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Sinking of the RMS Titanic
'''발생 날짜'''
1912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
~ 4월 15일 오전 2시 20분
사고일로부터 '''41167일'''
'''발생 위치'''
북대서양
'''선종'''
여객선
'''유형'''
운항 중 침몰
'''좌표'''
41° 43′ 55″ N, 49° 56′ 45″ W
<colcolor=#000> '''탑승인원'''
2,224명
'''사망자'''
'''1,514명'''
'''구조자'''
710명
2. 침몰
2.1. 빙산과의 충돌
2.1.1. 빙산 회피방법에 대한 가설들과 반론
2.2. 구조 요청
2.3. 초기 탈출
2.4. 혼란 가중
2.5. 최후의 순간
2.5.1. 두 동강설
2.6. 침몰 직후
3. 카파시아호의 구조
4. 시신 수습과 장례
5. 피해자들
6. 종합
7. 사고의 영향
8. 영웅들과 저명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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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항



여객선 RMS 타이타닉은 1912년 4월 10일 영국사우샘프턴에서 출항프랑스셸부르아일랜드퀸즈타운에 기항한 후 미국 뉴욕을 향해 출항했다.

2. 침몰



첫 빙산충돌로부터 침몰까지 타이타닉 침몰 사건을 자세하게 재현한 영상. 업로더의 설명에 따르면 편집이나 슬로우모션과 같은 시간 왜곡없이 완전한 실시간(real time)으로 제작되었으며 언리얼 엔진 4가 활용되었다고 한다.[1]

2012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타이타닉호 침몰사고 100주기를 맞아 재현한 CGI. 해설은 영화감독 제임스 카메론이다. 그 당시 연구성과였던 이중저의 분리 타이밍과 배 뒷부분의 낙하경로를 자세하게 표현했다.

2.1. 빙산과의 충돌



영화 타이타닉에서 표현된 충돌 당시 상황
운명의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레지놀드 리와 함께 견시를 보던 갑판 선원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m에 높이 20m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2] 출항할 때 쌍안경을 사용할 수 없었고 빙산의 10분의 9는 숨어있었기 때문에 빙산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3]
[image]
플리트가 빙산을 발견하고 종을 몇번 울린 후 급히 선교에 전화로 보고했고 당직 항해사인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가 조타실에서 그것을 받고 선임 당직자인 1등 항해사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에게 보고했다. 보고와 비슷하게 빙산을 확인한 그는 바로 좌현전타[4][5][6]를 명령하고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EOT)[7]를 전속 후진(Full Astern)[8][9]으로 돌려 기관실에 지시한 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의 방수격벽이 닫힐 것임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지시에 따라 왼쪽으로 키를 최대한 돌렸으며 기관실에서도 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배의 회전반경이 너무 크고 빙산과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충분한 회전과 감속을 하지 못했다.[10] 결국 우현은 빙산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접근하여 정통으로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우현측면이 빙산과 충돌하였다.
충돌 직후 머독은 우현전타[11]를 지시하여 빙산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12], 방수격벽 폐쇄 스위치를 작동시켰다. 폐쇄될 격실에 있던 화부 등 선원들은 전원 대피했는데, 영화상으론 굉장히 다급해 보이지만 격벽 닫히는 속도가 느렸고, 격벽이 닫혀도 수동으로 다시 열 수 있는데다, 불편하지만 벽에 박혀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열 수 있는 해치도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빙산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아 타이타닉은 멈춰섰다. 아래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위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으나 잠에서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은 흔들림을 느끼고 깨어났다. 선장실에서 쉬고 있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 역시 흔들림을 느끼고 곧바로 조타실로 향했다.
스미스 선장은 머독으로부터 빙산발견과 회피 시도, 그리고 방수격벽 차단여부를 간단하게 보고받았다. 그리고 좌현 윙브릿지에서 육안으로 빙산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4등 항해사 조지프 박스홀에게 피해상황을 점검할 것을 지시했다. 처음 조사에서 박스홀은 별다른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대로 선장에게 보고했다. 11시 47분경, 다시 조타실로 돌아온 스미스 선장 일행은 충돌에 따른 선체 피로를 고려해 텔레그래프를 미속 전진(Slow Ahead)[13]으로 설정했다. 타이타닉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뒤 타이타닉의 보수담당 존 홀 허친슨이 배의 누수현상이 심각하다고 조타실로 긴급하게 보고했다.[14]
스미스 선장은 즉시 타이타닉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와 직접 피해상황을 점검했다. 영화 타이타닉의 연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빙하와 부딪히며 선저에 길고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고 믿지만 만일 그정도의 파공이 생긴다면 수만톤 규모의 배는 순식간에 해수가 유입되어 즉시 기울어버린다. 해저탐사로 밝혀진 실제 파공의 크기는 모두 합해 1.1제곱미터정도로, 그 거대한 배를 침몰시킨 손상치고는 경미했다. 그러나 문제는 파공의 위치. 6개의 파공들이 총 5구획에 걸쳐 흩어져 나는 바람에 배의 침몰은 확실해져버렸다. 타이타닉은 2구획(선수부터는 4구획)까지 물이 들어오면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으나 선수부터 5구획 이상에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타이타닉의 격벽은 위의 E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침수구획이 5구획이 넘어버리면 선체가 부력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지며 잠기는 와중에 해수는 격벽을 넘어 차례차례로 다른 구획까지 흘러 들어가 침몰해버리게 된다.# 앤드루스는 이미 5구획에 걸쳐 누수가 진행되고 있음을 파악했고 이대로라면 타이타닉의 침몰까지 많아야 최대 2시간밖에 남지 않았음을 예고했다.[15] 펌프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누수 속도에 비하면 침몰을 고작 몇분 더 연기할 뿐이었다. 스미스 선장은 다시 조타실로 돌아가 박스홀에게 긴급타전이 적힌 쪽지를 건내주고는 즉시 구조요청을 보낼것을 지시하고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를 정지(Stop)로 맞췄다. 오후 11시 59분, 결국 타이타닉은 완전히 멈춰섰다.
당시 대부분의 승객들과 선원들은 빙산 충돌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게 여겼는데 갑판에 흩어진 얼음조각을 가지고 3등실 승객들은 축구를 하고, 1등실 승객들은 위스키에 쓸 기념품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참고로 미국의 민간 기상학자인 밀라 진코바는 사고 당시 태양 표면의 폭발 활동 때문에 발생한 지자기폭풍이 침몰에 일조했다며 연구결과를 공개했다.[16] 타이타닉 침몰 당시 구명정과 인근 구조선박에서 오로라를 관측했는데 이런 오로라를 만들어낸 강력한 지자기폭풍이 타이타닉호의 항해 시스템에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나침반과 무선통신에 장애를 일으켜 항로이탈과 구조지연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다만, 나침반 오류로 정상항로를 다소 이탈했다고 해도 침몰위치와 항적을 볼 땐 경로를 크게 이탈해 유빙 지역인 극북해로 갔다고 보긴 어렵고 오히려 당시 기상상황으로 유빙이 남하한 것이 더 유의미한 원인이었다. 무선통신 또한 일부 장애를 일으킨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당시 가장 가까운 위치이던 캘리포니안호는 1인 근무하던 무선사가 수신기를 끄고 취침해있었고, 그 외 그나마 가까운 카파시아호는 최고출력으로 왔음에도 4시간 가까이 걸렸으므로 의미가 없다.[17]

2.1.1. 빙산 회피방법에 대한 가설들과 반론


침몰에 이를 정도의 손상을 받은 원인으로 "정면이 아닌 측면에 빙산이 충돌해 피해가 가중되었다"는 설도 있다. 만약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정면으로 충돌했다면 침수된 방수 구획은 선수 일부의 좁은 범위(타이타닉호의 방수 한계범위 내)에 머무르는 것으로 끝나 침몰을 면할 가능성도 있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충돌을 회피하려고 키를 돌려 어중간하게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 피해를 가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면 충돌시 침몰하지 않았을 것이란 가설은 결과론적인 얘기다. 현대에 시뮬레이터로 결과를 보고 판단하는 것과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당대 최대 선박인 4만 6천톤의 타이타닉이 23노트 전속력으로 항해 중 빙산과 정면 충돌해도 침몰은 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목재로 된 범선이 혼용되던 당시 항해술은 회피만을 전제했으며, 현대에도 고의 충돌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고려되고 회피를 우선한다. 충돌 당시 1등 항해사 머독의 지시(좌현전타/전속후진)는 회피를 시도하되 여의치 않으면 최대한 스치듯이 가볍게 부딪혀 파손을 최소화하려던 의도로 보이며 당시 상황에선 최선이였다.
[image]
그리고 타이타닉호 선체에 사용된 강철판은 물론 그때 기준으로는 가장 최고급이었지만, 당대의 제강 기술 수준은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낮았고 이 근본적 한계로 인해 강철에 불순물인 황과 인이 많이 섞여있었다. 많은 인 성분은 균열을 만들고 황은 이러한 균열을 더 확산시키고 낮은 망간 비율은 강철의 탄력성을 낮추어 메진 성질을 더 크게 한다. 참고로 현대의 질 좋은 강철은 망간과 황의 비율이 200:1이지만 타이타닉호의 선체에 사용된 100여 년 전 기준 '고급' 강철은 겨우 6.8:1 수준이었다. 황과 인은 각각 4배, 2배 더 많았다는 게 밝혀졌다.
금속 자체의 특성과도 연관이 있는데 금속은 온도가 낮을수록 용접 부분이나 금속 그 자체가 충격이 가해졌을 때 파괴되기 쉬운 특징이 있다. 이를 '취성' 이라고 하는데 연성[18]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타이타닉호는 침몰 당시 북대서양[19]의 차가운 해수를 가로지르며 항해하고 있던지라 취성 파괴가 일어나기 쉬운 조건이었다. 당시의 야금술의 한계로 건조시 사용된 강철보다 영하의 기온 속의 빙산이 더 단단했으며 외부적 조건(낮은 온도)에 의해 금속의 특성이라는 악조건이 겹쳐 배가 파손당하기 쉬운 상태가 된 것이다.
게다가 선체를 접합하는 데 사용했던 이음못(리벳)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약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타이타닉호의 잔해에서 채취한 이음못 48개를 분석한 결과 이음못에 유리 성분의 슬러그[20]가 높은 비율로 섞여있었고 이로 인해 이음못이 메진 성질을 가져 쉽게 금이 간 것이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이쪽을 밀고 있는데 여기서의 내용에 따르면 선수 부분은 곡선이다 보니 리벳 머신으로 박을 수 없어서 강철 리벳 대신에 인력으로 박을 수 있는 연철 리벳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헌데 테스트용으로 만든 연철 리벳은 10,000psi(68,947kPa)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고(타이타닉이 충돌할 당시의 충격에 의한 압력은 계산결과 14,000psi(96,526kPa)로 추정하였음) 실제 타이타닉의 선수 부분의 리벳은 테스트용보다도 훨씬 약한 수준이었고 그 때문에 충격으로 리벳이 박살나면서 생겨난 틈으로 침수가 되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이 배는 현재 기준으로는 지중해에서 관광용으로 쓰는 크루즈선이지 대서양을 건너는 여객선 용도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당시 조달 가능한 최고급 강철을 써서 건조했으니 이만큼이나 버틴 것이고, 보다 저질 강철을 썼다면 파손이 훨씬 심해 보다 빨리 가라앉았을 것이다. 당시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그나마 이 정도로 된 배가 빙산과 박았을 시 가장 안전했다. 배가 충돌 후 가라앉을 때까지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구명정만 충분했다면 탑승자 대부분, 어쩌면 전원이 생존했을 수도 있을 만큼은 버텨 준 셈이다. 이 사건이 대참사가 된 이유는 구명정 부족이 크지, 배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2.2. 구조 요청


'''CQD THIS IS MGY[21]

'''

'''CQD THIS IS MGY'''

'''CQD THIS IS MGY'''

'''POSITION 41.44N 50.24W COME AT ONCE.'''

'''HAVE STRUCK A BERG.'''

'''CQD 여기는 MGY'''

'''CQD 여기는 MGY'''

'''CQD 여기는 MGY'''

'''현 위치 북위 41.44 서경 50.24 즉시 응답 요함.'''

'''빙산과 충돌함.'''

