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스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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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새롭게 제정된 상장 군복을 입은 쑹스룬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6.25 전쟁
2.3. 말년
3. 기타


1. 개요


宋时轮·宋時輪(송시륜) / Sòng Shílún (1907년 9월 10일 ~ 1991년 11월 29일)
중화인민공화국군인이다. 6.25 전쟁 시에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후난성에서 태어나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다. 당대의 홍군 중에서는 장교로서 제대로 군사교육을 받은 몇 안되는 엘리트 중 하나였다. 쑹스룬은 임관하자마자 곧바로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대장정에 참가했다.

2.2. 6.25 전쟁


김일성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패색이 짙어지자 중국 공산정권은 이를 구원하기 위해 '인민지원군' 명목으로 병력을 파병했다. 당시 쑹스룬은 부사령관으로서 총사령관 펑더화이를 보좌하는 동시에, 제9병단의 사령관도 겸임했다. 그가 지휘한 제9병단의 공세로 한국군과 미군 주도의 UN군은 압록강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장진호 전투를 지휘하며 올리버 스미스가 이끄는 미 해병대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당시 중공군에게는 계급이 없었고 직책으로만 지휘하는 체계였기 때문에 쑹스룬은 지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1] 게다가 마오쩌둥의 아들인 마오안잉이 그의 휘하에 있었는데 마오안잉을 사령부에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전사하는 바람에 굉장한 충공깽을 겪었다. 하지만 이걸로 마오쩌둥에게 문책당하지는 않았다.

2.3. 말년


1969년에 예편한 후, 1972년부터 13년 동안 인민해방군 산하의 군사과학원에서 2대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수의 저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중국 현대 군사전략의 이론적 향상,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특히 1980년 9월에는 마오쩌둥 시대 이래 중국 군사전략의 핵심 원칙 가운데 하나였던 '유적심입'(誘敵深入)을 삭제하고, '적극방어'(積極防禦)만을 명시하도록 하는 수정안을 관철시켰다. 전자가 미국, 소련 등 강대국과의 전면전쟁을 전제로 과거 중일전쟁, 국공내전처럼 약자로서 영토 내부에서 장기 저항을 감수한다는 개념이라면, 후자는 국경과 주변에서 최대한 외적의 침략을 격퇴한다는 것을 골자로 했다.[2] 이는 1년 전인 1979년 베트남과의 중월전쟁에서 드러난 중국의 현대전 수행 능력 부족에 따른 군사력 재정비의 필요성을 반영하고,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전면전쟁보다 주변국과의 소규모 국지전에 주력한다는 덩샤오핑 시대 중국의 대외 전략관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았다.[3]
노년에는 상하이시에서 거주하다 1991년 사망했다. 향년 84세.

3. 기타


  • 성격이 엄청 불같고 화가 나면 아무도 못말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때문에 쑹스룬의 부하들은 그가 분노하지 않기를 하늘에 바랐다. 이 때문에 장진호 전투에 참전해서는 다른 부대가 도망치거나 말거나 미 해병대를 아예 싹쓸이 하려고 했다.[4]
  • 펑더화이에 비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지만 초기 중공군 승전의 장본인이고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게는 사실상 생명의 은인격인 인물이나 다름없다. 반대로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북진통일의 염원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분단을 고착화시킨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정치적 행보로 인해 영욕을 겪었던 린뱌오, 펑더화이 등과는 달리 줄곧 전문 군인으로만 남아 모국의 군사력 발전에 기여했던 점은 그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요인이다.
[1] 6.25 전쟁 이후 1955년에 중공군에서 새로 계급을 제정하자 쑹스룬은 직책에 맞는 상장(上將. 한국의 대장에 해당) 계급을 받았다.[2] 다만 유의할 점은 중국의 소위 '적극방어'는 영토의 직접적인 공격이 발생하지 않고서도, 단지 중국의 이익에 불리한 주변의 지정학적 변화가 발생하는 것까지도 도발로 간주하고, 이를 빌미로 선제 공격까지 불사하는 사실상의 대외 군사개입도 포함한다. 실질적으로 말하면 '영토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서도 공격할 수 있다' 수준이 아니라 '상대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원칙에 가깝다. 이는 6.25 참전을 포함하여 중국이 공산정권의 수립 이래 주변국과 벌였던 주요 무력분쟁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3] 그러나 덩샤오핑이 집권했던 1980년대의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개발에 주력하던 시기였고, 군사 부문에 대해서는 오히려 수백만에 달하는 병력 감축을 단행하는 축소 지향적 정책을 펼쳤다. 오늘날 잘 알려진 연평균 10% 이상의 군사비 지출 증액, 신무기 대량 도입 등의 군사력 현대화는 덩샤오핑의 후임자 장쩌민이 집권한 1990년대부터의 일이다.[4] 마무리부분에서 이렇게 이성을 잃은 작전에 의해, 그 전까지의 장진호 전투 상황 속에서 중국군이 미군 상대로 올린 엄청난 전적에 비해 중국이 실질적으로 건지는게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