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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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안잉과 그의 처 류쑹린(刘松林) 또는 류쓰치(刘思齐)[1]. 마오안잉은 결혼 후 1년 만에 전사한다. 과부 류쓰치는 현재까지 살아 있다.
1. 개요
2. 생애
3. 사망 경위
4. 기타


1. 개요


毛岸英(모안영). 마오쩌둥의 큰아들. 1922년 10월 24일 ~ 1950년 11월 25일. 본명은 마오위안런(毛远仁)이다.[2]

2. 생애


1922년 10월 24일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마오쩌둥은 1927년 9월 추수폭동[3] 이후 도주하면서 가족과 헤어졌는데, 마오안잉의 어머니 양카이후이(杨开慧)는 1930년 창사 폭동 이후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후 마오안잉과 그의 동생 마오안칭(毛岸青, 본명 毛远义), 마오안룽(毛岸龙)은 작은 아버지인 마오쩌민(毛泽民)의 도움으로 국민당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도주했으나, 마오안룽은 곧 이질로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상하이에서는 중국공산당 지하 보육기관이던 다퉁 유치원(大同幼稚园)에서 양육되었다. 그 사이에 마오쩌민은 수배를 피해 도주해야 했고, 이후 기독교 목사로 위장한 공산당원이자 다퉁 유치원 원장이던 둥젠우(董健吾)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둥젠우도 수배를 피해 우한으로 떠나면서 결국 돌봐줄 사람이 없던 마오안잉-마오안칭 형제는 부랑아 신세로 전락하여 매우 빈궁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1936년 상하이의 당 인사들에게 이들 형제가 발견되면서 딱한 사정이 알려졌고, 이를 보고받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리두(李杜)와 함께 소련으로 향하게 된다.[4] 두 형제는 프랑스 마르세이유파리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당시 코민테른 대표이던 캉성이 돌봐준다. 두 형제는 소련이 국제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자녀를 보육해주던 이바노보 국제 기숙학교(Ивановский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ый детский дом, 약칭 인테르돔 Интердом)에 들어가서 '세르게이(Сергей) 마오'란 이름으로 공부하게 된다.
1941년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안잉은 소련군에 자원입대한다. 당시 중국 공산당 측에서는 유학 중이던 중국 공산당 지도부 자제들의 신변 보장을 요청한 상태였기에 원칙적으로는 입대를 불허해야 했으나, 마오안잉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야전병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레닌 군사정치학교와 프룬제 군사대학 군사학교로 보내 정치장교 양성과정을 밟게 하였다. 마오안잉은 입대 2년 후인 1943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1944년이 되어서야 중위 계급으로 제2 벨로루시 전선군 소속 전차중대의 정치장교로 배치되어,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해방전을 거쳐 베를린까지 입성했다. 종전 후에는 다시 모스크바 동양학원(Московский институт востоковедения) 중국학과에서 잠시 공부하다가,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1946년 1월에 먼저[5] 중국으로 귀향한다. 귀국할 당시 스탈린이 권총 한 정을 선물했다고 한다.
마오안잉은 이처럼 어린 시절 10년을 소련에서 보내고 소련군의 정치장교 양성과정을 두루 거친데다, 제한적이나마 소련군에 복무해 독소전쟁 참전 경험까지 갖췄다. 당연히 소련의 당, 군 관계자들과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소련 사정에도 밟고 수준급의 러시아어 실력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도 마오안잉을 자랑스러워하며 몹시 아꼈다고 한다. 동생 마오안칭이 어릴 적 체포 당시 구타의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으며 제 구실을 못한 것과 비교되기도 했을 것이다. 마오안잉은 귀국 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사회부[6] 부장이던 리커농(李克农)의 비서 겸 통역 역할을 맡았다. 이후 1949년 10월 류쑹린과 결혼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서 1950년 8월에는 베이징기기총창(北京机器总厂)의 당 총지부 부서기를 맡았다. 그러다가 중국 인민지원군의 파병이 결정되자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을 입대시키기로 한다. 이는 후계자 수업의 일환으로 참전 경력을 쌓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오안잉의 출전 통지에 대해서는 일화가 있다. 1950년 10월 7일 밤에 마오쩌둥은 바로 다음날 선양으로 출정을 앞둔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를 초대했다. 단순한 환송회로 생각한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불쑥 마오안잉을 데려가라는 말을 꺼낸다. 펑더화이는 처음에 이를 농담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주석의 집에 지원병을 모집하러 온 게 아니다. 주석을 모병관으로 임명한 적도 없다"며 웃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마오안잉이 자신이 뛰어난 인재라 며 지원병 1호로 나가겠다고 진지하게 나서는 바람에 이내 대경실색했다. 행여 자신이 마오쩌둥이 가장 아끼는 맏아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난리가 날 것을 직감하고서는 "통역이라면 몰라도 전투원으로는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아 사령부 통역장교로 데려가기로 한다.[7] 그러고도 펑더화이는 불안한 마음에 밤새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다른 공산당 고위 간부들도 마오안잉이 위험한 전선에 나가는 것을 우려하고, 마오쩌둥에게 이를 철회해달라고 했으나, 그는 "내 아들을 참전시키지 않으면 누가 전쟁터에 간단 말인가?",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하며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마오안잉은 사령관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관 신분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마오안잉의 참전 사실은 철저히 비밀로 붙여져 부사령관 덩화, 홍쉐즈 및 일부 사령부 요원들에게만 알렸다.[8] 이후에도 펑더화이는 항상 마오안잉의 신변에 신경을 쓰며 자기 주변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 참전한 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북한 평안북도 동창군(현 삭주군) 대유동에서 미 공군 B-26 폭격기네이팜탄 폭격을 맞아 전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만 28세였다.

