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병원선)
- 만약 국가 아르메니아를 찾아왔다면 이쪽으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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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이전의 아르메니아.
소련의 병원선. 독소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1년 11월 7일, 독일군 폭격기에 의해 공격당해 무려 5,00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내고 격침당했다. 이름의 유래는 국가(당시에는 지역)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2. 상세
2.1. 전쟁 전
아르메니아는 1928년, 레닌그라드에서 건조되었으며, 독소전쟁 발발 전까지는 화객선이었다. 일반적인 임무는 주로 세바스토폴이나 오데사 등의 흑해 항구를 오가면서 승객과 화물을 실어나르는 일이었다. 승객 수용원은 상당히 많았는데, 근거리 항해 시에는 최대 4500명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매함 3척이 있었다.
2.2. 독소전쟁 발발 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르메니아는 소련 해군에 병원선으로 징집되었다. 이후 전쟁 기간동안 각종 부상병들과 민간인들을 실어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이런 부분을 놓고 보면 나치 독일의 여객선이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와도 행적이 꽤나 비슷하다.
2.3. 침몰
이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제 11군이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자,[3] 세바스토폴에 있던 아르메니아 역시 1941년 11월 6일 밤, 수많은 피난민과 상이군인들을 싣고 피난 준비를 하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상당한 과적을 해 버렸는데, 근거리 항해 시, 그러니까 연료를 조금만 채울 때도 4500명이 한계였던 배에 무려 5000명이 넘는 인원을 태운 것이다.[4][5]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막장이었는데, 문제는 독소전쟁 초기, 그것도 흑해에서는 제공권이 완전히 독일과 추축국 공군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중무장한 군함도 아닌 일개 여객선이, 그것도 대낮에 항구를 나서면 매우 높은 확률로 공격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호는 군함 몇 척과[6] 전투기 2기의 호위를 받으며 1941년 11월 7일[7] 새벽 세바스토폴 항구를 나선다. 참고로, 원래 아르메니아의 선장은 최대한 공격을 피하고자 밤에 출항할 계획이있으나, 상부에서 호위 전력을 기다리라는 말에 다음 날 새벽까지 항구에 발이 묶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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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41년 11월 7일 아침 11시 30분 경, 불행하게도 아르메니아 호는 그곳을 지나던 He 111 폭격기 한 기를 만났다. 당시 He 111은 탑재하고 있던 두 개의 어뢰를 아르메니아를 향해 투하했고, 다행히 한 발은 빗나갔으나 나머지 한 발이 아르메니아 호에 그대로 직격하고 말았다. 어뢰에 직격한 아르메니아 호는 순식간에 두동강 났고 고작 4분만에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4분만에 바닷속으로 수장되어 버렸고, '''생존자는 고작 8명이었다.'''
아르메니아 호의 침몰로 인해 무려 '''5,000여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 이 사망자 수는 1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6,500-7,000명의 사망자를 낸 고야 호[8] 에 이어 전세계 민간 해양사고 사망자 순위 3위에 올라 있다. 이는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때보다도 약 4배~5배나 다 많은 사망자 숫자이다.'''
또한 전술한 아르메니아의 자매함 3척 역시 모조리 독소전쟁 도중 격침당했다.
3. 전쟁 범죄
이 당시 독일이 저질렀던 병원선 공격 행위는 제네바 협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명백한 전쟁 범죄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도 있는데, 실제로 격침당시 아르메니아는 적십자 표시도 새겨 넣었고, 무기를 수송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이전에 병력을 수송했던 전력이 있었고, 도한 침몰 당시 다른 군함에게 호위를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병원선이 일반 수송선 격침 사건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9]
4. 번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와의 공통점
어디까지나 번외이지만,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망자를 내고 침몰한 배인 빌헬름 구스틀로프와의 공통점이 꽤나 있다. 그리고 브리타닉호와도 공통점이 존재한다.
- 둘 다 병원선으로 사용되었다.
- 둘 다 전쟁 전에는 일반적인 여객선으로 사용되었다.
- 두 배 모두 탈출 작전에 동원되었다가 격침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동프로이센 민간인 구출작전에, 아르메니아는 세바스토폴에서 피난민들을 실어나르는 도중 변을 당했다.
- 두 배 모두 어뢰에 의해 격침당함.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잠수함에 의해, 아르메니아는 뇌격기에 의해 격침당했다.
- 모두 국가가 절체절명적인 상황에서 격침당했기 때문에 자세한 승선 정보가 없다.
- 두 배 모두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해안선을 따라 항해했더라면, 또는 기뢰부설함 한 척의 지원을 위해 켜 놓은 항해등을 꺼 놨더라면 격침을 피할 수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역시 빈약한 호위 전력을 기다리는 대신 전날 밤에 출발했더라면 참사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두 배 모두 격침당하면서 어마어마한 사망자를 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최대 1만 명으로 세계 1위, 아르메니아 호는 5,000-7,000명으로 세계 3위이다.
[1] 대략 얄타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2] 후술하겠지만, 워낙 당시 상황이 엉망이었던지라 제대로 된 승선자 자료조차 없다.[3] 당시 세바스토폴 주민들은 세바스토폴이 금방 함락될 것으로 예상하고 너도나도 피난길에 올랐다. 정작 세바스토폴은 그 후 9개월이나 더 포위를 버텨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것이다.[4] 자세한 승선인원은 아직까지도 불명이다. 전쟁통에 승선 관리 시스템은 개판이었고 워낙 많은 피난민들이 죽기살기로 승선했기 때문.[5] 게다가 승선자 5000명도 가장 적게 잡은 거고, 자료에 따라서는 6000명, 많으면 7000명까지 보기도 한다.[6] 말이 군함이지, 사실상 소형 보트에 무장을 얹은 것에 가까웠다.[7] 하필 러시아 혁명 24주년 기념일이었다.[8] 노르웨이의 민간선이었다가 나치 독일에게 징집되어 사용되었다. 1945년 한니발 작전 도중 소련 해군 잠수함 L-3에 의해 발트해에서 격침당했다.[9] 또한 일부 사람들은 아르메니아 호가 침몰당시 대공 무장을 탑재하였다는 것까지 근거로 세워 아르메니아 호를 무장상선으로 몰아가지만, 병원선에 대공포같은 간단한 자위용 무장을 설치하는 것은 국제법상 허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