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

 

'''펠레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1961 · 1963 · 1964
1957 · 1958 · 1959 ·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9 · 1973
'''FIFA 월드컵 골든볼 1970'''
'''FIFA 월드컵 실버볼 1958'''
'''FIFA 월드컵 실버슈 1958[165]'''
'''FIFA 월드컵 신인상 1958[166]'''
'''베스트팀'''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color=#373a3c> '''1972 Rey del Fútbol de América'''
수상
테오필로 쿠비야스
2위
'''펠레'''
3위
자이르지뉴

'''1959 코파 아메리카 MVP'''
'''펠레'''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color=#373a3c> '''1958'''
<color=#373a3c> '''1962'''
<color=#373a3c> '''1970'''

'''펠레의 기타 정보'''

'''뉴욕 코스모스 명예 회장 '''
'''New York Cosmos '''
'''이름'''
'''펠레''' '''OBK'''
'''Pelé OBK[1] KBE[2]'''
'''본명'''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3][4]
(Edson Arantes do Nascimento)
'''출생'''
1940년 10월 23일[5] '''(84세)'''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 주 트리스 코라송이스[6]
'''국적'''
[image] 브라질
'''종교'''
가톨릭
'''가족'''
2남 1녀 중 첫째, 슬하 2남 5녀
'''신체'''
173cm | 73kg
'''주발'''
양발
'''등번호'''
10번[7]
'''포지션'''
공격수[8]
'''소속 팀'''
바우루 AC (1952~1956 / 유스)
'''산투스 FC (1956~1974)'''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통산 득점'''
1283골[비공식] / 757골-767골[공식]
'''국가대표'''
92경기 '''77골'''[9] (브라질 / 1957~1971)
'''SNS'''
| |
1. 소개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선수 경력
2.3. 은퇴 이후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3.3. 수훈
3.4. 개인 기록
3.5. 통산 기록
3.5.1. 클럽
3.5.2. 국가대표
4. 플레이 스타일
4.1. 온 더 볼
4.2. 득점력
4.3. 패스
4.4. 수비
4.5. 그 외
5. 평가
5.1. 현대에서의 위상
5.2. 펠레에 대한 헌사
5.3. 당대에서의 위상
5.4. 비판과 오해
5.4.1. 당대 전술에 관한 논란
5.4.2. 득점 수 관련 논란
5.4.3. 소속 팀 수준 관련 논란
5.4.4. 주립 리그 관련 논란
5.4.5. 짚어야 할 점
5.5. 인성, 사생활
6. 어록
8. 이야깃거리

<color=#373a3c> 1965년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나온 바이시클 킥
<color=#373a3c> 1960년 5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면서 수비수를 따돌리고 있는 펠레
[clearfix]

1. 소개


'''FIFA - 펠레 영상'''


<color=#373a3c>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 직후 쥘 리메 컵을 들고 키스를 하는 펠레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본명은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Edson Arantes do Nascimento)로 펠레(Pelé)라는 애칭으로 더욱 유명하다. 브라질 정부에서 펠레의 선수 생활 당시에 유럽 구단[10]의 펠레 영입을 막기 위해 공식적으로 그를 국외 반출 불가의 국보로 지정하기도 했다.
FIFA 월드컵에서 3회 우승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인 펠레는 IOC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되었다.[11] 또한 발롱도르를 선정하는 프랑스 풋볼에서 비유럽 국적의 선수까지 포함[12]하여 재심사를 진행한 결과, 펠레는 총 7번 수상해야 했던 것으로 발표되었다.[13]
그 엄청난 실력으로 완벽한 커리어를 쌓으며 세계 축구계에 이바지한 공을 대중에게 인정받아 통해 '축구황제(The King of Football)'라는 칭호를 얻었다.[14]
''축구의 아이콘이다. ''

2. 생애


펠레의 생애에 대해서 서술한다.

2.1. 어린 시절


상술되어 있듯 '펠레'로 알려진 그의 이름은 별명이다. 아버지 돈지뉴[15]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Bilé)"를 어린 펠레가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고 "펠레"로 발음해서 생긴 별명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고,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1977년에 발간된 펠레의 자서전에서조차 펠레라는 별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적혀 있었고, 한참 후인 2010년 10월 경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는 펠레 본인이 이와 같이 밝혔다. 참고로 빌레는 포르투갈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적'''이라는 뜻이고 펠레는 흑진주라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어린 시절의 펠레는 자신의 별명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펠레가 살던 골목의 동네 친구들이 그를 펠레라고 부르며 놀려 대기 시작했고, 펠레는 그 때문에 친구들과 싸우기도 했다. 펠레의 원래 이름인 이지송(Edison)은 아버지 돈지뉴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것이다. 이는 돈지뉴가 에디슨을 존경하여 그와같이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인데, 이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던 펠레는 이지송이라는 이름을 무지 사랑해서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던 주위 사람들과 자주 다툰 것이다. 덧붙여 돈지뉴는 펠레의 이름을 호적에 올릴 때 i자를 빼고 "이드송(Edson)"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서류 절차상 실수가 생겨서 기록상으로는 이지송이 되었다.
어찌저찌 펠레란 별명이 굳어져버렸고 학교에서도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학교에서도 싸웠고 이틀간 징계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급기야 아버지까지 그를 펠레라 부르게 되자 그걸로 게임 끝. 후에 스타가 된 후 그는 펠레란 이름을 신이 주신 이름이라며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펠레의 가족들은 그냥 이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브라질의 흔한 빈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준프로 선수로 뛰었는데, 보잘것 없는 선수 수당 때문에 시간제 근무까지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16] 펠레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헤딩 실력만큼은 더 뛰어났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선수 생활 시절 헤딩으로만 5골을 넣었던 적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못했다고 말했다.[17] 하지만 아버지는 상대 팀과의 경기 도중 강한 태클로 무릎이 부서지는 끔찍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하지만 펠레의 아버지답게 기어코 재활에 성공했고 시청에서도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펠레의 가족은 바우루로 이사하였고, 펠레도 축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축구를 좋아했으며, 파일럿을 비롯한 여러 장래희망을 갖기도 했고, 가끔 무서운 일이 생기면 어머니에게 응석도 부리는 약간 소심할 뿐인 평범한 아이였다. 당시의 펠레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멘토는 아버지 돈지뉴였는데, 아버지는 자신이 못 이루었던 꿈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만들고자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노하우를 펠레에게 전해주었다. 축구 선수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스킬과 마음 가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관중을 다루는 법까지 가르쳤다.
펠레가 9살이 되던 해, 브라질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났다. 당시 펠레는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듣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서 브라질월드컵에서 우승시킬 것을, 그리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한다. 자서전에 보면 예수상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나와 있다. 펠레는 실제로도 신앙심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color=#373a3c> 바우루 AC 유소년 팀 계약을 맺는 펠레
그렇게 펠레는 동네에서 축구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한편 아버지 돈지뉴의 전 소속팀이었던 바우루 AC에서 유소년 팀을 만들면서 그 코치로 위대한 멘토 바우데마르 지브리투[18]를 데려왔다.
그리고 펠레는 바우루 AC의 지브리투의 소개로 상파울루 주의 떠오르는 강호, 산투스 FC 유소년팀에 들어가게 된다. 산투스 FC는 당시 지투, 페페[19] 등 젊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스쿼드를 재정비하던 팀이었다.
산투스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받던 펠레는 2번이나 무단 이탈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의 왜소한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 다른 한 번은 4살이나 어린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실축하였을 때였다.[20] 펠레는 유소년 팀에서 이탈하려고 할 때마다 팀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허드렛일을 하던 사부라는 친구에게 걸려서 다시 숙소로 되돌아갔다.

이 사부라는 인물은 사실 멘탈이 완전히 깨진 펠레를 잘 달래서 다시 축구에 전념하게 만들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작은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는 "네가 바우루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거다. 만약 지금 먹는 속도대로 계속 먹다보면 조만간 너는 산투스 제일의 뚱보도 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펠레의 가방을 빼앗아 다시 방 안에 던져 넣었다.
페널티 킥 실축 사건 때 사부는 대뜸 펠레의 방에 쳐들어갔다. 펠레가 울면서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 사부는 좋은 구경했다는 식으로 펠레의 속을 긁었다. 펠레가 페널티 킥 놓친 걸 말하느냐고 답하자 사부는 "맞다. 그런 식으로 페널티 킥 날려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라고 말했고, 펠레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지만 사부는 침착하게 '''"네가 롤모델로 삼고 있을 산투스의 스타 플레이어들도 연습이든 실전이든 페널티 킥 엄청나게 실축하던 거 내가 다 봤다. 누구나 다 하는 실수니까 풀 죽을 필요 없다."'''라고 말하며 화나 있던 펠레를 달래주었다. 사부는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해 허드렛일만 많이 했을 뿐이지 매우 지혜롭고 설득도 잘 하는 인물이었는데, 사부의 진심어린 설득 덕분에 축구 황제 펠레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이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펠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도망쳐왔는데, 지브리투 코치가 집까지 찾아와서 끌고 갔다고 한다.

2.2. 선수 경력


펠레의 축구 선수 경력에 대해서 서술한다.

2.2.1. 클럽 경력


''' '''

2.2.2. 국가대표 경력


''' '''

2.3. 은퇴 이후


펠레는 축구 선수 은퇴 이후 부패로 얼룩진 브라질 축구계와 대립했다. 이후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브라질 축구계를 정화하는 대규모 개혁을 시도하는 등 축구 협회와 클럽들의 회계를 투명화하려 노력했고,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힘을 썼다.관련 네이버캐스트[21]
이후 2015년에는 노환이 찾아왔고, 각종 수술 후유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이 때문에 우울증까지 찾아왔지만# 바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 산투스 FC (1956~1974)
    • 타사 브라지우: 1961, 1962, 1963, 1964, 1965,
    •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22]: 1968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1959, 1963, 1964, 196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컵: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968

3.2. 개인 수상


  • FIFA 발롱도르 명예상: 2013
  • FIFA 월드컵 골든볼: 1970
  • FIFA 월드컵 실버볼: 1958
  • FIFA 월드컵 실버슈: 1958
  • FIFA 월드컵 베스트 영플레이어: 1958[23]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8, 1970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FIFA 100: 2004
  • FIFA 세기의 선수[24]: 2000
  • FIFA 공로훈장: 1984, 2014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1959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1959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73
  • 타사 브라지우 득점왕: 1961, 1963, 1964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9, 197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 1965
  • 인터컨티넨탈컵 득점왕: 1962, 1963
  • 북미 축구 리그 올스타팀: 1975, 1976, 1977
  • FWA 공로상: 2018
  • 볼라 지 프라타: 1970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세계 베스트 XI: 1970
  • 타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25]: 1999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BBC 올해의 해외 스포츠 스타: 1970
  • BBC 올해의 운동 선수 평생 공로상: 2005
  • 로이터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IOC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IFFHS 20세기의 선수: 1999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

3.3. 수훈



3.4. 개인 기록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우승: 3회 (1958, 1962,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신인상 (1958, 17세)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득점: 2경기 3골[26] (1958, 1970)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도움: 3개[27]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공격포인트: 2경기 3골 3도움 (1958,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 14경기 12골 10도움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도움: 14경기 10도움 (1958, 1962, 1970)
  • FIFA 월드컵 통산 단일 대회 최다 도움: 6경기 7도움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해트트릭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우승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결승전 출전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결승전 득점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2회 우승 (1962, 22세)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프리킥 골이자 유이한 두 대회 연속 프리킥 골 2골 (1966, 1970)[28]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연속 대회 득점 4대회 (1958, 1962, 1966, 1970)[29]
  • FIFA 월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10-10(10골 이상, 10도움 이상)을 달성한 선수[30]
  • 축구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모두 3골 이상 득점하고 우승한 선수
  • 인터컨티넨탈컵[31] 통산 최다 득점 3경기 7골 (1962, 1963)

3.5. 통산 기록



3.5.1. 클럽


펠레의 골 기록은 특정 대회를 포함시키느냐 안시키느냐에 따라 다르다[32].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브라질 주별 대항전[33] 등을 공식 대회로 보냐 마냐에 따라 골 기록이 달라지곤 한다.

  • x표는 참가 자체가 불가능했던 경우
'''시즌'''
'''클럽'''
'''소속리그'''
'''주립 리그'''
'''히우
상파울루

[34]
'''
'''전국 대회'''
[35]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인터컨티넨탈컵'''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56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0
0
x
x
x
x
x
x
x
x
0
0
[36]
1957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9
36[37]
9
5
x
x
x
x
x
x
38
41
1958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8
58
8
8
x
x
x
x
x
x
46
66
1959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2
45
7
6
4
2
x
x
x
x
43
53
1960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
33
3
0
0
0
0
0
[38]
0
0
33
33
1961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
47
7
8
5
9
[39]
0
0
0
0
38
64
1962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
37
0
0
5
3
[40]
4
4
2
5
37
49
1963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22
8
14
4
5
[41]
4
5
1
2
36
48
1964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
34
4
3
6
7
0
0
0
0
31
44
1965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
49
7
5
4
2
7
8
0
0
48
64
1966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4
13
0
0
5
2
x
x
[42]
0
0
19
15
1967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8
17
x
x
[43]
14
9
[44]
0
0
0
0
32
26
1968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
17
x
x
18
12
[45]
0
0
0
0
[46]
43
29
1969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5
26
x
x
12
12
[47]
x
x
[48]
0
0
[49]
40
40
1970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5
7
x
x
13
4
[50]
x
x
[51]
0
0
28
11
1971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8
x
x
21
1
[52]
0
0
0
0
40
9
1972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0
9
x
x
16
5
0
0
0
0
36
14
1973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11
x
x
30
19
0
0
0
0
49
30
1974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0
1
x
x
17
9
0
0
0
0
27
10
'''19시즌'''
'''합계'''
'''412'''
'''470'''
'''53'''
'''49'''
'''174'''
[53]
'''101'''
'''15'''
'''17'''
'''3'''
'''7'''
'''657'''
'''644'''
<color=#373a3c> '''시즌'''
<color=#373a3c> '''클럽'''
<color=#373a3c> '''소속리그'''
'''리그'''
'''포스트 시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75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9
5
x
x
9
5
1976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2
13
2
2
24
15
1977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5
13
6
4
31
17
3시즌
합계
56
31
8
6
64
37
[54]
'''22시즌'''
'''클럽 커리어 통산'''
'''-'''
'''721'''
[55]

'''681'''
[56]


3.5.2. 국가대표


<rowcolor=#373a3c> '''소속 대표팀'''
'''연도'''
'''경기'''
'''득점'''
브라질
1957
2
2
1958
7
9
1959
9
11
1960
6
2
1961
0
0
1962
8
8
1963
7
7
1964
3
2
1965
8
9
1966
9
5
1967
0
0
1968
5
[57]
4
1969
9
7
1970
15
8
1971
2
1
'''통산'''
'''91'''
'''77'''
무슨 대회에서 어떤 골을 넣었는지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4. 플레이 스타일




펠레의 플레이 스타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모든 능력이 정점에 가까운 '''완성형 선수'''다. 최근 들어 멀티 플레이어나 육각형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약점이 없다'는 표현이 남용되고 있지만, 펠레는 그중에서도 단연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펠레의 화려한 득점 기록 때문에 그를 전형적인 골게터로 착각하기 쉽지만, 펠레는 자서전에서 스스로를 공격형 미드필더라 칭했을 정도로 미드필더적인 성향이 더 강한 선수였다.[58] 실제로, 이 링크의 사례처럼 펠레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한 사례가 꽤 존재한다. 당시 펠레의 포지션은 브라질에서 Ponta de Lança(창날)이라 불렸던 포지션이다. 이 창날 포지션은 빠르고 날렵한 드리블로 라인을 부순 뒤, 창처럼 침투해서 마무리를 짓기도 했고, 때때로 3선까지 내려와 박스 사이를 휘저으며 중원 장악을 돕기도 했다. 현재의 전술 및 포지션과 완전한 1대1 대응은 어려우나, 굳이 연관짓자면 지금의 세컨드 스트라이커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발롱도르 수상을 주관하는 프랑스풋볼 지에서 2020년 10월에 발표한 발롱도르 드림팀[59] 후보 명단에서 펠레는 공격형 미드필더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는데, 많은 축구팬들이 펠레가 왜 공미 후보에 있냐며 당황했지만[60], 이는 오히려 펠레의 실제 포지션과 플레이 스타일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61]

4.1. 온 더 볼



펠레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 중 한 명이다. 타고난 힘과 스피드, 그리고 무시무시한 수준의 기술적 역량을 모두 뽐내며 수비진을 추풍낙엽으로 만드는 드리블을 구사했다. 드리블링에 있어서 펠레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왼발과 오른발을 막힘없이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는 것인데, 이런 유형의 공격수를 상대하게 되면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정말 골치가 아파지는데, 공격수의 반대발 사용을 유도하는 축구 수비의 기본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펠레는 현대 축구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넛맥[62], 헛다리 짚기, 사포, 라 크로케타, 라보나 킥 등 각종 최고난도 기술들을 모두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레벨의 테크니션이었다.
상대의 성급한 수비를 역으로 이용하는 플레이에도 능했다. 대표적으로 더미 플레이, 노 터치 트릭을 들 수 있는데, 상대 선수의 수비 타이밍을 미리 읽고 그 타이밍을 깨버리는 플레이를 했다. 또, 자신의 앞을 막아선 수비수의 발에 일부러 공을 맞힌 후, 태클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수비수로부터 재빨리 공을 빼앗아오는 플레이에도 능했다.
신체적으로도 드리블에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100m를 10초 대에 주파하는 스피드, 폭발적인 순간 가속력과 민첩성, 단단한 신체와 절륜한 균형 감각 등을 모두 보유한 선수였다. 한 경기에서 두세명의 선수들을 제치는 장면 정도는 허다하게 나왔으며, '''때로는 11명까지도''' 전부 제치는 어마어마한 드리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image]
<color=#373a3c> '''상대팀 모두를 제친 골 상황에 대한 묘사[63]'''
공중볼을 섬세하게 컨트롤하는 것은 펠레의 전매특허였다. 펠레는 발과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 등, 무릎 등 몸의 거의 모든 부위를 사용하여 완벽한 트래핑을 할 수 있었다. 이 트래핑 자체를 하나의 드리블 기술로 흡수하여 상대 선수를 제치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머리와 어깨로만 공을 통통 띄워 골키퍼 바로 앞까지 가져가는 묘기 축구나 다름 없는 장면도 자주 만들어냈다. 어렸을 때부터 길거리 축구로 실력을 단련시킨 덕에 온 몸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공을 다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모두에게 인정받는 개인기의 달인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축구 선수 중 테크니션들은 신체 보호와 파울 유도를 목적으로 다이빙을 곧잘하는 경우가 많은데, 펠레는 최고의 테크니션이었음에도 다이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악의적인 태클에 걸려 넘어지면 주심에게 항의하거나 어필하기보다, 빨리 일어나 일단 공부터 다시 따내고 보는 스타일이었다. 드리블에 언제나 자신감이 차 있었고, 늘 집념 가득한 플레이를 펼쳤다. 펠레가 파울을 얻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날리는 장면은 어느 경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64]
그런데 펠레는 당대 최고의 드리블 능력을 가졌지만 드리블 시도 횟수를 많이 가져가진 않았다. 혼자서 상대 수비를 헤집은 골들도 있지만 상대 수비를 벗길 때 연계 플레이를 자주 활용하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마라도나, 메시와 같은 크랙의 모습을 기대하고 펠레의 볼터치 영상을 봤다가 실망하거나 저평가를 내리는 팬들도 있다. 하지만 축구는 팀 스포츠이며 굳이 모든 상황을 스스로의 힘으로만 해결할 필요는 없다. 마라도나, 메시가 특이한 케이스다.