0시 15분, 타이타닉의 긴급구조요청


타이타닉호가 주변 선박, 통신소들과 주고받은 무전을 정리 기록한 영상.
4월 15일 0시 15분, 직전까지 뉴욕 기지국으로 1등실 승객들의 전보를 보내고 있었던 타이타닉은 빙산 충돌 이후 긴급히 구조요청을 보내기 시작한다. 처음에 보낸 것은 조난신호 CQD였다.[22] 타이타닉호의 불과 20 km 정도의 거리에, 빙산이 너무 많아 야간 항해는 무리라 판단하여 아침까지 투묘하고 있었던 화물선 SS 캘리포니안(SS Californian)호가 있었지만 1명밖에 없는 통신사 '시릴 에반스(Cyril Furmstone Evans)'가 오랜 1인 근무로 인한 피로누적으로 취침 중이라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 배와 통신이 닿았다면 대부분의 승객이 구조 가능했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23] 사실 캘리포니안호는 앞서 통신사 에반스가 선장의 지시에 따라 수시로 빙산 경고를 무선으로 보냈는데, 타이타닉 역시 이를 수신했으나, 타이타닉의 통신사 '잭 필립스(Jack Phillips)'는 하루 12시간씩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1등실 승객들을 위한 전보를 보내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 일 방해하지 말고 닥치라는 무선을 캘리포니안호에 날리기도 했다.[24]
CQD 신호를 6회 보내고 현재 위치를 말한 타이타닉호의 조난 신호를 최초로 수신한 것은 근처를 지나고 있던 약 250 km 떨어져 있었던 독일 선박 SS 프랑크프루트(SS Frankfurt)호였다. 이후 SS 마운트템플(SS Mount Temple)호가 응답하여 상황을 물었고,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충돌했다'는 사고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고 했다. 그리고 마운트템플호의 통신사 '존 듀란트(John Durrant)'는 "타이타닉호가 CQD를 보내고 있으니 주변 선박들은 무선을 자제해줄 것"을 알렸다. 마운트템플호의 알림 이후 7분간 비슷한 내용의 무선 호출이 각 통신국으로부터 오갔다.
0시 25분, 드디어 사고현장으로부터 대략 90 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RMS 카파시아(RMS Carpathia)호가 응답했다. 카파시아호의 통신사 '해롤드 코탐(Harold Thomas Cottam)'은 구조가 필요하냐고 물었고 타이타닉호는 즉시 현장으로 와달라고 무선을 보냈다. 이후에도 타이타닉호는 지속적으로 CQD를 송신했는데 현재위치와 즉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그리고 빙산에 충돌하였고 가라앉고 있다는 말을 보냈다.
0시 34분, 프랑크프루트호는 그동안의 무선통신을 듣지 못하고 있었는지 타이타닉호에게 재차 상황을 물었다.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충돌했으며, 프랑크프루트호의 선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이쪽으로 와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카파시아호와의 통신이 이어졌으며 카파시아호는 현재 전속력으로 가고 있으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다. 이때 자매선 RMS 올림픽호도 타이타닉호에게 상황을 묻는 메세지를 보냈으나 타이타닉호가 응답이 없자, 카파시아호는 올림픽호의 메세지를 듣지 못했냐고 물었는데, 타이타닉호는 침몰하고 있었고 증기 소음이 워낙 시끄러웠기 때문에 듣지 못했다고 답한다.
0시 45분, 타이타닉호는 CQD에 '''SOS를 섞어서 보내기 시작한다'''.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빠르게 침몰하고 있으니 즉시 와달라는 말이 추가되었다. 이 신호는 케이프 레이스(Cape Race) 무선국[25]을 비롯한 당시 사고현장 근처 모든 선박들에게 송신되었으나 응답한 선박 중 가장 가까운 카파시아호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다른 배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타이타닉호의 구조신호를 재차 내보내면서 최대한 많은 선박에게 알려주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1시 3분, 대량의 무선신호들이 오가기 시작한다. 타이타닉호의 침몰 사고가 꽤나 중대하고 심각한 상황임을 다른 선박들이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마운트템플호가 무선을 자제한 요청을 생각해보면 다소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타이타닉의 구조요청은 들을만큼 다 들은 상황이었고 해당 해역을 통과하는 배는 많았기 때문에 그 배들도 조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만에 하나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그 빙산이 다른 선박과도 충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박들 사이에서는 바짝 긴장하고 빙산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라는 경고가 필요했다. 그 와중에 카파시아호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고 속력인 15노트로 달려가고 있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1시 10분, 패닉에 빠진 주변 선박들이 미친듯이 무선을 보내대자, 올림픽호의 통신사 '어니스트 무어(Ernest James Moore)'는 참다 못해 '''\'STOP TALKING\''''이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1시 15분에는 타이타닉호로부터 400 km 떨어진 RMS 발틱(RMS Baltic)호가 구조요청에 응해 현장으로 향했고, 1시 20분에는 270 km 떨어진 RMS 버지니안(RMS Virginian)호가 응답하여 현장으로 향했다.
1시 27분, 타이타닉호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구명정에 실어 탈출시키고 있다는 무선을 보내며, 더이상은 버티기 힘들고 기관 동력이 끊어졌다는 말도 보낸다. 1시 35분, 타이타닉호는 다시 CQD SOS 신호를 반복해서 보내면서 기관실이 침수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1시 35분경 타이타닉호의 무선 송신이 일시적으로 끊겼다.
2시 10분, 상황이 악화되어 신호가 미약해진 상황에서 타이타닉호는 계속해서 구조신호를 보냈다. 이에 주변 선박들은 신호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보냈으나 타이타닉호는 2시 17분, 'CQD THIS IS MGY CQD THIS IS' 메세지를 끝으로 '''무선 신호가 사라졌다'''. 무선실이 침수되기 시작해 통신사 잭 필립스와 헤롤드 브라이트가 송신을 중단하고 탈출했기 때문이다.

2.3. 초기 탈출


[image]
스미스 선장은 탈출 명령을 내리되, 혼란 방지를 위해 대놓고 승객들에게 침몰이 임박하다고는 알리지 않았다. 우선 잠들어 있던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을 갑판에 집결시키고, 구명조끼를 나누어주기 시작했으며 좌현에서는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우현에서는 1등 항해사 머독이 구명정을 내리기 시작했다. 보일러 폭발을 막기 위해 연돌에 달린 안전밸브를 모두 열어 동시에 증기를 뿜기 시작했는데[26][27], 이 소음으로 인해 이후 갑판에서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진다. 조리장 찰스 조그힌과 조리사들은 배에 비상식량으로 실을 들을 준비해 척당 몇 개씩 실었다.
처음에는 승객과 선원 대부분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구명정에 탈 생각조차 안 했는데, 배는 아직 몸으로 느끼기는 힘들 정도로 느린 속도로 가라앉고 있었고 어두컴컴한 북대서양 한복판에서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보트보다는 길이 270 m의 강철로 만들어진 최신형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게다가 한밤중인데다가 추운 날씨 때문에 귀찮아 했던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배에서 가장 부자였던 존 제이컵 아스터도 아내에게 "여기가 저 조그만 보트보다 안전해" 라고 말했다고 한다.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선장에게 여성어린이를 먼저 태울 것을 '''건의'''하고 선장은 승인했다. 이건 당시 사회 통념상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실제로 통계상으로 혼란스러우면 여자와 아이들이 생존할 가능성이 더 적은 점도 있었다. 1등 항해사 머독은 더 이상 여성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는 등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한 대응을 했지만 라이톨러는 "여자와 어린이 먼저"를 "여자와 어린이'''만'''"으로 받아들여 혼란을 막기 위해 여성과 어린이 우선의 관습을 철저히 실시했다.[28] 이게 현장에선 도리어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정원이 덜 찼음에도 성인 남자라는 이유로 탑승이 거부되거나 우현에 비해 구명정을 내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실제로 머독이 맡은 우현에서 구명정을 절반 가량 진수시킬 동안, 라이톨러는 겨우 한 척을 내릴 수 있었다. 다만, 좌현에서 100% 남성 승객의 구명정 승선이 거부된 건 아니고, 구명정에 선원이 한 명뿐이라는 여성 승객의 이의로 인해 선원 대신 타게 된 요트 선수와 몇 명의 노인 등 약간의 예외도 있었다. 1등실 승객들 중 소년 한 명이 조숙한 탓에 성인인 줄 알고 탑승이 거부될 뻔하다 소년의 아버지가 "얘는 아직 13살이라구요!"라고 라이톨러에게 이야기해 탈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장면 역시 1959년판 영화에 나온다. 이에 대해서 옹호하자면 일부러 죽게 남겨둘 생각은 없었고 당시 구명보트에 대한 인식은 다른 배에 실으면 다시 돌아와서 또 태우는 식이었고 본인도 구명보트들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고 한다. 또 남자들을 승선시키는 건 질서 유지 측면에선 위험 부담이 있다. 일단 사회 분위기상 아이들과 여자를 먼저 태우는 것까지는 용납하던 남자들이지만, 같은 남자들이 자기 대신 타게 될 경우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승객들이 "왜 쟤는 되는데 나는 안되냐?" 라는 식으로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고 난장판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배 밑에 갇혀있을 3등실 승객들과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밑에 선원들을 파견시키고 구명보트에 바로 태울 수 있도록 문을 열라는 지시도 내렸는데 선원들이 닫는 걸 깜빡해 오히려 배 침몰이 가속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타이타닉 호가 참사가 된 원인 중 하나는 구명정의 부족 때문이었는데 미관상의 이유로 구명정을 얼마 싣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으나 엄연히 거짓이다. 참고로 타이타닉에 싣고 있었던 구명정의 수가 영국 상무성의 규정보다 더 많이 실려 있었다! .[29]
게다가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랄 판'''에 많은 구명정들이 '''정원을 채우지 않은 채'''로 바다에 내려졌다. 만약 구명정들의 정원을 완전히 채우고 내렸다면 반이라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먼저 맨 처음 구명정이 진수될 때에는 단지 절차라고 생각하며 많은 승객들이 탈 수 있어도 배가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믿고 타지 않았다. 그리고 정원 65인승의 구명정에 70명을 태우는 실험을 했는데 배는 뜰 수 있었지만 추진과 균형 잡기가 불안정하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고 배에 타고 있던 타이타닉의 설계자인 조선기사 토머스 앤드루스를 포함해 선박공학 관련자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30] 교육 부재로 '''상선사관들조차''' 구명정 정원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고, 적정 정원을 모르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많이 태우면 구명정이 뒤집어져 다 죽을 수도 있으니, 결국 널널하게 태우는 수밖에 없었다.[31] 또한 급작스런 사고에 당황한 선원들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고 황급히 구명정들을 진수했다. 사실 사전에 계획되어 있던 안전 교육도 (아마도) 예배 때문에 취소되어 전혀 하지 않았다. 안전교육의 부재가 참사를 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시다. 뒤늦게 스미스 선장이 확성기로 정원 미달된 6호정에 돌아오라고 소리치기도 했으나, 6호정의 최선임 선원이던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가 이를 못 들은 척하고 계속 배에서 멀어졌다.
한편 배 밑 보일러실에서는 화부들과 기관부원들이 물이 보일러에 접촉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증기와 해수를 배출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관실에는 기관사들과 기관부원들이 계속해서 동력을 공급했다.[32] 배수를 시작하고 얼마 후 5번 보일러실에서 최초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화부와 기관부원 몇 명이 펌프질을 하다가 6번 보일러실의 석탄 저장고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익사한 것이다. 한편, 타이타닉호가 벨파스트 조선소에서 진수되기 전 보일러실에서 발생한 의문의 대형 화재로 인해, 보일러실 주변의 약해진 격벽이 힘을 쓰지 못하고 쉽사리 파괴되며 침몰을 가속화했다는 주장도 있다.[33] 화부장 프레더릭 배럿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한편 우편 직원들은 침수하는 우편물 저장고에서 우편물을 물에서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리고 하갑판에 남아있던 몇몇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물이 복도 구석구석에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12시 45분쯤 우현에서 정원 65명짜리 7호 구명정이 겨우 28명을 태우고 처음으로 내려졌다. 곧이어 55분에 좌현에서 6호 구명정이 7호정과 마찬가지로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다. 여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빙산에 부딪히고 있었을 때 조타 당직자였고 6호정의 지휘자로 탑승한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 빙산을 처음 목격했던 견시 프레더릭 플리트[34], 그리고 훗날 "가라앉지 않는 이(Unsinkable)" 라는 별명을 갖게 된 마거릿 몰리 브라운도 있었다.
구명정은 좌현과 우현 양쪽에서 하나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허나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 정원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내려졌다. 구명정 5호정은 41명이 탔고 3호정은 32명이, 8호정은 39명이 탔고 1호정은 겨우 12명(정원 40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2.4. 혼란 가중


