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쿠 다 가마
1. 개요
포르투갈어: Vasco da Gama (바스쿠 다가마)
1460 / 1469년~1524년 12월 24일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탐험가. 유럽인 최초로 유럽-인도 직항로를 발견한 사람이자, 이후 유럽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 정책의 첫걸음을 주도한 사람이다. 이 사람과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 두 사람 덕분에 세계의 흐름은 완전히 변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특히 포르투갈의 영웅이지만 도중에 만난 아랍 선박의 비무장 선원들을 몰살시키고, 교역을 거부하는 인도 도시는 무차별 폭격하며, 시민들의 손, 발, 귀를 자르는 등 잔혹한 면모도 보였다.
행적을 살펴보면 인도인이나 아랍인의 입장에서는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해적이자 약탈자였으며 사악한 살인마였다. 특히 후술되는 미리 학살 사건과 카레라이스 사건 같은 학살 행적으로 보면 기독교인을 빙자해 패악을 저지르는 적그리스도에 가까운 인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돈이나 패권 같은 목적을 위해 사람을 죽일 뿐만이 아니라 그걸 넘어선 가학적 학대를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1] 따라서 유럽인으로서 아시아를 공격한 최초의 식민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로도 불린다.
2. 행적
2.1. 인도 원정의 배경과 1차 원정
일찍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후추를 필두로 한 향신료들은 유럽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향신료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후 아라비아, 이집트나 레반트, 그리고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의해 유럽으로 수입되어 뭇 유럽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워낙 값이 비싸 부유한 귀족들만이 이를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 지방을 통일한 뒤 안 그래도 비쌌던 향신료의 가격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2] 그러자 유럽인들은 "우리가 그냥 향신료 산지까지 가서 직거래를 하면 엄청난 이윤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콜럼버스가 항해하게 된 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는 달리 포르투갈은 잘 알던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를 가려고 한 것. 인도를 찾아 이탈리아나 오스만 제국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역하려 한 것이다. 이는 엔히크 왕자 이래 수십 년간 추진되던 중요한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1497년, 바스쿠 다 가마를 제독으로 삼고 4척의 범선과 170여명의 선원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하였다. 이 함대는 8년전에 발견된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의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드디어 인도 캘리컷항에 도착하면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동쪽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당시 바스쿠 다 가마는 여행기를 썼는데, 인도 도착 무렵에 그들을 처음 반겨준 것은 현장에 있던 튀니지 출신 아랍인 상인[3] 둘이었다. 이들이 웬 유럽인이 온 것을 보고 던진 말은 "망할 놈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였다[4] 고 적혀 있다.[5]
첫번째 항해 때는 인도에서 3개월 가량 머물렀지만, 코지코드 왕국의 군주이자 지금의 캘리컷 항의 통치자 자모린은 유럽인들과 그들의 상품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인도인이나 아랍상인들이 보기엔 탐험대의 무역상품이 한심할 정도로 저품질이었고 메리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모린은 바스쿠 다 가마가 진상한 외투나 모자, 설탕을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이런 건 집어치우고 향신료를 사고 싶으면 금이나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인도는 풍부한 면화 공급에 더해 기원전부터 이어내려져온 유서깊은 방직, 염색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인도는 세계 최고의 면직물을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특히나 캘리컷은 영국과 유럽을 휩쓴 캘리코 면직물의 본고장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면직물 외에도 당시의 유럽문명은 선박과 화약무기 등을 제외하고는 중동이나 인도에 비해 기술력이 압도적이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포르투갈이 가져온 상품을 본 자모린 입장에서는 이게 무역이라기보다는 지하철에서 꼬질꼬질한 잡동사니나 껌을 파는 식의 동냥질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지역 상권을 꽉 잡고 있던 아랍 상인들이 탐험대가 보이면 고함을 칠 정도로 격렬한 증오심[6] 을 보이며 탐험대를 견제하며 방해공작을 펼쳤다. 때문에 통상교역을 하는데는 실패했고 함대는 어쩔 수 없이 소량의 상품만을 싣고 8월경에 귀국길에 올라서 1499년 9월 즈음 리스본으로 귀국했다.