4.2. 득점력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잡이 중 한 명. 발로 골을 결정짓는 능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뛰어났다. 기본적으로 슛 파워 자체가 매우 강력했으며, [65] 양발잡이라서 왼발과 오른발 모두를 사용하여 파괴력 있는 슈팅을 구사할 수 있었다. 언제나 상황에 알맞는 슈팅을 시도했고, 여차하면 칩슛을 통한 득점에도 능했다. 중거리 슛 능력도 탁월해서 어느 위치에서든 각만 나오면 위협적인 슈팅으로 골키퍼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하프라인에서도 호시탐탐 골문을 노렸다.
특히 공중에서 슈팅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뛰어났다. 펠레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공을 처리했는데, 단순 헤더는 물론 양발을 모두 사용하여 바이시클 킥, 발리 슈팅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팔을 제외한 온 몸을 사용하여 마치 기계처럼 골을 집어넣었다.

펠레는 170cm대 초반의 작은 키를 가졌음에도 공중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선수였다. 일단 점프 높이부터가 남달랐는데, 이는 펠레의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바우데마르 지브리투의 훈련법에서 비결을 찾을 수 있다.
지브리투는 펠레의 타고난 신체적 탄력을 눈여겨보았고, 오른발, 왼발, 양발 점프를 이용해 어떤 상황에서든 탄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켰는데 이는 펠레의 엄청난 무기가 되었다. 압도적인 점프력 덕에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선수들을 상대로도 제공권에서 우위를 점했다. 공중에 뜬 후 특유의 탄력을 이용하여 강력하고도 정확한 헤더를 골문에 꽂아넣었다. 이런 펠레의 점프력은 동시대 선수들과 후대 선수들에 의해 퓨마, 헬리콥터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펠레가 넣은 헤딩골은 영상으로 남아있는 것만 추려도 100골 가까이 된다.
[image]

[image]
<color=#373a3c> '''펠레의 압도적인 점프력[66]'''
펠레는 프리킥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다. 2번의 월드컵에서 프리킥으로 득점한 5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67] 1966년 월드컵에서는 가린샤와 1970년 월드컵에서는 호베르투 히벨리누와 함께 브라질의 프리킥을 도맡아 찼다. 펠레의 프리킥은 호베르투 카를루스와 비슷하게 먼 거리에서 달려와서 발등 혹은 인프런트&아웃프런트로 강하게 때려넣는 스타일이었다.[68] 펠레의 프리킥 스타일을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프리킥 스타일과 비교했을 때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펠레는 주로 쓰는 발인 오른발뿐만 아니라 왼발로도 프리킥을 즐겨 찼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왼발 프리킥으로도 골을 넣은 적이 있다. 펠레가 선수 생활동안 넣은 프리킥 골 수는 70골이나 된다.

4.3. 패스



에우제비우같이 동시대의 선수 중 펠레와 비슷한 포지션에서 활약했던 선수들 중에서 높은 수준의 플레이메이킹 능력과 연계 능력을 갖춘 선수들도 있었지만 펠레는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는데, 정말 군계일학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수준이었다.
타이밍에 맞추어 공격수의 앞 공간으로 보내주는 스루패스에 매우 능했으며, 전방에 있는 선수와의 섬세한 연계 플레이로 상대 수비진의 혼을 빼놓았다. 또 공중볼을 트래핑할 때와 비슷하게 온 몸을 사용하여 단 한 번의 간결한 볼터치를 했고, 이를 통해 즉흥적인 찬스메이킹을 하곤 했다. 백힐 패스는 예사였고, 호나우지뉴처럼 등으로 패스하거나 노 룩 패스를 하기도 했다. 펠레는 단순한 패스에 노골적인 트릭을 접목하여 사용한 최초의 축구선수 중 한 명이다.
월드컵 때에도 펠레의 패스 능력은 빛났다. 그 중에서도 1970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경기 조율 능력은 단연 압권인데, 스포츠 통계 사이트 옵타에 따르면 1970년 월드컵 6경기에서 28회의 찬스메이킹 횟수를 기록했다.[69]
펠레는 슈팅이나 드리블을 할 때에는 양발을 비슷한 빈도로 섞어서 쓰는 선수이다. 그러나 패스할 때에는 일단 공을 잡아두고 오른발을 주로 사용하여 패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70년 월드컵 잉글랜드전에서 자이르지뉴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장면, 그리고 결승전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장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패스할 때는 왼발보다는 오른발을 더 선호한다. 아무래도 패스는 드리블이나 슈팅에 비해 더 정교함을 요하므로 펠레 입장에서도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오른발을 자주 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4.4. 수비



펠레는 수비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슬금슬금 수비 진영으로 내려가서 타이밍을 재다가, 공을 보유한 상대팀 선수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일거에 들이닥쳐 공을 빼내는 식의 수비 스타일을 가졌다. 경기를 살펴보면 이런 장면을 꽤 자주 볼 수 있다.
펠레는 스탠딩 태클과 슬라이딩 태클 모두 뛰어났다. 또 끈기와 승부욕이 대단해서 본인이 수비하기로 마음 먹은 상대는 어떻게든 막아내려 했으며, 때문에 슬라이딩 태클도 자주 시도했다. 성공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실패도 제법 많이 했고, 필연적으로 파울도 자주 범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골키퍼들도 펠레의 레이더망에 걸리면 가차없이 당했다. 펠레는 우둔한 사냥감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아주 영악한 플레이를 펼쳤는데, 골키퍼가 골킥을 차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뒤에서 머리를 불쑥 들이밀거나, 골키퍼가 잡은 공을 의도적으로 툭 건드리는 플레이를 해서 상대 골키퍼의 방심을 유도했다. 대표적으로 고든 뱅크스레이 클레멘스가 펠레에게 이런 플레이를 당한 바 있다.
펠레는 1970년 월드컵 당시 6경기에서 태클 9회를 기록했다. 공격수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다.[70]
펠레가 퇴장 또는 부상으로 경기에서 빠진 골키퍼를 대신하여 경기 도중 골키퍼 장갑을 낀 경기는 통산 7경기나 된다. 펠레는 그 7경기 동안 단 1골만을 실점했다. 골키퍼로서의 기량도 필드플레이어 중에서는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다.

4.5. 그 외



펠레는 승부근성이 아주 강했는데, 상대의 반칙에는 반칙으로 맞받아칠 줄도 알았다. 대표적인 예로 1970년 월드컵 우루과이전에서 펠레가 우루과이의 미드필더 다고베르토 폰테스에게 파울을 당하자 아예 팔꿈치로 폰테스의 얼굴을 가격해 버렸던 장면을 들 수 있다. 폰테스는 그 상황 이전에도 펠레가 돌파하다 파울을 당해 쓰러진 상황에서 펠레의 다리를 밟은 적도 있었고 돌파 중에 뒤에서 또 파울을 걸자 펠레가 아예 팔꿈치로 찍어버린 것이다. 물론 현대 축구였다면 동반 퇴장을 당하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심판은 폰테스의 파울로 판정하고 브라질에게 프리킥을 주었다.[71]
그런데 의외로 펠레는 현역 시절 공식적으로 팀의 주장에 선임된 적이 없으며, 임시로 주장직을 수행했던 경기도 몇 안 된다. 그러나 동료들과 주변인들의 언급에 따르면 리더십 자체는 매우 뛰어났다. 노년기의 활발한 언론활동이나 정치활동을 보면 빈 말은 아닌 듯하다. 또한 최고 레벨의 플레이어들이 자신만의 세계가 강고하고 외골수적인 면이 있는 것에 비해 경기 중 동료의 조언에 따라 포메이션이나 플레이스타일을 즉석에서 바꿔 재미를 보는 등 유연한 태도를 보여줬다고 한다.
펠레는 기복이 거의 없는 선수였다. 기량에 있어서 늘 일관됨을 유지했으며, 골 기록만 살펴봐도 그가 매우 꾸준한 선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드컵에서 통산 14경기[72] '''12골 10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골을 몰아 넣는 타입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경기에서 1~2개의 골을 득점했다. 그러나 언제든 무섭게 몰아칠 수 있는 선수이기도 했다. 1964년 리그의 보타포구[73]를 상대로 8골을 넣은 것이 펠레의 단일 경기 최다골 기록이다. 이 외에도 해트 트릭 91회, 4골 31회, 5골 6회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74]

5. 평가



5.1. 현대에서의 위상



공신력이 어느 정도 보장된 기관에서 내놓는 역대 축구 선수 랭킹을 보면 최상위권에서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현재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와 함께 3명이서 역대 최고 자리를 다투고 있는데 이것도 펠레를 경험한 세대가 줄어들고 최근에 메시가 등장하면서 평가가 떨어진 것이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십중팔구 1위라 평가 받은 선수였다.''' 펠레가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1981년에 플라카르에서 세계 각국의 축구 전문가 70인에 의뢰하여 역대 베스트 11을 뽑았을 때에는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펠레를 자신의 베스트에 집어넣었다. 20세기 말 각종 세기말 조사에서 펠레가 축구 선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고 엘 그라피코와 같은 아르헨티나 축구 잡지에서조차 자국 영웅인 디에고 마라도나가 아닌 펠레를 1위로 깔고 들어갈 정도였다.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인을 뽑으면 축구계 대표로는 펠레가 들어가고 복싱무하마드 알리농구마이클 조던, 야구베이브 루스, 골프타이거 우즈같은 타 종목 최고 선수들의 위에 랭크되는 결과도 자주 나온다. 실력이야 시대 차이가 많이 나니 마라도나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그렇다쳐도 축구 황제의 위상만큼은 도전자가 현재로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다. 마라도나가 알리, 조던, 루스 등과 비슷하거나 그들의 위에 설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펠레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포츠인인 이유.
펠레는 축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FIFA 월드컵 3회 우승 선수'''이며, 두 개 이상의 대회에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우승을 이끈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75] 클럽에서도 득점왕 11회[76], 리그[77] 우승 10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인터컨티넨탈컵 우승 2회의 업적을 남겼다. 펠레 때 브라질축구협회 측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코파아메리카 등 남미축구협회 주관 대회에 불참하거나 2군을 보내서 펠레의 코파 아메리카 참가는 1번,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는 3번 뿐인데 그 3번 중 2번을 우승했고 특히 1번은 세계 최초의 트레블이었다. 이 트레블이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남미에서 유일한 트레블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이다.
국가대표와 클럽을 포함한 팀 커리어, 득점왕과 MVP와 같은 개인 커리어, 중요 경기 내에서의 활약도 등 모든 면에서 역대 최고급의 성공을 거둔 케이스로 커리어상으로는 비슷한 선수를 찾기조차 불가능하다. 각종 대회 결승전에 출전하면 스타 본능을 발휘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주인공이 되곤 했다.[78] 펠레가 커리어 내내 클럽, 국가대표를 통틀어 출전한 결승전은 총 14회인데 단 2번을 제외하면 모두 소속팀에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러면서 총 23경기 동안 29골을 넣었고, 그 안에는 월드컵 결승전 2경기의 3골도 포함된다. 이는 바바, 지네딘 지단, 제프 허스트와 더불어 갖고 있는 월드컵 결승전 개인 최다 득점 기록이며 어시 3개까지 포함한다면 월드컵 결승전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은 펠레가 갖게 된다. 이렇듯 펠레는 결승전에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였는데, 월드컵 결승전 2경기 3골 3어시스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경기 3골 2어시스트,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인터컨티넨탈 컵 3경기 7골 2어시스트를 기록, 총합 8경기 13골 7어시스트로 경기당 2.50공격포인트라는 엄청난 기록도 남겼다.# '''게다가 축구 역사상 월드컵 결승전, 챔스 결승전,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3골 이상 넣어본 선수는 펠레가 유일하다.'''
기량이야 당시 라이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준에 커리어까지 독보적으로 최고이니 당연히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를 꼽으면 첫 손가락에 꼽히게 된다. 굳이 표현하자면 현재까지 전해지는 '축구 제국' 브라질의 위상을 처음으로 개척한 선구자이자 세계 국제 축구 대회의 축을 브라질로 옮겨놓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세계인의 머리에 축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를 브라질로 각인시켰다는 이야기.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축구하면 어떤 나라가 떠오르는지 물어보라. 아마 한 나라로 선택지를 좁히면 거의 대부분 브라질이 나올 것이다. 아무나 외국 농구 선수 이름을 하나만 대보라고 하면 조던이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당시 브라질이 세계 최강의 팀이었던 것도 사실이나, '''1958~1970년까지 주전으로 활약하며 월드컵 3회 우승을 모두 경험한 선수는 펠레밖에 없다.''' 펠레가 월드컵에 14경기 출전해서 총 12골 10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경기에 나오기만 하면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한 62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전과 66월드컵 포르투갈 전만 제외하면 전 경기 스탯을 찍은 것이다. 또한 1958~1970년 월드컵까지 브라질 선수들의 스탯을 보면 펠레가 공격포인트 22개(12골 10어시스트)로 2위인 가린샤(5골 5어시스트, 10개) 등 다른 선수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79] 또한 이제 100년 가까이 되어가는 월드컵 역사상 10-10(10골 이상, 10어시스트 이상)을 달성한 선수는 펠레가 유일하다.[80] 그 이후에도 지쿠,[81] 소크라치스,[82], 베베투,[83] 호마리우,[84] 히바우두,[85] 호나우두,[86] 카푸,[87] 호나우지뉴,[88] 카카,[89] 등 수많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나왔고 그들이 브라질의 명성을 이어왔지만 펠레를 뛰어넘는 선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20세기 말까지 전문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펠레의 활약을 접하지 못한 팬들은 마라도나가 더 위대한 선수였다는 반응이 많았고 이는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에 대한 FIFA 주관 인터넷 팬 투표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마라도나 53.6%, 펠레 18.53%)# 그러나 2004년의 펠레 에테르노[90]를 시작으로 펠레의 영상 자료가 과거에 비해 많이 발굴되었다. 또한 적은 표본이긴 하지만 옵타 등 스포츠 통계 사이트에서 골 기록 외에도 키패스 등 다른 스탯에서도 현재의 슈퍼스타들에 모자를 것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골 기록만 존재하고 영상 자료는 없던 과거에는 축구팬들이 펠레가 단순히 골만 많이 삽입하던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영상 자료들로 인해 축구팬들에게 축구 전반에 뛰어난 컴플리트 포워드로서의 모습으로 각인될 수 있었다. 덕분에 현재는 펠레의 평가가 많이 올라간 모습이다.
기술적으로 그는 바이시클 킥을 비롯, 현대축구에서도 묘기라고 찬양받는 여러 기술을 모두 사용했으며, 머리, 가슴, 오른발, 왼발, 엉덩이 등등 손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분을 현대축구의 기준으로 봐도 놀랄 정도로 완벽하게 사용하며 골을 넣었다. 펠레의 영상을 보면 돌파 외에도 경기 조율을 하거나 직접 연계로 도움을 주는 등의 이타적인 플레이도 많이 가져간다.[91] 그리고 "피치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팀 동료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예측과 경험으로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운동능력과 볼컨트롤로 상대 수비진의 틈을 뚫어 골을 넣어야 이긴다"라는 축구의 황금률을 생각해보면 고금의 그 어떤 공격수도 펠레만큼 최상위 클래스의 선수들을 상대로 그 정의 하나하나에 정확하게 그리고 수준 높게 부합하는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득점으로 유명하지만 30세의 노장으로서 참가했던 1970년 월드컵에서의 6경기 4골 7어시스트 기록이 말해주듯이 펠레의 신체적 기량이 떨어지고 나서는 골스코어러보다는 플레이메이커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펠레는 20대 초반에도 다수의 매체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었다.#
축구사에 길이남을 떡밥인 VS 디에고 마라도나에서 2005년을 기점으로 영상 자료들이 발굴되어서 '''골 기록과 도움 기록, 동료 전설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경기력에 대한 증언이 거품이 아니었음이 증명되고, 펠레의 평가가 상대적으로 많이 올라가게 되었다.''' 확실한 것은 펠레는 그 시대에 현대축구에서도 구사하는 사람이 몇 없는 각종 기술을 '''모두''' 구사하고 확립한 선수라는 것이다.
사실 펠레의 활동 시기가 워낙 과거의 일이라 펠레의 플레이를 담은 영상은 거의 소실된 상태인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니 펠레는 실력 논쟁이 펼쳐질 때마다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펠레의 전성기 플레이를 라이브로 본 세대는 2020년 기준으로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펠레 시절의 선수들 역시 대부분 축구계 자체에서 은퇴했거나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른 역대급 선수들인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요한 크루이프 등 타 선수들과의 비교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해서 요즘 세대들에게는 상당히 저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펠레의 플레이를 직접 목격한 세대인 알렉스 퍼거슨 경이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 프란츠 베켄바워 등 축구의 산 증인이자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선수들이나 감독들은 "역대 최고는 펠레다"라고 항상 치켜세운다. 다른 부분들을 떠나서 펠레가 축구라는 하나의 스포츠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상 펠레의 자리를 넘볼 선수는 앞으로도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때가 지금 같은 빡빡한 수비전술을 쓰는 시대가 아니라며 펠레의 업적이 과장되어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는 펠레의 전술이해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간과한 의견이다. 1970년 4-3-3[92]을 채택한 브라질 대표팀은 당시 기준으론 혁신적으로 유기적이고 화려하면서도 공격, 중원, 수비의 밸런스가 잘 잡힌 팀으로, 토탈 풋볼의 단초를 제공한 팀이었다. 펠레는 그 팀의 중핵이었고 심지어 그 때 펠레는 이미 마지막 월드컵일 정도로 노장이었다. 노장이 되어서도 혁신적인 전술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춘 인물에게 현대의 전술 앞에 무력할 것이란 의견은 시대착오적, 인물착오적 억지다. 그리고 1:1로는 펠레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종종 3~4명씩 펠레를 에워싸거나 펠레의 돌파지점을 미리 선점하고 막고자 한다거나, 맨마킹을 포기하는 대신 공간을 차단하는 등, 수많은 동시대 내노라하는 수비수들이 시대를 앞선 각종 수비방식으로 펠레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펠레를 막을 순 없었다.[93]
또한 이 시기의 장비들이 오늘날 수준으로 보면 놀랄 정도로 낙후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지금보면 축구의 기초적인 개인기인 드래그 백 조차도 푸스카스가 실제로 웸블리에서 보여주기 전에는 거의 뜬구름 잡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푸스카스조차 그 드래그 백을 실전에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연습했는데 동료들이 비웃을 정도였다. 이 원인이 바로 낙후된 장비였다. 푸스카스가 옛날 선수라해서 기술이 별로 뛰어나지 못한 선수라 생각할 수 있는데 호주에서의 크로스바 챌린지 일화[94]라든가 샤워장에서 동료 프란시스코 헨토가 던져주는 물 묻은 비누를 장난치듯 가지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컨트롤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던 선수다. 그리고 당연히 필드라 할 수 있는 축구장도 오늘날에 비교하면 질이 매우 떨어지는데, 잔디부터가 좋지 않다. 유럽은 그나마 덜했지만 남미 축구 경기에서는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기까지 했다.
21세기 초반 축구신의 재림이라 불리던 아르헨티나리오넬 메시포르투갈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국가대표 성적이 메시는 월드컵 준우승 1회, 호날두는 월드컵 4강과 유로 우승 1회에 네이션스리그 1회로 그쳤다. 아직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팀 성적, 그리고 특히 개인의 성적은 월드컵에서 보여준 펠레와 마라도나의 모습에 비해 초라했고, 그래서 반대로 펠레와 마라도나의 위대함이 더욱 올라가기도 했다.

5.2. 펠레에 대한 헌사


'''How Do You Spell Pele? G - O - D'''

The Sunday Times(1970년 브라질의 세번째 월드컵 우승 소식을 전하면서)[95]

'''그러나 최고의 스포츠 선수는 펠레'''

타임즈(마이클 조던의 은퇴기사 중)

'''내가 넣은 가장 위대한 골은 셀레스트[96]

와의 원-투야. 그리고 우리는 그 골을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라고 이름 지었지.'''