영화 타이타닉에서 묘사된 스코틀랜드 로드.
상황이 지속되고 배가 서서히 기울어짐에 따라 혼란이 훨씬 더 가중되었다. 우현의 손상에 의해 우현쪽으로 기울어졌다가 좌현쪽에 쏠려있는 "스코틀랜드 로드"라는 복도로 인해 좌현으로 심하게 기울어졌다. 스코틀랜드 로드는 E갑판에 있는 여러 구역과 이어지는 긴 복도인데, 이곳을 통해 해수가 격벽을 넘어 다른 구역까지 유입되며 좌현에 무게중심이 쏠린 탓이다. 몇몇 생존자들은 좌현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앞으로 기울어지는것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이제 대다수의 승객들이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닫고 공황에 빠졌다. 아직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약간씩 있었다. 그에 따라 사고도 약간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여성은 구명정 10호정과 배 사이에 떨어져 끼었다가 구조되었다.
어떤 승객들, 특히 탑승이 거부된 성인 남성들 중 몇몇은 구명정에 타기 위해 구명정을 내리고 방치된 줄을 타거나 물에 뛰어들어 구명정까지 헤엄쳐 가거나 아예 선원들의 제지를 뚫고 뛰어들기도 하였다. 어떻게든 구명정에 오르기만 하면 내려가는 중이거나 다 내려진 경우 쫓아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고, 익수자는 일단 구조의 의무가 있는 사람이니 별 말 않고 건져줬다. 대부분의 구명정이 정원 미달이어서 여유 공간이 있었고 다 내려진 뒤라면 공중에서 내릴 때보단 좀 더 태울 수 있으므로 구조에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이 거의 없기도 했다. 물론 이 와중에 부상자들도 생겨났다. 이제 승객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한편 무선사 잭 필립스와 해럴드 브리드는 계속해서 모스 신호를 보내고, 선교에선 조타수가 5분마다 1발씩 하늘에 로켓을 쏘았다. 당시 확인된 배들 중 가장 가까운 30여 km 거리에 투묘하고 멈춰서 항해를 쉬고 있던 캘리포니안호에서도 이것이 조그맣게 보였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 외에 정체불명의 선박이 목격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선박은 후에 포경선으로 밝혀졌으며 자신들에게 뭔가 트집을 잡으려던 미 해안경비대로 착각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당시에는 로켓 신호탄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한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어, 단지 다른 선박 등에게 주목을 끄는 용도로밖에 쓰질 못 했기 때문이다. 즉, 저 로켓 신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목격한 선박이 알아서 판단해야 했다. 사고 이후, 로켓 신호는 무조건 SOS 신호와 같은 뜻으로 해석하도록 규정되었다.
  • 만약 캘리포니안이 저 신호가 구조신호임을 알아차리고 타이타닉 위치로 갔거나, 에반스가 지쳐서 잠들지 않았더라면 타이타닉 승객들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35] 영국과 미국 측의 조사 모두 두 배 사이의 거리가 최대 19.5마일 (31.4km)이거나 이보다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캘리포니안 호의 평상시 운항속도가 12노트(시속 22.2km)란 걸 감안하면 이론적으로 한시간 24분만에 도착할 수 있다. 이때 해당 바다에 빙산이 많다는 것, 캘리포니안이 투묘 상태라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보일러를 가열하는 시간을 감안해도 워낙 거리가 짧기 때문에 시간 내에 도착했을 가능성도 높고, 서두르면 이보다 더 짧아졌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타이타닉의 생존자들을 구한 RMS 카파시아의 타이타닉과 거리가 107km나 떨어져있었는데 평상시 운항속도인 14노트로 달렸을 경우 4시간이 넘게 걸리지만(당시 네 시간 정도 걸릴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실제로는 배의 난방 장비도 전부 끄고 전속력으로 달려 세 시간 반만에 도착했다. 이는 이론상 최고 속도인 15.5노트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달린 것. 캘리포니안과 마찬가지로 빙산이 가득한 바다에 있던 카파시아가 평상시보다 훨씬 빠르게 달렸다는 걸 감안하면 캘리포니안 역시 최고속도보다도 빨리 달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36]
또한 캘리포니안 호가 카파시아의 절반 정도밖에 안되는 크기란 걸 지적하는 사람도 있는데, 캘리포니안은 승선인원이 평상시엔 최대 승객까지 합해 102명에 불과하지만 적재량이 4천톤에 달하는 화물선이었다. 설령 승객/선원을 합쳐 2200명에 달하는 타이타닉 탑승인원들의 몸무게를 평균 100kg라고 크게 과장해 계산하더라도 고작 220톤에 불과한데, 이 정도는 이 배의 최대적재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정 급하면 화물을 전부 버려도 되고, 캘리포니안 자체적으로 총 200여명을 태울 수 있는 구명보트 6개에 타이타닉의 구명보트도 있었으니 사람들을 전부 물 속에서 건져내는 건 이론상 얼마든지 가능했다. 가기만 했다면. 실제로 영국에서 이뤄진 조사는 만약 캘리포니안이 구조를 하러 갔다면 타이타닉의 탑승인원들을 "대부분, 혹은 전부 구할 수도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때 수많은 3등실 승객들이 여전히 배를 헤메고 있었다. 여러 구역이 철창으로 막혀 제한되어 있었고 배가 미로처럼 복잡했기 때문에 탈출에 지장을 빚었으며 일부 승무원들은 혼란을 막는다는 이유로 승객들의 통행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거기에다가 이 배는 영국인과 미국인만 탄 게 아니라 미국 이주 목적으로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많았고 3등실 승객들 중에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승객들도 많았다. 영화에서는 영어 안내판을 본 어느 아랍계 승객들이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Deck(갑판)'''의 의미를 찾는 장면도 있다. 이 상황에서 여러 3등실 승객들은 그냥 탈출 시도를 포기한 채 자신들의 숙실이나 식당, 복도 등에 남아 지시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일부 승무원들은 상부와의 소통 부재로 그냥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수백명의 승객들이 식당에 남아 묵묵하게 탈출 지시를 기다리거나 같이 모여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존 에드워트 허트를 비롯한 승무원들과 바일스 신부같은 승객들은 배 밑으로 내려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3등실 승객들을 적극적으로 인도해 도와주기도 했다. 허트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단 1등실 승객이 먼저 탈출하도록 3등실 승객을 가둬두었다는 통설은 사실과 다르다. 갑판으로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은 3등실과 1-2등실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였는데, 당시 미국 이민법 규정은 전염병 방지를 위해 이 통로를 철저히 막아서 두 구역을 격리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충돌 직후의 혼란 속에서 이 통로를 개방하라는 명령이 상당히 늦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항해사들도 이 사실을 파악하자 즉각 선원들을 파견해서 밑에 갇혀있을 승객들을 구출하도록 했다. 또한 구명보트에 바로 태울 수 있도록 출입문을 열라는 지시도 내렸는데 선원들이 닫는걸 깜빡해 오히려 배 침몰이 가속화된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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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 30분쯤에는 선수가 잠기기 시작하고 혼란은 계속해서 가중되었다. 구명정도 이제 정원에 어느 정도 맞추기 시작했다. 11호정은 정원을 다섯 명 초과해서 내려졌고 배에서 펌프질로 빠져나오는 물이 들어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13호정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제를 가까스로 피했으나 밧줄에 문제가 생겨 옆에서 함께 내려지던 15호정은 '''바로 위에 내려져''' 깔리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다행히도 15호정에 타고 있던 화부장 바렛을 포함한 선원들이 아슬아슬하게 밧줄을 잘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4호정이 내려지려 하자 공황에 빠진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타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다. 이에 라이톨러의 지시로 14호정에 탄 5등 항해사 로우는 혼란을 저지하기 위에 허공에 대고 리볼버을 쐈다. 5분 후에는 16호정이 내려졌는데 여기 타고 있었던 사람들 중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은 후에 자매선 HMHS 브리타닉이 침몰했을 때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구명정이 하나둘씩 내려짐에 따라 이제 후미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시 45분에는 구명정 2호정이 내려졌다. 이때 몇몇 외국인들이 타려 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권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 존 제이컵 애스터는 어린 아내를 태우고 아직도 빈 공간[37]이 많은 것을 보고 타도 되냐고 물었으나 라이톨러에 의해 거절당했다.
접이식 구명정 C호정이 2시 정각에 내려지기 직전 여섯 사람이 뛰어내려 탔는데 한 명은 가족을 버리고 도망간(...)[38] 성인 남성 승객이었고, 네명은 중국인 승객들, 나머지 한 명은 화이트 스타 해운의 회장이자 배의 선주 브루스 이스메이였다. 그는 이 때문에 돌아와서 욕을 꽤 먹었으며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도 사퇴했다.
마지막으로 정상적으로 내려진 구명정[39]은 접이식 구명정 D호정으로 2시 5분에 내려졌다.
이 와중에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한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 좋은 노부부였는데, 남편 이시도라 스트라우스가 노인의 경우 남성이라도 선원들이 대체로 태워 주니 타 보라는 말에 다른 남자들이 구조되기 전까지는 타지 않겠다며 구명정 승선을 거절하자 아내도 선원의 구명정 승선 제안을 거절한 다음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정에 태운 뒤 배에 남아 남편과 운명을 같이했다.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 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의 내용은 2016년 3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된다.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40]은 현지처와 하인을 구명정에 태운 뒤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했다. 턱시도로 갈아입은 그는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 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카메론판 영화에서 보이는 그의 최후는 제법 비장하다. 계단으로 물이 서서히 차오르는 홀의 의자에 정장 차림으로 앉아 무심히 최후를 기다리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2.5. 최후의 순간


2시 5분, 옥상에 설치된 접이식 보트 2척을 제외한 마지막 구명정인 접이식 보트 D호정이 떠났다.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모두 제 살 길을 찾으라고 했으며 배를 포기한다고 공식 선포했다. 남은 사람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살기 위해 발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배에 남은 사람들은 남은 항해사 네명과 함께 진수되지 못한 접이식 보트 2척을 기다리거나 후미 쪽으로 달아나거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배가 기울며 프로펠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2시 10분에는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다. 그때쯤 체육관 바깥쪽 휴식터에서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악단이 마지막 음악을 연주했다.어떤 곡이 연주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Nearer, My God, to Thee'(한국에 번역된 곡으로는 개신교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 가톨릭 성가 '주여 임하소서'가 된다.)와 'Autoume' 이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채로 선교에 들어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 배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도 같은 길을 택했는데, 목격된 그의 마지막 모습은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2시 15분에서 17분 사이에는 바닷물이 마치 파도가 흽쓸듯이 보트 갑판을 본격적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해수가 이제 위에서도 들어오면서 배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통신실도 침수되기 시작했고, 한계까지 버티며 구조신호를 보내던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라이트도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빠져나왔다.
남은 접이식 보트 두 척은 제대로 진수되지 못한 채 물에 흽쓸려 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보트 B호정은 뒤집힌 상태에서 여러 명이 매달려 있었고 A호정은 물이 반쯤 찼다. 이때 몇몇 사람들(아치볼드 그레이시, 찰스 라이톨러, 잭 테일러 등)이 환기구 때문에 빨려들어갔지만 다시 보일러실에서 발생한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면서 물 속으로 빠져나와 뒤집어진 B호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살아남았지만 수석 항해사 와일드, 1등 항해사 머독, 6등 항해사 무디는 끝내 사망했다.
그러던 중 굴뚝 1이 수압과 기울어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선교루 쪽으로 쓰러지면서 물에 빠져있던 몇몇 사람들을 덮쳐버렸다. 접이식 보트는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그 여파로 생긴 파도가 접이식 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쓸어내리는 동시에 보트를 배로부터 밀어냈다. 잠시 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파도에 의해 깨져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깊은곳에 있는 선실로부터 굉음이 네번 발생한 뒤 침몰속도가 가속되었다. 배가 기울어지면서 선내의 온갖 가구, 기관, 잡기 등등이 쏟아지며 굉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배가 더 기울어지자 잡을 것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 또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갑판을 타고 미끄러졌다.[41]
2시 18분,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더 커졌다. 그러던 중 2번 굴뚝쪽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폭발하였고[42] 이때문에 2번 굴뚝도 폭발과 함께 무너져내렸다.그리고 정전이 발생하고, 잠시 뒤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2번째와 3번째 굴뚝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43] 동시에 굴뚝 3과 환기구인 4가 부러졌다.[44]
이윽고 선수 부분은 잠기고 선미 부분은 분리되어 잠깐 떠있는 듯 했지만 순식간에 거의 수직으로 기울면서 수면 아래로 잠겼다. 이는 배가 동강난 뒤에도 선저에 있는 이중저(double bottom)부분이 두 동강을 연결하고 있었던 탓인데, 이것이 결국 선수부가 선미부를 잡아당겨 뒷부분의 이중저까지 뜯어지는 바람에 순식간에 해수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45]
이 때 구명정들은 빨려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선미는 꽤 느리게 침몰했고 빨아들이는 것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후술하듯이 배 조리장 찰스 조그힌은 머리도 젖지 않았다.

2.5.1. 두 동강설


타이타닉 잔해 발견시기인 1985년까지 논쟁에 휘말렸던 설이다. 침몰 직후 타이타닉이 동강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생존자들에 의해 논쟁이 시작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증언 역시 많았고 청문회에서 배가 두동강으로 파손되지 않았다는 화이트스타 라인의 주장이 인정되어 74년간 부정되었다. 그래서 타이타닉의 최후(The Titanic, 1953), 타이타닉호의 비극(A Night To Remember, 1958) 등 80년대 이전의 타이타닉 소재 영화에서는 배가 두동강나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가라앉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1985년 9월 1일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 소속 로버트 밸러드 연구팀의 탐사로 각각 600m 떨어져있는 두 구역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끝내 두동강설이 정설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 시점에서 두동강난 모습을 목격했다는 생존자의 증언을 다시 보면 상당히 정확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양손을 모은채로 손가락을 V자로 만든 뒤 두손을 떨어뜨리는 묘사가 있다. 즉 2번 굴뚝과 3번 굴뚝 사이가 갈라졌다는 말로, 1997년 영화판에서조차 오류를 범했던 파손 위치까지 정확하게 증언했던 것이다.
생존자가 700명이 넘는데도 사고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에 대해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해상근무 경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원래 불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시야는 보름달이 뜬 날이 아닌 이상 한치 앞도 전혀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암흑천지이다. 게다가 두 동강 나기 직전에 정전이 되는데, 밝다가 갑자기 어두워지면 더 안 보인다. 단, 어둠 속이기는 했지만 소리는 들을 수 있었기에, 이때 두동강이 나는것을 목격하지 못한 생존자들도 소리는 들었다고 증언했다. 보통 폭발하는 소리가 아닌, 마치 번개소리 같았다고 한다. 또한 두 동강이 날 당시 많은 생존자들이 정전 이후 보일러의 폭발이나 끊어진 전선으로 인해 발생한 스파크로 보이는 작은 폭발이나 화재는 보았다고 한다.