3. 사망 경위


중국 인민지원군은 참전 초기부터 미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에 진입한 이후, 미군의 정찰기와 폭격기에게 포착되지 않으려고 많은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부도 부사령관 홍쉐즈(洪学智)가 방공 책임을 맡아 엄격한 대피규정을 마련했다. 경험 많은 홍쉐즈는 사령부 요원 전체에게 동 트기 전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다 마치고, 이후 날이 밝으면 절대 난방이나 요리를 위해 연기를 피우지 말고, 공습경보가 울리면 방공호로 신속히 대피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중국 최고 지도자의 아들로 이전부터 기고만장해 있던 마오안잉은 이런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종종 늦잠을 자고 방공호로 대피하는 것도 설렁설렁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아랫사람들이 어려워하던 펑더화이 사령관을 사석에서 '라오터우(老头)'[9]라고 거리낌없이 불러댈 정도였다. 마오안잉은 게다가 초공작전,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치르며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적들을 상대해온 고위장교들과 달리, 독소전쟁 말기에 이미 소련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진 뒤에나 약간의 전쟁 경험을 가져본게 다였기 때문에 미군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었다.
이러던 차에 폭격 전날인 1950년 11월 24일 늦은 오후, 미 공군의 P-61 정찰기 2대가 대유동 사령부 상공에 출몰한 것이 목격되었다. 이들이 사령부 위치를 포착했는지는 불분명했으나, 홍쉐즈는 다음날 날이 밝으면 폭격이 감행될 수 있다고 예견하고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지시에 따라 사령부 요원들은 모두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 먹고 방공호로 피신했다. 홍쉐지는 마오안잉도 이때 분명히 방공호에 들어와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오전 10시가 넘도록 폭격이 이뤄지지 않자, 전날 미군 정찰기들이 허탕을 친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며 경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이때 마오안잉과 다른 간부들이 사령부 건물로 돌아가 기밀서류를 챙겼다고 한다. 그 사이 오전 11시 경에 미군 폭격기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바람에 제때 대피하지 못하고 폭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사령부 건물에는 마오안잉 이외에도 가오뤼신(高瑞欣), 청푸(成普)가 함께 있었는데, 청푸만 간신히 빠져나오고 마오안잉과 가오뤼신이 화염에 휩싸여 사망한다. 중국 정부는 이를 근거로 마오안잉을 최고 지도자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은 전쟁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 특성상 이러한 일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미화된 선전일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이 여럿 남아 있는데, 이러한 목격담에 의하면 부주의한 마오안잉의 독단적인 행동이 어이 없는 죽음을 재촉했다고 한다.
예컨대 전기 작가인 텅쉬옌(滕叙兖)은 2014년 마오안잉은 대피 명령을 무시하고 사령부 건물에서 박일우펑더화이에게 선물한 댤걀을 삶아먹다가 변을 당했다고 봉황망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당시 사령부 작전실에는 달걀이 10여개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원이며 팔로군 출신으로 북한 정권 출범 이후 귀국해 내무상을 지낸 박일우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이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그는 펑더화이 사령관이 고생을 한다며 어렵게 달갈 10여개를 마련해 광주리에 담아 보내주었다. 펑더화이는 먹지 않겠다면서 부상병들에게 주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지원군 사령부에는 부상자가 전혀 없기도 하고 달걀이 워낙 귀한 물건이라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자 마오안잉이 이 달걀에 먹으려 했으나. 당시 사령부에는 아궁이는 없고 목탄으로 때는 조그만 난로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달걀을 컵에 넣고 난로 위에 올려 놓았다. 난롯불이 영 신통찮아 한참이 지나야 달걀 하나가 겨우 익었다. 그는 밤을 새가며 댤걀을 익혔고 그러는 사이 날이 밝았다. 전날 미군 정찰기가 오랫동안 대유동 상공에 머물러 있어 인민지원군 사령부는 이날 새벽부터 대피령을 내린 상태였다. 홍쉐즈 부사령관이 다급하게 숙소로 들어와 야전침대에 누워있던 펑더화이 사령관을 “아직도 누워계시냐”면서 끌어냈다. 펑더화이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버텼으나 참모들이 모시고 나갔다. 숙소에 있던 지도며 문건도 다 들고 방공호로 옮겼다. 펑더화이는 문을 나서면서 “안잉, 너도 빨리 나와라”하고 외쳤다. 그러나 마오안잉과 가오뤼신은 그대로 난로 곁에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미군 전투기 4대가 산쪽으로 날아와 정확하게 산허리에 있는 인민지원군 작전실에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중국어 원문 한국어 번역

