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세니오 에리코

 


''' 아르세니오 파스토르 에리코
(Arsenio Pastor Erico)'''

<colbgcolor=#1a5a9f> '''출생'''
1915년 3월 30일/
파라과이 아순시온
'''사망'''
1977년 7월 23일
'''국적'''
[image] 파라과이
'''신체조건'''
183cm/76kg
'''포지션'''
스트라이커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1930~1933)
CA 인데펜디엔테(1933~1946)
CA 우라칸(1946~1947)
클루브 나시오날(1947~1949)
'''감독'''
플란드리아(1948)
클루브 나시오날(1949)
클루브 솔 데 아메리카(1955)
클루브 나시오날(1956)
클루브 솔 데 아메리카(1957)
'''국가대표'''
37경기 17골(파라과이 / 1942~1958)
'''등번호'''
-[1]
1. 개요
2. 선수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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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라과이축구선수 출신 축구감독으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는다.

2. 선수 생활


아르세니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에리코는 아버지에게 이탈리아 쪽의 피를 물려받았다. 11살 무렵부터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뛰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지만 그의 조국 파라과이볼리비아와의 전쟁(차코 전쟁) 때문에 파라과이 리그가 중단되었고 나시오날은 외국으로 투어를 나다니게 되었다.
이 무렵 아르헨티나에서 벌였던 투어 경기를 보고 아르헨티나의 CA 인데펜디엔테CA 리버 플레이트가 에리코의 플레이에 관심을 보였다. 두 팀이 동시에 비드했지만 에리코의 선택은 인데펜디엔테였고 1934년에 데뷔전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1934-35 시즌에는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는 바람에 시즌의 절반을 날렸지만 회복 후 에리코는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두 팀이 동시에 알아본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가장 무서운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쳤다.
인데펜디엔테에서 13년간 활약하면서 3번의 득점왕을 차지였고 통산 득점이 293골로 리버 플레이트앙헬 라브루나와 같은 수치로 역대 아르헨티나 리그 통산 득점 1위에 올라있다. 라브루나가 20년간 올린 득점을 에리코는 13년, 325경기 만에 달성해냈으니 에리코의 득점 기록이 더 빛나는 것은 당연지사. 한편으로는 에리코의 통산 득점 기록은 295골로 아르헨티나 리그 역대 최다 득점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르헨티나인들이 자국인 라브루나의 위에 외국인 선수의 기록이 올라가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일부러 에리코의 기록을 2골 깎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기록을 가진 선수임에도 에리코는 공식 A매치 기록이 없는데 그 이유는 조국 파라과이가 전쟁 등을 겪으면서 코파 아메리카 등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37년 이후에 전쟁을 딛고 파라과이 대표팀이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였지만 인데펜디엔테가 그의 참가를 만류했다.[2] 오히려 1938년 즈음에는 아르헨티나 측에서 에리코에게 귀화 제의를 했지만 에리코가 거절했다.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감독으로 여러 팀을 돌아다녔지만 그리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1977년. 62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의 점프는 최고의 무기였다. 그의 헤딩은 궁수와 같아서 정확히 원하는 곳에 꽂을 수 있다. 그것을 모두 점수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정말로 신사였다."'''

프란시스코 바라요

당시로서는 183cm의 큰 키를 갖고 있었고 탄력이 발군이었기 때문에 인데펜디엔테는 그를 이용한 공중전으로 상당히 재미를 보았다. 슛 테크닉도 매우 뛰어난 선수라 호세 레네 이기타, 라파엘 판데르파르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등이 사용해서 유명해진 스콜피온 킥을 최초로 사용한 선수라고 알려져 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선수 시절 초기에 영향을 준 선수 중 한 명이며, 브라질의 레전드 스트라이커 레오니다스 다시우바, 같은 파라과이 출신이자 보카 주니어스 출신의 공격수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는 그를 역대 최고의 공격수로 꼽았다.

4. 뒷이야기


  • 1937-38년 시즌에 득점왕을 차지할 당시 에리코의 골 수는 43골이었다. 이 골의 기록에는 기묘한 뒷 이야기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한 담배 회사에서 자사 제품인 'Cigarrillos 43' 담배를 선전하기 위해 43골을 득점하는 선수에게 상금을 지급하는 이벤트를 벌였고, 에리코는 43골에 도달한 후 더 넣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43골에 맞추기 위해 득점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5. 수상



5.1.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38, 1939(이상 인데펜디엔테)

5.2. 개인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3회: 1937, 1938, 1939(이상 인데펜디엔테)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에리코의 아르헨티나 생활 동안, 특히 1941년에는 봉급 문제로 에리코와 인데펜디엔테 구단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고 이 때 리베르 플라테산 로렌소 등 여러 팀들이 에리코를 노렸지만 인데펜디엔테는 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