돈지뉴(펠레의 아버지)

'''리어왕인지, 황제 존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황제처럼 보였다. 타당하게도 완벽한, 그의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망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어떤 농촌에다가 데려다 놓더라도 그의 왕조의 위엄은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넬슨 로드리게스(스포츠 평론가. 1958년 2월 26일에 나온 칼럼으로, 펠레를 최초로 '황제'라고 불렀다.)#

'''이제 우리는 안다. 왜 사람들이 이 사람을 왕이라고 불러 왔는지, 그가 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알려져 있는지...[97]

'''

제럴드 신스타트, ITV에서 1970년 월드컵 준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 펠레의 노 터치 트릭 직후에 한 발언

'''What a beautiful goal from Pelé! El Rey Pelé!'''

휴 존스, ITV에서 1970년 월드컵 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

'''현재, 지금껏 우리가 본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가 펠레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는가?[98]

'''

휴 맥킬바니, 잉글랜드의 축구 기자, 펠레의 1970년 월드컵 우승 직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이 땅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펠레는 하늘에서 만들어졌지.'''

제프리 그린 (영국의 저명한 축구 기고가)

'''역대 최고의 선수는 1위 펠레, 2위 메시, 3위 마라도나, 4위 크루이프, 5위 호날두.'''

한준희

'''메시, 마라도나, 펠레 중에서 최고는 펠레입니다.'''

오스발도 보스카치 (아르헨티나의 스포츠 평론가)#

'''내가 여태 본 선수 중 최고 5명은 1위 펠레, 2위 메시, 3위 마라도나, 4위 호날두, 5위 디스테파노.'''

호세 라몬 페르난데스 (1978월드컵부터 10번 이상 월드컵을 중계해온 멕시코 스포츠 기자)#

'''펠레가 있던 시절의 브라질은 007영화에서 나오는 온갖 신기한 장치가 달린 자동차와 같았다. (중략) 하지만 펠레가 은퇴하고 난 후의 브라질은 모든 장치를 다 떼고 의자가 튀어나가는 장치만 남은 자동차가 되었다.'''

닉 혼비(영국의 소설가. 자신의 저서 '피버피치' 중에서)

'''제 이름은 로널드 레이건입니다.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본인이 누구인지 밝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펠레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로널드 레이건

'''그의 플레이를 보는 것은 아이의 기쁨을 보는 것이었다. 인간의 비상한 은총과 결합된 아이의 기쁨.'''

넬슨 만델라

'''펠레는 미국 축구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높여주었습니다. 이것은 펠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미 카터

'''펠레는 22년간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전세계의 어떤 외교관보다 더 세계 평화에 공헌했다.'''

J.B. 피녜이루 (주미 브라질 대사)

'''펠레는 내 이론(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유명해질 수 있다)을 반증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15분간의 명성 대신 1500년의 명성을 누릴 것이다.'''

앤디 워홀

'''오늘에서야 펠레가 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무하마드 알리(펠레의 은퇴 경기에서 펠레를 향해 관중들이 손수건을 흔드는 것을 보며. 알리는 바비 무어와 함께 펠레의 은퇴 경기에 초청받았다.)

'''축구는 잘 모른다. 음... 하지만 펠레는 안다.'''

마이클 조던(1994년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릴 당시 축구에 대해 관심이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나는 무하마드 알리와 펠레를 넘어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선수가 되려고 노력한다.'''

우사인 볼트

'''(팀닥터가 펠레의 정신연령이 12살밖에 되지 않는다며 출전을 금지시키는 것을 권유했을때)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축구를 알지 못하며,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봤다.'''

비센치 페올라

'''눈을 깜빡일 때도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면서 깜빡여야만 했다. 두 눈을 동시에 깜빡이면 펠레는 어느새 골을 넣고 있었다.'''

브리투

'''메시와 호날두 중 누가 최고냐고요? 제 생각에 펠레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입니다. 메시와 호날두도 뛰어난 선수들이지만, 펠레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입니다.'''

디노 조프 (1982 월드컵 우승 당시 이탈리아의 주장이자 이탈리아 선수로 유일하게 유로와 월드컵 모두 우승한 선수)

'''마라도나는 현재의 메시와 호날두를 합친 선수였고, 의심할 여지 하나도 없이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는 펠레다.'''

안드레아스 브레메 (1990 월드컵 결승전에서 결승골 넣은 독일선수)

'''마라도나, 메시, 호날두도 좋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는 펠레입니다.'''

조반니 트라파토니 (2002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감독)

'''펠레는 마라도나와 메시보다 뛰어난 선수입니다. 저는 펠레와 라이브로 경기해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는 막강한 피지컬을 자랑하는 선수였고 저는 그를 상대할 때마다 힘들었습니다.'''

다니엘 오네가 (196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이자 대회 통산 단일대회 최다득점 기록을 보유한 아르헨티나 레전드)

'''예전에는 펠레, 마라도나 등과 직접 경기장에서 붙어봤고, 지금은 메시를 봤습니다만, 그들 중 가장 완벽한 선수는 펠레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다른 시대의 선수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펠레는 선수로서 구성요소부터가 최고였습니다. 그는 환상적인 기술, 드리블을 갖춘 선수였습니다. 스피드도 매우 빠르고 어시스트도 매우 많이 했죠.'''

다니엘 솔소나

'''펠레, 마라도나, 메시, 3명 중에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나의 선택은 펠레다.'''

호세 바라카 (1959년 코파아메리카 우승한 아르헨티나 주전 선수)

'''펠레는 완벽하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는 게다가 3번의 월드컵 우승과 1,283골을 넣었다. 펠레 다음으로는 마라도나,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크루이프와 메시이다.'''

노르베르토 알론소 (1978년 월드컵 우승한 아르헨티나 선수)

'''경기에 임하면서 그도 마찬가지로 피부와 뼈로 된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내 자신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타르치시오 부르니치(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 당시 펠레를 막는 임무를 맡았던 이탈리아 수비수)

'''펠레를 막으려는 임무를 수행하려 했을 때 몸이 공처럼 튀었다. 지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난다.'''

야마구치 요시타다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동메달 주역 일본 국대 주전)

'''그는 위대한 컨트롤과 시야를 갖춘 엄청난 재능을 지닌 선수였다. 그는 경기를 읽고 포지션을 읽었다. 그는 거만했지만 그걸 나쁜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는 위대한 선수였으니 뽐 좀 내면 또 뭐 어떤가?'''

'''난 가끔 이 축구란 스포츠가 이 마법같은 선수를 위해 발명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바비 찰튼

'''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지네딘 지단 같은 선수들 모두 훌륭하지만 그들에게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 그건 바로 펠레다.'''

'''펠레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다. 그는 20년간 최고로서 군림했다.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는 그의 밑이다. 펠레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내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때가 아니라 펠레와 함께 뛰었던 때였다.'''

'''지금 리오넬 메시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며, 그의 선수생활 내내 그랬다. 그러나 역대 최고는 펠레다. 나는 펠레와 같은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뉴욕 코스모스에 있을때 같이 뛰었는데, 그에게 공을 주면 그가 너무 빨라서 다신 볼 수 없었다. 펠레는 모든 것이 본능이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완벽한 플레이어였다.'''(펠레 에테르노 중에서)

프란츠 베켄바워[99]

'''나는 제2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될 수 있어도 제2의 펠레는 될 수 없다. 그의 축구는 우리 모두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크루이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이다. 하지만 나는 펠레는 선수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축구에 관한 한 그는 단순히 최고의 선수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페렌츠 푸스카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펠레. 리오넬 메시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모두 특별한 자질들을 지닌 위대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펠레가 더 뛰어났다.'''

'''펠레는 호날두메시를 합친 것보다 뛰어났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펠레는 펠레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세자르 삼파이우

'''펠레를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펠레는 펠레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레벨에 있는 선수이다.'''

'''신은 펠레에게 모든 걸 주셨고, 나머지 찌꺼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호베르투 히벨리누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펠레를 상대했던 순간이 내 커리어 최고의 순간이었다.'''

Q: 펠레가 현시대에서 뛰었어도 과거만큼이나 많은 골을 기록했을거라 자신합니까?

'''A: 물론입니다. 그것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100]

'''경이로운 운동 선수'''(펠레 에테르노 중에서)

'''펠레는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그는 정말 환상적이었다.'''[101]

고든 뱅크스

'''나는 이제 자식들, 가족들, 친구들에게 말해 줄 수 있다. 내가 역사상 최고의 선수와 플레이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말이다.'''

'''대회 전부터 우리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펠레가 우리가 우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펠레가 그렇게 말했다면 우리는 결국 월드컵을 우승할 터였다.'''

'''그의 가장 거대한 비밀은 바로 그의 즉흥성에 있다. 그가 해낸 그 모든 일들은 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는 축구에 관한 한 비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이라 꼽히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의 주장이자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

'''먼저 펠레라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나서 펠레라는 선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펠레처럼 플레이한다는 것은 처럼 플레이하는 것을 뜻한다.'''

미셸 플라티니

'''어두운 방을 밝게 밝힐 수 있는 예술가. 1970 월드컵 결승전에서 펠레로부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게로 이어진 패스는 랭보의 시와 같았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보는 이들에게 영원함을 느끼게 한다.'''

에릭 칸토나

'''펠레가 날 보고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말해줬다. 이는 내 인생 최고의 영예이다.'''

조지 베스트

'''난 우상이랄게 딱히 없는 사람이지만 난 선량한 브라질 사람이고 또 그러므로 펠레를 우러러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우리에게 있어 신과 같다. 뭐,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내 생각에 이 게임은 축구가 아니라 펠레라 불려야한다.'''

'''리오넬 메시는 최고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는 먼저 디에고 마라도나와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펠레를 뛰어넘어야겠지.'''

호마리우

'''펠레는 위대한 선수가 가득했던 시기에 가장 빛났던 최고의 선수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였을뿐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젊고 훌륭하며 아직 많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는 선수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가 본 선수 중 펠레에 견줄 수 있는 선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에우제비우

'''세기의 선수에 대한 논쟁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가능한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펠레. 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추가될 수 있겠지.'''

'''신이 펠레를 만들 때, 축구선수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집어넣었다. 슈팅하는 법, 드리블하는 법, 헤더 슈팅을 하는 법, 몸을 쓰는 법 등. 축구계에서 그가 성취한 것을 다른 사람이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술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마음가짐으로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펠레는 최고이다.'''

'''마라도나와 비교해서도 펠레가 더 뛰어났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말하자면 공중제비를 넘는 광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펠레는 무엇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으며, 팀이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공중제비를 넘을 수 있는 선수였다.'''

지쿠

'''펠레가 결승전에서 5번째 골을 넣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나조차도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어.'''

지게 팔링 (1958 스웨덴 월드컵 당시 결승전에서 펠레를 상대했던 스웨덴의 미드필더)

'''난 위대한 선수를 막는다는 희망을 갖고 도착했으나 우리와 같은 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선수로 인한 완전한 실패에 설득되어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코스타 페레이라 (1962년 인터컨티넨탈 컵 당시 SL 벤피카골키퍼)

Q: 직접 본 선수 중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

'''A: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Q: 그 순서대로인가?

'''A: 그렇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펠레는 내가 지금까지 본 선수 중 최고였다. 펠레는 마라도나,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도 뛰어난 선수였다.'''

알렉스 퍼거슨

'''브라질에서는 펠레가 누군지, 네이마르가 누군지 모두 안다. 우리는 오직 한 명의 펠레만 알고 있다. 어떤 누구도 펠레가 될 수 없다. (네이마르는) 아주 좋은 선수다. 때로 스펙타클한 경기력을 보인다. 바르셀로나 시절에 많이 발전했다. 그러나 절대 펠레와 같을 수 없다. 누구도 그와 동등할 수 없다.'''

'''펠레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 그의 움직임은 컴퓨터 게임으로도 재현해 낼 수 없다.'''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저는 펠레 = 축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스페셜 원, 펠레를 가지고 있죠.'''

주제 무리뉴

'''나에게 두 명의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와 펠레다. 알프레도는 펠레보다는 한 걸음 정도 아래다. 월드컵에서 플레이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펠레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고 축구화를 벗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

쥐스트 퐁텐

'''펠레는 내가 본 선수 중에서 가장 완벽했다. 그는 모든 것을 지녔었다. 뛰어난 양발과 마술같은 공중에서의 능력, 민첩함, 강력함까지. 그는 기술로도 스피드로도 선수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173cm밖에 되지 않았지만 피치 위에서 그는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완벽한 균형과 비현실적인 시야도 지녔었다. 그는 피치 위에서 모든 것을 무엇이든지 보여줄 수 있었기에 가장 위대했다. 브라질 기자가 사우다냐[102]

에게 스쿼드 내 최고의 골키퍼가 누구냐고 묻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펠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느 포지션에서건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바비 무어[103]

'''10번이 지구상 최고의 선수인 펠레의 것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난 펠레가 아니었기에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정말 완전한 선수였다. 그는 위대한 양발과 당해낼 재간이 없는 볼 컨트롤을 소유했고 골문 앞에서는 무자비한 선수였다.'''

'''펠레는 축구에 있어 모든 것을 대변했다. 그가 피치 위에서 보여준 모든 것들 때문에.'''

마리우 자갈루

'''비교하는 것은 추잡하지만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였다. 그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혼합체였다.'''

'''만약 우리가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면 신께선 흑인 펠레를 완벽하게 만드셨다. 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전혀 모자란 것이 없었다. 헤딩, 체력, 드리블, 피니시, 영감, 천재성, 성질, 시야, 골. 모든 것을 지녔다.'''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디에고 마라도나는 위대한 공격수이자 플레이어였지. 하지만 그는 펠레가 아냐. 나는 디에고를 펠레와 비교할 수 없어.'''

지투(1958 스웨덴 월드컵, 1962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월드컵 2연패 당시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펠레의 산투스 시절 동료이자 펠레가 초기 선수 시절 존경했던 선수)

'''메시가 마라도나처럼 되려면 월드컵 우승은 필수다. 그런 마라도나보다 펠레는 더 영특한 선수였다. 그는 축구를 더 잘 이해했다.'''

다니엘 파사레야

'''펠레가 최고였습니다. 마라도나도 잘했지만 왼발 밖에 잘 쓰지 못했죠. 지금의 메시도 뛰어나지만 메시는 바르셀로나에 있기 때문에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가와 히로시 (1924년생으로 1952년부터 60년 넘게 축구기자로 활동했고 피파 회장상을 받은 일본축구 기자)

'''축구 역사에서 펠레가 마라도나보다 훨씬 더 나은 선수이다. 펠레와 다른 나머지 선수들 사이에는 천 마일의 간극이 있다.'''

아마데오 카리소(1950~1960년대 활동한 아르헨티나의 레전드 골키퍼)

'''몇몇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펠레를 만져보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키스를 하고싶어 했다. 심지어는 펠레가 걸었던 땅에 입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클로도아우두(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펠레는 선수의 피부, 헤딩, 스피드, 모든 것을 지녔다. 내가 그와 경기를 했을 때 그는 마치 하얀 옷을 입은 흑표범과 같았다. 그는 마지막 몇 분을 남기고 플레이하러 입장했는데 그러고도 그는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펠레는 필드 위에 공포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마라도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게 있어 최고의 선수는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그리고 디에고 마라도나, 이 순서이다. 난 디에고를 인정하며 그는 위대한 선수이다. 그러나 다른 별에서 온 선수는 바로 펠레였지 그가 아니었다.'''

'''메시? 그보다는 펠레, 마라도나,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와 지단이 더 뛰어나다. 만약 펠레와 마라도나, 크루이프의 시대였다면 메시는 뛰지 못했을 것이다. 메시는 벤치에 있었어야 할 것이다. 펠레가 역사상 최고다. 당신이 축구에 대해서 논할 때, 당신은 펠레를 논외로 두고 나머지에 대해 말해야한다. 그리고 또 알프레도, 크루이프, 디에고가 있다.'''

'''펠레, 그 흑인은 퓨마였고, 무서운 존재였다. 펠레는 2단 점프를 한다. 일단 잔디에서 점프를 한 뒤엔, 공중에서 한 번 더 뛴다. 그는 마치 농구 선수 같았다. 그는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를 상대로 헤더 골을 넣기 위해 내가 일생에서 본 것 중 가장 높은 점프를 보여줬다.'''

우고 가티(보카 주니어스 시절 디에고 마라도나의 동료이자 보카 주니어스 역사상 최다 출전 골키퍼 기록 보유자)

'''메시는 엄청난 선수이다. 나는 메시를 보려고 TV를 켤 때마다 그의 플레이에 놀란다. 그러나 최고는 펠레이다. 펠레는 메시보다 더 크고, 강했으며, 헤딩에도 능했다. 펠레가 메시보다 더 뛰어난 선수다. 펠레는 마치 ‘외계인’ 같은 선수였다. 지금까지 나는 펠레보다 더 뛰어난 선수를 보지 못했다. 펠레는 메시의 능력과 호날두의 장점을 모두 가진 선수다. 메시는 디스테파노와 같은 위대한 선수들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지만, 펠레만은 넘을 수 없다.'''

주제 마시아 페페(1954~1969년 산투스에서 활약하던 왼쪽 윙어)

'''나의 왕, 지구 최고의 선수.'''

다다 마라빌랴(1970년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팀 후보 선수)

'''나는 그와 필드에서 몇 번 대면해 보았는데 내 생각엔 그와 같은 선수는 없다.'''

테오필로 쿠비야스

'''펠레는 1970년 월드컵에 출전하면서 우승하는 것에 집중했다. 마치 그것이 그의 운명인 것으로 알고 있는것 같았고, 그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와 같았다.'''

마리우 아메리쿠(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마사지사)

'''저는 펠레가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제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는 궁극적인 운동 선수였고, 피치위의 절대적 존재였죠. 펠레는 모든 것을 지닌 선수였습니다. 그라운드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쓸고 다녔고, 무브먼트들은 훌륭하였고, 마크맨들을 너무나 쉽게 따돌리곤 했죠. 폭발적 슈팅의 소유자이었지만 공중볼 처리도 수준급이었고 어떤 포즈에 있던 간에 득점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었죠. 음 통산 1283 골이라는 기록만 보고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펠레는 묶어두기가 무척 힘들었고(could not be contained) 17살의 나이에 출전한 1958년 스웨덴 월드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단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브라질 대표로 뛰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당시 최고로 꼽히던 팀들과 대전하면서 날라다닌 것이 반증해 주지 않을까요? 예선에서 저는 잉글랜드 대표로서 브라질과의 경기에 출장했지만 다음 경기에 펠레가 출전했었죠. 브라질과 우린 0-0으로 비기고, 골에 목이 말랐던 브라질은 한 번 펠레에게 기회를 주는 모험을 합니다. 그 뒤로 펠레는 뒤돌아 볼 틈없이 승승장구했죠. 저번 달 442에서 호마리우는 자신이 펠레 다음으로 축구사의 2번째로 위대한 선수라고 자평하더군요. 네, 호마리우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전 그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미셸 플라티니,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페렌츠 푸스카스, 존 찰스 등등을 꼽자면요. 제가 생각하는 리스트엔 펠레 뒤로 디에고 마라도나를 No.2로 꼽을 수 있겠고, 호마리우는 아마 20위 안 쯤에 있을 것 같습니다.'''

바비 롭슨(<Four Four Two> 2005년 8월호 인터뷰에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조언을 해주셨다: "앞으로도 누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든, 펠레가 최고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위르겐 클롭

'''하지만 나는 지금의 리오넬 메시보다도 뛰어난 선수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바로 펠레야. 펠레는 피치 위에서 양발을 모두 사용했어. 그는 그의 왼발이 위험한만큼 오른발도 위협적이었지. 그는 공중에서조차 강력했어. 그리고 많은 찬스들을 창조해냈지. 게다가, 그는 정말 상상 이상의 존재야. 어느 날 난 펠레가 골키퍼로 뛰는 것까지 봤어. 글쎄, 난 그걸 보고 '펠레가 원래 골키퍼였나?' 하고 착각했다니까. 그는 그만큼 다재다능해.'''