2.6. 침몰 직후


오전 2시 20분, 배가 완전 침몰하자 배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려졌다. 당시 바닷물의 온도는 '''영하 2℃였다.'''[46] 침몰원인 자체가 빙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약 침몰사고가 일어난 계절이 더운 계절이었다면 적어도 수십~수백명은 구명조끼로 둥둥 떠있다가 구조될 수도 있었다. 수백~천여명의 생존자들은 넉넉히 지급된 구명조끼와 많은 부유물 덕에 침몰 직후엔 살아 있었다.
바닷물에 빠졌다가 나온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의 회상에 따르면 '천 자루의 칼로 몸을 찌르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깜깜한 밤, 배가 침몰한 곳에서는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명과 아우성이 울려퍼졌고 이는 구명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PTSD를 남겨주게 된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어떤 생존자는 살아남은 후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서도 야구 경기를 보러 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는 '''관중들의 함성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침몰 전 부서지는 배에서 떨어져나온 수많은 쇳조각 잔해들도 바닷물에 버려진 조난자들에게 부상 내지는 치명상을 입혔다.
가장 적은 탑승수인 12명을 태운 1호정에 탑승한 화부 헨더릭슨은 현장에 돌아가서 떠 있는 사람을 건져내자고 요구했으나 더프-고든 부부와 배를 맡은 선원 시먼스가 반대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으며 결국 무산되었다. 5호정의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만 또한 현장에 돌아가려 했으나 몇몇 사람들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6호정에서는 마거릿 몰리 브라운 또한 현장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요구했고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으나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길 것이라며 거절했다.
한편 현장에서 비교적 가까운 약 50m 거리에 있었던 4호정에서는 완전히 침몰 전 헤엄쳐온 3명이, 침몰 후에는 5명이 헤엄쳐와 구조되었는데, 이 중 1명은 이후 구명정 위에서 사망했다. 접이식 구명정 D호정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헤엄쳐온 한명을 구조했다.
현장에 바로 있었던 뒤집어진 접이식 보트 B호정에서는 30명이 넘는 사람들(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 아치발드 그레이시, 잭 테일러 등)이 메달리고 있었는데 주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노를 저으며 느리게 벗어나야 했다. 이 중 구출되지 않은 한 남성은 "알겠소. 행운을 빌고 하느님의 축복이 있길 빌지요" 라고 했다고 한다.[47] 이 남자의 정체는 모르지만 당시 보트에 타고 있던 생존자들에게는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물에 떠 있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침몰로부터 20분이 지나면서 점차 동사하고 익사해 가면서 점점 줄어들고 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14호정의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정들을 재편성한 뒤 지원자는 남기고(선원 7명, 승객 1명) 다른 사람들을 다른 구명정으로 옮겨 구조에 나섰으나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대부분이 30분 안에 사망했으며 4명만이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첫 번째로 구조된 사람은 중국인이었으며 5등 항해사 로는 구해주자는 의견에 "저런 쪽발이(Jap) 구해서 뭐하게?" 식으로 말하다가 말이 심한 걸 알았는지 금방 마음을 바꾸고 구명정을 돌려 구해줬고 이 사람은 열심히 노를 저으며 구조 작업을 도왔다. 진심은 아니고 무수한 시체들을 보고 스트레스를 받아 한 우발적인 막말이었던 듯하며 본인도 구명정 위에서 괜한 소리를 했다고 인정했다. 익수자 대부분이 저체온증 이전에 심장마비로 몇 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사망자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카메론판 영화에서도 그 여성 사망자를 표현했다.[48] 1958년작에서는 3등칸에 타고있던 조연중 2명이 갓난아기를 안고 B호정으로 접근하여 구출되었지만 아기는 이미 동사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한편 배가 침몰할 때 제대로 내려지지 못하고 파도 위를 떠다니던 접이식 보트 A호정과 B호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물에 빠져있던 사람들보다는 덜하지만 거의 지옥 같은 경험을 겪고 있었다. 뒤집어진 B호정은 안에 있는 공기가 불안정해지고 파도까지 일어서 모두가 보트의 균형을 맞춰야 했고 몇명은 이 전에 동사하거나 이 과정에서 힘이 빠지면서 익사했으며, 물이 찬 A호정에서는 반이 동사했다. 이 두 접이식 보트에 남은 생존자들도 다른 구명정에게 구조된다. 그나마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B호정의 생존자들을 적절히 지휘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버티는 데 성공했다. 라이톨러가 구조된 직후 한 말에 따르면, 카파시아 호가 30분만 늦게 구하러 왔어도 B호정은 침몰했을 거라고 한다.[49]
이 때 바닷물에 있었던 사람 중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은 조리장인 찰스 조그힌이었는데, 뒤집어진 B호정에 매달렸다가 자리가 다 찼다며 거절당했지만 타고 있던 누군가가 사망해 버려져 자리가 남자 끌어올려져 살아남았다. 그렇게 오래 버티며 살아남은 이유는 침몰 중 '''술을 잔뜩 마셨기 때문'''이다. 무려 '''세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선미 끝에 매달려 있다가 배가 완전히 침몰함과 동시에 그냥 물 위로 떠올랐는데 머리가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1958년작은 아무래도 주인공이 라이톨러이므로 침몰 직후의 B호정이 비중있게 다루어지는데 침몰하는 도중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 숨겨두었던 술을 꺼내 마시며, 이후 술에 취해서 구명보트 위치를 묻는 주연 일행들에게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는 대사를 날린다. 침몰 이후 위에 적힌대로 보트에 건져지자 딸꾹질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편 타이타닉의 잔해는 불과 5~6분 만에 대서양 3,800미터 아래 해저에 가라앉았다. 동강난 선체중 선수부분은 전면으로 낙하하여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였지만, 선미부분은 부서진 면을 아래로 수직으로 침몰하였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나서 선내의 에어포켓으로 엄청난 양의 해수가 밀려들어갔고,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선체 외벽 일부가 뜯겨져 나갔다. 그 후로 선미 부분은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며 극심하게 훼손되었고, 해저에 다다랐을 땐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50] 이때문에 정확하게 선체가 파괴된 위치를 알기 어려워졌고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그 파괴위치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오류를 범해버리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의 성공은 타이타닉 침몰 사고에 대한 연구들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켜주었고, 최근의 연구에서는 주변의 잔해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분석하여 아예 타이타닉 침몰 사건의 전모를 밝혀낸 수준에 다다랐다. 지금은 파괴 부위와 시점을 모두 알아내었다. 이 과정에서 동강난 부분의 이중저 잔해를 발견하였고 동강난 선미 부분이 왜 빠르게 침몰했는지 역시 밝혀내었다.[51]

3. 카파시아호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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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카파시아(카르파티아)호는 타이타닉의 선박사 화이트 라인 사와 경쟁 관계였던 큐나드 라인사의 여객선으로, 뉴욕에서 출발해 상당수 미국에서 여행을 가거나 유럽으로 돌아가려는 승객들을 싣고 타이타닉의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4월 15일 오전 0시 11분경 카파시아호의 아서 로스트론(Arthur Rostron) 선장은 자고 있던 중 무전사 헨리 커텀으로부터 타이타닉이 침몰하고 있고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는데, 처음에는 뭔 일이길래 이렇게 깨우냐고 짜증을 내다가 구조 신호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선장은 27년 항해 경력에서 구조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철저한 준비를 하고 사고 현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갈 것을 지시하고 다음을 준비했다.
  • 모든 기관사들과 기관부 선원들을 각자 근무장소로 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증기엔진으로 돌아가는 동력을 최대한 속도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난방과 온수 시스템을 끄라고 지시했다. - 승객과 선원들의 사소한 불편함을 감수한 결과 배의 최대속도를 14.5 노트에서 17.5 노트로 올릴 수 있었다.
  • 전속력으로 향하면서 빙산 충돌에 대비해 위해 견시들을 추가로 배치하였다.
  • 1등실, 2등실, 3등실 식당에 각각 생존자들을 진찰할 의사들을 배치하였다.
  • 복도 곳곳에 생존자들을 돕고 안내할 승무원 배치하였다.
  • 생존자들의 잠자리를 위해 승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승객들을 최대한 한 격실을 다 채우도록 이동시켜 빈 객실들을 확보하였다.
  • 추위에 떨고있을 생존자들에게 나눠줄 담요를 배 곳곳에서 수거해 왔다.
  • 사무장에게 저체온증에 걸려 있을 생존자들을 위해 요리사들에게 커피 등 따뜻한 마실 것과 수프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 선체에서 복도로 들어가는 문/해치들이 열려지고 거기에 생존자들이 올라올 줄과 사다리가 내려졌다.
  • 생존자들을 구조할때 물결을 잠재우기 위해 바다에 기름을 쏟을 준비를 하였다.
  • 승객들을 구출한 뒤 타이타닉 호의 구명정들을 올리기 위해 카파시아 호의 구명정들이 안쪽으로 내려졌다.
표류한 타이타닉호의 구명정들은 바다의 파도가 점점 거칠어지고, 특히 접이식 보트들은 이미 물이 들어오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카파시아호는 전속력으로 항해했지만 이 배는 최대 속도가 17노트(약 시속 31.48km)에 그쳐[52] 카파시아호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4시였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른 타이타닉의 완전 침몰 시각은 2시 20분 경이므로 침몰 1시간 40분 뒤에야 도착했다. 그나마 이것도 카파시아호가 선박의 동력을 한계까지 필사적으로 쥐어짜서 최선을 다해 달려온 것이었으며, 침수된 접이식 단정 A, B호정의 생존자 등은 카파시아호가 빠르게 도착한 덕에 그 추위에도 많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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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시아호 선상에서 촬영한 A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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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시아호 선상에서 촬영한 번호 불명의 구명정 2척
카파시아호의 불빛은 이미 오전 3시 30분부터 볼 수 있어서 생존자들이 매우 환호했지만, 모든 생존자를 인양하는 데는 몇 시간이 더 걸렸다. 오전 4시쯤 구명정 4호정을 최초로 발견하여 구조했고 약 4시간 30분 동안 20척의 구명정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하고 12호를 마지막으로 구조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5명이 그 전에 구명정 위에서 사망했다. 선원들은 분주하게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음료와 스프, 담요,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했으며 승객들 또한 생존자들에게 옷, 음식, 세면도구 등을 빌려주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한다. 이 무렵 카파시아호의 선원들과 승객들은 바다에 20개가 넘는 거대한 빙산들과 타이타닉호의 잔해들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오전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하고 나서 45분 후 다른 배들도 구조를 위해 달려왔지만 이미 다른 생존자들은 발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타이타닉 호의 자매선이던 화이트 스타의 RMS 올림픽 호가 회사 차원에서 책임을 지기 위해 생존자들을 인계받을 것을 제안했지만 로스트론 선장은 또 옮기면 생존자들에게 불편함만 줄 테고 무엇보다도 올림픽 호는 타이타닉 호의 자매선이라 거의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심리적인 불안감을 줄 것이라고 판단[53], 이스메이 회장도 이에 동의하여 거절하였고, 카파시아호에는 타이타닉 호의 생존자들을 구호할 충분한 의약품과 물자가 없었기 때문에 출발지였던 뉴욕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원래 목적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피우메(현 크로아티아 리예카)였는데, 생존자들을 위해 이 정도까지나 불편을 감수한 것이고, 승객들 역시 이해해줬다. 카파시아 호는 속도를 줄이고 침몰 현장으로 돌아가 혹시나 있을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지만 단지 1구의 시신만 인양할 수 있었다. 대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도식을 열었다. 그리고 뒤늦게 달려온 화물선 캘리포니아 호에게 잔해를 더 뒤져보라고 부탁하고 오전 8시 50분에 미합중국 해군의 정찰 순양함 USS 체스터 함의 호위를 받으며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항로도, 애초 배 자체가 썩 빠른 속도를 내지 못했던 데다 빙산, 안개, 폭풍, 거친 파도 등 악천후의 영향, 그리고 침몰 사고를 겪은 직후라 보다 조심해서 항해하는 등의 이유로, 타이타닉이 침몰 지점에서 하루만 더 항해하면 도착했을 곳을 4일이나 소모한 끝에, 4월 18일 뉴욕 항에 입항,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과 그들이 탔던 구명정들을 항구에 내려놓으며 구조 작업을 완수하였다. 뉴욕 항은 사고 소식을 들으려는 수만명의 사람들로 북적였고 취재하려는 기자들도 상당히 많았지만 로스트론 선장은 생존자들의 휴식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 기자들에게 취재를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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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시아호가 입항 후 뉴욕항에 내려 놓은 타이타닉호의 구명정들과, 조사를 위해 올라탄 조사관들
로스트론 선장은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1912년 미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받았다. 생존자들은 고마운 마음에 돈을 모아 상금을 전달했지만 그는 그 돈을 하나도 받지 않고 대신 자신의 선원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이후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활약했고, 1926년 그동안의 군공을 인정받아 2등급 대영제국 훈장(KBE)도 받았다. 훈장 등급이 기사 서임 대상에 해당하는 2등급이었으므로, 이 때 경(Sir) 칭호도 함께 받았다. 이후 로스트론 선장은 1940년 11월 4일 폐렴이 악화되어 별세했으며, 웨스트앤드 교회의 묘지에 장례를 지냈다.
안타깝게도 RMS 카파시아 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1918년 7월 17일에 독일 제국 해군 잠수함 U-55어뢰에 맞고 침몰하며 그 영웅적인 함생을 끝마쳤다. 침몰한 위치는 에이레 패스트넷 에서 약 190km 떨어진 지점이다.

