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헬 라브루나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으로 현역 시절 라 마키나의 주포였다.
2. 선수 생활
라브루나의 어릴 적 우상은 베르나베 페레이라였다. 어린 시절 라브루나의 가장 큰 보물은 페레이라의 친필 사인이 담긴 사진이었다. 농구에도 재능을 보인 라브루나는 10대 중반까지 두 운동 사이에서 갈등하다 역시 축구에 정착하게 되었고 20살 되던 해에 리베르 플라테에 입단하게 된다.
리베르 플라테에서의 데뷔전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는데 호세 마누엘 모레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에스투디안테스전에서 뛰게 된 것이 데뷔전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첫 시즌에 7골을 넣는 데뷔시즌 치고는 괜찮은 활약을 했다.
당시 리베르 플라테는 골키퍼 빼고는 전원 공격이라는 극단적인 공격전술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라브루나는 골 넣는 능력에서만큼은 단연 발군이었다. 그 당시 리베르 플라테의 공격진 라 마키나의 날카로운 창은 바로 라브루나였다. 그리고 아돌포 페데르네라와의 포지션 체인지도 상당히 발군이었다.
1943년 리베르 플라테는 라이벌 보카 후니오르스에게 1점차로 밀려서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라브루나는 처음으로 득점왕에 올랐다. 그리고 국가대표에도 발탁되면서 1946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94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팀의 주축 선수들이 정리되었지만 라브루나는 팀에 끝까지 남았다. 그리고 라 마키나 이후의 새로운 선수들과 함께 다시 팀의 전성기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20년간 리베르 플라테에서 넣은 골이 '''293골'''로 아르헨티나 리그 역대 최다골 되시겠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계속 월드컵에 나가지 않아 남미 대륙 밖에서는 그렇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고 결국 1958년에야 39살의 나이로 월드컵에 데뷔하였지만 아르헨티나는 조 꼴찌로 탈락하고 말았다.
월드컵에서도 활약하고 리베르 플라테에서도 물러난 라브루나는 몇 팀을 더 돌아다니고 1961년에 은퇴하였다.
3. 감독 생활
1971년 로사리오 센트랄을 이끌고 나시오날 챔피언십[1] 에서 우승을 차지한 라브루나는 1975년에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친정팀 리베르 플라테의 감독으로 복귀하였다. 처음에 리베르 플라테를 맡았을 때에는 다소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두어 물러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팀에서 다니엘 파사레야, 노르베르토 알론소, 레오폴도 루케 등 이후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첫 우승을 이끄는 멤버들을 키우면서 리그에서도 6번의 우승을 달성하는 또 다른 황금기를 구가한다.
1981년 건강 문제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고 1983년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스피드와 정확한 슈팅을 겸비한 스트라이커 그리고 리베르 플라테 역대 최고의 선수
그의 293골은 파라과이의 공격수 아르세니오 에리코와 함께 갖고 있는 아르헨티나 리그 역대 최다 골기록이다. 여담으로 라이벌 보카 후니오르스와의 수페르클라시코에서 16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성공을 거둔 축구인으로서 리베르 플라테 팬들은 그의 생일인 매년 9월 28일을 '국제 리베르 플라테 팬들의 날'로 지정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5. 수상
5.1.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9회: 1941, 1942, 1945, 1947, 1952, 1953, 1955, 1956, 1957(이상 리베르 플라테)
5.2. 국가대표
코파 아메리카 우승 2회: 1946, 1955
5.3. 개인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2회: 1943, 1945
5.4. 감독
나시오날 챔피언십 우승 3회: 1971(이상 로사리오 센트랄), 1975, 1979(이상 리베르 플라테)
메트로폴리타노 챔피언십 우승 4회: 1975, 1977, 1979, 1980(이상 리베르 플라테)
[1]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은 1967년부터 1985년까지 나시오날 챔피언십과 메트로폴리탄 챔피언십의 2개 리그로 운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