귀국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도중의 고초와 괴혈병에 시달린 나머지 선원이 많이 죽었고 바스쿠 다 가마의 형도 리스본 귀환 무렵에 병사했다. 배를 몰 선원이 30여명만 남을 정도로 부족해져서 배 한척을 침몰시키고 2척만이 살아돌아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귀환 과정에서 아프리카를 거쳐 중계무역을 하면서 얻은 수확으로 출자자들이 60배가 넘는 배당을 받을 정도의 수익은 올리긴 했다.
귀환한 바스쿠 다 가마는 국왕 마누엘 1세로부터 'Don' 칭호와 함께 거국적인 환영식, 영웅 대접을 받았고 인도양의 제독이라는 지위도 하사받았다.
2.2. 포르투갈의 2차 인도 원정과 분쟁의 시작
이후 1500년의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의 2차 항해에서는 함대가 폭풍 속에서 헤매이다가 전혀 엉뚱한 장소인 브라질에 기착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잘못된 장소에 도착한 걸 알았기에 결국에는 인도에 도착하긴 했다.[7] 2차 항해에서 브라질을 발견하고 코친과 우호관계[8] 를 맺었으며 칸나노르[9] 와 무역을 트는 성과는 있었으나 교역에 가장 중요한 세력 캘리컷과는 불화만 일으키고 제대로 된 무역협정은 맺지 못했다. 거기에 항해 도중 13척 중 8척이 침몰하고 많은 선원이 사망하는 등 꽤 큰 손실을 보았다.
게다가 2차 항해의 과정에서 캘리컷에 교역소를 설립했는데, 그 교역소가 아랍상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공격당하고 포르투갈인 53명이 살해당하는 교역소 습격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사건의 시작은 아랍 상인들과 포르투갈의 마찰이었다. 인도 상권을 주도하던 아랍상인들은 포르투갈 함대를 견제하며 향신료 거래에 대한 방해공작을 펼쳤다. 시장을 통제하여 향신료 물량이 포르투갈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식이었다. 이에 2차 함대의 제독 카브랄은 캘리컷 당국에 항의하며 포르투갈에 대한 향신료 시장에서의 우선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무시당했다. 아랍 상인을 내쫒고 포르투갈에만 그런 권리를 줄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카브랄은 아랍상선을 마구 약탈하는 식으로 보복전을 펼쳤다. 여기에 빡친 아랍상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교역소를 습격하고 선원들을 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카브랄은 폭동의 배후를 캘리컷 측으로 판단했고[10] 캘리컷 항구에 무차별 포격을 퍼부어 항구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대포를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쏘아대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자연히 캘리컷과 포르투갈은 심각한 적대관계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 폭동 사건은 4차 항해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된다.
2.3. 바스쿠 다 가마의 4차 인도 원정, 피바다가 된 인도양
주앙 다 노바의 3차 항해[11] 에 이은 바스쿠 다 가마의 4차 항해[12] 는 1502년에 있었는데 포르투갈에서는 외교적으로 무역을 할 수 없다면 무력으로 해결하라는 식으로 20척의 함대를 꾸려 보냈다. 무엇보다도 불신자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한 교역소 습격사건의 복수가 목적이었다. 그래서 인도 도착 이후 이슬람군과 해전을 벌여 승리하고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게 아니고 본격적으로 약탈과 해적사업을 시작했다.
사실 무역이란 양국의 이익이 되어야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측에서는 인도인의 기호에 맞는 자원이나 고품질의 상품을 제시할 수 없었다. 향신료는 탐이 났지만 그것과 등가교환할 중국의 도자기나 비단, 일본의 은 같은 압도적인 상품이나 자원이 없었던 것이다. 현지에서 평가하기에 희귀하지도 않은데 저품질이기까지 한 상품을 장거리 운송하니 단가가 맞을 리도 없다. 때문에 설령 교역허가를 얻었다 한들 포르투갈의 저품질 상품을 팔아서는 이익을 내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1~3차에 이르는 원정에서 탐험대는 들인 공과 항해 도중의 사망, 편성된 선박이 절반 이상 침몰하는 등의 크나큰 리스크에 비해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팔 상품은 없었지만 끝내주는 배와 대포[13] 는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탐험대는 무역은 때려치고 해적질과 약탈, 항구 초토화, 학살이나 협박을 통한 강제적 평화조약으로 삥을 뜯는 일에 열중했다.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인도인들은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지옥에 떨어질 불신자들이었으므로 그들 입장에선 전혀 도덕적으로 거리낄게 없는 일이었다.