4. 시신 수습과 장례


4월 14일로부터 며칠 후, 시신 수습을 위해 해저 전선 부설선인 CS 맥키-베넷(Mackay-Bennett) 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이 출항했다. 베넷 호에만 70명의 수습 작업원과 100개의 , 시신 냉장용 100t얼음 등을 탑재했다. 베넷 호는 타이타닉의 악단원 중 유일하게 수습된 바이올리니스트 윌리스 하틀리, 미국의 갑부 존 제이콥 애스터, 이시도르 스트라우스 등 1등실 승객, 116구의 3등실 승객 등의 유해를 수습했다.
총 328구의 시신이 인양됐고, 이 중에서 1, 2등실 승객이라 하더라도 119구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연고자도 있고 신원도 확인된 일부 3등실 승객들, 선원들의 시신은 영국 근해에서 수장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선원들은 본래 바다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의미로 바다에서 죽은 선원은 자신의 고향 바다에 돌려보내는 수장이 일반적이었지만, 본래 육지로 옮겨 장례해야 할 연고자도 있고 신원도 확인된 일부 3등실 승객들까지 수장한 것은, 배의 협소한 공간으로 시신을 전부 싣고 갈 수도 없다는 점도 있었고, 수배된 배들이 대부분 1등실 생존자나 유가족들이 낸 비용으로 출항했던 것이기에 이들에게 우선권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3등실 사망자의 유가족들 역시 이에 따른 설명을 듣고 사전에 동의했다.[55]
수습 된 시신 중 205구의 시신은 캐나다핼리팩스에 매장 형식으로 안장되었다.
수장도 아니고 핼리팩스 이외에 묻히거나 안치 된 사람은 메이시스 백화점 소유주 이시도르 스트라우스, 악단 단장인 윌리스 하틀리 , 침례교회 담임목사인 존 하퍼 목사, 최고의 갑부 존 제이콥 애스터 총 4명이다. 윌리스 하틀리는 태어난 고향인 잉글랜드 콜른에 안장되었고, 하틀리의 장례식에는 4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그리고 런던의 침례교회 담임목사로서 2등칸에 탑승한 존 하퍼 목사는 영국 런던의 덴마크 힐에 매장 형식으로 안장되었고,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의 소유주 이시도르 스트라우스는 카네기홀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브루클린에 있는 베델 묘지의 Straus - Kohns 가족묘에 화장 후 납골 안치되었으나 부인은 시신을 찾지 못했고 스트라우스의 가족묘의 부인을 위한 유골함 자리는 비워져 있다. 또한 최고의 갑부 존 제이콥 애스터 4세는 뉴욕 맨해튼의 트리니티 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신이 수습되지 않았지만 시신 없이 장례를 치른 경우도 있다.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과 그의 충직한 시종 빅터 가글리오 비서가 대표적이다. 구겐하임은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으나, 철강업자 답게 소속된 철강업의 회사장으로 가글리오와 함께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다.
몇몇 신문 등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잠수부 등을 동원해 침몰 잔해에서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도 진지하게 검토됐지만, 당연히 불가하다는 결론만 내렸다고 한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그 정도 심해에 가라앉은 시신의 수습은 매우 어렵다.

5. 피해자들


  • 타이타닉 호의 생존자와 사망자 비율.[56] 출처
'''분류'''
'''탑승자'''
'''생존률'''
'''사망률'''
'''생존자'''
'''사망자'''
1등실, 어린이
6
83%
17%
5
1
2등실, 어린이
24
100%
0%
24
0
3등실, 어린이
79
34%
66%
27
52
1등실, 여성
144
97%
3%
140
4
2등실, 여성
93
86%
14%
80
13
3등실, 여성
165
46%
54%
76
89
1등실, 남성
175
33%
67%
57
118
2등실, 남성
168
8%
92%
14
154
3등실, 남성
462
16%
84%
75
387
승무원, 여성
23
87%
13%
20
3
승무원, 남성
885
22%
78%
192
693
어린이 총합
109
51%
49%
56
53
여성 총합
425
74%
26%
316
109
남성 총합
1690
20%
80%
338
1352
'''전체 총합'''
'''2224'''
'''32%'''
'''68%'''
'''710'''
'''1514'''
배가 침몰했을 때 선원들의 통제가 안 먹히는 경우 여성과 특히 어린이들의 생존률이 매우 낮아진다. 급박한 상황에서 아무래도 구명정으로 달려들때 힘센 남성이 구명정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 사건 때는 승객들에 대한 통제도와 선원들의 상선사관들의 명령 복종 정도가 매우 높았다. 이는 승객들이 타이타닉 같은 큰 배가 설마 3시간도 안되어 침몰하리란 생각을 못한 덕에 비교적 여유롭게 행동했고 구명정이 부족할 거란 생각을 못했으며 무엇보다 60년 전인 1852년에 발생한, 영국 육군 병력을 수송하다 가라앉은 영국 해군의 HMS 버큰헤드(Birkenhead) 함 침몰 사건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병력 수송용 프리깃 HMS 버큰헤드 함에는 영국 해군 승조원과 해병대원, 10개 연대에서 차출되어 승선한 육군 병력 및 민간인 21명(남성 1명, 여성 7명, 어린이 13명) 등 총 643명이 타고 있었다. HMS 버큰헤드 함은 암초에 걸려 반시간도 안돼서 침몰하면서, 탑승하고 있던 21명의 민간인을 우선 구명정에 태웠고, 혼란을 막기 위해 함장 로버트 샐먼드(Robert Salmond) 해군 대령 이하 육해군 장병들은 갑판에 부동 자세로 도열한 채로 가라앉았으며,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뒤에야 에드워드 WC 라이트(Edward WC Wright) 육군 대위 등 잔해를 붙잡고 살아남은 소수의 운 좋은 군인 173명(육군 113명, 해군 54명, 해병 6명)만이 구조되었다. 이후 영국에서는 "버큰헤드호를 기억하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사건 당시 장병들의 희생정신이 알려져 영국 사회의 정신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 말을 듣지 않는 승객들은 항해사들이 '''권총으로 위협했다.''' 동시에 몇몇 남성들이 승무원을 도와서 구명정 주변에 스크럼을 짜고 사람들을 통제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구명정에 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이 역할을 수행하다 죽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명령에 순응했고, '여자와 아이들 먼저' 규칙에 의해 남자들은 생존률이 여성과 아이들보다 훨씬 낮다.
반대로 1854년에 침몰한 아틱호에는 지휘가 마비되어 선원들이 먼저 도망가버리고 힘센 남자들이 먼저 타는 바람에 여자와 아이들이 전부 죽었다.
객실별로는 3등실의 사망률이 월등하게 높다. 3등실 선실이 구명정에서 가장 떨어져 있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구조인 데다가 출입이 제한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거기다가 외국인이 많아 영어가 통하지 않아 언어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일부 승무원들이 3등실 승객들의 출입을 제한한 것도 있었는데, 몇몇 매체에 나온 것처럼 1등실 승객을 먼저 탈출시키려고 막았던 것은 아니고 그냥 상부와의 소통 부재 때문이었다. 오히려 상선사관들은 3등실 승객들의 대피가 지연되는 것을 알게 되자 배 밑에 승무원들을 파견했다.
2등실 어린이들은 전원 생존했지만 1등실에서는 어린이 사망자 1명이 발생했다. 1등실에서 헬렌 알리슨이라는 당시 2살짜리 여자아기가 구조되지 못했는데 구조되지 못한 이유가 엄마를 찾아서라고 한다. 이는 1등실과 2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유일한 어린이였다. 그녀의 남동생인 당시 생후 11개월의 트레버 허드슨 알리슨은 알리슨 가에 고용된 간호사 앨리스 클레버에 의해 구조되었다. 반면 3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어린이는 구조된 수의 거의 두 배에 가까웠다. 1,2등실 어린이까지 합친 총 어린이 수와 비교 시 절반에 가깝다.
가장 생존율이 높은 부서는 갑판부였다. 배 제일 위에서 일하는 것도 있고 직무 중 구명보트 관리도 있기 때문. 특히 조타수들은 전원 살아남았는데, 조타 항목에 나와 있듯 조타수는 타를 잡는 입장에서 돌발상황 발생 시 항해사의 지시 없이도 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몰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능력있고 어느 정도 근무 이력이 쌓인 이들에게 주어지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항해사 없이 작은 구명정을 바다에서 사고 없이 지휘하기엔 조타수들이 적합하였고, 게다가 조타수가 있어야만 배가 표류하지 않고 갈 수 있었다.[57]
반면 생존율이 제일 낮은 부서는 기관부로, 이들은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도 배의 동력을 유지하고 물을 펌프로 빼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고생했고 이들 덕에 배가 조금이나마 더 버틸 수 있었다. 특히 상선사관 중 항해사들과 달리 기관사들은 전원 사망했다. 그래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나마 보일러실이 침수된 후 할 일이 없어진 화부들을 항해사 한 명이 단체로 한 구명정에 몰아 태우고, 화부장 바렛 같이 노잡이 및 구명정 지휘 등을 위해 한두 명 태워져 살아남은 경우가 없진 않다.
구명조끼가 넉넉하게 지급되었기에 익사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고, 사망 원인의 대다수는 -2℃의 수온으로 인한 저체온증이었다. 물 속에서는 공기 중보다 체온 저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며 20℃의 해수에서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 있다.[58] 사고가 발생한 북대서양 바다는 여객선이 통행하는 바다 가운데 가장 수온이 낮은 바다[59]로 영하 온도의 물속에 빠지게 되면 건강한 성인 남자도 10분 내외로 목숨을 잃는다. 2등실, 3등실 남성 승객의 사망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2등실 남성 승객 중 92%가 사망했다.
생존자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장수한 이는 밀비나 딘(Millvina Dean) 여사로 타이타닉의 최연소 승객이기도 했다. 침몰 당시 생후 9주밖에 안 된 아기였다. 그녀는 2009년 5월 31일 세상을 떠났으며 사우샘프턴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오빠는 아버지의 침착한 대처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노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타이타닉 침몰 당시 갖고 있었던 가족의 유품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97년판 영화의 제작진들과 타이타닉 탐사협회가 생활비를 지원해준 적도 있다.
타이타닉의 생존자 중에는 자매함인 RMS 올림픽 호에 승무원으로 탑승했었고 이후에 1차대전 때 병원선으로 징발된 HMHS 브리타닉 호에도 탑승하게 되는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Violet Jessop)도 있었는데, 타이타닉 침몰 전 올림픽에 타고 있다가 영국 해군 순양함 HMS 호크(Hawke)와 충돌하는 사고[60]를 겪었고, 브리타닉이 침몰할 때도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런 불운에도 불구하고 건강히 살다가 83세로 1971년에 사망했다. HMS 호크는 1914년 1차 대전 개전 얼마 후 U보트에 격침됐다.
타이타닉 탑승자 중에는 신대륙으로 이민가던 북유럽인, 레반트(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출신 오스만 제국인도 있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시리아 출신자만 154명이 탑승하고 있었고 그 중 23명이 생존했다고 한다. 이런 이민자들은 대부분 3등실에 탑승했다.
탑승자중에는 동양인도 있었다. 3등실에 탑승한 중국인 8명[61]과 2등실에 탑승한 일본인 철도공무원 호소노 마사부미(細野正文)[62]가 있었는데, 이들 중 중국인 6명과 일본인 1명이 구조되어 생존률은 꽤 높았던 편이었다.
생존한 중국인들 6명중 4명은 마지막 구명보트에 뛰어내려 탑승했고, 한명은 수영해서, 다른 한명은 5등 항해사 로우가 침몰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구출됐는데, 2017년이 되어서야 다큐멘터리로 이 중 몇 명의 행방이 밝혀졌다. 모두 홍콩 출신으로, 그들은 이전에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하는 화물선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타이타닉 3등선 티켓을 끊어 미국으로 이주하던 중이었다. 이 중국인 생존자들은 한동한 잊혀져 있다가 2017년이 되어서야 다큐멘터리로 몇 명의 행방이 밝혀졌다. 잊혀진 이유는 당시 미국의 중국인 노동자 배제법으로 미국땅을 밟자마자 금방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필 중국 노동자 배제법이 시행되는 동안 미국에 도착했다. 1882년부터 1943년까지 이 법은 중국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이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다른 생존자들은 뉴욕에서 환영을 받고 언론에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중국인 생존자 6명은 24시간 내에 뉴욕에서 추방되어 역사에서 거의 사라졌던 것이다. 이들은 쫓겨난 뒤에도 계속 북미에서 살았고, 평생 이 문제로 추방당할까봐 숨어살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여성과 아이만 탈 수 있었던 구명정에 숨어타서 수치스럽게 살아남았다는 인식 때문에 나서지 않은 것도 있다. 중국에서도 이들의 존재와 생존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일본인일본 철도계의 관료였으며 일본 국내에서 선정한 제 1회 철도원 재외 연구원으로 발탁되어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향하던 귀로에서 사건과 조우했는데, 같은 타이타닉 생존자인 영국인1912년 출판한 'THE LOSS OF THE SS.TITANIC'이라는 수기에서 "다른 이들을 제치고 구명정에 억지로 타려는 일본인이 있었다"라는 증언이 일본 국내에도 퍼지게 되어 '여자와 아이를 우선으로 구한다'라는 원칙을 무시했다는 둥, 사무라이들은 전쟁에서 목숨을 바치고 돌아왔다는 둥 귀국하고도 언론등에게 갖은 욕을 먹었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해고되어 불운하게 생애를 마감했다. (여장을 했다는 낭설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1997년에서야 '다른 사람을 밀치고 억지로 탑승한' 동양인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63]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가 탑승한 구명정 근처에 더 이상 여자와 어린이가 없어 항해사가 2명분의 자리가 아직 남아 있다고 소리쳐 그걸 듣고 탑승했다는 것이 드러나 수십년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호소노 본인도 구명정에 탄 후 너무나 참혹하고 끔찍한 기분이었다고 수기에 기록하였고, 일본에 돌아오자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 그는 죽는 날까지 타이타닉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신문사에서 승객 전원 구조 오보가 나오기도 했다.예시