조금 다른 버전도 있다. 이에 따르면 마오안잉은 이날도 늦잠을 자서 아침을 거르고 대피를 하는 바람에 배가 몹시 고팠다. 그래서 폭격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0시 경에 사령부 건물로 나와서 박일우가 선물한 달걀로 볶음밥을 만들어 먹다가, 11시에 들이닥친 미군 폭격기의 네이팜탄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날 아침 마오안잉은 침대에서 늦게 일어났고,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다. "방공동 안에 숨어있던 마오안잉은 고개를 빼서 하늘을 보았는데 비행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배가 고팠다." 10시가 지난 후, 마오안잉은 가오뤼신(高瑞欣)에게 작전실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가오뤼신은 말했다. "기다려봐라. 경보가 아직 해제되지 않았지 않느냐." 마오안잉이 말한다. "겁낼 것없다. 내가 보기에 비행기는 한동안 오지 않을 것이다. 온다고 하더라도, 어디 꼭 이 곳을 명중시킬 것인가. 엣날에 국민당의 비행기가 자주 연안을 공습했지만, 부친은 일에 바빠서 방공동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아무 일도 없지 않았는가. 부친이 보인 모범을 아들이 배우지 않으면 누가 배우겠는가?"(공공연히 규율을 어기면서 '부친'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런 도련님은 정말 지원군 사령부 사령관의 골칫거리였을 것이다)는 말을 하면서, 마오안잉은 이미 방공동을 빠져나갔다. 가오뤼신 등은 할 수 없이 그를 따라 작전실로 가서 밥을 했다(찬밥에 달걀을 넣어서 따뜻하게 볶음).

아쉽게도 아들은 부친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11시가 지나서, 미군의 B-26 폭격기 4대가 대유동 상공을 지나갔다가 바로 되돌아온다. 마오안잉이 요리하는 연기를 보았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번에 수십 개의 기유탄(汽油彈)을 떨어뜨리는데, 정확하게 작전실에 명중한다. 생존자인 청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마오안잉은 난로 옆에서 먹고 있었다. 우리는 문 밖에서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빨리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마오안잉과 가오뤼신은 모두 탁자 아래로 숨어들어 폭탄을 피했다… 일찌감치 도망쳐 나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어 원문 한국어 번역

그래서 마오안잉의 기일에 많은 중국인들이 인터넷에 황금 볶음밥 사진을 올리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사고 이후 펑더화이는 망연자실하여 저우언라이에게 급보를 보냈다. 저우언라이는 이 사실을 공산당 수뇌부 일부에게는 공유했으나, 마오쩌둥이 심한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보고를 최대한 늦추기로 한다. 그러다가 1951년 1월에 불쑥 마오쩌둥이 마오안잉의 안부를 묻자[10] 저우언라이는 그제서야 이실직고를 한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눈시울을 붉히며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한탄을 했다고 전해진다. 마오쩌둥은 대범하게 맏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 했으나, 아들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펑더화이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삭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묵은 감정은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에 대해 펑더화이가 직언을 하자 폭발하여,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몰락하는 빌미가 된다.[11]
그가 전사한 이후에도 마오쩌둥은 다른 인민들도 자식을 전쟁에서 잃었을 것임을 생각하여 아들의 시신을 가져오지 않았고, 훗날 '지도자라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아들의 참전을 말리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마오안잉의 유해는 북한 평안북도 회창군에 소재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 있다. 그의 묘는 북한과 중국의 혈맹을 상징하는 정치적인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4. 기타