피살되는 사람들이 교역소 습격 사건과 무관하다는 점 역시 바스쿠 다 가마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의 시각에선 죄다 똑같은 죄인이자 이교도 불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이 2년 전 교역소에서 일어난 포르투갈인 사망 사건의 당사자가 아님에도 이러한 벌을 받았으므로, 문제의 불씨를 지핀 자들에게는 더 잔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이 바스쿠 다 가마의 입장이었다.
4차 원정 함대 파견 이후로 인도양은 불바다가 되었다. 포르투갈 함대는 주요 해로를 지키고 있다가 상선이 나타나면 못지나가게 막은 뒤 카르타스(Cartaz)라는 통행증을 팔아먹고 돈을 받았다. 듣도보도 못한 나라의 배가 갑자기 나타나서 통행세를 뜯는 것만 해도 괴이한 일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함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통행증이 없는 선박이나 통행증 강매를 거부하는 선박은 맘대로 습격하고 불태우는 해적질을 저질렀다. 조폭이 보호세를 뜯고 돈을 안내는 가게주인은 두들겨 패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위라고 볼 수 있겠다.
함대는 오노르 항구 초토화, 이슬람 순례선 미리(Miri)호 승객 학살과 선박 방화로 전소시킴, 이교도는 팔다리를 잘라 돛대에 매달고 사격 연습, 틈만 나면 포로들을 배의 돛대나 기둥에 매달아 죽이고 현지인들에게 공포 분위기 조성, 통치자들에게 시체를 보내며 협박... 같은 패악질을 저질렀고 함대가 가는 곳마다 피바람이 몰아쳤으며 인도인들과의 갈등은 심화되어갔다. 포르투갈인이 보일 때마다 사람들이 "포르투갈! 포르투갈!"하며 증오에 찬 노성을 지르고 침을 뱉을 지경이었다.
2.4. 미리 호 학살 사건
바스쿠 다 가마의 악행, 수많은 살인과 약탈 중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것이 미리 학살 사건이다. 보통 대항해시대 당시의 도덕관과 현대의 도덕관은 차이가 나기 마련인데 당대에도 끔찍하고 사악하다고 지탄받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 함대는 메카를 왕복하는 순례선 미리 호를 나포했다. 미리 호는 Jauhar Al Faquih 같은 아랍 세계에서 손에 꼽는 부호들과 부유한 승객들이 가득 탄 배였다. 승객들은 몸값 협상을 제시했다. 배 여러 척에 향신료를 가득 채워 주겠다, 캘리컷 통치자 자모린과의 관계에 기름칠을 해주겠다 같은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5일 동안 진행된 교섭은 결국 무산되었다.
불신자들을 때려죽일 생각으로 가득했던 바스쿠 다 가마는 모든 제의를 묵살하고 그냥 배의 화물을 모조리 털어 버렸다. 그리고는 승객들을 무장해제시킨 뒤 배에다 불을 왕창 지르고 런을 해 버린다. 함대와 동행했던 서기 Thome Lopes의 기록에 따르면 바스쿠 다 가마는 승객들이 허둥지둥하며 배 안에서 타죽는 모습을 멀리서 느긋하게 감상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칠 듯이 사악하고 악의적인 의도였다. 그러나 승객들은 가까스로 화재를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승객들에게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광경이 몹시도 꼬왔던 바스쿠 다 가마가 다시 배를 나포해 버린 것이다.
승객들, 그리고 여인들은 아이를 내밀고 품에 있던 보석들까지 모두 바치며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바스쿠 다 가마는 이런 호소를 완전히 무시했다. 바스쿠 다 가마는 해병대를 승선시켜 배에 불을 또 질렀다. 그리고는 배가 반쯤 불에 탈 때까지 해병대를 퇴선시키지 않고 포위망을 유지하기까지 했다. 즉 이번만큼은 실패 없이 승객들이 타죽을 때까지 불을 지르려 한 것이다. 결국 미리 호의 승객들 거의 전원이 학살당했다. 죽기 살기로 선원들에게 맨손, 도끼로 덤벼든 승객들은 끔찍하게 살해당했고 싸울 능력이 없었던 사람들은 불에 타 죽었다.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승객들에게는 더 끔찍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스쿠 다 가마가 롱보트에 선원들을 태워 바다로 내보내고는, 허우적거리는 승객들을 창으로 확실하게 찔러 죽이게 한 것이다. 확인 사살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유아들, 즉 부모와 떨어트려놓아 세계관을 기독교 버전으로 리셋시킬 수 있는 갓난아이들 뿐이었다. 물론 아이를 내밀며 살려달라고 빈 어머니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친부모를 도륙한 것이다. 학살이 끝난 뒤 총 사망자는 300여명이었다. 배 한척에 탄 승객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학살당한 것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입장은 이게 다 1500년의 교역소 습격 사건의 복수라는 것이었다.