잔니 리베라

'''펠레는 단순하면서도 완벽한, 축구의 집합체다. 펠레는 메시가 가지지 못한, 피지컬 능력을 가졌다. 그는 들소였다. 그래야 한다면 그는 수비수들을 밀고 들어가서 박살냈다. 펠레는 메시가 가진 것과 동등한 테크닉, 기술, 창의력을 지녔고, 더 힘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그리고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펠레는 야수가 된다. 그 관점에서 보면 메시는 좀 더 조용하다. 펠레는 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적인 강함이 있었다. 더 어려운 경기일수록, 그는 더욱 위험해졌다. 내 생각에는 아마 이 것이 펠레가 메시보다 우월한 점일 것이다.'''[104]

'''펠레가 가장 위대했다. 그는 간단히 말해 결점이 없었다. 피치 밖에서도 그는 항상 웃었고 긍정적이었다. 그가 화난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는 펠레로 사는 걸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세상의 플레이를 하곤 했다. 그 시기(17세)가 진정으로 그가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펠레의 정점은 1970년 월드컵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은 멕시코 월드컵 비디오를 보고 실망하곤 한다. 내 아들도 그랬는데, 축구에 미친 친구들과 함께 그 경기들을 모두 보고 이렇게 말했다. "펠레는 정말 뛰어난 선수네요. 그런데 아버지가 묘사하신 만큼의 선수는 아니네요." 하지만 그건 그들이 1958년에서 1964년, 좀더 날씬했던 초기의 펠레를 보지 못했기에 할수있는 말이다. 그 이후에 펠레는 벌크업을 했고, 근육을 키워 더 강해지면서 기술 역시 보존했지만 날렵함을 일부 잃었다. 펠레의 최전성기는 1958년에서 1964년까지였다.'''#

토스탕(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펠레의 파트너) [105]

'''진지하게 묻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펠레는 세계를 3번 제패했다. 반면 메시가 이룬 건 없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메시가 월드컵을 3번 우승하면 그때 그 질문을 던져 달라.'''

자이르지뉴 (메시와 뎀벨레가 1970년 월드컵 때 자신과 펠레가 세레머니한 것을 재현한 후 펠레와의 비교를 묻는 질문에)

'''한 번은 내가 메시가 특별하다고 말한 적은 있다. 그러나 창의성에서 특별하다고 한 것일 뿐이다. 메시는 특별하지만 인간들 사이에 있다. 펠레는 인간을 넘어섰다. 그에게 단점을 찾을 수 없다.'''

티테

'''메시는 현세대 최고의 선수지만 마라도나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지전증한 존재이다. 이 전에도 이후에도 마라도나에 비견할 선수는 찾을 수 없다. 마라도나보다 우위에 있는건 펠레겠지. 나는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메시 순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top 10에는 브라질 선수가 두 명 더 있는데, 그건 호마리우호나우두이다.'''

클라우디오 카니자(1990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멤버로 16강전에서 마라도나의 어시를 받고 브라질을 침몰시킨 선수)

'''1위는 펠레, 2위는 마라도나, 3위 크루이프, 4위는 메시 그리고 그와 동급인 디스테파노.'''

알피오 바실레 감독(유일하게 메시와 마라도나를 모두 지도해본 감독으로 최고의 선수를 뽑으라는 질문에)

'''축구 역사상 3대 영웅은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입니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면 메시도 이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1986, 1990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

'''펠레, 마라도나, 메시는 거의 같은 레벨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펠레는 엄청났고 한 단계 더 위에 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오마르 라로사(1978년 월드컵 우승멤버)

'''그는 축구 기술이 총집합되어 있는 완벽한 도서관과도 같다. 역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고, 그 다음은 마라도나와 디스테파노이다.'''

로베르토 페르푸모

'''펠레는 '왕'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자친토 파케티

'''역사상 최고의 선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펠레와 다른 위대한 선수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펠레는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없던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미겔 앙헬 브린디시, 펠레와 함께한 아르헨티나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의심의 여지없는 역대 최고의 플레이어. 세계 축구의 상징이다. 펠레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엘리아스 피게로아

'''나는 운이 좋게도 그가 미국 팀에서 뛰고 있을 때 펠레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전에는 텔레비전에서만 그를 보았기 때문에, 실제로 보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경기 동안, 나는 정말 인상 깊은 두 장면을 보았고, 그가 정말 모든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비오 카펠로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로타어 마테우스(2014년 브라질 tv프로그램 캄페앙 쇼에서)

'''나는 펠레와 몇 년 동안 함께 플레이했는데, 그는 수비수였다. 골을 가장 많이 넣는 수비수.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였다. 또 다른 펠레가 나타나려면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지지

'''메시가린샤와 펠레의 수준에 다가가려면 한참 멀었다. 그 두 브라질리언은 내가 살면서 본 축구선수 중 최고였다.'''

후안 호세 피수티 [106]

'''역사상 최고. 이 이상의 수식어는 그에게 필요 없다.'''

아데미르 다 기아

'''펠레는 명백하게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선수이다. 그가 생각하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펠레는 당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드리블을 시작할 것이고 당신이 한 쪽 눈을 깜빡인다면 그새 당신을 제치고 다른 선수 한 명을 추가로 제친 상태일 것이다. 나는 펠레에 근접한 선수조차 보지 못했다. 그는 놀라움 그 자체다.'''

디노 사니

'''펠레는 피치에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최고의 수비수들이 그를 마킹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언제나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두세 명이 달라붙어도 금세 4야드가량 마킹하는 선수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이것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였으며, 나는 그보다 뛰어난 축구선수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산드로 마촐라

'''매우 많은 선수들이 플레이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 패스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펠레의 머릿속에서라면 패스라는 것은 영화가 진행되듯이 흘러가는 일이다. 펠레는 축구를 이해한다.'''

니우통 산투스

'''펠레는 발명가였다.'''

비센테 델보스케

'''내가 생각하기에는 펠레가 넘버원이다. 그는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이다. 그는 정말 결점이 없다. 신체적으로 완벽하며, 아주 기술적이고 헤더도 잘한다. 오른발도 잘 쓰고 왼발도 잘 쓴다. 절대 예상할 수 없는 플레이를 펼치며 지능적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에게 있어서 펠레는 언제나 넘버원일 것이다.'''

네비오 스칼라

'''신체적인 능력과 기술적인 면을 생각해 보면, 펠레는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선수이다.'''

파올로 로시

'''당신이 최고의 브라질 풀백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펠레라고 답하겠다. 최고의 하프백과 윙어가 누구냐고 묻는다 해도 펠레를 답하겠다. 그는 심지어 우리 스쿼드 안에서 최고의 골키퍼이기도 할 것인데, 그 같은 선수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주앙 사우다냐[107]

'''비교 대상이 되는 선수들의 세대는 각각 다르지만, 각자 이룬 것으로 비교하여 말한다면 펠레가 마라도나&메시보다 위대하다. 내가 플레이를 본 선수 중에는 이 세 명이 가장 뛰어났다.'''

파울로 포를란[108]

'''펠레와 바비 찰튼이 내가 여지껏 본 선수 중 최고이다.'''

후안 라몬 베론[109]

'''펠레는 마라도나메시보다 완성된 선수이다.'''

리카르도 보치니[110]

'''스피드, 가속력, 힘, 폭발력, 헤더, 협응성, 시야, 반응 속도, 경기를 읽는 능력, 왼발, 오른발. 모든 것에 능통했다. 그는 아주 뛰어난 선수다. 역대 최고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펠레는 모든 세대를 통틀어 기술적으로 가장 재능 있는 선수였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첫번 째는 펠레다. 두번 째는 마라도나. 그리고 메시는 마라도나와 동급이다.'''

안토니오 라틴 (1966 월드컵 때 아르헨티나 주장)

'''압도적인 클래스와 부러워할 만한 신체 능력의 소유자였다. 사실, 그에게는 아무런 결점이 없었다.'''

마르첼로 리피

'''당신이 몇 살인지는 상관없는데, 감히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펠레'를 논하지는 마세요.'''[111]

그레이엄 테일러

'''펠레는 천재였다. 엄청난 킥 능력을 양 발에 가지고 있었으며 가슴에 용수철이 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공을 잘 받았다. 망치로 치는 듯한 헤더 슈팅 능력도 가지고 있었고, 먼 거리에서도 득점했다. 필드 위의 코치였으며 전략가이자 해결사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선수였다. 그러나 공을 가지고 하는 일에서만큼은 마라도나가 더 뛰어났고, 그러므로 기술적인 면에서는 마라도나가 역대 최고라고 본다.'''

호르헤 발다노

'''바이에른에 살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들은 모두 펠레의 플레이를 보았고 그가 코스모스와 산투스, 그리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언제나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의 플레이를 좋아했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좀 더 어려운 환경에서 플레이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펠레는 나에게 있어 축구의 왕으로 언제나 남아 있으며,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입니다.'''

로저 밀러

'''펠레와 디스테파노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디스테파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펠레는 모든 것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로헬리오 도밍게스

'''축구의 왕, 가장 위대한 펠레.'''

아베디 펠레

'''그의 축구는 모두를 앞선 것이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다리오 페레이라

'''역대 최고의 선수 세 명? 펠레, 디스테파노, 푸슈카시. 이 순서겠지.'''

알시데스 기지아(2005년 마르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40세였던 펠레와 딱 두 경기를 함께 뛴 경험이 있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왜 넘버원인지 알 수 있었다.'''

레오베지우두 주니오르

'''펠레는 축구괴물이다.'''

히우데라우두 벨리니[112]

'''완벽한 선수. 기술, 시야, 트릭, 신체능력을 겸비했던 유일한 선수이다.'''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펠레는 평범한 골을 예술작품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였다.'''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펠레는 닮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던 선수였고, 무엇보다도 점프 능력이 아주 탁월하여 헬리콥터처럼 보였던 선수이다. 나에게 그는 농구선수처럼 보였으며 공중에서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절대 닮을 수 없는 것들이다. 펠레는 완벽한 선수였다.'''

실비오 마르솔리니

'''마라도나와 펠레 중에서는 펠레가 더 뛰어난 선수였다. 펠레는 사실상 완벽한 선수였다. 양 발과 머리를 사용해서 슈팅을 때릴 수 있었다. 마라도나는 환상적인 곡예사이다. 오른쪽 다리를 거의 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왼발로 하는 플레이들은 헛웃음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마라도나가 양발 사용 능력이 뛰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두 선수 모두 환상적인 선수였다.'''

카레카

'''그는 가장 완벽한 10번이었다. 그는 완전하게 완벽한 선수였다.'''

즈보니미르 보반

'''나와 펠레의 차이? 간단하지 않은가? 나는 그저 지나가는 '스타'일 뿐이였고 그는 천재이다.'''

레오니다스 다시우바

'''그의 눈을 보고 공포를, 아주 심각한 공포감을 느꼈다. 그의 눈은 불타고 있었고, 맹수의 눈과 같았다.'''

볼프강 오베라트

'''나는 펠레가 50살이 되었을때 그를 상대로 뛰어본 적이 있는데[113]

, 그는 여전히 완벽한 플레이어였어. 그는 여전히 축구의 백과사전과도 같았다.[114]'''

게오르게 하지

'''감히 내가 펠레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왕이다.'''

지에구 타르델리

'''펠레는 지금의 메시나 호날두보다 뛰어난 선수였다.'''

주니뉴 파울리스타

Q: 펠레를 정의 내린다면?

'''A: Perfect.'''

'''메시는 그의 시대에서는 최고이나 역사상 최고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두가 있기 때문 입니다.'''

호나우지뉴

Q: 역대 최고의 선수 3명을 말해봐.

'''A: 펠레, 다른 한 명은 에우제비우, 포르투갈인이지. 그리고 우리의 친구 크리스티아누. 또 포르투갈 사람이네! 하하하...'''

Q: 펠레를 1위로 선정한 이유는 뭐지?

'''A: 음, 글쎄... 그는 그의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야. 에우제비우도 마찬가지고. 크리스티아누는 현 시점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니까 넣었어.'''

루이스 피구, 리오 퍼디난드와의 1:1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제 생각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 마라도나, 메시 등을 거론하며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입니다. 그가 훌륭한 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팀에서도 가장 빛났던 것은 펠레였습니다.'''

빈센트 콤파니

'''나는 낙후된 환경에서도 그런 기적을 일으킨 펠레나 가린샤 같은 1950년대의 스타들이 오늘날의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상상하곤 한다. 반대로 내가 펠레가 쓰던 장비를 쓴다면, 10배는 더 적은 골을 넣었을 것 같다. 분명히.'''

알렉산다르 케르자코프(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골을 넣은 러시아 선수)

'''메시는 2010년대의 펠레이다.'''

줄리아누 벨레티

'''나의 롤모델은 펠레였다. 나의 아버지는 펠레의 영상을 많이 가지고 계셨고, 나는 그 영상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클로드 마켈렐레

'''모든 브라질인에게 있어 펠레는 '세기의 선수'이다.'''

카푸

'''메시는 아직 펠레나 마라도나의 체급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디디에 드록바

'''펠레는 축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세계에서 펠레는 단 한 명만이 존재한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위대한 선수들이 있을지라도 펠레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페르난도 토레스

'''펠레는 글로벌 맨이자 아이콘이자 모두의 우상이다. 역사상 최고이다.'''

네이마르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역대 최고의 선수가 펠레라는 말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메시는 정말 위대하다. 하지만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는 더 대단했다.'''

호나우두

'''펠레 같은 선수는 앞으로 1000년이 지나야 나타날 것이다. 내가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길 바란다.'''

산도르 코츠시스

'''역대 최고 선수에 대한 논쟁에서 나를 고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펠레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선수는 펠레이며, 마라도나는 마라도나일 뿐이다. 앞으로 메시가 은퇴한다면 어떻게 될까? 메시가 은퇴한 지 10년이 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메시를 더 자주 보며, 그래서 메시를 위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나와 펠레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다. 나와 펠레는 함께 카타르에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디에고! 디에고!"하며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펠레를 알아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펠레에 대한 호응은 나에 비해서 미적지근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시 현역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플레이만 봤다. 젊은 사람들은 항상 오늘날의 선수를 고평가한다. 그렇기에 시대가 다른 선수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뛰는 선수와 과거의 선수를 비교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나도, 메시도 역사상 최고는 아니다.'''

디에고 마라도나


5.3. 당대에서의 위상


[image]
이 비교하는 표에서 알아둬야 할 점이 있는데 브라질 전국 리그는 펠레의 데뷔 3년차인 1959년에 창설되었고 1966년까지 주립 리그 챔피언끼리만 토너먼트로 붙은 컵 대회 규모라 리그가 아니었다. 펠레가 주로 뛴 리그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였고 리그를 계산할 거면 사실 이쪽을 보는 것이 맞다. 이렇게 되면 일부 지역에 한정된 상파울루 리그 수준에 대해 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지만 펠레가 1974년까지 뛴 16년 동안 18번의 전국 대회 중 상파울루 클럽들이 무려 12개의 트로피를 차지했다. 역사적으로 상파울루와 함께 브라질의 양대 주립 리그로 인정 받는 리우데자네이루 리그가 그 사이 3회 우승에 그친 것을 보면 당시의 상파울루 리그가 전국 수준에 비견되었다 봐도 과장은 아니다. 참고로 펠레의 주립 리그 우승 횟수가 10회, 그리고 펠레와 마라도나는 발롱도르 후보 자격 자체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프랑스 풋볼이 연도별로 발롱도르를 재평가한 적이 있는데 펠레가 7회, 마라도나는 2회 선정되었다.
커리어의 우열을 가리는데 펠레의 유럽 무대 경험이 없음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는데 오류라고 보는 것이 옳다. 펠레가 뛰던 당시 리그와 연봉 수준에서 브라질이 아쉬울 게 없었고[115] 클럽 간 국가대항전의 경우 역사가 짧아 권위가 덜하기도 했다. 펠레와 유럽의 챔피언스리그는 데뷔 동기였으며 남미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보다 오히려 먼저 등장했다. 실제로 산투스는 1966년과 1969년에 다시 리베르타도레스의 참가 자격을 얻었음에도 이를 불참했다.[116] 거기다 펠레는 산투스와 브라질 국대로 전세계의 클럽 팀과 국가대표를 실신시킨 경력의 소유자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다수의 마이너 국제 대회에서 우승컵을 쓸어담았으니 유럽 커리어가 없는 펠레에 대한 의문은 사실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당시 유럽 축구계에 펠레를 능가하는 인물도 없었으니 굳이 건너갈 이유도 없었다.[117]
유럽 클럽팀들과 130경기, 그것도 전부 원정경기에서만 144골을 넣은 기록 또한 펠레가 상대를 가리는 선수가 아니었다는 걸 의미하며 국가대표에서는 오히려 강팀에게 더욱 강한 면모를 보여줬다. A매치 77골 중 유럽, 남미 국가가 71골로 그 비율이 무려 '''92%'''이며 그 상대국들은 대부분 유럽, 남미 중에서도 강호에 속한다. 당시 브라질은 친선 경기도 주로 남미 국가들, 유럽 상위 국가들과 잡았고 월드컵도 16개국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데다 아시아, 아프리카, 북중미 같은 상대적 약체 대륙들에게 티켓을 1장 이하로 배분했기 때문에 정말 강팀들 밖에 상대할 수 없었기에 강팀 대비 득점 비율도 높은 것. A매치 골 중 1/3이 비유럽남미 상대인 메시, 유럽 예선에서 하위 랭킹 국가들을 상대로 많은 득점을 올린 호날두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단적인 예로 펠레가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던 1958년 월드컵 당시 펠레에게 밀려 벤치 멤버가 되었던 주제 아우타피니AC 밀란 등에서 뛰며 세리에 A '''역대 득점 랭킹 공동 4위'''에 올라있다. 아우타피니가 그렇다고 유럽 무대에서 못했느냐? 1963년 AC 밀란에서 유러피안 컵 우승을 차지했고[118],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전에 14골을 기록, 한 대회 최다 득점 기록도 가지고 있던 선수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아우타피니에게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했던 발렌티노 마촐라의 이름을 따 마촐라라는 별명까지 지어줄 정도로 세리에 A에서 사랑받던 레전드 공격수이다.[119] 그 외에도 지지도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면서 19경기 6골을 넣고 돌아오는 등 당시 브라질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보다 못한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우타피니와 지지 외에도 다른 브라질 선수들이 유럽에서 활동하며 브라질 축구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지만 득점 등의 랭킹에 남아있거나 어지간히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 못한 선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혔다. 리오넬 메시 진출하지 않았다고 바르셀로나 동료들 덕봤다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또한 펠레의 1000골은 친선경기 포함이라 인정 못한다고 하지만 그 친선경기 중 국제 컵 대회가 많았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비공식 컵 대회는 챔스, 리그, FA컵을 포함한 여러 공식 대회들이 규모나 위상 측면에서 점차 발전했기 때문에 사양길을 걸었고 현재는 프리 시즌에 연습하는 개념으로 참가하는 대회들만이 대부분 남았으나 당시엔 이 정도로 만만한 위상은 아니었고, 펠레가 출전한다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대회의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같은 대륙 다른 리그의 클럽과 대결할 일도 드문 시대에[120] 다른 대륙의 클럽과 대결하는 것도 모자라, 그 펠레와 대결함에 있어서 어느 팀, 어느 선수가 긴장을 늦추고 여유를 가질 수 있겠는가? 지금의 메시를 생각해보면 감이 더 잘 올 것이다.[121]
위의 내용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펠레가 어찌나 세계를 쏘다니며 여러 팀들을 박살냈는지, 이 시기 정말 아시아 오지였을 한국에도 펠레가 와서 경기를 치렀다.[122] 그러다 30대 후반에 은퇴했는데, 이 양반이 넣으려면 더 넣을 수도 있었던 게 브라질 무대에서 물러나던 순간에 10골을 찍었고, 그 전 시즌에는 득점왕을 차지하였다.[123] 브라질을 떠난 뒤 미국에서 3년을 뛰었는데 마지막 해에도 20골을 넘겼고 은퇴 경기도 친선이 아니라 실제 경기였는데 풀타임이 아닌 전반전만 뛰다가 골 넣고 들어갔다.