6. 종합


'''참사의 원인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빙산 경고 메시지가 선장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항로를 바꾸지 못했다. 게다가 배는 당시 전속력으로 가는 중이었다.
  • 쌍안경함 열쇠를 항구에 두고 왔고, 탐조등과 달빛도 없었던 데다가 파도까지 잔잔해서 견시들이 맨눈으로 식별하기 매우 어려웠다.
  • 게다가 빙산의 대부분은 바다 밑에 있기 때문에 알아냈을 때는 늦었다.
  • 리벳 또한 불량이었다.
  •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배인 캘리포니안 호의 유일한 통신사는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에게 일침을 들은 후 초과 근무로 피곤해서 침몰 당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 선원들과 승객들 사이에 대피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선장과 상선사관들도 난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혼란을 겪었다. 그나마 있던 대피 훈련 계획도 예배로 인해 취소되었다.
  • 배 밑에 위치한 3등실 승객들이 복잡했던 선내 구조와 혼란한 상황 속에 탈출하는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나중에는 대부분 어떻게든 나오긴 했지만 이미 상당수의 구명정이 떠난 상태였다.
  • 구명정의 정원이 탑승객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합법적이었는데, 당시 영국법이 구명정을 사람 수가 아니라 톤 수에 맞추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법은 사고 이후에야 개정되었다.
  • 그럼에도 많은 구명정이 꽉 채우지 않은 상태로 보내졌다.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랄 판에! 20척의 구명정에 전원을 채웠으면 절반인 1100명, 전원을 초과해 탑승시켰다면 이론적으로 1,500명을 살릴 수 있었다. 즉 가장 이상적인 구조활동이 진행됐다면 생존자 수와 사망자 수가 서로 반대로 나와야 했다.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자 총체적 난국이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순간 멈춘 세계 유일의 회중시계가 현재 강릉시에 위치한 정동진시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7. 사고의 영향


최신 과학기술로 만든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문명의 진보에 낙관적인 희망을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 낙관은 2년 후 발생한 제1차 세계 대전에 의해 확인사살된다. 타이타닉호의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3명에 달해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64]이다. 생존자는 711명에 불과하다.
물론 711명도 많지만 전체의 100%중에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니 약 30%~40% 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의 안전성 확보를 국제 조약의 형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14년 13개 주요 해운국 회의에서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 통칭 SOLAS)' 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65] 당시 선박에 적용되는 안전규정이 얼마나 엉터리였냐면 당시까지도 해상법에 있어 가장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영국법에서도 구명정의 설치 기준은 선박의 정원이 아닌 배수톤수에 맞춰져 있었을 정도다. 화물선은 몰라도 여객선에서는 구명정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여객선들이 충분한 구명정을 싣고 다니도록 개정이 되었는데 1915년에는 SS Eastland라는 여객선이 추가된 구명정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전복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또 미국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에 무선 통신 장비가 의무화, 무선 통신이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국제 빙산 탐색대(International Ice Patrol)가 창설되었고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긴급 상황을 의미하는 통신용어 메이데이(mayday)가 이때 등장한 표현. "구해 달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인 'venez m'aider' 의 뒷부분에서 몬더그린 현상이 일어나면서 생긴 단어이다. 또 하나의 같은 의미인 통신부호 SOS도 타이타닉에서 유래됐다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타이타닉호가 초기에 SOS를 쓴 선박 중 하나인 건 맞다. 항목 참조.
타이타닉은 영국의 로이드 보험사에 손해보험을 들었는데, 배가 침몰하면서 로이드는 보험금으로 140만 파운드를 지급했다. 원화로 환산하면 25억원 정도인데 1912년 당시 화폐가치를 적용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지급된 것이다. 어마어마한 보험금 때문에 타이타닉 침몰 사고가 보험사기라는 음모론이 나오게 된다.
한편 타이타닉호의 회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은 침몰 이후 먼저 취역한 자매선인 올림픽호를 흘수선 아래 측면을 이중 선체로 보강하고, E 갑판까지만 올라와 있던 방수 격벽을 일부는 메인 갑판, 선실 구획은 B 갑판까지 보강하고, 그 후 건조된 브리타닉호는 건조 중 보강을 하여 취역시켰다. 브리타닉호는 병원선으로 징발되었고 1916년에 에게 해에서 기뢰의 폭발로 인해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브리타닉은 구명정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어 탑승자 대부분이 살아남았지만, 선장이 배를 좌초시켜 보겠다고 무리를 하다 기관을 제 때 정지시키지 못해 구명정 1척이 침몰할 때까지 계속 돌던 스크루로 빨려 들어가 3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후 화이트 스타 라인은 큐나드사에 인수합병되어 지금의 큐나드사가 되었다.
같은 해 같은 날이 김일성출생한 날이다 보니, 북한에선 교과서 등에 이를 어거지로 엮어 서구 자본주의가 망하고 주체 사상이 흥할 징조라는 식의 고인드립을 서술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한때 김일성은 '''타이타닉호 침몰 희생자들의 환생'''이라고 불린 적도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생전에 저지른 기행으로 인해 고인드립 취급될지도 모른다. 사실 그전에도 남은 유가족들이 여기에 대해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8. 영웅들과 저명인사들