2.5. 캘리컷을 불지옥으로 만들다
이렇게 인도양 초입부터 학살을 시원하게 한바탕 저지른 바스쿠 다 가마 함대는 마침내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인근의 어선들을 때려잡으며 소요를 일으킨 바스쿠 다 가마는 통치자 자모린에게 교역소 습격 사건에 대한 사과, 정당한 보상, 이슬람 상인 추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모린의 입장에서 이는 말도 안되는 요구였고 당연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습격사건은 포르투갈과 아랍 상인과의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고 캘리컷 측은 이미 포르투갈의 2차 함대에 습격사건의 복수를 명목으로 미친듯이 포격을 얻어맞고 항구가 초토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3차 함대를 이끈 주앙 다 노바 역시 어김없이 자모린과 불화를 일으키고 인도 함선들을 한바탕 약탈한 바가 있었다. 이미 죽은 50명의 10배는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털린 재산도 엄청났다. 거기다 바스쿠 다 가마는 자모린의 어민들을 인질로 잡아 어그로를 더욱 더 끌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요구에 굴복하면 지배자로서의 자모린의 권위는 개판이 되어 버린다. 자모린은 일단 어민들부터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포르투갈 함대는 정박해 있던 20여척의 아랍 함선들을 나포하고 선원들을 싹 쓸어버렸다. 그리고는 함선마다 포로들을 돛대에 수십명씩 매달아 죽이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더니 또다시 캘리컷에 무차별 포격을 퍼부어 항구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캘리컷은 화포의 성능이 딸려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포르투갈 측은 기고만장해져서 경악할 만한 패륜행위를 저지르는데, 이것이 바로 전설적인 카레라이스 사건이다. 유럽인 탐험가들이 저지른 패륜과 살육 중에서도 잔혹하기로 손꼽히는 행적이다.
바스쿠 다 가마는 캘리컷을 불바다로 만들기 전 20여척의 아랍 상선들을 나포하면서 800명의 무슬림을 포로로 잡았다. 바스쿠 다 가마는 이 포로들의 팔, 다리, 귀와 코를 잘라낸다. 아마도 교역소에서 죽은 53명의 포르투갈인에 대한 복수로 보인다. 기독교인을 죽인 불신자들에 대한 응징인 것. 여기까지만 해도 참혹한 일인데 바스쿠 다 가마는 이렇게 잘라낸 팔, 다리, 귀, 코를 차곡차곡 보트에 싣고는 협박성의 서신을 브라만인 사절과 함께 자모린에게 보냈다.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걸로 카레라이스 해먹어라''''
인육으로 카레를 해드시라는, 그야말로 경악할만한 패드립이었다. 이후로도 바스쿠 다 가마는 이틀 내내 400발의 포격을 퍼부었다. 대포와 소포를 가리지 않고 쏴대어 캘리컷 시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캘리컷을 박살낸 후 몇몇 선장들은 이쯤 되면 상륙해서 약탈도 한뚝배기 해먹자고 해적스러운 제안을 한다. 하지만 바스쿠 다 가마는 불바다 깽판을 쳐놓고서도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고(???)[14] 약탈은 접어둔 후 일단 캘리컷을 6척의 함선으로 봉쇄해놓고 떠나기로 한다.
미리 호 학살과 캘리컷 불바다 만행 이후로 인도의 말라바르 해역 전역이 공포에 떨었다. 인근 항구의 상선들은 모두 숨었고 모든 무역행위가 동결되다시피 했다. 겁을 집어먹은 코친이나 칸나노르, 콜람, 코둔갈루 같은 인도 세력들은 포르투갈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기를 희망했고 교역조건을 재협상하거나 배에 향신료를 가득 채워주는 식으로 포르투갈에 굴종했다.