5.4. 비판과 오해


비판에 앞서 유념할 것은, 펠레가 단순히 골 기록만으로 높게 평가받는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펠레는 FIFA 월드컵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이고 브라질을 축구의 나라로 발돋움케 한 5, 60년대의 독보적인 스타 플레이어다. 이것은 펠레에 의구심을 품는 인물들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뛴 시대를 꾸준히 대표했던 선수라면, 그에 걸맞는 높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펠레 이전의 브라질 역시 강호에 속했으나 펠레가 등장하고 나서야 축구 최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124]

5.4.1. 당대 전술에 관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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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광개토TV
'''펠레의 위상과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자 낮은 평가를 내는 의견들의 대표적인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펠레가 뛰었던 시대와 현 시대의 단순 골 기록 비교는 큰 무리가 있다. 당시 유럽 주요 리그의 경기 당 평균 득점은 1970년대 이후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았다. 1970년대 이전은 토탈 풋볼 붐 이전이기 때문에 선수들의 뛰는 거리가 지금의 두 배 가까이 적었다. 지역 방어 개념이었고, 압박이 적었다. 이로 인해 수비수의 개인 기량만이 수비의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아 골이 많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70년대에 들어서고 축구판에는 토탈 풋볼의 바람이 불면서 압박 전술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상대 팀에 대한 분석이 발달했는데, 이로 인해 해당 클럽에서 뛰는 주요 선수를 직접 상대하거나 경기장에서 직접 플레이를 보지 않아도 상대의 장점과 약점, 파훼법을 연구하기 쉽게 되었다. 이러한 미디어의 발전은 그동안 뛰어난 공격수들을 잘 막지 못했던 수비수들에게 큰 득이 되었고, 수비수들의 기량은 전반적으로 크게 상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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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광개토TV
브라질 리그 역시 그런 경향이 나타났는데, 펠레 또한 수비 전술이 발달한 축구판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60년에서 70년대로 갈수록 브라질 리그의 수비력 수준이 상향되는 것에 반비례해서 펠레의 득점이 적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브라질 리그 평균실점이 3.66에서 1.91까지 절반 가까이 떨어지는 동안 펠레의 경기 당 득점은 1.63에서 0.37까지 80%가량 심하게 떨어졌다. 물론 펠레의 득점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건 나이가 30이 넘어가는 노쇠화 시기도 겹쳤으며 최전성기와 말년의 기록을 수치 그대로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리그 전체 평균 득점을 봤을 때 수비 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가 마침 자신의 최전성기였고, 더 많은 득점 기록을 세우는데 이득을 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위는 득점 기록에 대한 비판이고 이걸로 펠레의 실력 자체가 현대에서 뛰면 뒤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건 '''정말 큰 착각이다.''' 과거 축구에서 득점 난이도가 쉬웠다는 것과 펠레의 전술 이해도는 별개의 문제다. 당시 브라질의 1970년 월드컵 대표팀의 공격수들 펠레, 토스탕, 자일지뉴, 호베르투 히벨리누 네 명은 다른 공격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기는 했지만 모두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선수들이었고 이들 중 4-2-4에서 전방 플레이메이커(10번) 역할을 맡을 선수로 펠레가 선택되었다. 이 위치는 파트너 스트라이커(토스탕)와는 다르게 단순히 공격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내려와 미드필더들을 지원하고, 수비에도 가담하는 전체적인 경기 조율의 역할을 맡는다. 공격수의 수비 가담 즉, 위에서 펠레의 기록을 비판할 때 이야기한 '''토탈 풋볼의 이론 일부를 먼저 구현했다는 말이 된다.'''# 기술 뿐만 아니라 유기적인 플레이가 가능한 축구 지능도 있었으니 현대 축구에 적응 못할 가능성이 오히려 더 적을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올려진 펠레의 수비 영상이나 인터넷에 도는 펠레의 볼터치 영상들을 보면 그는 수비 가담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미헬스의 토탈 풋볼이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탈 풋볼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며, 펠레 시대에도 축구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유럽 감독들이 카테나치오, 토탈 풋볼 등 전술을 발전시킨 목적이 펠레와 남미 선수들의 개인기에 대항하기 위해서인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전술은 감독과 선수들의 역량에만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며 규칙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데, 대표적으로 펠레 시대에는 체계적인 퇴장 제도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고, 오프사이드의 동일선상이 인정되지 않는 등 규칙 면에서는 공격수에게 불리한 점들이 많았다. 특히 사실상 퇴장 제도가 없었던 당시에는 지금 기준으로 퇴장감인 태클들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과거에도 퇴장 제도가 존재하기는 했는데 상대 선수에게 직접 폭력을 가하는 등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할 경우 심판이 구두로 선수를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 중에 주로 일어나는 비매너 플레이들은 여기에 해당이 안 됐다.[125][126] 단순히 당시 의학 수준이 낮았던 것 뿐만이 아니라 종목 자체가 선수 생명을 고려하지 않고 운영되었다. 이런 열약한 환경은 높은 수준의 전술을 구현하려 할 때 제약이 따를 수 있다.
그 외에도 시대적 차이는 전술적인 측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위에서 과거 축구가 활동량이 적다는 비판 내용이 있지만 '''펠레는 오히려 동시대 선수들에 비해 지나치게 혹사당한 편이다.''' 펠레의 공식적인 통산 출전 기록은 821경기지만, 이건 현재 기준으로 봤을 때이고 여러 비공식 경기와 친선경기들까지 포함하면 무려 1400에 가까운 경기들을 출전했다. 그리고 이런 수 많은 경기를 치루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다. 동시대 디 스테파노가 706경기, 에우제비오가 596경기, 푸스카스는 754경기를 뛰었는데 비해 펠레는 이들보다 이른바 공식 경기만 해도 100경기 이상을 뛰었고 친선경기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펠레가 뛰던 1957~1974년 약 18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의 친선경기는 179경기인데 비해 산투스는 488경기로 무려 300경기 이상 훨씬 많았다.# 여기에 덧붙여 산투스는 1965년 이후부턴 브라질 축구협회의 불참 지시와 더불어 펠레가 나오는 해외 친선경기 투어가 더욱 돈벌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도 불참하고 친선경기 투어를 다녔다.# 심지어 시즌 중에도 리그 일정을 무시하고 친선경기 투어를 다녔는데 1971년에는 무려 리그 도중에 그 악명 높은 해발고도 4,000m 정도의 볼리비아 라파스에 가서 볼리비아 클럽과 경기를 치루고 오기도 했다. 이러한 경기들의 목적은 펠레를 통한 마케팅이기 때문에 펠레는 당연히 선발, 풀타임으로 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현재는 3일 단위로 경기를 치루면 혹사 일정이라 평가하고 박싱데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과거에 이 정도는 평범한 수준의 일정이었고 하루 이틀 단위로 경기를 치루는 경우도 많았다. 선수들이 현재와 같은 전술로 경기를 치룰 수 있는 건 그에 맞는 환경이 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체력적인 문제도 그렇고, 많은 경기를 치르기 위해 반복되는 장시간 비행과 시차의 변화는 선수 생명에 악영향을 미친다.
60년대 선수들 모두 기록적인 면에서 똑같이 이득을 봤다고는 하지만 당시 브라질에서 펠레의 득점 페이스는 독보적이었다.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득점 기록에서 최정상을 다투는 수준이었다.[127]
여기에 리그 골 기록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펠레는 1971년에 생긴 남미 올해의 선수 순위가 6위-2위-1위-5위, 이후 1975년부터 미국 생활을 했는데 은퇴하던 1977년, 37살에 또 4위를에 올랐다. 말년 펠레의 골 기록은 줄어도 경기력은 좋았다는 증거가 된다. 당시 '유럽 올해의 선수'란 이름의 발롱도르에서 30위권 안에 31세가 넘어서도 줄곳 든 선수는 디 스테파노 혼자고 그나마 디 스테파노는 35살 넘어가자 아예 30위권 내에도 들지 못했다. 당시 유럽과 남미의 축구 격차가 없던 것을 고려하면 펠레가 생각보다 롱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다.[128] 펠레의 포지션은 원래부터 득점에만 치중하는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인사이드 포워드(현재의 세컨드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였기 때문에 득점력이 저하되어도 연계 플레이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그의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통계 매체 옵타에서 밝힌 월드컵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1970년 펠레의 어시스트, 기회 창출 횟수는 1986년 마라도나보다 높았다.[129]

5.4.2. 득점 수 관련 논란


펠레는 자신의 기록으로 1283골을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매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펠레의 골 기록은 매체 별로 차이가 나는데, 흔한 매체들은 812경기 757골로 보고 있고, 이탈리아어 위키 처럼 821경기 761골, RSSSF처럼 831경기 767골 등 보통 3가지로 나오는 편이다. 이렇게 10골 정도 차이가 나는 이유는 특정 대회를 공식 대회로 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선 1968~1969년에 인터컨티넨탈 슈퍼컵이라고 1960년대 인터컨티넨탈컵을 우승한 팀들끼리 모여 열린 대회가 있었는데, 이 대회에서 펠레는 1968년 1회 대회를 우승하고 두 번의 대회 통산 8경기 3골을 넣었다. 이 대회는 2005년 남미축구연맹에서 공식 대회로 인정한 바 있다. # 또한 1968년 브라질 전국 리그에서 펠레의 18경기 12골 기록이 영문위키를 포함한 대다수 매체에 17경기 11골로 잘못 기록이 되었다. # 이렇게 기존의 812경기 757골에서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8경기 3골과 1968년 리그 1경기 1골을 추가하면 821경기 761골로 위에 언급한 이탈리아어 위키판과 동일한 기록이 된다. 그리고 <Campeonato Brasileiro de Seleções Estaduais>라는 대회가 있는데, 이 대회는 브라질 전국의 각 주대표들로 구성된 대회로 펠레는 상파울루 주 대표로 나간 대회이다.#이 대회는 1922~1987년까지 열렸으며 펠레는 1959년 대회에 참가해 7경기 6골을 넣었다. 이 기록까지 합할 시 828경기 767골이 된다. 마지막으로 831경기 767골로 잡은 RSSSF의 남은 3경기는 1959년 남미에서 징병제를 실시하는 국가끼리 모여서 한 밀리터리 코파아메리카, 즉 한국으로 치면 각 국가별 상무 팀이 나가서 한 대회로 펠레는 2경기 출전했지만 골은 기록하지 못했는데 RSSSF의 경우 3경기 1골로 잘못 기제되었다. 결국 현재의 공식 기록 기준은 주 대표, 군인 국가 대표 기록을 인정하지 않지만 인터컨티넨탈 슈퍼컵은 인정할 여지가 있으므로 펠레의 기록은 이탈리아어 위키의 '''821경기 761골'''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위는 현재를 기준으로 산정한 것이다. 과거에는 현재처럼 공식 대회가 개수나 규모적인 면에서 그리 활성화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소규모 친선 대회나 친선 경기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A매치 친선 정도의 긴장감이 있었을 것이라 가정한다면 펠레 입장에서는 여기서 넣은 500여골이 아까울 만도 하다. 무엇보다 FIFA와 기네스북도 이를 펠레의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어 '''단순히 펠레 혼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경기들이 중요도가 낮은 편인 것은 맞다. 그런데 현재 기준도 같은 공식 경기마다 수준 차이가 존재한다. 월드컵, 유로, 챔피언스리그, 1부 리그, UEFA 슈퍼컵 등은 그 수준이 매우 크지만, 나머지의 경우는 주최한 기관이나 대회 특성, 참가 팀들의 성격에 따른 차이로 인해 공식으로 인정 받는 것이지 경기하는 팀들의 수준이 특별하다 볼 수 없으며 국가대표끼리 붙는 경우는 친선 경기라 해도 A매치로 인정하고 있다. 이게 외국 협회가 주관하는 클럽끼리의 경기, 친선과 대회를 불문한 국가대표 대 클럽의 경기보다 수준 면에서 특별하다고 볼 수 없다.[130] 결국 공식 경기의 기준은 수준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기 수준을 논하는 건 어폐가 있다.
하지만 또, 펠레의 기록은 현재 기준 뿐만 아니라 예전 기준으로 잡아도 그 수치가 많이 갈린다. 당장 위의 예시만 봐도 기네스북(1279골)과 FIFA의 보도(1281골) 모두 펠레의 주장(1283골)과 다르며 어떤 언론에서는 1289골이라 보도하는 등 숫자가 다양하다. 대표적인 축구 선수인 펠레도 이렇게 기록이 갈리니 과거의 축구 선수들은 대체로 골 수가 불분명하다. 최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펠레의 757골을 넘어서며 역대 통산 최다 골을 기록했다는 기사들이 세계적으로 보도되자 체코 축구협회에서는 요제프 비찬의 골 수가 821골이므로 호날두가 넘어서지 못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펠레가 기네스북의 통산 최다 골 부문에 등재는 되었지만,# 과거 기준이라면 같은 나라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앞에서 이야기한 요제프 비찬 등 펠레보다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선수들이 있는데 기네스북의 등재 기준도 불분명하다.[131]

5.4.3. 소속 팀 수준 관련 논란


펠레가 3번의 월드컵 우승 중 1958, 1970년의 우승은 펠레 본인이 에이스 역할을 하며 활약했으나, 1962년 월드컵에서 펠레는 조별리그 2경기만에 부상으로 낙마하였는데,[132] 이후 경기들에서 가린샤가 엄청난 기량을 선보이며 1958년의 우승 멤버, 즉 1958년 당시보다 4년 더 늙어버린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던 브라질 스쿼드를 말 그대로 멱살 잡고 끌어올렸고,[133] 브라질은 펠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승했다. 펠레도 "사람들은 1958, 1962, 1970년의 월드컵을 나의 월드컵이라고 하지만 사실 1962년 월드컵은 가린샤의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것이 맞는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소위 말하는 '팀빨' 이야기가 오가기도 한다. 펠레가 속했던 클럽팀 산투스 FC도 당대 최고의 팀이었기에 팀빨 논란을 뒷받침한다. 1960년대에는 말 그대로 브라질을 호령한 강팀이었고 1962년 월드컵 대표팀에 7명, 1970년 팀에는 5명을 차출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기본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있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최근의 메시, 호날두를 포함 역대 상위권 선수들은 대부분 최고 수준의 클럽이나 국가에서 뛰었으며 팀빨을 안 받은 선수가 오히려 찾기 더 힘들다.[134] 특히 현대 축구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빅클럽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과거의 클럽들은 물론이고 국가 대표팀의 전력도 능가한다. 팀빨 비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선수는 디에고 마라도나 한 명 밖에 없다.
1962년 월드컵의 결과만을 보고 브라질에서 펠레를 빼도 공백이 없었을 거라 판단하는 것도 오류가 있다. 195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펠레를 제외한 1958년 월드컵 멤버로 출전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게 연달아 패배했다.[135] 이 팀에 펠레가 합세하고 우승한게 1958년 월드컵이다 1966년 월드컵에서 똑같이 펠레가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브라질은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비극을 맞이했다.[136] 펠레가 은퇴하고 나서는 히벨리누, 자이르지뉴가 건재함에도 1974년 월드컵 우승에 실패했고 브라질이 다시 월드컵을 우승하기까지 24년이 걸렸다. 덧붙여 산투스가 당대 최고의 팀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경쟁팀에 해당하는 SE 파우메이라스에게 1964/1965 시즌 7:1, 1965/1966 시즌에 5:0으로 대파당한 일이 있었다는 점에서 절대적 강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37]

가장 논란이 되는 1962년 월드컵은 펠레의 부상이라는 불행을 겪어서인지 사실 브라질에게 엄청난 행운들이 따라 주었다. 칠레와의 준결승전에서 퇴장 당한 가린샤는 원래 결승전 출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와 피파가 가린샤의 출전에 문을 열었고 이것도 모자랐는지 1:1 상황에서 자우마 산투스의 핸들링으로 명백한 페널티킥을 심판이 불지 않았다. 1962 월드컵은 1958년이나 1970년 대회에 비해 브라질에게 천운이 따라준 대회라 할 수 있다. 1970년 멤버들은 현재 역대 최강이라 평가 받지만 이는 결과가 따라준 뒤의 평가이고, 대회 직전까지는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살디냐 감독이 도중에 자갈로 감독으로 교체된 점에, 아르헨티나와의 평가전에서 로베르토 페르푸모가 "이 브라질은 내가 본 브라질 중 가장 최약체 팀"이라 발언할 정도로 전망이 썩 좋은 팀은 아니었다.[138]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브라질에게 줄리메컵 영구 소유권을 가져다 준 선수가 펠레다.

