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미르
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2. 선수 생활
2.1. 초기 선수 생활
아데미르는 브라질의 항구 도시 헤시피에서 태어났다. 아데미르는 여느 브라질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해변에서 볼을 차고 노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을 보고 센트루 에스포르티부 두 피나 클럽에의 입단을 허락했고, 아데미르의 재능은 그 지방에서 가장 큰 클럽인 스포르트 클루브 두 헤시피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데미르가 입단할 무렵인 1938년에 스포르트 헤시피는 캄페오나투 페르남부카누[1] 의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고, 아데미르는 유스팀에서 1년 정도 있다가 리그에 데뷔하였다. 스포르트 헤시피는 다른 주의 팀들과 친선경기를 종종 가졌는데 그 상대 중 하나가 캄페오나투 카히오카[2] 의 CR 바스쿠 다 가마였다. 여기서 아데미르는 처음에 3대 0으로 끌려가던 경기를 5대 4로 뒤집는데 성공하였는데 아데미르는 이 경기에서 5골을 혼자 득점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이 활약에 매료된 바스쿠 다 가마는 아데미르에게 적극적인 영입 의사를 보였고 결국 바스쿠 다 가마에서 뛰게 되었다.
아데미르가 입단하던 당시의 바스쿠 다 가마는 7위 언저리에 머물 정도로 휘청이던 팀이었다. 1942년, 아데미르가 입단한 이후 성적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였고, 아데미르는 1944년, 12골을 넣으면서 팀을 캄페오나투 카히오카 결승전까지 진출시켰다. 비록 상대였던 CR 플라멩구에게 패해 팀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아데미르의 활약은 쏠쏠했다. 이러한 활약 속에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아데미르는 칠레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 나가게 되었고, 에콰도르와의 경기에서의 해트 트릭을 포함하여 6경기에서 5골을 넣는 활약을 펼쳤지만 아르헨티나에게 패하는 바람에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3]
이듬해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데미르는 무득점이란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며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막아내지 못했다.[4] 이 성적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는 플루미넨시 FC에게서 받은 계속된 구애를 받아들여 2년의 계약을 맺고 플루미넨시에서 활약을 하였다.[5]
플루미넨시에서도 2년의 활약 동안 우승컵을 한번 들어올렸고,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서 아데미르는 다시 바스쿠 다 가마로 돌아왔다. 돌아온 아데미르는 어느덧 20대 후반의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리그에서도 득점왕, 자국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7골을 넣는 활약을 펼쳐 조국 브라질에 3번째 타이틀을 안기는데 성공하였다. 그에게 12년 만에 조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은 최고의 기회였다.
2.2. 1950년 월드컵
브라질에서 아데미르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했다. 개막전인 멕시코 전에서 아데미르는 개막 축포를 포함하여 2골을 넣어 조국이 꿈꾸는 월드컵 우승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비겼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를 꺾어야만 결승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고 아데미르는 여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하였다. 결국 브라질은 지지뉴의 쐐기골을 포함하여 2대 0의 승리를 거두고 결승 리그에 진출하였다.
결승 리그에서도 아데미르의 활약은 계속되어 첫 경기 스웨덴전에서는 4골을 터뜨리면서 7대 1의 대승을 이끌어냈고, 그 다음 스페인과의 경기에서도 1골을 추가하여 총 8골을 기록하였다. 최후의 상대는 우루과이. 우루과이를 상대로 무승부만 기록하면 되는 상황이었기에 브라질은 애초에 우루과이도 박살내 버리고 깔끔하게 승리할 각오로 우루과이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아데미르 역시 침묵에 빠지고 말았고, 전반에만 17개의 슈팅을 쏟아부었지만 소득이 없었다. 후반에는 결국 우루과이에게 뼈아픈 역전골을 허용하였고, 결국 우루과이에게 다 잡은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다.
2.3. 이후
비록 아데미르가 득점왕을 차지하였지만 다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데에는 2년의 시간이 걸렸고, 판아메리칸 챔피언십[6] 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1953년에도 코파 아메리카에 나갔지만 아데미르는 초반에만 기용되었고 후반에는 기용되지 못하였다. 결국 브라질은 우승에 실패하였다. 이 대회를 끝으로 아데미르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선수 생활을 접은 아데미르는 은퇴 후 라디오 해설자로 이름을 날렸고 1996년에 사망하였다. 라디오 해설자로 활동할 때의 일화가 하나 있는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라디오 중계를 맡고 있던 아데미르는 브라질의 4강 상대가 우루과이로 결정되자 지지뉴와 함께 전격적으로 브라질 대표팀 숙소를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아데미르는 후배들에게 월드컵 우승을 못해도 좋으니 우루과이 만큼은 꼭 꺾어서 우루과이가 가진 오만함을 꺾어주기를, 그리고 후배들에게 자신들의 복수를 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펠레 등 어린 시절에 당시의 비통함을 겪었던 선수들이 남아 있어서 그들의 투지를 자극하였고, 후배들은 선배들과의 약속을 결국 지켜내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브라질 최초의 넘버 나인.[7] 양발 사용에 모두 능했으며 당시로서는 큰 키와 좋은 탄력으로 공중볼 다툼에도 우위를 점했다. 또한 발재간도 훌륭하여 대표팀 동료 지지뉴등과 더불어 관중들의 눈을 즐겁게 했는데 빠른 스피드[8] 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더 막기 힘든 공격수였다.
또한 그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총 32골[9] 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브라질 역사상 9번째로 많은 득점수이다.
4. 수상
4.1. 클럽
캄페오나투 페르남부카누[10] 우승 1회: 1941(이상 헤시피)
캄페오나투 카히오카[11] 우승 5회: 1945(바스쿠 다 가마), 1946(플루미넨시), 1950, 1952, 1956(이상 바스쿠 다 가마)
4.2. 국가대표
FIFA 월드컵 준우승 1회: 1950
코파 아메리카 우승 1회: 1949
판아메리칸 챔피언십 우승 1회: 1952
4.3. 개인
FIFA 월드컵 골든슈 1회: 1950
FIFA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50
캄페오나투 카히오카 득점왕 2회: 1949, 1950
[1] 페르남부쿠 주 리그[2]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리그[3] 여담으로 열달 후에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친선 경기에서 아르헨티나 수비수 호세 바타글리에로의 다리를 부러뜨렸다.[4] 이 대회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의 자이르 다 호사가 아르헨티나의 주장 호세 살로몬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을 시작으로 역사에 남을 초유의 난투극을 벌였다. 관중들이 난입하였고, 경찰이 나서서 소요를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이후의 시합은 싸움 그 자체의 양상을 띠었다. 그 이후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10년 간 시합을 하지 않았고 아르헨티나는 여기에 브라질이 월드컵 개최권을 가져간 것에 반발하여 월드컵 출전 자체를 거부해버렸다[5] 여기에는 가족들의 입김도 작용했다[6] 중남미 국가들의 축구 경기. 브라질은 초청팀 자격으로 참가하였다[7] 브라질 대표팀에는 그 이전에도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나 레오니다스 다시우바같은 스타 스트라이커들이 있었지만 9번의 등번호를 달고 필드를 누빈 스타 스트라이커는 아데미르가 최초이다[8] 아데미르가 처음 데뷔할 때의 포지션은 아웃사이드-레프트. 오늘날의 레프트 윙어였다[9] 39경기 출전[10] 페르남부쿠 주 리그[11]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