2.6. 4차 원정의 종결과 그 후의 전개
하지만 자모린은 평화조약을 미끼로 바스쿠 다 가마를 유인하는 등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매복공격에 이은 항구에서의 치열한 공방전 결과 바스쿠 다 가마가 탈출하면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바스쿠 다 가마는 사로잡은 브라만 3명을 또 협박성으로 돛대에 높이 매달았고, 자모린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는 서신과 시체를 뗏목에 실어 내려보냈다.
포르투갈에 대해 원한이 사무쳤던 자모린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휘하 제독에게 함대를 끌어모으라고 지시한다. 아랍 용병 등 끌어모을 수 있는 배는 다 끌어모은 결과 아랍 대형선 20여척, 삼부크 수십척과 소형 갤리선 수백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급조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바스쿠 다 가마는 매복에서의 탈출 이후로 아무나 걸리는 대로 한번 박살낸다는 식으로 벼르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함대는 캘리컷 해전에서 포르투갈 카락선 16척에 개박살이 나고 만다. 그만큼 서유럽의 선박, 화포기술과 인도양의 테크 간의 격차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원정의 목표였던 캘리컷과 자모린을 불평등조약으로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함대는 칸나노르와 코친에 거점을 마련해둔 것과 어마어마한 향신료를 털어온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4차 원정 함대는 1503년 7월에 리스본으로 복귀했다. 귀환한 함대는 후추 1700톤, 계피와 말린 정향, 메이스, 육두구 400톤이라는 엄청난 분량의 향신료를 실어 왔고 떼돈을 벌었다. 물론 이게 포르투갈이 가져온 상품을 정당하게 판매하고 교환해서 얻은 성과는 절대 아니며 포격과 협박, 나포, 약탈로 삥뜯어온 결과물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가 후평하기에는 우호세력 코친과 칸나노르에 마련해놓은 거점은 자모린의 위협에 매우 취약한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이후 자모린은 수만의 군대를 동원해 코친을 공격하며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려는 시도[15] 를 했으니 매우 정확한 지적이었다. 따라서 바스쿠 다 가마는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파견할 것과 강력한 함대가 주둔해서 순찰함으로서 영구적인 지배를 해야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함으로서 항해를 마무리 지었다.
이후, 포르투갈 함대와 후임 제독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는 바스쿠 다 가마의 조언대로 코친과 칸나노르 같은 인도의 요지에 요새를 건설해 알을 박고 지속적으로 인도 세력들과 불화를 일으키며 삥을 뜯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포르투갈인의 교회나 상관이 생기면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마찰이 생기게 된다. 바스쿠 다 가마를 비롯한 포르투갈 탐험가, 선원이나 선교사들은 현지의 풍습에 대한 이해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오로지 미개한 불신자 취급이었기 때문이다.[16] 이런 태도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 포르투갈인이 살해당하거나 건물이 파괴되면 이를 명분삼아 불바다를 만드는 게 포르투갈의 방식이었다.
무엇보다도 포르투갈이 자의적으로 발행한 통행증인 카르타스 미소지 선박에 대한 해적질이 인도인들의 크나큰 원한을 샀다. 상인들은 자모린 같은 통치자들에게 호소했고 그렇잖아도 포르투갈에 쌓인 감정이 증오 수준이었던 자모린은 주기적으로 포르투갈에 복수전을 펼쳤다.
이렇게 포르투갈은 인도 세력들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며[17] 공성전과 해전을 벌였다. 물론 포르투갈이 대체로 크게 승리했다. 특히 자모린이 영혼까지 군사를 끌어모은 결과물인, 인도와 아랍, 오스만의 연합 함대 200척이 대파당한 1506년의 칸나노르 해전과 1507년의 칸나노르 공성전[18] 이 결정적이었다.
2.7. 이후의 행적과 결과
피로 얼룩졌던 인도 원정 이후 바스쿠 다 가마는 20여년간 조용히 묻혀 지냈다. 왕실에 잘 보이려는 시도는 대부분 무산되었고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 같은 다른 제독들이 중용되었다.