5.4.4. 주립 리그 관련 논란


당대 위상 목차의 설명과 관련된 내용이다. 브라질은 영토가 워낙 넓은데다 교통 시설이 열악하다보니 특이하게 각 주마다 주립 리그들이 먼저 창설되었고 그 이후 전국 리그가 늦게 창설되어서 주 단위와 전국 단위의 리그를 서로에 영향이 미치지 않는, 아예 별개의 리그로 운영하고 있다. 축구 선수들이 가장 많이 치르는 경기는 클럽 경기이고, 펠레의 득점 60% 이상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다르게 주립 리그에서 나온 기록이다보니 이 주립 리그의 수준에 관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139] 자세히 말하면 펠레가 전성기를 맞이할 당시에는 전국 대회가 창설 초창기였고[140] 각 주립 리그의 챔피언들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붙었던 컵 대회 규모라 현재 같은 전국 규모의 정규 리그가 아니었기에[141] 주로 뛰어야 할 리그가 주립 리그였던 것. 이렇게 되면 지역에 한정된 리그의 수준은 전국 단위 수준과 차이가 크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당시 상파울루 주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펠레 시절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18차례의 전국 대회 중 12회 우승을 기록하며[142] 다른 주립 리그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고 브라질 국가 대표 자리의 절반을 상파울루 주 선수들이 차지한 만큼 선수들 수준도 높았다.[143] 심지어 펠레가 뛰던 당시에도 이미 상파울루 리그는 주 자체적으로 '''4부 리그까지 있었으며 강등제도 존재했다.''' 큰 규모의 하부 리그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은 그만큼 하위권 팀들과 주의 하부 리그 팀들도 높은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다른 주들은 현재도 2부 리그까지만 보유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현재의 리그 형식처럼 전국에서 최고의 팀들을 뽑는 게 더 퀄리티가 있었겠지만[144] 그와 비견될 수준을 갖췄다는 건 사실이다. 여러 기관이나 매체들도 펠레의 주립 리그 기록을 배제하지 않고 공식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 비판은 그다지 펠레의 약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브라질 리그의 수준이나 형식은 크게 변화했고 라이트 팬들이 과거 시스템과 환경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브라질 전국 리그가 4부 리그까지 운영되고 있는데, 전국 1~4부 리그에 참가하지 못한 팀들 중 주립 리그와 주립 컵 대회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팀들에게 4부 리그 참가 자격을 주고 있다. 상파울루의 일부 팀들도 4부에 소속되거나 아예 전국 리그 참가 자격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과거 펠레 또한 4부 수준의 팀들과 경기해 쌓은 기록이라고 추측하여 주장하는 팬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1차원적인 추측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전체적인 브라질의 수준, 그 브라질 내에서 상파울루 리그의 위상도 다르고, 리그 시스템의 차이점도 알아봐야 하는 등 고려할게 많은데 지나치게 경솔한 생각이며, 그저 펠레를 깎아 내리고 싶은 '''악의적인 주장'''으로 볼 수 밖에 없다.[145] 결과적으로 주립 리그 관련 비판은 펠레가 과소평가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선을 지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흔히 주립 리그를 오늘날로 치면 카탈루냐 리그라고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위의 내용처럼 브라질 국가대표 멤버 대다수가 나온 곳이고, 브라질 전국 리그 통산 우승 횟수 1~4위가 모두 있는 리그라 그리 적절한 비유는 아니다.[146] 스페인으로 비유를 한다면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빌바오 + 12개의 팀으로 구성된 리그라 보는 것이 적당하다.
펠레의 통산 골 기록은 경기당 1골에 근접하지만, 주립 리그가 아닌 전국 대회에서의 골 기록은 173경기 100골로 경기당 골 수가 통산 기록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이 또한 항변이 가능한데, 전국 리그는 펠레의 전성기가 끝난 1971년부터 출범했고 펠레의 전국 리그 출전 기록을 살펴보면 1971년부터 브라질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74년까지의 출전 기록이 84경기로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60년대까지의 전국 대회 기록은 76경기 62골, 1966년 월드컵에서의 큰 부상 이전에는 전국 대회에서도 28경기 28골로 경기당 1골의 기록을 세운 반면, 1970년부터 1974년까지 5시즌 동안 전국 대회 기록은 97경기 38골로 펠레의 이름값에 확실히 미치지 못했다. 이 때는 주립 리그에서의 득점율도 절반 이상이 감소했기 때문에 딱히 리그마다 차별적으로 활약한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5.4.5. 짚어야 할 점


선수의 평가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으며 펠레의 기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시대 배경을 무시한 채 과거 선수들의 플레이나 스탯을 현대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아예 논리적인 오류라는 것이고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147] 현재의 메시나 호날두를 치켜세우고 펠레를 포함한 옛 선수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현대 축구 선수들의 유리한 점, 과거 축구 선수들의 불리한 점만 파헤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찾아보지도 않는다면 나중에 메시나 호날두의 대단한 기록들도 미래의 전술, 규칙, 시스템, 판도 등에 따라 후손들에게 얼마든지 평가절하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펠레가 자신의 기록으로 다른 선수들을 공격하는 상황이라면 그의 기록은 엄정히 평가받을 여지가 존재하며 그 또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5.5. 인성, 사생활


축구 황제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치기 때문인지, 자신과 비교되는 선수들에게는 좋은 소리 안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148] 펠레 자신과의 대척점에 있는 세기의 라이벌인 마라도나와는 서로 디스를 주고 받는 사이이며, 호마리우, 호나우두 등의 브라질 출신 후배들도 잘 나갈 때는 펠레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리오넬 메시가 그 대상. 축빠들의 반응은 대개 "안 그래도 그 영감이 최고인거 다 아는데 왜 속좁게 저런 소리를 하지"쯤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메시가 네이마르부터 넘고 오라는 소리는 메시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개드립이었다는 평.[149]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을 두고 무조건 닥치고 개최해야 한다며 개최 거부 시위를 비난하면서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된 호마리우가 월드컵 개최를 놓고 엄청난 비난을 하면서 시위를 옹호하던 것과 비교했을 때 대조적이라서 더 욕을 먹었다.[150] 이 때문인지 아르헨티나 기득권자들에 허구한 날 쓴소리하는 마라도나와 달리 기득권자들에게 아첨하고 빈민층이던 자신의 과거는 잊었다는 비난도 많다.

또한, 가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이 문제는 법정까지 갔는데 펠레가 DNA 검사마저 거부하며 버티자 법원은 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딸은 펠레의 성(姓)인 두나시멘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펠레는 이후에도 그 딸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고, 딸이 유방암으로 사망했지만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으며,[151] 그 딸이 낳은 두 외손주들까지 철저히 존재를 부정했고 그들에게 양육비 청구 소송을 당해 패소까지 한다. 의아한 것은 펠레에게 다른 혼외자식 딸이 또 있었는데 그 때는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5.6. VS 디에고 마라도나




6. 어록


[image]

'''베토벤음악을 위해 태어났고 미켈란젤로미술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나는 축구를 위해 태어났다.'''

'''축구는 팀플레이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다.'''

'''축구는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다.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152]

'''나는 미드필드 라인으로 자주 내려가 미드필더들을 돕곤 했다. 그때는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난 분명히 내가 넣은 골보다도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Q: 당신이 현대에 뛴다면 1,000골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A: 아니다. 현대의 장비는 나의 현역 시절보다 훨씬 발전해 있다. 또한 스타플레이어들에 대한 보호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약 현대에 선수생활을 한다면, 두 배 많은 2,000골을 넣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즘 비행기에서 직접 자신의 짐을 옮기는 축구선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 축구선수들이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좋은 환경에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페널티 킥은 골을 넣는 가장 비겁한 방법이다.'''[153]

'''머리는 가슴에게 이야기하고, 가슴은 발에게 이야기한다.'''

'''브라질은 축구를 통해 먹고 자고 마신다. 브라질은 축구로 살아간다.'''

'''모든 것은 열정에 달렸다. 그것은 팽팽한 기타 줄과 같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며, 항상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나는 축구로서 얻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신께서 나에게 모든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대보다 0.5초 빨라야 한다.'''

'''축구를 하는 모든 어린이들은 펠레처럼 되고 싶어한다. 나는 그들에게 축구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줄 책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되는지를 보여줄 책임이 있다.'''

'''아프리카에 갔을 때, 어딜 가든지 저를 신처럼 받들더군요. 아마도 제가 흑인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기 때문인거 같아요. 저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백인의 나라에서 흑인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저는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희미하든지 간에 말이죠.'''

'''가난에서 어린이를 구해내는 것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는 것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나와 함께 외칩시다. 러브-러브-러브!'''
자신의 은퇴 경기에서

'''현재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의 미래를 만든다.'''

'''나이는 상관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배움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누구라도 좋은 선수가 되려면, 무의식 속에서도 양 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축구는 하나의 종교이다. 나는 축구공을 숭배하며, 축구공을 신처럼 다룬다. 많은 선수들은 축구가 그저 공을 차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좀 더 공을 예쁘게 다룰 필요가 있으며 공을 찰 때 귀중한 보석을 대하듯 해야 한다.'''

'''사람들은 늘 내게 묻곤 해. "제2의 펠레는 누구죠? 언제 나타납니까?" 사견을 밝히자면 '제2의 펠레'같은 건 태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공장 문을 닫으셨거든.'''

'''축구는 한두명의 스타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늘 경기 안에 어우러져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소극적으로 군다면 이길 수 없다. 이것은 팀 게임이므로 누구도 혼자 플레이할 수 없다. 11명이 1명처럼 플레이해야 승리가 찾아온다.'''

'''나는 가끔 잠을 자지 않고 그저 누워서 궁금해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펠레'가 그리 유명한 이유가 뭘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른다.'''


7. 펠레의 저주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명성이 자자한 펠레이지만 또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말을 하면 언제나 그것이 반대로 이루어지는 펠레의 저주 때문이다. 이놈의 저주 때문에 그는 단 한번도 축구감독을 해본 적이 없으며, 평생동안 엄청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그저 이건 농담삼아 하는 얘기니 너무 진지하게 펠레를 까는 건 자제하자. 틀린 것이 부각돼서 그렇지 정확하게 예측한 것도 많기 때문.
어쨌든 펠레의 저주 희생양들에겐 흑마법사라고 왕창 까인다. 이게 펠레의 잘못이라곤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펠레가 무언가를 예측할때마다 지목당한 선수들의 팬들은 그만좀 하라고 원성이 자자하다. 우리나라 역시도 펠레가 월드컵에서 한국의 승리를 예상하자 펠레를 까면서 펠레에게 질문을 던진 기자까지 세트로 까였고, 네이마르가 메시보다 낫다는 개드립을 듣고도 기겁한 쪽은 오히려 네이마르의 팬들이었다. 메시팬들은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마저 있는데 실제로 한마디 했다가 네이마르는 매 경기마다 부진했고, 반면 메시는 귀신처럼 골을 넣으면서 MVP 골든상도 수상까지 했다. 여담으로 펠레는 자국 월드컵 직전에 아르헨티나는 팀이 엉망이고 메시를 3류 선수라며 혹평까지 했다. 그런데 월드컵 본선에서 온갖하드캐리하면서 자국팀을 결승전까지 올렸다. 비록 준우승 했지만 골든볼까지 수상도 받았다.

8. 이야깃거리


  • 1967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전쟁 당시, 양측 당사자들은 라고스에서 열린 펠레의 시범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 48시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 펠레는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 FC를 상대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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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 있는 기념판
  • 공격수로서의 펠레의 실력은 모두가 알지만, 펠레의 또 다른 장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골키퍼로서의 능력이었다. 펠레의 선수 시절 당시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던지라 주전으로 나왔던 골키퍼가 부상을 입거나 퇴장을 당하면 다른 골키퍼를 교체 투입시킬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필드 플레이어 한 명이 골키퍼로 투입되곤 했는데 그것이 산투스의 경우는 주로 펠레였다. 1000번째 골을 페널티 킥으로 넣기 바로 전 경기에서도 산투스의 골키퍼가 부상을 당하자 펠레는 남은 시간을 골키퍼로 뛰었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조차 예비 골키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산투스 팀에서도 2군 골키퍼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실제 경기로는 1964년 1월 19일, 산투스 FC그레미우의 타사 브라지우 4강 2차전에서 경기 86분에 골키퍼 지우마르가 퇴장을 당했다. 산투스는 그 대책으로 펠레를 골키퍼로 뛰게 했다. 펠레는 이 경기에서 이미 해트 트릭을 기록했는데, 골키퍼로도 여러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고 결승으로 이끌었다.참고하면 좋은 에펨코리아 글 이런 식으로 펠레가 골키퍼로서 뛴 기록은 놀라운 수준이다. 공식 경기와 비공식 경기를 합쳐 골키퍼 대신 뛴 경기가 7경기나 되는데, 실점은 단 한 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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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당한 지우마르의 유니폼을 빌려 입은 펠레

펠레의 골키핑 능력
  • 펠레는 909경기만에 1000골을 달성했으며 그 대기록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브 루스가 2000회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라 평했으며, 자국 브라질에서는 두 번씩이나 달에 착륙했던 미국인 조종사 콘라드와 빈의 사진이 펠레의 1000번째 득점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이 당시 펠레의 득점은 페널티 킥이었는데 한 브라질 언론인은 "세계인들이 모두 함께 집중해서 보려고 시간을 잠시 멈추어야 했기에 하늘이 그러한 상황(페널티 킥)을 만들어주었다"라고 썼다.
  • 콜롬비아에서의 일이다. 그 날 따라 수비수들이 펠레에게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왔고 평소에 매너 좋은 펠레도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그러다 펠레가 파울을 당했지만 심판이 오히려 펠레에게 파울을 선언했고 펠레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고 심판에게 항의했다. 심판은 이런 펠레에게 퇴장을 주었는데 펠레가 이렇게 퇴장을 당하자 관중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오히려 주심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경기장에서 나가야만 했다. 관중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펠레보러 비싼 돈 주고 표 사서 경기보러 왔는데 펠레를 퇴장시켜? 장난하니?" 결국 남은 경기는 부심을 주심으로 임명하여 경기를 진행시켜야만했다. 물론 펠레는 경기를 끝까지 소화했다.
  • 이란 국왕은 펠레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으며 중국의 국경 수비대는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초소를 버리고 홍콩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들은 중징계를 받았다.
  • 펠레가 아프리카로 투어를 갔을 때의 일이다. 펠레는 그 날따라 엄청난 팬들의 환호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친선 경기를 뛰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미담인데 그 이후에 해프닝이 벌어졌다. 펠레는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각종 묘기들을 선보이며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골 폭풍을 쏟아부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환호성이 커질수록 상대팀 수비수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급기야 골키퍼는 아예 경기를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그걸 본 펠레는 아차 싶었다고 한다. 저 골키퍼도 가족들이 있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을텐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있는 힘껏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크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고. 게다가 본인의 서브 포지션이 골키퍼였기 때문에 골을 먹었을 때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기가 끝난 후 펠레는 골키퍼에게 사과하러 상대팀 라커룸에 방문했지만 골키퍼는 펠레를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타리 2600의 게임 Pelé's Soccer는 스포츠 스타를 등장시킨 최초의 게임이다.
  • 1962년 펠레가 두 번째로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SL 벤피카를 깨박살내자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인터 밀란 등 유럽의 수많은 축구 클럽들이 펠레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國寶)'로 선언하고 펠레가 계속 브라질에 남도록 했다.[154] 펠레는 한평생 동안 단 하나의 프로팀에서 활약했는데, 그것은 산토스 팀이었다. 은퇴 후에 미국의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에서 뛰기는 했다.
  • 월드컵에서 3번을 우승하여 월드컵의 대명사같은 선수지만 실제로 부상 또는 부상의 후유증이 없는 풀 컨디션으로 월드컵을 뛰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1997년 펠레는 영국에서 명예 KBE훈장을 받았다. 2등급 훈장이기 때문에 작위급 훈장이다. Sir칭호가 안 붙는 명예 작위이긴 하지만 현재 축구계의 유일한 KBE 수훈자이다.[155][156]
  •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펠레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강도를 만났었다. 그런데 택시기사의 돈을 빼앗고 펠레의 돈도 뺏으려고 뒷문을 열었을때 놀란 얼굴로 있는 펠레를 보자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펠레씨,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당신의 돈을 빼앗을 수는 없죠."# 하지만 약 10년 뒤 또 강도를 만난 모양이다.#
  • 펠레가 어렸을 적 이야기다. 친구들과 축구를 한 뒤 으쓱해져 함께 담배를 피웠는데, 이 장면을 아버지에게 딱 걸리고 만 것. 저녁이 되어 들어온 펠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담배 피웠냐?" 펠레는 뜨끔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단맞을 줄만 알았던 펠레에게 아버지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축구에 소질이 있으니 장차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벌써 담배를 입에 대다니. 흡연은 몸을 망가뜨려 경기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아버지로서 네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책임도 있다. 하지만 네가 좋은 길로 가느냐 나쁜 길로 가느냐는 어디까지나 네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너는 담배를 피우고 싶으냐? 아니면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으냐? 네 스스로 선택하거라." 그리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펠레에게 건네며 "뛰어난 축구 선수가 되길 원치 않고 굳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면 이 돈도 담배 사는 데 보태거라."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펠레는 한바탕 울고 난 뒤 아버지에게 가 돈을 돌려주며 당연히 이렇게 말했다. "담배는 피우지 않겠어요. 그리고 꼭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일화가 있었기에 그는 지금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 펠레와 술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펠레가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어른이 즐기는 향긋하면서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액체를 조금씩 먹다보니 큰 나무통 한 통을 거의 비워버릴 정도로 마셔버렸다. 친구는 술을 조금 즐기던 인물이라서 별 탈이 없었지만 펠레는 취했을 때 어지러운 것이 이대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결국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아버지께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애원에 아버지는 몽둥이 찜질로 답을 주었다. 그 이후로 역시 술도 마시지 않는다. 술냄새만 맡아도 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토 나올것 같다고 한다.
  • 펠레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력하는 천재였다. 세계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만한 빛나는 발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펠레는 자신의 발 모양에 심각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못생겼다고. 축구선수들의 발이 못생긴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펠레는 특히 심하다. 발마디의 굳은 살은 기본이고 발톱도 거의 흔적만 남은 수준. 밑의 사진은 현재 일반에 유일하게 공개된 펠레의 맨발 사진이며 이것 역시 펠레 본인이 한사코 촬영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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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맨발 사진
  • 아들 에지뉴도 축구선수였으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하지만 이 아들내미가 마약이나 팔고 다니는 사고뭉치여서 펠레의 속을 꽤나 썩히고 있다. 막내아들인 1996년생 조슈아도 산투스 FC에서 축구를 했었는데 2015년 미국의 탬파 대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하면서 축구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 1959년 펠레는 브라질 병역법에 의해 군대에 징집되었고 1년간 군복무를 했다. 펠레는 이 시절을 매우 환상적인 경험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가끔 군대를 가라고 충고를 한다.[157]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은 조별리그에서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를 만났다. 당시 물이 올라와있던 펠레는 자신만만해 했으나, 브라질은 승리하긴 했지만 고작 1골을 넣는 데 그쳤다.[158] 참고로 이 경기서 잉글랜드 골키퍼 고든 뱅크스가 펠레의 골이나 다름없는 슛을 막아내는 등 역대급 선방들을 보여줬다. 경기가 끝나고 펠레는 "잉글랜드 골문은 은행(Banks) 문만큼이나 문턱이 높더군요." 라는 드립을 남겼다.
  •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 펠레는 20세기를 빛낸 세계의 위대한 축구선수 100명을 선택해서 FIFA 100을 만들었다. 아무리 펠레가 빗나가는 예측을 자주하는 위인일 지언정 그래도 세계 축구 역사에 두 획이나 그어버린 장본인이니 만큼 그의 축구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뛰어난 안목에 의해 펠레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축구선수들이 FIFA 100인 것이다.
  • 펠레는 승리의 탈출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그 영화는 1981년에 개봉되었다. 여기에는 영화 배우 실베스타 스텔론, 막스 폰 시도우[159] 등이 출연했으며 펠레 외에도 보비 무어등의 유명 축구 선수들이 출연했었다. 스토리는 2차대전 당시 나치장교들이 선전용으로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포로 대표팀과 자신들의 정예 축구팀과의 경기를 주선하였는데 포로 대표팀 선수들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탈출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모티브는 데스메치로 알려져 있는 FC start 선수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 펠레가 선수 시절에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면 7회를 수상했을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다름아닌 프랑스 풋볼[160]에서 내보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기사이다.[161]
  • 과거 마라도나가 진행하던 토크쇼[162]에 펠레가 게스트로 초정된 적이 있었는데[163], 이 토크쇼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교환하고 마라도나는 펠레를 칭찬(이라기보다는 까지 않는)하고, 펠레는 마라도나의 마약 끊기 노력을 크게 칭찬하는 등. 둘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을것만 같은 일이 진행되었지만... 마라도나가 먼저 헤딩 대결(서로에게 헤딩해서 공을 넘겨주는 것)을 제안하고, 즉석에서 성사되었다. 길게 가지 않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펠레가 이겼다 마라도나가 실수를 해서 공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마라도나에게서 한 30cm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직행... 하던 것을 마라도나가 재빨리 캐치해서 펠레와 뜨거운 포옹하는 애드립으로 넘기며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제대로 봤다면 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마라도나는 자신이 진행하던 토크쇼에서 굴욕을 당했다.
  • 현재 80세가 되었지만, 아직 크게 나이들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동안속성을 지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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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공격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 카포에라를 익힌 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세이부 컵 축구의 최종보스인 GOD 팀의 주장으로 등장한다. 1~7스테이지에서는 부심으로 뛰다 8스테이지에서 선수로 돌변하여 경기장에 난입한다!
  • 한국과도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편이다. 1972년 선수로서 한국을 방문해서 친선 경기를 치렀다.대한뉴스 친선 경기에서 펠레가 속한 산투스 팀이 3:2로 이겼다. 1998년에도 방한했다. 부산에서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 조추첨 행사에도 참여했다. 2002년 월드컵때 한국팀에 대해 좋은 멘트를 많이 남겼다. 브라질에 있는 펠레가 만든 팀인 리토라우FC에서 10번을 달고 뛰던 한국 축구 선수 임규혁에게 칭찬을 하기도 했다. 2003년 피스컵 대회 고문을 맡아 방한했다.
  • 바비 찰튼도 언급한 바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17살때 브라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를 묻는 질문에 나라고 대답했으며, 세계 최고의 윙어를 묻자 그것도 자기라고 대답했다. 다른 선수였다면 농담이라고 웃었겠지만, 펠레는 진정으로 믿고 대답했고, 다른 이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해 누구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의 등번호는 10번으로 유명하다. 펠레는 1958년 월드컵 개최 당시 17세의 유망주 소년일 뿐이었는데, 때문에 그가 대회 실버볼을 차지하고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 주축 공격수가 될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발렌티노 마촐라를 닮은 플레이로 인해 유럽에서도 유명했던 주제 아우타피니도 있었고 여러모로 펠레가 낄 자리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통념상 10번은 다른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타당해 보였는데, 당시의 [164] 팀의 주전 골키퍼 지우마르는 이례적으로 3번을 달고 뛰었고(다른 팀 다 멀쩡한 와중에 브라질만 골키퍼가 3번을 달았다.다행히도 후보 골키퍼였던 카스티유는 정상적으로 1번을 받았다.), 8번이나 10번을 받아야 했을 팀의 플레이메이커 지지는 6번을 받고(지지는 전 대회인 1954년 월드컵에서 8번을 달았었다), 라이트 윙이 아닌 레프트 윙어 마리우 자갈루가 7번을 받고 반대로 라이트 윙인 가린샤가 11번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터졌다. 당시에는 페렌츠 푸스카스 같은 스타선수나 달 수 있었던, 중심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돌아가야 할 10번의 영광이 뜬금없게도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유망주 스트라이커에 불과했던 펠레에게 주어진 것이다. 펠레로서는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받게 된 10번이었는데, 이 10번 셔츠를 입고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10대 선수가 되는 바람에 이후에도 그 번호를 입을 수 있게 되었고, 그가 대표로 뛰었던 당시에 누구도 그의 등번호를 달 수 없었다.
  • 그와 가장 많이 비견되는 축구선수인 디에고 마라도나가 사생활 문제로 끊임없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과 비교하면 은퇴 이후에도 큰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한 적도 없고 축구 진흥 및 홍보에 계속 힘쓰는 등 좋은 이미지가 강하다. 펠레는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시절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으로 입각되어 국정에도 참여하였다.