유족으로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과부가 된 마오안잉의 처 류쑹린(刘松林)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청상과부가 된 류쑹린을 소련 유학을 보내주고, 돌아온 후에도 계속 재혼을 권하고 선을 주선해줬다고 한다. 결국 마오쩌둥의 추천으로 류쑹린은 1962년에 공군학원 교원이던 양마오지(杨茂之)와 재혼했다. 마오쩌둥은 과부가 된 며느리의 재혼을 주선했을 뿐만 아니라 거액의 결혼부조금도 보내줬다고 한다. 하지만 류쑹린은 문화대혁명 중에 장칭의 맹공격을 받았다. 장칭은 마오안칭의 아내 사오화가 마오안칭을 강간(!)하여 억지로 결혼했으며 자신과 마오쩌둥은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한 적도 없고 류쑹린이 거기에 책임이 있으며 류쑹린 때문에 자신이 심장병이 생겼다고 미친듯이 비난했다. 이 말을 들은 천보다를 비롯한 다른 문혁 지도자들조차 경악하여 연설하던 장칭을 붙잡고 이쯤하자고 만류했지만 장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2006년 5월 12일, 류쑹린은 전 남편이 죽은 지 56년 만에 전 남편이 죽음을 맞이한 북한 평안북도 삭주군 대유동의 지원군사령부 터를 찾아가 참배했다.
중국 내에서는 6.25 전쟁에서 마오안잉이 죽지 않았다면 김정일처럼 권력세습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청조 멸망 이후에도 중국인들이 전통적인 황제 중심의 군주제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야사적인 분석은 제외하더라도 의외로 국민당 장제스 부자에게서 비슷한 일이 재현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12] 마오쩌둥이 대약진과 문혁 이후로 당내에 주자파가 가득하다는 극도의 의심에 찬 것을 생각한다면 믿을 것은 자식 뿐이라고 마오안잉에게 후계자 자리까진 몰라도 어느 정도 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당장 장칭과 조카 마오위안신만 해도 마오쩌둥 살아있을 때 굉장히 거들먹거렸으니… 하지만 중국은 혁명을 지속하기 위해 혈육과 친위파벌 중심의 폐쇄정치를 추구했던 북한, 루마니아, 알바니아와 달리 문혁이라는 매우 극단적인 대중 동원 노선을 취했으므로, 그 과정에서 마오안잉이 대단한 활동을 했을 가능성은 낮긴 하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러한 이야기도 전한다. 능력이 없진 않았지만 겸손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는지라, 험한 꼴 보이기 전에 그렇게 죽은 게 그의 명성이 이나마라도 유지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한편 2018년 4월 북한을 여행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30여명의 중국 관광객들 가운데, 마오쩌둥의 손자이자 마오안잉의 조카인 마오신위가 포함되었다는 뉴스가 떠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마오신위가 중국의 한 공개토론회에 참석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한때의 소동으로 끝났다.
사후 마오안잉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가 제작되었고 이 드라마는 현재 북한에서만 방영되고 있다. 배우 추자현의 남편인 우효광이 마오안잉 역을 맡았다.
마오쩌둥이 6.25 전쟁에서 끝까지 북한을 지원한 것은 마오안잉의 죽음으로 인한 분노라는 설이 있다.
마오안잉의 생일에 볶음밥 만드는법을 소개한 중국 요리사 미식작가 왕강(美食作家王刚)의 유튜브 영상이 중국 네티즌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했다. 요리사가 올린 볶음밥 요리법 영상을 보면 유튜브까지 와서 욕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댓글을 몇개 볼 수있다.
[1] 마오안잉 생전에는 류쑹린을 주로 썼으나, 현재는 류쓰치를 주로 쓴다.[2] 참고 항렬자 항목에도 설명이 있다.[3] 1927년 9월 7일 중국 후난성과 장시성 일대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다가 실패한 무장봉기이다. 이 봉기는 중국에서 최초의 공산당 무장봉기로 기록된다.[4] 리두는 원래 만주(동북) 지역의 항일세력을 조직하기 위해 프랑스-소련을 거쳐 만주국으로 잠입하려 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프랑스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다.[5] 동생 마오안칭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이던 허쯔전과 함께 소련에 남아 있다가 나중에 국공내전이 종식된 이후 귀국한다.[6]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사부의 전신이다. 당시에는 중국 국민당에 대한 정보, 간첩, 통일전선 조직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7] 사실 마오쩌둥도 아들이 위험한 야전으로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8] 그러나 마오안잉은 과시욕이 심해서 사령부 내에서 자신의 정체를 떠벌리기 일쑤였고, 이내 사령부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9] 우리 말로 '늙은이', '영감'이라는 뜻이다.[10]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이 석 달 정도 경험을 쌓았으니 다시 곁으로 불러오려 했다고 한다.[11] 공식적으로는 펑더화이가 고의로 마오안잉 사망 보고를 지연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으나, 사실 펑더화이는 사망 직후 지체 없이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다. 이를 곧바로 전달하지 않은 것은 저우언라이의 책임이었다.[12] 1940년대까지 세습에 대해 전혀 생각한 적이 없던 장제스중일전쟁을 겪으면서 천리푸, 천궈푸가 영도하는 CC파, 리쭝런, 바이충시의 광서파 등과의 계속된 싸움과 끊임없는 국민당 내부의 배신 때문에 믿을 것은 혈육밖에 없다고 여겨 장징궈를 중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총통 자리를 물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