그러다 1519년에 바스쿠 다 가마는 백작지위에 오르게 된다. 브라간사 공작과 협의하에 비디게이라라는 포르투갈 동남부의 마을을 봉지로 받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 왕실 일원이 아니고서는 백작 자리에 오른 사례가 없는데 바스쿠 다 가마가 항해로 얻은 공적으로 최초로 백작 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 후 1521년이 되자 시운이 잘 풀려 바스쿠 다 가마가 다시 중용받게 된다. 15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떠난 목적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에 독점당한 인도, 아시아 방면에 스페인도 숟가락을 얹기 위한 것이었다. 포르투갈이 점유한 동쪽 항로 대신 인도로 향하는 서쪽 항로를 발견하고자 한 것. 포르투갈은 여기에 큰 위협을 느꼈고 마젤란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바스쿠 다 가마는 이러다 인도 밥그릇 다 뺏기게 생겼다고 위기론을 주장한 바가 있었다.
마누엘 1세 재위 후반기 시절에는 바스쿠 다 가마의 주장이 빛을 못 보았고 백작 작위를 받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마누엘 1세가 승하하고 주앙 3세가 즉위하면서 포르투갈이 다시 인도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러면서 전설적인 성과를 낸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정책 고문으로 등용되는 등 다시 중용을 받게 된 것이다.
마침 당시의 인도 총독이었던 두아르테 드 메네제스가 무능력하다는 지적과 부패 혐의로 논란이 많았기도 했다. 결국 바스쿠 다 가마는 1524년 부왕 자격을 가지고 인도 총독에 부임하게 되었고 본인의 3차 인도 항해를 하였다. 인도 도착 후 전임 총독을 체포했고 부패를 일신하려 했으나 도중에 말라리아에 걸려서 코친에서 사망했다. 그 후 바스쿠 다 가마는 코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매장되었다.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함으로서 베네치아인의 유럽내 향신료 무역 독점이 깨지게 되었다. 포르투갈 왕의 허풍[19] 등으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엄청 큰 사건으로 여겨졌지만, 포르투갈 제국이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밀수가 횡행했고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 향신료 무역은 1550년경이면 다시 활발해졌다. 이 무역이 시들해진 건 후추보다 더 값이 나가는 육두구와 정향 산지를 유럽인들이 알아내 차지한 이후이고, 특히 네덜란드인들이 동인도 향신료 산지를 점령하고 나서부터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1차 항해의 여정은 동행한 기록원에 의해 '바스쿠 다가마의 첫 인도 여행기'라는 기록물로 남은 바가 있다. 4차 항해에 동행했던 서기 Thomé Lopes의 기록 역시 미리호 학살 같은 흑역사도 남김없이 서술하는 생생하고 치밀한 문장으로 인해 역사가들에게 즐겨 인용되었다.
3. 그의 기함
그가 직접 인도에 타고 갔다고 하는 기함, 성 가브리엘. 여러 삽화가 있지만 대형 카락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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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중 매체
인도 발견 후 토착인들은 플레이어에게 적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복할 수 없는 인도의 항구들을 정복하고 다니는 것이 실시간으로 플레이어에게 알려진다. 스페인 유저는 조약 이후 인도에 기항할 수 없는 항구가 많아진다.
포르투갈 이벤트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후추 무역을 위해 캘리컷으로 갔다가 디에고 살미엔트의 계획에 뜻하지 않게 휘말리는 역. 계획 자체에 대해 눈치채지는 못하고 국가의 사정에 따라야 한다는 충직한 인물로 나온다. 게임의 특성상 외모도 젊은 청년으로 미화되어 있다.
2nd Age 확장팩 그리폰의 날개에서 중급 가나돌로 등장한다. 등장분기는 14세기 4/5, 5/5분기.
주인공 일행이 포르투갈 왕궁의 의뢰로 전설의 새에 대해 마다가스카르에서 찾았지만 찾지 못했는데, 유럽에서 그 정보를 조사하다가 에스파냐 왕궁으로부터 정보를 얻으면서 마다가스카르로 가기 전에 포르투갈 왕궁에 보고하러 오면서 가마와 만나게 된다. 주인공 일행에 대해 반가워하면서 대화하고 포르투갈이 마다가스카르에 거점을 두기 위한 임무의 책임자라고 하며, 현지 부족의 반대나 열강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주인공 일행과 대화를 마치자 모잠비크로 가기로 하면서 헤어졌다가 주인공 일행이 도시인 캄포를 발견해 거점으로 삼으라고 하자 주인공 일행에게 캄포를 발전시킬 것을 부탁한다. 자신은 인도 항로를 항해하는 동안에 여러 부족들이랑 싸워서 비우호적인 자들이 자신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발전시켜달라고 하며, 그 대신 주인공 일행이 포르투갈의 의뢰로 하고 있는 로크새에 대한 정보를 찾아오는 것을 칼디나와 함께 하기로 한다.