  • 2016년에 '펠레: 버스 오브 어 레전드'라는 영화가 나왔다. 빈센트 도노프리오 등 유명한 배우도 출연했고, 펠레의 가족들이나 펠레 역할의 배우는 실제로 브라질인을 캐스팅하였다. 펠레의 어린 시절 삶과 1958년 월드컵에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가린샤가 펠레보다 키가 큰 점 등 잘못된 고증이 조금 있지만, 펠레의 유년기 삶과 브라질 축구계의 분위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 볼 만한 영화이다. 펠레 본인이 직접 마지막 내레이션을 맡았다. 그것도 포르투갈어가 아닌 영어로 했다.
  • 축구 잡지 스포르트 바이블에서 2020년 9월25일 만일 펠레가 현역 시절 발롱도르의 평가 대상에 들었다면 산투스 FC 시절 7개의 발롱도르를 탔을 것이라 예상했다.
  • 코로나로 시상이 취소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타임 발롱도르 드림팀에 예상대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정되었다. 스트라이커 대신 미드필더 포지션에 이름이 올랐다는 점이 논란이 되긴 했으나, 선정전에 발표한 후보군의 포지션 배분을 보면 레프 야신, 프란츠 베켄바워, 펠레, 마라도나, 로타어 마테우스의 선정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어있었으므로 올타임 드림팀 선정은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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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7년 수훈, 브라질 리우 브랑코 국왕 공로장 5등급 기사장 Ordem de Rio Branco Knight[2] 1997년 명예 수훈, 2등급 대영제국 훈장 Knight Commando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 / 이름 앞에 Sir을 붙일 수 있는 2등급인 KBE에 서훈 되었지만 영연방 국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름 앞에 Sir은 붙지 않는다.[3] 영어를 제외한 로망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4] 펠레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을 때 당시 유명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유행에 따라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등록하려 했을 때 실수로 i를 빼먹어서 이디송이 아닌 이드송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비슷한 예로는 마이콘이 있다.[5] 펠레의 출생신고서에는 10월 21일로 올라가 있지만 본인은 21일은 관청 측의 실수고 원래는 23일이라 주장한다.[6] Três Corações. 한국어로 번역하면 세 개의 심장이란 뜻이다.[7] 사실 펠레가 10번을 달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당시에 브라질 축구협회가 등번호를 제출하는 것을 잊었고, 이에 FIFA의 어느 직원이 자기 마음대로 브라질 선수들에게 등번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 월드컵에서 펠레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고, 그때부터 10번은 에이스의 번호가 되었다.[8] 축구선수 커리어를 시작할 때에는 인사이드 포워드였다. 그러나 인사이드 포워드를 사용하는 전술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축구계에서 비주류 전술이 되어가고 있었고, 결국 1970년대를 지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브라질과 산투스는 1950년대 후반부터 4-2-4 포메이션을 자신들의 주요 전술로 채택했고 펠레는 그런 변화에 적응하여 기량을 유지했으며, 1970년대에도 처진 위치의 중앙 공격수로 활약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득점 기록만 보면 최전방에서 골에만 집중한 스트라이커로 착각하기 쉽지만, 주로 2선에 머무르며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했으며 덤으로 득점력까지 뛰어났던 선수였다. 오늘날의 세컨드 스트라이커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선수였다.[비공식] https://instagram.com/pele?igshid=16e8ktglfq3z6 비공식 경기 골 포함.[공식] [9]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남미 선수 A매치 역대 최다 득점자이다.[10] 레알 마드리드 CF, 유벤투스 FC,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등 많은 유럽 팀들이 펠레를 호시탐탐 영입하고자 했다.[11] 놀라운 것은 펠레는 올림픽에 참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무하마드 알리, 마이클 조던올림픽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선수들을 제쳐두고 펠레를 1위에 선정한 면에서 말 다한 셈이다.[12] 1994년까지는 발롱도르 투표에 유럽 국적 선수만 포함될 수 있었기에 비유럽 국적의 선수들은 아무리 좋은 활약을 해도 발롱도르를 받을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95년에 비유럽 국적 제한이 풀렸고, 비유럽 리그 제한은 2007년에 이르러서야 풀렸다.[13] 그대로 받았다면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이다. 물론 받은 사람의 상을 다시 빼앗진 않는다. 그리고 따로 투표를 거친게 아닌 프랑스 풋볼이 자체적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재미로 보는게 더 맞다.[14] 혹은 'King Pele', 브라질에서는 'O Rei do Futebol', 'O Rei'(발음:우 헤이). 해외에서는 황제가 아니라 으로 써서 오역처럼 보이지만, 당장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영어로는 King of Pop이다. 동아시아와는 달리 영어권 국가에서는 최고의 존칭으로 황제라는 단어 대신 왕인 'King'을 더 자주 쓰기 때문이다.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축구공 호나우두"와 같은 말실수로 구설수에 올랐던 SBS 동시통역사가 펠레를 "축구왕"이라고 통역한 건 해외에서의 명칭을 직역했기 때문. 이 왕이라는 칭호는 1958년 2월 26일 쓰여진 칼럼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유서깊은 별명이다. 기사.[15] Dondinho. 본명은 주앙 하무스 두나시멘투(João Ramos do Nascimento, 1917~1996.11.16)[16]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유스 출신의 스트라이커로 1935년부터 1952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였다. 키는 돈지뉴가 펠레보다 9cm가량 크며 , 돈지뉴도 선수 생활동안 605골을 기록했는데 브라질 대표팀에 소집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 브라질 리그의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17] 사실 이것은 축구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헤딩골 기록이다.[18] 1934년 월드컵에 출전한 경험도 있는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이다.[19] 지투는 이후 산투스 FC의 역사에 남는 주장이 되며 페페는 산투스에서만 700경기가 넘는 경기를 뛰게 된다.[20] 참고로 일반적인 유소년 레벨에서 나이 차는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어린 나이에는 신체 발달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에 따르면 같은 나이면 1월에 태어난 아이가 12월에 태어난 아이보다 프로 선수가 될 확률이 50% 이상 높다고 한다. 성장속도의 차이를 재능의 차이로 착각해 1월에 태어난 아이가 계속해서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21] 하지만 여기에 대해선 반박의 여지가 있다. 펠레가 만든 이른바 '펠레법'이 오히려 브라질 리그를 망친 원흉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22]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브라질의 공식 전국 리그였다.[23] 최초, 최연소 수상 기록.[24] 디에고 마라도나와 공동수상[25] 스포츠계 인물 중에서는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26] 제프 허스트, 지네딘 지단, 바바와 타이기록[27]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ootball_new6&no=6979548[28] 나머지 한 명은 히벨리누[29] 나머지 3명은 우비 젤러, 클로제, 호날두[30] https://www.fmkorea.com/2921927537[31] 현 FIFA 클럽 월드컵[32] 근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다(...)[33] 정식 명칭은 Campeonato Brasileiro de Seleções Estaduais로 상파울루 주대표, 히우지자네이루 주대표 등 브라질 주들 끼리 대결하는 대회로 1922~1987년까지 열렸다. 이 대회는 펠레가 1959년에 산토스가 아닌 상파울루 주대표로 참가해 6골을 넣었다.[34] 1966년까지 개최하고 개최 중단[35] 1959년 개막. 1968년까지는 타사 브라지우라는 이름의 컵대회가 개최. 1967년~1968년은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과 타사 브라지우를 병행. 브라질 세리 A가 출범한 것은 1971년. 타사 브라지우, 브라질 세리 A 모두 우승팀&준우승 팀에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은 같음.[36] 영문 위키피디아 등 1경기 1골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도 많다.[37] 1957년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세리 아줄과 세리 브랑쿠로 나뉘어 열렸다. 펠레는 세리 브랑쿠에서 14경기 19골, 세리 아줄에서 15경기 17골을 득점했다.[38]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개막[39]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40]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41]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42] 산투스는 1965년 타사 브라지우 챔피언이었고 원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해야 했지만 브라질 축구협회가 1966년 대회에 브라질 팀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43]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 중단, 이후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개최[44]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타사 브라지우[45]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타사 브라지우에는 불참. 대다수 위키 및 신문에 17경기 11골로 잘못 알려짐. #[46]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3경기 1골[47]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48] 1968년 타사 브라지우에서 우승한 산투스는 참가 자격을 충족했다. 그러나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1970년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브라질 팀들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을 제한했다.[49]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5경기 2골[50]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51] 월드컵에 집중하기 위해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브라질 팀들을 보내주지 않았음[52]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개막[53] 대다수 위키 및 신문에 1968년 시즌이 17경기 11골로 잘못 기록됨. 18경기 12골임. 따라서 174경기 101골이 정확함.[54] 기타 경기(공식전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확인이 어려운 경기들) 포함시 107경기 64골[55] 불확실[56] 불확실[57] 2001년 1월, FIFA는 1968년 11월 6일에 열린 브라질과 FIFA 선발팀과의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CBF는 여전히 FIFA 선발팀과의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하며, 펠레의 A매치 경기 수를 92경기로 집계하고 있다. 이는 펠레와 함께 FIFA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뛰었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나무위키에 있는 이 선수들의 A매치 기록은 FIFA가 아닌 FA의 기록에 근거하여 작성되어 있는 것으로, 1963년의 해당 경기를 포함한 기록이다.[58] 1970년 월드컵 직전에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 펠레를 센터포워드로 뛰게하자, 당시 언론의 인터뷰에서 거기는 당신이 좋아하는 포지션이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펠레도 이에 대해 15년을 미드필더에서 뛰었는데, 갑자기 하라고 하면 되겠느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참고로 이 감독은 자신에게 대드는 펠레가 근시라는 근거없는 주장까지 하면서 선발에서 제외시켰다가 해임당한다.[59] 코로나19로 인해 발롱도르 시상식을 열지 않기로 한 대신 올타임 드림팀을 선정하기로 했다.[60] 더구나 디에고 마라도나도 공격형 미드필더 후보로 올라왔기에 많은 축구팬들이 공격형 미드필더 두 자리는 누가 뽑힐지 뻔하겠다고 실소를 지었다.[61] 다만 펠레가 현대 축구에서 뛰었다면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을 가능성은 없다. 공격형 미드필더들은 중앙 미드필더로 뛰기엔 수비력이 부족하고 스트라이커로 뛰기엔 피지컬이 부족한 테크니션들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그 때문에 공격형 미드필더의 위상은 점점 하락하면서 현대 축구에서는 사장되고 있는 포지션이다. 하지만 이게 펠레가 현대 축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펠레의 피지컬과 테크닉은 당연히 현대 축구에도 먹힐 레벨이며 수비력 또한 출중했기 때문에 오히려 현대에 뛰기 시작했다면 펄스나인이나 딥라잉 포워드와 메짤라가 가능한 희대의 멀티 자원으로 각광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62] 알까기로 통칭되는 기술. 펠레가 매우 선호하는 개인기였는데, 1968년 서독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나온 알까기가 특히 유명하다. 무려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넛맥을 성공시켜 엉덩방아찧게 만들기도 했다.[63]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 FC를 상대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펠레의 경우는 영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대략 절반 이상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되고 위에서 영상이 링크된 주벤투지전에서의 리프팅 골처럼 '''펠레의 베스트 골은 오히려 영상에 남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이 경기에서도 녹화가 허용되지 않아서 이 골은 영상으로 남지 않았다.#[64] 라이벌 마라도나와 자주 비교되는 부분인데, 마라도나는 일명 '매춘부'라 불리며 다이빙을 굉장히 많이 시도했던 반면 펠레나 메시는 다이빙을 절대 시도하지 않는다.[65] 1962년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비수 얀 포플루하르가 펠레의 슈팅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은 후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있었던 에피소드도 있다.[66] 펠레와 함께 활동했던 골키퍼 셰프 메싱은 "펠레의 서전트 점프 높이는 48인치 이상이며, 마이클 조던 보다 높게 점프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탈리아의 자친토 파케티도 "펠레와 공중볼 경합에 나섰다. 내가 더 크고 힘도 셌다. 땅에 떨어져서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펠레는 그때까지도 공중에 떠서 헤더를 시도하고 있었다. 마치 원하는 만큼 공중에 머무를 수 있는 선수 같았다."라고 놀라워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파케티는 191cm의 장신이며 펠레보다 20cm 가량 키가 큰 선수다.[67] 나머지 4명은 호베르투 히벨리누, 데이비드 베컴, 테오필로 쿠비야스, 베르나르 젱기니이다. 이들 중 펠레가 가장 먼저 성공하였다. 그리고 '두 대회 연속 프리킥 득점'으로 범위를 더 좁히면 펠레와 히벨리누, 단 2명에 불과하다.[68] 펠레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랬다. 당시의 공과 축구화는 지금에 비해 품질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강한 회전을 걸어 골문 구석으로 꽂아넣는 플레이는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69] 이는 제대로 기록이 집계되기 시작한 1966년 대회 이후 역대 월드컵 4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1위는 1974년요한 크루이프로 36회, 공동 2위는 1974년의 카지미에슈 데이나, 2010년차비로 30회였다. 다만 크루이프, 데이나, 차비는 해당 대회에서 7경기, 펠레는 6경기를 소화했다.[70] 참고로 2014년의 메시가 7경기 9개, 2018년의 그리즈만이 7경기 11개의 태클을 기록했다.[71] 여담으로 폰테스는 머리가 움직일 정도로 꽤 크게 얻어맞았지만 다행히 팔꿈치에 정통으로 맞지는 않아서 잠깐 통증을 호소하고 문제없이 경기를 소화했다. 오히려 폰테스가 쓰러지면서 펠레를 몸으로 덮치는 바람에 펠레가 훨씬 오래 그라운드에 누워 있었다.[72] 4번의 대회에 출전했음에도 경기수가 적은 이유는 2번의 대회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다.[73] 가린샤, 니우통 산투스 등이 소속되어 있던 히우지자네이루 주 소속의 강팀 보타포구 FR이 아니다. 상파울루 주 리그에도 같은 이름의 팀이 있다.[74] 이 기록 역시 말도 안되는 기록인데 브라질 후배 호나우두의 통산 해트트릭 횟수가 24회다. 메시호날두가 50회 정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75] 쉽게 말해 월드컵 최다 우승 선수. 그 밑으로 월드컵을 2회 우승한 선수들은 축구 역사를 통틀어 주세페 메아차로 대표되는 1930년대 중반의 이탈리아 선수들, 가린샤지지로 대표되는 1950년대 후반의 브라질 선수들, 그리고 호나우두카푸,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레야를 합쳐서 총 20명이다.[76] 그 '''게르트 뮐러'''의 분데스리가 통산 득점왕 기록이 7회이다. 그러면서 1966년의 부상 이전의 펠레는 9년간 상파울루 주 리그에서 1시즌 평균 40골을 넘기는 압도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펠레 이전의 상파울루 주 리그 득점왕들의 9년간 1시즌 평균 득점은 26골 수준이고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메시의 2018년까지 9년간 라리가 평균 1시즌 득점은 36.6골이다.[77] 상파울루 주 리그이다. 산토스의 통산 우승 횟수가 2011년 우승까지 포함하여 19회이니 아직 통산 우승의 반 이상을 펠레 시절에 이룬 것이다.[78] 펠레 외에 이런 스타 본능을 발휘한 선수라면 지네딘 지단이 있다.[79] https://www.fmkorea.com/2918614271[80] https://www.fmkorea.com/2921927537[81] 남미 올해의 선수(~2006년, 발롱도르 개편 전) 3회[82] 남미 올해의 선수(~2006년) 1회[83] 남미 올해의 선수(~2006년) 1회[84] 월드컵 골든볼 1회, FIFA 올해의 선수 1회, 남미 올해의 선수(~2006년) 1회[85] 발롱도르 1회[86] 월드컵 골든볼 1회, 발롱도르 2회, FIFA 올해의 선수 3회[87] 남미 올해의 선수(~2006년) 1회, 발롱도르 드림팀[88] 발롱도르 1회, FIFA 올해의 선수 2회[89] 발롱도르 1회, FIFA 올해의 선수 1회[90] 펠레의 다큐멘터리 영상. 현존하는 펠레의 스페셜 영상 출처의 대부분은 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 쯤 펠레 에테르노에서의 펠레의 플레이가 아이러브사커 같은 축구 동영상 카페에 소개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91] 1970년 월드컵에서 기록된 드리블 돌파 횟수는 19회로 53회의 마라도나, 46회의 메시 등과 비교하면 확실히 적다.[92]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11번이었던 호베르투 히벨리누가 펠레의 밑에서 공미의 롤을 수행할때는 4-3-3, 왼쪽 측면으로 올라가 윙포워드로 활약할 때는 4-2-4로 변형되었다.[93] 펠레와 마라도나를 메시 등의 현대 선수들과 비교할 때 '과거 선수들이 현재 선수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니까 현대 선수들이 더 대단하고 위대한 선수이다.' 라는 이야기로써 현대선수 우월론을 주장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부분들이 펠레와 그 동시대를 뛴 선수들의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증명이 되기도 한다. 항상은 아니지만 자신이 뛰는 전술 트렌드에서 시대를 한 발 앞서가는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선수들인데 그 수준이 떨어질리가 없다. 애초에 그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는 현대 선수들의 플레이는 이러한 선대 플레이어들의 노력과 연구, 실전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94] 데니스 로조지 베스트와 함께 유소년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푸스카스가 늙고 배가 나왔다고 무시했다고 한다. 갈수록 무시하는 정도가 심해지자 베스트의 제안으로 크로스바 맞추기 내기를 했고 푸스카스는 10개 중 10개를 모두 맞춰 아이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아예 공을 띄워서 어깨와 머리로 트래핑하고 발꿈치로 띄우더니 발리 슈팅으로 강하게 차서 크로스바를 강타했다.