승객들을 구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아 충분히 구명정에 타려고 하면 탈 수 있었지만 모범을 실천하며,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한 영웅들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영화 타이타닉에도 등장한다. 타이타닉(영화)/실존인물 내용을 어느 정도 참고할 것.
  •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구명정에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에 남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조타실 문을 잠그고 침수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설과 다른 선원들과 함께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 물에 휩쓸려 가라앉았다는 설 등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목격되기 직전까지 구조에 힘썼다고 하며, 끝까지 배에 남았기에 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한다의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선장 그리고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의 선장 프란시스코 스케티노와 여러모로 대비되는 분이다.
  • 배의 설계자인 토머스 앤드루스는 승객들의 구명정 승선과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돕다가 1등실 흡연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흡연실에 고귀하게 남기로 한 사람은 앤드루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1등실) 승객들도 있었다. 어떤 승객들은 카드 게임을 계속했으며 당대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T. 스티드는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들 또한 모두 가라앉는 배에서 품위있는 최후를 맞았다.
  • 흡연실에 있던 1등실 승객들 중 윌리엄 스티드는 세계 언론 역사상에서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인데, 바로 현재의 인터뷰 기법 기사를 사상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과의 인연도 특별한데, 1907년 대한제국 고종의 헤이그 특사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대한제국의 처지에 개인적으로 동정을 보이는 각국 대표단들은 많았지만 러시아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대표단들은 자국의 계산된 국익을 따라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다. 오직 스티드만이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을 거절당한 헤이그 특사 인터뷰를 당시 특별 발행되던 '만국 평화 회의보'에 실어주었으며, 그만큼 파급력이 컸다. 스티드는 이후에 헤이그 특사와 국제 기자단간의 기자간담회도 성사시켰으며, 이들 덕에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헤이그 특사 관련 보도가 그나마 남아있는 편이다. 자기 구명조끼도 타인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 기관장인 조지프 G.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기관부들과 화부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2분 전, 그러니까 배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상선사관들 중 항해사들과 달리 기관사들은 전원 순직했다. 이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고군분투 했는데 전속항해 중이던 타이타닉의 기관이 달아오를대로 올라있어서 여기에 차가운 해수가 닿으면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사고가 난 시각이 밤이었기에 전기가 없다면 구조를 위해 달려오는 타 선박들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고, 승객들의 안전한 탈출 또한 불가능했다.
  •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8명의 악단[66]은 배가 침몰하기 불과 10분 전까지 곡을 연주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빈 후 헤어진다. 이때의 연주는 이들의 생애 마지막 연주가 되고 말았다. 이후 악단원 중 유일하게 월리스 하틀리만이 그의 바이올린과 함께 시신이 발견되었으나, 시신을 인양한 이후와 타이타닉 잔해 및 기록의 최초 발견 이후에도 그 바이올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이타닉과 함께 심해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으나, 2006년 영국에서 하틀리의 마지막 바이올린이 나타나면서 추측이 깨지게 되었다. 이후 7년간 검증하면서 진품이라고 확인되었으며, 2013년 10월 19일 영국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90만 파운드(약 15억 5,000만원)에 판매되었다. 이 부분은 2015년 6월 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어졌다. 유일하게 시신이 수습된 윌리스 하틀리는 고향인 잉글랜드 콜른에 묻혔다.
  • 2등실 승객이었던 가톨릭 사제 토머스 바일스 신부는 구명정 승선을 거절하고 배 밑까지 내려가 사람들의 구명정 승선을 도왔고, 다른 신부 2명과 함께 구명정을 타지 못하고 죽을 운명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갑판 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다가 선종했다. 이 때,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심지어 유대교 신자까지 종파를 가리지 않고 같이 기도했다는 증언이 있다.
  • 역시 2등실 승객인 개신교 존 하퍼 목사는 침몰 전까지 전도를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소천했다. 마지막으로 전도한 청년은 구출된 후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됐고, 그 청년의 간증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존 하퍼 목사는 39세의 일기로 영국 런던의 덴마크 힐에 묻혔다.
  • 탐정 밴 두젠 시리즈를 내며 인기를 끌던 추리소설가 잭 푸트렐도 1등석 승객으로 이 배에 탔다가 같이 갖고 탄 6편의 미발표 원고와 함께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아내였던 릴리 메이 푸트렐(결혼전 성은 필(peel))을 구명정에 태우고 자신은 배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은 자신은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 현지처였던 프랑스 가수 Léontine Pauline Aubart와 하녀를 구명정에 태운 후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신사답게 가라앉겠다며 자신의 방에서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비서 빅터 기글리오와 함께 "우리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67]라고 선언하고,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고, 아내와 딸에게 자신은 나의 의무를 다했다고 전해달라고 전하면서 쪽지 하나를 남겼다.[68] 그의 딸 페기 구겐하임이 여기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콜렉션한 예술 작품들이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구겐하임과 비서 기글리오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으나, 철강업자 답게 본인이 소속된 철강업의 회사장으로 장례가 치뤄졌다고 한다. 카메론의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정장 차림으로 실크햇을 쓰고 중앙 계단의 의자에 앉아 와인을 즐기다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시가를 피우는 장면은 심의 때문인지 등장하지 않았다.
  • 1등실 탑승객 중에서도 가장 부자였던 사람은 부동산 업자 존 제이콥 애스터 4세였다. 그는 당시 불과 19세였던 새 신부 매들린[69]과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다 귀국하는 길에 참변을 당했다. 매들린을 구명정에 태운 후[70] 승객들을 대피시키던 선원 한 명이 애스터에게 보트에 타라고 하자, 애스터는 일언지하에 "사람이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며 구명보트 탑승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다. 이후 생존자들과 함께 옥상 갑판에 있던 접이식 보트를 띄우려고 노력하다가 익사로 사망했다. 배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쓰러지는 연통에 깔려 다른 일부 희생자들과 함께 사망했다는 잘못된 증언이 있었는데[71] 목격자들에 의하면 실제 사인은 익사였고 발견된 시신도 멀쩡한 편이었다. 옷의 이니셜과 회중시계로 신원 확인이 가능했으며 맨해튼의 트리니티 교회 묘지에 묻혔다.
  •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었던 메이시 백화점[72]을 소유하고 있는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이 좋은 노부부였다. 이지도르 스트라우스가 구명정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아내인 아이다 스트라우스도 선원의 구명정 승선 제안을 거절한 다음 하녀 엘렌 버드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정에 태운 뒤 남편과 함께 운명을 맞았다. 이지도르 스트라우스가 승선을 거부한 건 노블레스 오블리주 때문이었다. 주변에 있던 지인이 노부부가 함께 승선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함께 승선하라고 권유했고, 실제로 여성과 아이들만의 원칙이 비교적 철저히 지켜진 좌현에서조차 노년의 남성은 적은 수나마 항해사의 허락 하에 태워졌지만, 이시도르는 "나는 다른 이가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네." 라고 말하며 승선을 거부했다. 참고로 이때는 아직 배의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구명정에 타기보다 배에 남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였지만 아이다 스트라우스가 엘렌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며 "나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했으므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타이타닉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 내용은 2016년 3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되었다. 이시도르는 유일하게 시신이 화장되어 브루클린의 가족 묘에 안치되었으나 가족묘의 부인을 위한 유골함은 비워져 있다고 한다.
  •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둘 다 마르코니 사 직원들이었다)들도 선장이 이만 물러나가도 좋다고 한 후에도 퇴선하지 않고 가라앉아가는 통신실에서 끝까지 남아 전파를 보냈다. 이 중 해럴드 브리드는 살아남았지만 잭 필립스는 순직했다.
  • 남편이 금광을 발견해 하루아침에 떼부자가 된 1등실 승객 마가렛 토빈 브라운(몰리 브라운)은 구명정에서 가장 앞장서서 노를 저었으며 생존자를 구조하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조타수 히친스(충돌 당시 배를 맡고 있기도 했다)는 거절했고, 히친스가 자꾸 구조를 반대하자 계속 그렇게 구시렁대면 바닷속에 쳐넣어 버리겠다고(...)말했다고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사교계에서 졸부 취급받던 몰리 브라운은 이 당시 영웅적인 구조 활동으로 이후 사교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고, "가라앉지 않는(unsinkable) 몰리"가 그녀의 별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도 대공황기를 겪으며 그렇게 순탄치는 못했으며, 몰리 브라운의 삶은 이후 1964년 사랑은 비를 타고의 데비 레이놀즈가 주연을 맡아 영화화되기도 했다. 타이타닉 영화에서는 어째서인지 저 바다에 처넣어 버리겠다는 대사를 거꾸로 몰리가 아닌 히친스가 말한다.
  • 3등실 승무원 존 에드워드 허트는 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길을 잃어 헤메는 3등실 승객들을 배 밖으로 안내했다. 허트는 다행히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5등 항해사 헤럴드 로우는 침몰 직후 유일하게 익수자들을 구조하러 간 항해사였다. 선내 항해사들 중 서열은 6등 항해사 무디(사망) 다음인 매우 낮은, 생존 항해사들 중 막내였으나, 괄괄한 성격 답게 자신이 지휘하는 구명정 3척을 소집해 2척에 승객들을 전부 옮기고, 선원 3명과 구조작업을 지원한 남성 승객 1명과 함께 침몰 현장으로 구명정을 몰고 갔다. 총 5명을 현장에서 구조했고, 이 공로로 귀환 후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2년 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영국 해군 장교로 복무, 중령까지 진급했다.
  • 상선사관 중 가장 막내였던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는 가장 후임이니까 구명정에 타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선임 로우에게 양보했고, 배에 남아서 죽었고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다.
  • 타이타닉은 당시 다른 여객선들과 마찬가지로 우편 운반선이기도 했으며, 등기우편물 200개를 포함해 3364개의 우편행낭이 적재돼 있었다. 이 우편행낭의 처리를 위해 미국 우편원 3명, 영국 우편원 2명이 탑승했으며, 타이타닉의 우편원들은 모두 우편원 생활 15년 이상 된 베테랑이었다. 이들은 빙산 충돌 당시 미국 우편원 오스카 스콧 우디의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배가 침수되기 시작하자 곧장 우편행낭을 쌓아둔 방으로 내달려 그곳에서 우편행낭들을 꺼내 갑판 위로 옮기기 시작했고, 물이 발목 위로 점점 차올라 위험이 고조됐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다른 선원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만류해도 묵묵히 일을 계속한 뒤 가라앉는 배에서 최후를 맞았다. 생일이 사망일이 된 우디는 이들 중 유일하게 시신이 수습됐고, 시신에서 현장에서 목숨을 바쳤음을 보여주는 유품인 우편물의 행선지를 표시해 주는 전표가 발견됐었다. 타이타닉이 운송하던 7,800,000여 통의 편지들 또한 수장되었다.
  • 로테스 백작부인은 미모로 명성이 높은 젊은 귀부인이었다. 침몰 당시 여성이고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노를 열심히 저었고 이 동안 선원들과 3등실 승객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으며 구조된 후에도 음식과 담요를 나눠주는 등 가난한 승객들을 보살펴 모든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 생존하지 못한 4명의 1등실 여성 승객들 중 한 명인 에디스 에반스는 1등실의 승객으로 마지막 구명정이 내려질때 자신도 탈 수 있었지만 가족이 있는 여성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배에 남아 생을 마감했다.
  • 허쉬 초콜릿의 창립자인 밀튼 스네이블리 허쉬가 부인과 함께 탈 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정이 앞당겨져 다른 배를 탔다고... 그의 타이타닉 호 티켓은 현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 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 끝까지 남아 운명을 함께하거나 구명정에 탑승해 열심히 생존자들을 도왔다.
각 생존자들의 디테일은 이 문서보다 본 항목 상단에 언급된 타이타닉(영화)/실존인물 항목에 훨씬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참고바람.