주인공 일행이 도시를 발전시키는 사이에 로크새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가 돌아왔다가 아프리카 연안을 통해 다시 인도에 가기로 하며, 이번에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잘 지내기로 하면서 주인공 일행들에게는 올바른 길을 걸었으면 한다면서 떠난다. 주인공 일행이 아프리카 동해안에 진입해 해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치안 유지를 싸우는데, 가마는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근처 도시들을 동맹항으로 만들려고 분주하다가 해적과 싸우게 되지만 주인공 일행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해적을 토벌하고 주인공 일행에게 아프리카 동해안의 해적들을 토벌하는 것을 부탁하는 대신 프레스터 존 왕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항해사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는 것을 돕기로 한다. 주인공 일행이 해적 8함대를 토벌하자 조사한 결과를 알려주고 동쪽에서 온 이방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인도의 동쪽인 비단의 나라에서 왔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며, 몸바사 북동쪽 거점에 조사하기를 권하면서 자신은 포르투갈 왕궁의 소환 명령 때문에 뒷일은 칼디나에게 맡기겠다면서 무슨 일 있으면 칼디나를 찾아가고 칼디나는 소팔라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떠난다.
이후 주인공 일행이 포르투갈 왕실의 부름을 받아 인도로 가서 가마에게 협력해 포르투갈의 영광에 기여하라고 했는데, 포르투갈 왕실의 집무관이 말로는 인도로 가라고 했지만 왕실의 명에 대해 일부러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주인공 일행이 소코트라에서 도착하자 가마는 포르투갈 왕실의 명이 적힌 글을 보고 주인공 일행에게 해적 10함대를 토벌해 치안 회복을 하라고 시킨다.
'인도의 수호여신' 퀘스트에서는 의외로 개그 기믹을 보여준다. 막 자신을 찾아온 후배 페드로, 통역사 사루만과 함께 전투가 익숙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20] 해적토벌작전을 전부 인도 여성 아이슈와리아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며, 플레이어 일행이 그녀와 함께 토벌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3명이서 술을 마시며 탱자 탱자 노는 꼴을 보여주자 이에 뚜껑이 열린 아이슈와리아가 칼을 들고 쫓아다니고 이에 정신없이 도망치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중에 포르투갈 왕실의 지시를 받은 플레이어 일행이 그의 안부를 확인하러 방문했을 때도 핑계를 대고 사루만과 함께 해전 훈련에서 빠져나가 외유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나중에 프랑스 서해안 600pt 때 개방되는 진정해도 퀘스트에서도 여전히 전투는 아이슈와리아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고, 니나는 포르투갈의 영웅이란 인간이 사람의 약점을 악용하는 쥬피톨 같은 나쁜 사람 같다며 디스한다. 진정해도 퀘스트 성녀와 해적에서는 아이슈와리란 여전사가 지시가 정확하고 빠르고 구심력이 높아 가마 제독이 할 일을 다한다며 가마가 있을 자리가 없다며 주인공 일행에게 무능한 리더로 디스당하는 등 개그기믹이 강해지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자신의 함대가 몇 척이나 되고 어디서 전개하는지 제대로 파악도 안 하며 산다고 하는 걸 보면 전투에는 확실히 무능한 것 같다.