[95] FIFA 홈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1970년 월드컵을 중계하던 영국 중계진 팻 크럴랜드(맨유 출신 수비수)가 말콤 앨리슨이 던진 질문에 대해 남긴 대답이었다.[96] 돈지뉴의 부인, 그러니까 펠레의 어머니이다. 풀네임은 도나 셀레스트 아란치스.[97] 해설: Now we know... that we have a thought it before 'Why they call this man the king, Why he is known of the greatest footballer in the world'...[98] 원문: Who will now suggest that he is less than the greatest footballer we have ever seen? 펠레가 아닌 '그'라고 표현했지만, 1970년 월드컵이 끝난 시점이었고 이는 당연히 펠레를 지칭하는 것이었다.[99] 입에 침이 마르도록 펠레에 대한 헌사를 아끼지 않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대단한 펠레의 이다.[100] 2018년 FWA에서 진행한 인터뷰 중에서[101] Pele was the greatest player I have seen. This guy was absolutely fantastic. 2013년 다큐멘터리 Bobby에서[102] 前 브라질 감독.[103] 바비 무어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조별경기에서 펠레와 만난 적이 있는데 말 그대로 축구 역사의 남을 명경기 of 명경기를 펼쳤다. 방패의 대결과도 같았으며, 잉글랜드의 위대한 전설 바비 찰튼경은 이 경기는 축구의 모든것을 볼 수 있는 위대한 경기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펠레, 토스탕, 호베르투 히벨리누, 자이르지뉴라는 역대급 공격진 그리고 그것을 막아서는 바비 찰튼, 바비 무어, 고든 뱅크스로 이어지는 잉글랜드의 3인방이 있었다. 브라질은 위에 4선수 중 한 명도 이기심을 표출하지 않고 팀 플레이 위주의 경기력을 펼치며 완전히 한 몸인것 처럼 경기장을 휘저었고, 무어와 뱅크스는 거의 완벽의 가까운 경기를 보여주며 저 무적의 4인방을 막아냈다. 바비 찰튼경도 브라질의 4명에 꿀릴것 없는 경기를 단신으로 보여줬지만, 축구는 11명이 하는 게임. 잉글랜드는 3명의 선수에게 전적으로 의지했지만, 브라질은 사정이 달랐다. 브라질은 저 4명 외에도 중원 사령관 제르손에다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인 카를로스 아우베르투 등 말 그대로 초호화 선수진이였다. 비록 잉글랜드가 1-0으로 브라질에게 패하지만, 이 당시의 브라질은 예선 전승도 모자라 본선 전승... 그 마저도 본선은 잉글랜드를 제외하면 모든 팀에게 3득점 이상씩 득점했다. 이로서 그 때 당시 브라질의 파괴력과, 그 파괴력을 그나마 1실점만으로 막아낸 잉글랜드 삼인방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104] 이 점은 디에고 마라도나 역시 지적했던 적이 있다. 2016년에 메시의 성격에 대해 펠레가 묻자 마라도나는 성격이 좋지만 리더감은 아니라고 평한 것이다.[105] 이전 경기에서는 펠레가 혼자서 다 해먹다 보니 자연스레 제재 및 반칙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2인 1조로 축구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토스탕이 펠레와 같이 한 조를 짜게 된 것.[106] 아르헨티나의 공격수 출신으로 1959년 코파아메리카 우승멤버이고,감독으로는 라싱의 1967 코파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끌었다. 재밌는 것은 이분은 1959년 코파아메리카 당시 브라질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선수이기도 하다. 경기는 펠레의 동점골로 1-1로 끝났으나, 당시 조별리그 형식으로 치루어진 대회 방식에 5승 1무의 아르헨티나에게 4승 2무의 브라질은 승점 1점 부족으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즉, 펠레의 국대 커리어에 없는 딱 두 가지인 코파아메리카 우승과 월드컵 득점왕 타이틀 중 전자를 막은 선수다.[107] 위에서 바비 무어가 언급한 내용의 원문이다.[108] 우루과이의 전 축구선수이며 디에고 포를란의 아버지이다.[109]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선수이며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의 아버지이다.[110] 인디펜디엔테의 전설적인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의 어린 시절 우상으로 알려져 있다.[111] I don't care how old you are, you don't say "Pele" without knowing who you're talking about. 다큐멘터리 Bobby에서[112] 1958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113] 1990년 로마에서 열린 '펠레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친선 경기. 펠레의 50살 생일을 맞아 특별히 개최된 친선 경기이다.[114] 뒤는 메시에 관한 칭찬. 그 중에서 일부를 따왔다.[115] 인터컨티넨탈컵1960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펠레가 남미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 1974년까지 15전 8승 7패로 비등비등했고, 굳이 따지자면 남미가 조금 앞섰다. 즉, 8승이 남미 쪽. 결정적으로 펠레를 중심으로 모인 브라질 리그 출신의 선수들로 구성된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을 무려 3번이나 우승한 시점에서 남미 리그 수준이 유럽 리그 이하라 보긴 어렵다.[116] 다만 당시의 유럽 클럽 축구가 현재의 유럽 클럽 축구 같은 위상을 가지지 못하듯이 당시의 남미 클럽 축구도 현재 유럽 클럽 축구 같은 '별들의 전쟁'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즉, 최고의 선수들이 각 리그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클럽 대회들의 수준은 메시의 시대보다 좀 더 느슨했다는 것. 현재의 축구계는 보스만 룰 이후 유럽 빅클럽 위주로 축구판이 돌아가게 되면서 스타들이 모여 있는 형세이고 현재 유럽 챔스의 실질적인 수준은 월드컵보다도 위라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4년에 한번 열리는데다 세계인들의 무대라는 상징성과 개인이 아닌 국위선양에 이바지하는 목적까지 더하여 전체적인 대회 위상은 월드컵이 훨씬 우위이다.) 하지만 이는 펠레에 대한 평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럽 리그들이 남미를 포함한 세계의 우수한 선수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인터컨티넨탈컵이나 초기의 FIFA 클럽 월드컵의 결과들을 보면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과 남미 무대의 수준은 별 차이가 없었다. 유럽이 압도적인 수준을 가지기 시작한 때가 최근 2010년대라 볼 수 있으며 펠레까지 갈 것 없이 최근의 지단, 호나우두 세대도 현재 유럽 무대 수준과 동일하지 않았고 이러한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해야 정상이다. 그러므로 이는 역대 평가에서 펠레의 약점이라기 보다는 메시와 호날두의 강점이라 보는 게 옳다.[117] 레알 마드리드의 황금 콤비의 경우 사실 펠레가 10대 때 이미 30줄을 넘긴 인물들이고, 에우제비우, 보비 찰튼, 루이스 수아레스 등 당시 유럽에서 날린다는 선수들 대부분이 국제 대회에서 다들 펠레보다 하수 인증을 한 위인들이다. (푸스카스는 30대 중후반에도 레알에서 30골 넘게 찍으며 결국 40까지 해먹고, 최전방에서 살짝 내려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디 스테파노 역시 30대 중반까지 20골 넘게 찍으며 펄펄 날아다닌 양반들이긴 하다.) 요한 크루이프프란츠 베켄바워도 동시대에 뛴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전성기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동일선상에 놓지 않는다.[118] 그리고 이 AC 밀란이 바로 펠레의 산투스에게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패했다.[119] 현재 세리에 A가 정상에서는 한 풀 꺾였지만 1960년대에는 유러피안 컵 우승만 4번을 차지할 정도로 유럽에서 최고로 알아줬고 지금도 여전히 빅 리그로 인정 받는다.[120] 펠레 시절에는 활성화가 잘된 유러피언컵도 각 나라 챔피언들만 참가했고 조별 리그 없이 1라운드부터 바로 토너먼트였다. 못하면 2경기만 치르고 바로 탈락이며 결승까지 가면 4~5라운드였으니 우승 팀도 7~9경기 즉, 현재 우승 팀의 절반 좀 넘는 경기를 치렀다. 이 중 약체 팀을 상대에서 제외한다면 빅 리그 팀 입장에서 실질적으로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경기는 8강부터 있으니 경기 수가 확연히 적어진다.[121] 1959년 산투스 FC의 유럽 투어 당시 레알 마드리드 CF는 산토스의 경기를 앞두고 스페인 정부의 명령으로 2주간 리그를 중단하고 산투스와의 경기에 대비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산투스를 5대3으로 이기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펠레가 있을 때에는 단 한번도 산투스와 경기를 다시 치르지 않았다.[122] 1972년 6월 2일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시합이다. 이 경기에서도 당시 국가대표 수비수였던 김호이차만이 펠레 한 번 막아보려고 모든 것을 쏟다 못해 거친 플레이를 선보였고, 관중석에서 우리가 펠레 골 넣는 거 보러 왔지 너희들 수비하는 거 보러 왔냐라는 식의 격한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123] 사실 전성기는 1970년 월드컵을 치룬 30세가 마지막이긴 했다. 그 이후는 펠레라는 이름 값에는 아쉬웠다.[124] 펠레 등장 이전 10년간 남미 강호들과의 전적을 살펴보면 VS우루과이 16전 7승 4무 5패 골득실+10 / VS아르헨티나 7전 2승 2무 3패 골득실+4 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월드컵과 친선전에서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는 등 유럽강호들과의 대전에서도 강했다. 하지만 자국에서 개최된 19, 22, 49 코파아메리카 우승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뚜렷한 성과는 없었고, 월드컵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58 월드컵은 브라질이 처음으로 원정에서 이룬 우승이다.[125] 1962년 월드컵에서 가린샤가 퇴장당한 경우도 플레이와 무관하게 상대 선수를 걷어차는 보복 행위로 퇴장을 당했다. 펠레는 1966년 월드컵에서 심각한 백태클을 받았지만 상대 선수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다. 레드/옐로카드 제도 또한 1966년 월드컵 8강에서 처음 등장했고 1970년 월드컵부터 정식으로 채택되었다.[126] 1986년 월드컵 당시 마라도나와 붙었던 조민국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 룰이었으면 서너 명은 퇴장 당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렇게라도 버텨야 했던 거지. 난 당시 수비에 서서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정면에서 생생히 봤어요. 이야, 저 정도 갖다 받으면 부러졌겠다 싶었지. 그런데 태클을 피할 때 몸 중심을 살짝 띄우더라고. 그걸 어려서부터 접해왔던 선수다 보니 상대가 들어올 타이밍을 다 알고 충격을 완화하더만. 그리고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무슨 종아리가 우리 허벅지만 한 거야. 나도 한 허벅지 했는데. 가만 보니 정강이 보호대를 앞뒤로 했더라고. 얼마나 견제가 심했으면 저렇게까지 했나 싶었죠."라고 밝힌 바가 있다. 그리고 정말로 유튜브에 이 경기가 하이라이트로 올라오자 우리나라 채널임에도 불구하고 마라도나를 동정하거나 우리나라 선수들이 여러 명 퇴장당해야 했다는 댓글 반응이 줄을 이뤘다.# 마라도나 시절도 이 정도인데 파울에 제재가 없었던 펠레 시절은 더욱 살인태클 위험에 노출되었을 것이다.[127] 1964년의 데니스 로처럼 일시적으로 펠레보다 많은 골을 넣은 선수는 있었지만 펠레만큼 꾸준히 득점 페이스를 유지했던 선수는 없다. 그나마 근접했던 선수가 지미 그리브스, 에우제비우 정도. 거기에, 데니스 로지미 그리브스같은 경우에는 펠레, 에우제비우와 달리 최전방 공격수였다.[128] https://www.fmkorea.com/3075749847[129] 1970년 월드컵에서 펠레의 기록은 6경기 4골 6도움 (프리킥 유도 제외), 기회 창출 28회, 드리블 16회였고, 1986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의 기록은 7경기 5골 5도움, 기회 창출 27회, 드리블 53회였다. 펠레는 드리블도 적은 횟수를 시도하여 마라도나와 같은 크랙의 역할보단 연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4강 우루과이전에서 하프라인부터 상대 문전까지 혼자서 볼을 운반하면서 파울을 유도하는 명장면을 연출하여 그의 드리블 능력을 보여주었다.[130] FIFA 랭킹에 의한 동기부여를 고려한다 해도 FIFA 랭킹 도입 이전의 국가대표 경기도 A매치로 인정하기 때문에 이건 이유로 들 수 없다.[131] FIFA는 프리덴라이히가 1329골을 넣었다고 보도했으며 이는 펠레보다 많은 골 수다.[132] 멕시코전에서 1골 1도움의 활약으로 첫경기 승리의 주역이었다.[133] 일례로 주전 레프트백이었던 니우통 산투스가 1925년생으로 당시 만 37세였다.[134] 메시를 비롯하여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베켄바워, 크루이프, 호날두 등의 선수들 역시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 FC 바이에른 뮌헨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구단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이들이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러한 팀의 쟁쟁한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빛났기 때문이다. 또한 브라질이 당대 최고의 팀은 맞지만, '''1958~1970년까지 12년 동안 주전으로 활약하며 월드컵 3차례 우승을 전부 경험한 선수는 펠레밖에 없다.''' 축구는 개인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적당히 걸러들어야 한다.[135] 디디, 가린샤, 니우통 산수트, 자우마 산투스, 지우마르, 벨리니가 출전했다.[136] 1966년의 브라질은 가린샤, 자우마 산투스, 지우마르에 떠오르는 신예 자이르지뉴, 토스탕, 게르손이 합세해 신구 조화가 잘 이루어졌고 스쿼드만 보면 매우 막강한 팀이었는데도 펠레가 아웃당하자 속수무책으로 떨어졌다.[137] 다만 1964/1965 시즌에서 대패한 경기는 펠레가 결장했다.[138] 출처 축구철학의 역사, 조나단 윌슨 저, 2012년, 324쪽.[139] 이런 이유로 제2의 전성기 시절의 호나우두가 브라질 축구협회에 펠레의 골 기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140] 펠레의 데뷔 시즌이 1957년, 전국 대회의 창설이 1959년으로 펠레의 데뷔가 더 빠르다![141] 브라질의 70년대 군부 독재 시절 군사 정권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축구로 돌리기 위해 전국 리그를 재빠르게 창설한 것이고 이는 10여년 후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일어났다.[142] 산투스는 이 중 6번을 우승했다.[143] 펠레가 현역으로 뛰던 시기의 4번의 월드컵 별로 보면 1958년 월드컵은 10명, 1962년은 13명, 1966년은 10명, 1970년은 11명. 이렇게 브라질 대표팀 22명의 선수 중 모두 절반을 채울 정도로 상파울루 주 리그가 만만한 리그는 아니었다.[144] 이는 분데스리가 출범 전 독일 지역 리그와 분데스리가의 Elo 레이팅을 보면 간접적으로 상황이 비슷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145] 위키피디아만 뒤져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펠레 시절 브라질 축구의 구조이나 위상을 전혀 찾아보지 않고 그저 추측만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라이트 팬들이 많다. 진지하게 과거의 축구 선수들을 평가할 때 이러한 추측성 날조는 절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직접 선수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146] 파우메이라스, 산투스, 상파울루, 코린치안스[147] 스탯 조정이 일상화된 야구계에서도 조정 방어율이나 WAR같은 스탯을 구할 때 같은 시즌을 뛴 선수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잘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따지지 시대가 다른 선수들의 스탯을 있는 그대로 비교해서 누가 낫다는 비교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1920년이나 1923년의 베이브 루스가 2001년의 배리 본즈보다 홈런을 못 쳤으니 당시의 본즈보다 아래라는 헛소리가 나온다. 2001년 본즈는 73홈런을 기록해서 역대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갖고 있다. 반면 1920년의 루스는 54홈런을 기록했는데 웬만한 팀 전체의 홈런을 혼자 때려낸 수준이었고 1923년의 루스도 타율 .393을 기록하며 WAR 15를 기록,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WAR 역대 1위를 기록하였다.[148]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도 생전에 가끔 이런 경향이 있어서 현 시대 축구팬들에게 반감을 살 때가 있었는데 펠레는 훨씬 더 심하다. 오죽하면 펠레가 디스하는 선수들이야말로 펠레의 진짜 라이벌 자격이 있는 선수들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149] 다만 네이마르가 메시와 동료가 된 이후에는 메시에 대해 현역 최고의 선수라는 코멘트를 종종 남기는 편이다. 당장 리오넬 메시 항목만 가 봐도 '''메시는 기술적으로 볼 때 자신과 동급''' 운운하는 코멘트가 달려 있는 판이니 말이다. 메시가 바르셀로나의 브라질리언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다보니 브라질에서의 평가가 상당히 좋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호나우지뉴가 갓 데뷔한 메시를 팍팍 밀어 준 건 이미 유명한 일이고, 네이마르와의 관계를 보면 거의 의형제 수준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게 다 브라질리언 슈퍼스타에 대한 펠레의 애정이 지나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라 할 수 있다.[150] 하지만 이것도 펠레의 저주와 마찬가지로 기자들의 편집 조작이 있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브라질 국민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평화적 시위에 피해를 주고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말도 했으나 이 부분은 방송되지 않았던 것. 결국 시간이 지나서 '과격 시위와 국가대표팀에 대한 야유에 반대한 것이었을 뿐이며 평화롭기만 하다면 브라질 시위를 지지한다'라고 진화 성명을 냈지만 이것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는 여기[151] 성격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펠레가 직접 장례식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펠레 본인이 밝히기로는 1996년에 아버지 돈지뉴가 사망하였을 때에도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고... 아마 펠레가 장례식장에 가지 않는 이유는 어린 시절에 동굴이 무너져서 친구를 잃고 친구의 시체를 꺼내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비행기 사고로 죽은 파일럿의 시체를 보고 트라우마에 빠져 파일럿을 포기함은 물론 한참을 고생했었던 과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심약한 소년이어서 10대 초반까지 악몽을 꾸면 어머니 품에 안겨서 응석을 부렸다고 한다.[152] 원문:football is most beautiful sport, because it is always possible to surprise your opponent in the most creative way. 출처:펠레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153] 실제로 펠레는 국가대표팀에서나 클럽에서나 PK 전담 키커가 아니었다. 가끔씩 차긴 했지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산투스에 온 후에는 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페널티 킥을 찼다.[154] 펠레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때 이적료로 백지수표를 준비했다는 구단도 있다고 한다.[155] 그 밑의 등급인 CBE, OBE, MBE 등(얘들은 작위가 아니라 그냥 훈장이다)은 영국 축구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많이 들어있다. CBE에는 빌리 라이트, 앨런 시어러. OBE에는 바비 무어,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아르센 벵거(외국인 명예훈장). MBE에는 스티븐 제라드, 페테르 슈마이헬(외국인 명예훈장), 헨릭 라르손(외국인 명예훈장) 등이 있다.[156] 단, Knight Bachelor를 따로 받은 경우는 Sir를 붙인다. CBE + Knight Bachelor로 알렉스 퍼거슨, 바비 롭슨, 보비 찰튼. MBE + Knight Bachelor로 제프 허스트가 있다.[157] 애초에 펠레의 조국 브라질은 지금도 징병제를 유지하는 국가다.[158] 왜 '고작'이냐하면, 당시 브라질은 지역예선에서 6전 전승을 하고 조별리그 1차전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4-1로 이겼던 강팀이었다. 당시 잉글랜드가 바비 무어, 바비 찰튼 등 전설급 인물들이 넘쳐난데다 차원이 다른 수비력을 보여줬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159] 엑소시스트 시리즈의 진주인공 메린 신부로 유명한 바로 그 배우이다.[160] 발롱도르가 피롱도르로 합쳐지기 전에 수상자를 선정하던 기관이다[161] 구체적으로 1958년~1961년까지 4회, 이후 1963, 1964, 1970년 수상했을거라는 것이다. 이 가정대로면 펠레는 17살의 최연소, 4회의 최다연속, 7회의 최다수상 기록까지 세우게 된다.[162] 라 노체 델 디에스(10시의 밤)[163] 펠레가 첫 초청자였다[164] 앞선 7번 주석에서 브라질이 등번호 작성을 잊어서 FIFA 직원이 랜덤 배정했다는 이야기와 차이가 있다. 둘을 종합해보면 등번호 제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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