[1] 타이타닉 소재의 VR게임 개발의 일환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2] 타이타닉호의 높이는 배 밑바닥으로부터 굴뚝 위까지 52.2 m이고 빙산은 수면 위로 1/10만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수면 아래에 충돌할 위험이 높다. 바로 앞에 링크된 '빙산의 일각'이란 말도 이러한 사실에서 유래된 것이다.[3] 당시에는 이미 탐조등이 상용화된 시대였는데, 어째서인지 타이타닉호에는 이게 설치되지 않았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상당하다.[4] 명령은 우현전타(Hard Starboard)였는데 틸러(Tiller) 명령법에 따른 것이다. 당시 항해술의 원류던 범선에서 기인한 조타술은 진행방향과 조타지시가 반대였다. 즉 당시의 우현전타(Hard Starboard)는 좌현(Port side/Larboard)으로 배를 최대한 꺾으라는 말이 된다. 언뜻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이 조타술은 노잡이가 방향타를 직접 밀고 당기며 방향전환 하던 것에서 기원한 명령법으로 오늘날에도 소형 보트 등에서 사용되며 헷갈리지 않게 'Wheel to~'를 덧붙여 명령하도록 보완되었다. 위키피디아 <Tiller> 항목참조[5] 타이타닉 시절은 이런 틸러 명령법이 자동차 핸들처럼 선체의 진행방향을 기준으로 조향하는 러더(Rudder) 명령법으로 변하던 과도기이다. 타륜이 17~18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이에 맞는 러더 명령법은 20세기가 돼서야 표준화되었는데 이는 제도와 관습이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 지체 사례 중 하나이다. 영화 타이타닉(1997)에서도 이런 점들을 고증해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참조1 참조2[6] 최근 들어 당시에 조타수가 이런 조타법의 과도기에 따른 혼란으로 타륜을 잘못 조작해서 빙산과 충돌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당시 청문회 결과와 대치되는 유족 한명의 증언이 근거의 전부이며 영국은 다른 국가들이 19세기 말 러더 명령법으로 바꿀 때도 일관성과 전통유지를 위해 국제 표준이 정립된 1933년까지 틸러 명령법을 유지했으므로 영국선적인 타이타닉의 숙련된 조타수가 명령을 오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7] 선교에서 선원들이 레버를 움직이며 조작하는 끼링끼링거리는 원형장치이다.[8] 일설에는 정지(Stop Engine)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다수설은 전속 후진이다. 앞선 언리얼 엔진 재현 영상은 정지설을 따르고 있다.[9] 타력 유지 측면에서 후진보다 정지가 선회에 유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대로 후진을 걸지 않았으면 충격력이 높아져 더 큰 파손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황상 빙산과의 거리를 육안으로 확인한 1항사 머독이 회피가 어렵다고 보고 가볍게 스치는 경충돌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됐든 다수의 전문가는 빙산을 너무 늦게 발견했으므로, '''어떠한 조치에도 침몰을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10] 타이타닉은 배의 크기에 비해 방향타가 작았고 총 3기의 프로펠러 중 중앙 프로펠러는 후진이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한 느린 기동에 플리트는 항해사가 본인의 경고를 무시해 늦게 대응한 것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이렇듯 선박자체가 둔함에도 통상 절차로 빙산회피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전속항진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11] 마찬가지로 명령은 좌현전타(Hard Port)[12] 배는 뒤부터 돌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우측면이 다 긁힌다.[13] 또는 반속 전진(Harf Ahead)[14] 보일러실 2호, 6호와 우편실이 침수한것을 확인[15] 1958년 타이타닉 소재 영화 <A Night to Remember>에서는 타이타닉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가 설계도면을 챙겨와 브리핑하는 모습으로 연출되었으며 타이타닉(영화)에서는 아마도 1958년작을 오마주하여 비슷하게 연출했다. 이것은 관객들에게 도면을 보여주며 이해를 돕기 위한 연출일 뿐 실제로는 매우 짧은 시간안에 각 구획 피해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으며 거의 암산으로 예측했다.[16] 영국왕립기상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기상>의 2020년 8월 4일 발간지에 등재[17] 타이타닉호가 구조요청을 발신한 것이 0시 15분이고 카파시아호가 수신한 것이 0시 25분이다. 백번 양보해 즉각 수신했다고 하더라도 10분의 차이밖에 발생하지 않으며 10분 일찍온다고 참사를 막을 순 없었다.[18] 금속이 외부 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유연하게 변형되는 성질.[19] 북극해 주변이라는 소리가 있으나, 사고 지점은 북위 41° 44′, 서경 49° 57′으로 북극해와는 거리가 멀다.[20] 연철항목의 첫째 사진의 검정색 줄무늬가 바로 슬러그이다.[21] CQD는 현재 SOS로 대체되기 전 사용되던 조난신호이며, MGY는 타이타닉호의 콜사인이다.[22] CQ= sécurité, 뜻은 보안, 안전. 용도는 모든 기지국 호출, D= Distress, 조난. 둘을 합쳐 구조요청이 된다. 프랑스어 sécurité의 줄임말인 sécu를 음이 비슷한 두개의 알파벳으로 짧게 정리하여 무선통신에 용이하게 한 CQ와 조난이라는 뜻의 영단어 Distress의 앞글자를 합한 신호이다.[23] 이 사건으로 인해 타이타닉 사고 이후 무전을 상시 켜놓고 교대근무를 통해 통신사가 항상 대기하도록 하는 국제규약이 생겨났다.[24] 이것때문에 침몰 후 조사과정에서 빡친 에반스가 의도적으로 SOS 무전을 무시한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애반스 본인이 "그렇게까지 화가 난것은 아니였다."라고 증언하면서 아닌것으로 판명났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SS 캘리포니안호에는 통신사가 애반스 혼자 뿐이였고 혼자서 24시간 내내 근무할수가 없으니, 한마디로 통신사가 퇴근해버린 것.[25] 뉴펀들랜드 섬 남단에 위치한 통신소. 당시 대서양을 오가는 선박들의 통신 중계소 역할을 담당했었다.[26] 위 그림에 나와있다시피 동시에 증기를 뿜어냈는지라 소음이 엄청났을 것이다.[27] 왜 뒤쪽의 하나는 놔두고 3개의 연돌에서만 뿜었나? 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타이타닉호의 4개의 연돌 중 뒷쪽의 하나는 장식용으로 보일러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배가 거대해 보이기 위해 쓴 꼼수.[28] 타이타닉 영화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선장은 "Yes...Women and children first"라고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라이톨러는 승객들에게 "Women and children ONLY"라고 말한다.[29] 영화판에서는 구명정을 좀 더 올릴 수 있었지만 '''1등칸의 미관상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으나 사실 무근이며, 영국 리버풀 해양박물관에 타이타닉 관련 진실과 거짓이란 내용에서 구명정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Titanic carried 16 ilfeboats and four collapsoble boats.This was more than required by law in 1912, but not enoungh to carry every person on board." 라고 적혀 있다. 번역하면 타이타닉은 16개의 구명정이 있었고 1912년 당시 안전기준보다 많은 구명정이 실려있었다. 하지만 탑승객 전부를 태우기엔 부족했다.[30] 영화에서는 앤드루스가 구명정에 승객을 태우던 2등 항해사 라이톨러를 붙잡고 '''성인 남성 70명 태워도 잘 뜬다'''며 다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라이톨러가 기가 막혀하며 "한 구명정은 12명밖에 안 태우고 있었는데요!"라고 하는데 이는 실화다. 귀중한 생명을 50명은 더 살릴 수 있었던 기회가 교육 부재로 날아간 셈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구명정 절반 가량이 승객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이미 바다로 내려간 상황이었다.[31] 물론 결과적으로 이는 기우였다. 침몰이 가까워졌을때 구명보트들은 정원을 꽉꽉 채워 내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정원을 5명 넘긴채 내려간 보트도 있었으나 이 중 뒤집힌 보트는 없었다. 라이톨러를 포함해 배에 빠진 탑승인원들이 간신히 메달려 살아남은 뒤집힌 간이용 구명보트는 보관장소에서 내리는 과정에서 사고로 뒤집혔고, 그 무게와 상황 때문에 결국 다시 뒤집지 못하고 둥둥 떠내려가던 것에 생존자들이 메달린 것이다. 즉, 6,70명씩 태운 구명보트들도 무게 때문에 뒤집힌 건 없었다. 구명정 정원이 몇명인지라도 교육이 이뤄졌으면 생존자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32] 물이 보일러에 접촉해 폭발하는 원리가 궁금하다면 보일러 항목을 참고하자.[33] 심지어, 빙산 충돌시 타격받은 부위가 그 손상부 근처라서 선체의 함몰 규모가 더욱 커졌다는 가설까지 포함하는 내용인데(관련 기사), 이 주장은 2017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영상[34] 이들 선원들은 배의 침몰 상황시 맡게 되는 임무가 지정된 구명정을 맡아서 승객들을 인솔해 대피시키는 것이었기에 타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은 구조 후 빙산 충돌 당시 상황을 증언할 의무가 있었다. 멋도 모르는 이들은 이렇게 살아남은 선원들이 비겁자라 구명정을 선점해 동료들을 버리고 자신들이 탔다는 헛소리를 하기도 하지만.[35] 책임 회피를 피하기 위해서 캘리포니안 호에서 본 배의 정체가 타이타닉이 아니란 설도 제기되었으나 이 시간에 해당 해역에 다른 배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기각되었다.[36] "빙산이 많은 바다"를 진짜 음료수에 얼음이 둥둥 떠다니듯 넘쳐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망망대해에서 빙산이 많고 찾기 힘들다는 것은 타이타닉처럼 몇날며칠동안 고속으로 달리다보면 부딫힐 지도 모른다는 수준이지 진짜 속도를 못 낼 정도로 많다는 건 아니다. 당시 타이타닉은 견시 두명 밖에 없었고 선원들이 슬슬 퇴근하던 늦은 밤이라 긴장이 다들 풀렸고,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엄청난 고속(23노트)의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빙산을 너무 늦게 발견한 것이다. 타이타닉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나게 빠른 배였는데, 만약 카파시아가 타이타닉의 속도로 왔다면 배가 침몰하기 전에 도착하는게 가능했을 정도였다. 캘리포니안은 전속력을 내봤자 타이타닉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데, 그 정도는 "너무 빨라서 빙산을 발견하지 못할까" 우려되는 수준은 아니다. 물론 당시 해양 항해기술의 한계상 충돌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빙산이 무서워 속력을 못 낼 정도는 아니었다. 12노트(22km)면 마라톤 세계신기록 보유자의 평균 달리는 속도(20.9km)보다 조금 빠른 수준이다.[37] 정원 40명의 보트에 25명이 타고 있었다.[38] 부인은 살아남았지만 이혼했다.[39] 선교 위에 선원들의 업무용으로 탑재되어 있던 접이식 보트 2척 제외.[40] 구겐하임 미술관을 개장한 솔로몬 구겐하임의 동생이다.[41] 영화에서 묘사된 선체의 기울기는 거의 45도에 육박할 정도로 가파르지만 실제로는 18~23도 수준으로 생각보다 완만했다. 그래도 사람이 20도 이상 기울어진 경사에 서면 굉장히 가파르다는 느낌은 받게 되며, 나무로 된 갑판은 꽤 미끄럽다.[42] 당연한 얘기지만 보일러의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면 급속도로 증발하면서 생긴 수증기로 인해 압력이 급격히 설계상 한계치 이상까지 높아져 '''터져버린다.''' 당장 현대의 가정용 보일러 폭발사고도 이게 원인인 경우가 있다.[43] 작은 균열이 1시 55분에서 2시 사이에 생기고 있었다고도 한다.[44] 영화 타이타닉에선 3번째와 4번째 굴뚝 사이가 갈라지는데 이는 영화 제작 당시인 1990년대 중반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성공 이후에 타이타닉도 재조명되면서 많은 조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영화 제작 당시와 달라진 점이 생긴 부분이다.[45] 후일 해저탐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영화에서는 선미부가 수직으로 기울어진 채 한동안 버틴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것은 영화제작후의 연구결과로 실제와 다른 것으로 확인된 부분이다. [46] 액체에 다른 물질이 용해되어있을 경우 어는 점이 낮아진다. 바닷물에는 소금이나 다른 무기물이 있으니 어는 점이 더 낮아진다.[47] 1958년판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수록되었다. 한 남성이 B호정에 접근하자 이미 올라탄 사람들이 저지하였고, 이 말을 하고 나서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갔다. 아직 보트 주위에 있던 라이톨러가 돌아오라고 소리쳐보지만.... 1997년판 영화에서는 이 사실을 따온 장면이 촬영되었다. 단, 본편에선 삭제되어 미방영 장면 모음으로만 볼 수 있다. 알려진 이야기와는 좀 다르게 전복된 보트가 아닌 로즈와 잭이 매달린 판자로 헤엄쳐 오다 잭에게 제지당하자 위 대사를 남기고 순순히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간다.[48] 괄괄한 성격으로 나온 5등 항해사 로 마저도 그 모습을 보고는 자조섞인 목소리로 너무 늦었다며 한탄한다. 물론 바로 뒤에 마음을 다시잡고 휘하 구조대원들에게 큰 목소리로 더 샅샅이 찾아보라고 소리친다.[49] 카파시아는 다른 곳의 전력과 난방까지 아끼며 미친듯이 달려 3시간 반만에 왔는데, 원래 추정했던대로 최고속인 15노트로 달렸을 경우 소요 예정시간은 네 시간으로 딱 30분 차이가 난다. 카파시아가 무리해서 운항한게 라이톨러와 B호정 생존자들을 살린 셈.[50] 타이타닉 100주기 ngc 다큐멘터리에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마치 항공기 추락현장을 보는 듯 하다고 언급했다.[51] 이중저란 선저 파손사고시 해수의 유입을 막도록 이중으로 만든 바닥인데 이 부분이 두 동강이 난 뒤에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 선수부분이 선미부분을 잡아당기게 만든 것이다.[52] 평소 운항시 최고 속도는 물론이고 공식 스펙(테스트 속도)인 15.5노트보다 오히려 빠른 속도였다. 순항 속도가 21노트에 달하고 최고속도는 23노트인 타이타닉이 당시 여객선 중 얼마나 빠른 배였는지 알 수 있다.[53] 방금 타이타닉 호의 침몰에서 겨우 살아났는데 타이타닉과 똑같이 생긴 배에 타라하면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인 사람들이 옮겨 탈 리가 없다.[54] 죽다 살아나서 바닥난 체력과 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인해 혼이 반쯤 빠진 생존자들에게 무턱대고 인터뷰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큰 실례다. 일례로 세월호 사고 당시 한국에서는 생존자들에게 무턱대고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고, 물어본 질문의 수준까지 떨어지는 기자들의 행태가 질타를 받았다.[55] 함부로 수장을 하다가는 유가족들의 큰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설명을 하고 수장 장례를 치르도록 동의를 구해야 했다.[56] 이는 승선객 명부에 따른 수치이며 돌발상황 등으로 인한 변화내용은 반영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57] 여담이지만 충돌 당시 타를 잡았던 로버트 히친스는 지휘를 맡은 6번 보트에서 여러 병크를 저질러 악명이 높다. 배로 다시 오라는 선장 명령을 거부한다던지, 엉뚱한 소리로 사기를 쳐지게 한다던지...자세한 내용은 타이타닉(영화)/실존인물에 나온 실존인물의 행적 참고. (영화에선 이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리더 역할을 하며 탑승자들을 격려해준건 Unsinkable 몰리 브라운이었다.[58] 한국사람들이 흔히 방문하는 대중목욕탕 냉탕의 수온이 15도 전후이다. 이 정도 수온만 되어도 전신을 담그고 있을 경우, 5분도 지나지 않아 나가고 싶은 매우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59] 위도는 북위 41º 44'에 불과하지만 빙산이 떠다니는 -2℃의 수온이면 '''맥머도 기지 앞바다의 겨울 수온'''과 비슷한 수준이다. 동 위도에 있는 청진 앞바다와 하코다테 앞바다의 4월 수온은 6℃ 전후로 빠지면 역시 30분 안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건 똑같지만 타이타닉이 가라앉은 곳보다는 훨씬 수온이 높다.[60] 공교롭게도 이 때 올림픽 호의 선장이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이었는데, 조사 결과 올림픽 호의 과실로 결론났으나, 선원들의 힘으론 불가항력이었다고 결론나서 딱히 책임을 지거나 경력에 흠집이 나진 않았다.[61] 10명 이라는 기록도 있다. 앞서 언급 되었듯 타이타닉 탑승자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62] 이 사람의 손자가 일본 팝 역사계의 레전드라 불리는 핫피 엔도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멤버 호소노 하루오미다. 때문에 하루오미 본인도 타이타닉 사건 관련인으로 간간이 등장하는 편.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사망한지라 실제로 만났던 기억은 없다고 하나, 어쨌든 유족이므로 2012년 사건 100주년 당시 피해자 위령비가 있는 핼리팩스에 가서 행사에 참석했다고 한다.[63] 생존자 중 한 명인 Choong Foo라는 이름의 인물로, 영국인의 수기에는 13호정이라고 쓰여있었으나 일본인이 탄 구명정은 다르다.[64] 자연적 재해 분야 최대 선박 사고 사망자이다. 다른 사고로는 1945년 한국인 수천명이 죽은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 같은 일이라든지 4천명 이상이 죽은 1987년 12월 필리핀 도냐 파즈호 침몰 사고 같은 비극이 있다. 사망자 수가 타이타닉 4배 가까이 된다. 사상 최악의 단일 선박 침몰 사망숫자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1945년에 발트해 연안에서 후퇴하던 독일 국방군과 피난민을 태우고 가다가 소련 잠수함에 침몰. 최대 1만 명이 넘게 타고 있었다고 하는데 2,000명 정도가 구조. 게다가 장교들이 사람들을 가둬두는 바람에 탈출도 늦어졌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별 의미는 없었겠지만.), 고야호(같은 지역에서 침몰. 이쪽은 6,000~8,000명은 넘게 타고 있었는데 그 중 180명 정도만 생존). 소련의 아르메니아호(소련의 흑해 정기 유람선이었다 징발된 병원선으로 루프트바페He 111 폭격기어뢰에 의해서 격침되어 최소 5,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나 병원선중에서는 가장 큰 인명피해를 기록했다.) 등이 있으며, 아르메니아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병원선 격침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 기록 또한 1950년에 깨질 뻔했다. 흥남 철수작전 당시 14,500명의 군인 및 한국인 피난민들을 수송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해당 선박으로, '''탑승한 한국인 피난민들이 항공유 드럼통 위에서 모닥불을 피웠다.'''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는 300톤의 항공유가 적재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불이 붙었을 경우 14,500명 전원이 폭사해 1,513명이 사망한 타이타닉호는 물론 9,343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기록도 밀어냈을 것이다.[65] 이 조약은 수없는 개정과 보강을 거쳐 현재까지도 효력이 지속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 중 하나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해상 규약 역사에는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SOLAS와 함께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인 MARPOL(선박에 의해 발생하는 해양 오염을 규제하는 규약) 역시 사상 최악의 유조선 침몰&원유 유출 사고가 일어나고 나서야 제정되었다. 이뭐병.[66] 이들은 2등실 이용자와 동일한 서비스가 제공됐다.[67] 당시는 아직 여성참정권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가부장제 시대였는지라, 노골적으로 아내를 버리거나 하지 않는 한 정부를 두는 것 정도는 봐 주는게 일반적이었다. 이 시대보다 조금 앞선 벨 에포크 당시를 그린 모리 카오루의 엠마에도 킴벌 자작이 뮤지컬 가수를 정부로 두고 있는 묘사가 등장한다. 이 때문에 타이타닉 시대 여성참정권 운동은 달리는 마차에 뛰어들어 투신하는 등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이 포함된 보통선거는 1924년에 이루어졌다.[68]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답게 죽을 것이오.”[69] 1911년 결혼했으며, 두 번째 아내였다.[70] 다른 항해사 머독이 남는 자리가 있을 경우 성인 남자도 태워보낸 데 반해 라이톨러는 철저히 여자와 어린이만 태우도록 조치했다. 라이톨러는 침몰하면서 뿜어져 나오는 선내의 공기에 의해 튕겨져 나와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영-미 의회 합동 조사단에서 사고 정황에 관해 많은 귀중한 증언을 했다.[71] 영화에서는 주인공 잭 도슨의 친구가 연통에 깔려 사망하는 묘사가 있다.[72] 2009년에 부산 신세계백화점이 더 크게 지어지면서 기네스북 기록을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