'세계 일주' 진정해도 퀘스트 끝무렵에서는 쥬피톨이 평형세계의 바스코 다 가마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흉악한 인간이라고 한다. UR 바스코가 등장할지는 모르지만, 만약 나온다면, 교역 능력보다는 전투 능력이 강화된 평형세계의 바스코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1] 사실 바스쿠 다 가마 뿐만 아니라 휘하 함대원 및 포르투갈인 탐험가들 대부분이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지옥에 떨어질 이교도 불신자들에게는 뭔 짓을 해도 된다는 심리를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2] 통념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이 직접적인 무역 방해를 하진 않았으나 통행료는 올렸는데 이는 그대로 유럽에 전가되었다.[3] 카스티야어와 제노바 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4]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는 기독교도와 향신료를 찾아 여기까지 왔소."였다고 한다.[5] 튀니지는 이탈리아 건너의 지중해 국가이다. 당시 아랍상인들의 활동영역이 넓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참고로 당대의 아랍 상인들은 굳이 아프리카를 빙 둘러 희망봉을 지나지 않고도 육로를 통해 북아프리카→중근동→페르시아→인도로 직접 올 수 있었다.(애초에 육로를 사용해야 하지만 이 쪽이 훨씬 가깝다.) 이 때문에 인도로 갈 수 없던 유럽 상인들과는 달리 지중해 근처에서 활동하던(카스티야어와 이탈리어어도 할 수 있던) 튀니지 상인이 인도까지 직접 갈 수 있었던 것이다.[6] 포르투갈인들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살인과 약탈 등등 사악한 깽판을 친 전과가 있었고 북아프리카인이나 아랍인들과도 이미 마찰이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7] 그러나 브라질에서 인도로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서 4척의 함선을 잃었는데 이때 희망봉에 최초로 도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사망한다.[8] 코친의 군주가 캘리컷의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로 포르투갈의 무력에 압도당한 코친의 라자는 꼭두각시가 되었으며 코친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9] 마찬가지로 칸나노르는 캘리컷과 경쟁관계였다. 덕택에 포르투갈은 칸나노르 향신료 시장에 대한 진입을 허가받고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칸나노르는 캘리컷의 지배자 자모린의 회유에 설득되어 포르투갈을 몰아내기 위해 캘리컷과 공동으로 포르투갈을 공격하게 된다.[10] 습격사건의 생존자들이 자모린의 경비원이 폭도들을 현장에서 도운 것 같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11] 주앙 다노바는 1501년에 칸나노르 교역소를 설치하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1502년 9월에 귀환[12] 바스쿠 다 가마의 2차 인도 항해. 3차 함대가 귀환하기 전에 출발하였다.[13] 서유럽의 카락과 컬버린은 당대 최고수준의 기술력이었다.[14] 자모린이 포르투갈의 무위에 겁을 집어먹고 쫄았을테니 우리가 시키는 대로 다 퍼주는 불평등조약에 사인하겠지? 식의 판단으로 추론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계산은 빗나가는데 자모린은 끈질겼고 포르투갈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15] 포르투갈이 일시적으로 퇴각할 정도로 심각한 위협이었으나 5차 함대가 도달해 불쇼를 벌이면서 위기는 해소된다.[16] 대표적 예로 바스쿠 다 가마 함대의 선장 한 명은 무슬림을 붙잡아서 채찍으로 신나게 후려패다가 포로가 실신하자 입에 돼지고기 조각을 쑤셔박아 능욕한 바가 있었다.[17] 깽판이 심각했던 나머지 인도 뿐만 아니라 오스만, 맘루크까지 개입할 정도였다.[18] 칸나노르와 캘리컷이 연합하여 포르투갈이 칸나노르에 건설한 안젤로 요새를 포위공격한 사건. 최초에 칸나노르는 캘리컷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포르투갈에 우호적이었고 교역도 허가했다. 그러나 통치자의 사망으로 칸나노르 왕국을 지배하던 콜라티리 왕조의 승계 문제가 일어났는데 이때 자모린이 개입하여 통치자 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쉽게 말해 자기편을 왕으로 꽂아준 것이다. 자모린 덕분에 자리에 오른 새 통치자는 자모린에게 보답할 수 밖에 없었고 포르투갈 공격에 동의하게 되었다.[19] 스스로를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의 정복, 항해, 그리고 교역의 왕(King of conquest, navigation, and commerce of Ethiopia, Arabia, Persia, and India)'으로 칭했다.(…) (<대항해시대>, 주경철 저, 22쪽)[20] 일단, 전투, 탐험, 교역능력 중에 전투가 제일 낮고 교역능력이 제일 높아서전투에는 별로긴 하다. 하지만, 고유능력이 전투용 능력인 회복의 함성이라 전투능력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스킬 진화를 하면 '교역 왕'이라는 이름의 교역스킬로 변하는지라 전투능력은 기본적으로 낮은 것 같다. 본인 스스로도 세계 일주 퀘스트에서 자신의 실력으로는 드레이크에게 이기지 못한다고 공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