 태어나는 악비를 모를 수밖에. 그러자 "그럼, 형가를 아시겠네요?"라고 말하자 대단히 불쾌한 얼굴로 "그런 대역적의 이름은 입에 담지도 마시오!" 라고 화를 낸다. 그녀가 "아니? 형가는 폭군 진시황에게 맞선 영웅이라고요." 라고 말하자 "무엄한 소릴! 그 자는 폐하께서 직접 참수한 대역적이오!" 라면서 펄펄 뛴다.
그 장예모가 나중에 감독을 맡은 영화인 '영웅'이 바로 이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 진 것이며, 이연걸이 맡은 역할인 '무명'이 바로 형가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물론 영화에서 나오는 10보 필살검은 당연하겠지만 영화 상의 허구이다. 다만 이 영화는 현대 중국 정부에서 밀어주는 시황제에 대한 긍정적 관점이 들어가 각색되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덧붙여 이 영화에서 진시황 역을 맡은 배우는 중국의 유명 배우인 진도명. 드라마 <강희왕조>의 강희제, <무간도3>의 심등, 초한전기에서 유방 역으로 유명한 배우이다.
진개가(첸 카이커)의 영화 '시황제 암살'(원제: 荊軻刺秦王(형가자진왕))도 형가의 열전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1990년에 만들어진 대만 드라마 자객열전 형가편이 국내에 수입되었다. 형가역으로는 초류향시리즈로 유명한 정소추가 열연했다. 여기서 형가는 진의를 감추고 풍류를 즐기는 카사노바 행세를 하는 미공자이다. 마지막에 암살에 실패한 형가가 칼에 맞고 피를 흘리면서 광기어린 웃음과 함께 영정을 저주하는 씬은 정소추의 연기가 돋보이는 명장면이다.
TVB에서 제작한 대자객(大刺客)이란 드라마 파트 중 형가 파트에서 형가 역을 맡은 배우가 서금강이다. 흠좀무. 다만 대자객 드라마 자체는 첫 방송 기간 당시 홍콩의 유명 배우 신마사증(新馬師曾)의 사망 보도 때문에 화제성에서 밀렸고, aTV 경쟁작 비묘정전(肥貓正傳)에 기세에서 밀리는 추가타를 맞아 여사낭 파트가 방영되지 못하고 사실상 조기종영당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2004년에는 형가전기라는 드라마가 중국에서 제작되었는데 여기서 서금강은 백기 역을 맡았다. 전체 스토리와 인물관계는 역사가 아닌 각색 위주이며, 진시황 암살[18]이 아닌, 전란시대 사람들의 비극적인 삶[19]을 위주로 다룬 것이 특징.
국내에선 문영이라는 작가가 형가가 시장 바닥에서 함께 어울렸다는 개백정을 주인공으로 한 <구도>라는 단편 소설을 썼다. 일반적인 역사 소설이 아니라 역사를 가지고 재창작한 무협 소설이다. 국내 유일 장르 문학지 <판타스틱> 2008년 9월호와 <꿈을 걷다>라는 단편집에 실려 있다.
삼국지 드라마인 삼국에서 사마의 휘하 위군 병사들이 제갈량의 계략에 빠져 상방곡에 갇힌 후 화공을 당하며 죽음을 앞두고 부르는 노래가 바로 형가의 역수가다. 물론 오랜 세월동안 음은 사라지고 현대에는 역수가의 가사만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창작한 노래이다.
모바일게임 영웅 for Kakao에서는 마법형 원거리 공격 캐릭터로 등장한다. 다만 여기서는 암흑 주술을 사용하는 암살자 컨셉이며 황제의 암살에 실패하며 형장에서 참수될 위기에 처하자, 금기의 주술을 외우기 시작하며 신체 자체가 암흑이 되어버린 캐릭터로 등장한다. 흠좀무
FGO서는 당연하게 어쌔신의 클래스로 등장, TS당해 여자가 되었다. 형가(Fate 시리즈) 항목 참조.

7. 기타


연암 박지원은 자신의 저서 열하일기에서 형가가 역수에서 기다리던 것은 다른 검객이 아닌, 아직 거사를 치를 준비가 안 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행위일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후기 농민 반란의 지도자 홍경래는 12살에 형가와 진시황의 고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런 시를 지었다.

"가을 바람에 역수 장사의 주먹이요 / 벌건 대낮에 함양 천자의 머리라"

내리치겠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훗날 그의 말과 행동으로 보아 언젠가는 이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 왕을 없애겠다는 무서운 뜻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글을 가르치던 그의 친척은 연좌의 두려움에 그를 집으로 쫓아보내고 다시는 왕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1] 왼쪽의 덩치 큰 사람이 형가이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도망가는 사람이 소매가 잘린 진시황이다. 오른쪽 밑에 넘어져 있는 사람은 형가를 수행한 부사 진무양. 당황해서 달려오는 호위병과 번오기의 목이 든 상자와 형가가 던진 칼이 기둥에 박혀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형가가 있는 왼쪽을 자세히 보면 형가가 양팔과 한쪽 발을 들고 있고, 칼을 던지는 형가를 말리기 위해 어떤 사람이 형가의 몸을 한 팔로 붙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2]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3]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용기와 지혜가 비범해서 연나라 태부인 국무의 추천으로 연나라에 출사하였다고 한다.[4] 그나마 조나라는 왕족인 조가가 대군(代郡)에서 왕위에 올라 저항하고 있었다.[5] 여자가 아니다. 이름이 부인이며 한자 표기도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부인이다(…).[6] 서리마저 벤다는 뜻. 강철을 진흙처럼 자를 만큼 명검이라고 한다. 여기에 독을 발라 살을 살짝만 그어도 죽일 수 있도록 특별히 준비했다.[7] 특정 나라의 사신이 자기 나라의 지도를 가지고 가서 바친다는 것은, '''그 땅을 넘기겠다'''라는 의미이다.[8] 사기 흉노열전에서 그의 집안내력이 언급되는데, 진무양의 조부는 연나라 장군인 진개로, 흉노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쳐 귀국했다고 한다. 진개는 한국사와도 관련이 깊은데, 고조선을 쳐서 서쪽 영토 2천 리를 빼앗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9] 일찍이[10] 그러므로[11] 이것으로 도궁비현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12] 야사에 조고가 외쳤다, 한 호녀가 저 말을 해서 이후 진시황의 총애를 얻었고 그래서 낳은 아이가 호해라는 이야기도 있다.[13] 하고자 하다[14] 예를 들어 형가가 진시황을 죽이진 못했어도 상처는 냈다는 잘못된 정보[15] 이때 고조선도 진나라에 칭신하였다고 한다.[16] 단검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17] 고점리가 살해를 시도한 공간이 궁중 악단 연주회였는데, 이 자리에 있던 커다란 징에 진시황의 목소리가 울려퍼져서 고점리의 계산이 실패했다고도 전해진다.[18] 연출로 나오지 않고 문자로만 교대한다.[19] 메인 선역들은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데, 그나마 목숨이라도 남은 고점리 부자 역시 아내와 어머니를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