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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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인구 구성
2.1. 메스티소
3. 문화
3.1. 언어
3.2. 종교
3.3. 식문화


1. 개요


'''아르헨티나인'''은 아르헨티나의 국민 및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헨티나 국적 소유자 등등을 의미한다. 이웃국가인 브라질, 우루과이와 마찬가지로 유럽 각지에서 이민을 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아르헨티나는 속지주의 국가로 만약 본인이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면 '''아르헨티나 국적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아르헨티나 헌법에 국적 포기 불가 조항이 박혀있어서다.[1]

2. 인구 구성


우루과이와 마찬가지로 유럽계 백인 혹은 유럽계 백인에 가까운 메스티소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약 600만여 명의 인구가 유럽 및 레반트 지역에서 이르헨티나로 이주하였고, 이 가운데 300만여 명 정도는 아르헨티나에 영구 정착했다.[2]
특히 이탈리아계 출신 인구가 많은데, 오늘날 아르헨티나인의 62.5% 가량은 이탈리아인 이민자 및 그 혼혈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는 이탈리아어의 영향이 강한 편이기도 하다.
브라질 남부와 우루과이 및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지역이 백인 인구 비율이 높은 이유는 대항해시대 초반에는 잘 개발되지 않던 지역이라 서아프리카 출신 인구의 유입이 적었던데다[3], 19세기 이후 해당 지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민 붐이 겹치면서 대규모 유럽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인데서 기인한다.[4] 19세기 산업혁명 시대부터 스페인을 포함해서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5],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일랜드, 영국,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이주한 유럽계 백인후손들이 많다. 특히 이탈리아계가 많았는데 1861년부터 1920년 사이 아르헨티나로 유입된 이민 인구 3,798,925명 중 59%에 달하는 2,270,525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스페인계 인구도 결코 적지 않다. 애초에 아르헨티나 자체가 스페인 식민지로 출발한 것은 둘째치고 185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에 약 350만여 명의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중 최소 절반 이상이 19세기에 새로이 막 개발되던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원래 스페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멕시코 같은 경우에는 독립 이후에 혐스페인인 감정이 불거지면서 스페인계 이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하던 상황이었던 데다가,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농지가 새로 개간되면서 스페인인 농부들이 새 땅을 얻어 정착하기 쉬웠던 것도 있다.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 다음으로는 독일계와 폴란드계 인구가 많다. 독일계 아르헨티나인들은 19세기 당시 인구 과밀 상태였던 프로이센에서 이민 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징집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경우도 많았다.[6] 아르헨티나에서 프로이센 출신 이민 후손을 제외하고 볼가 독일인 후손만 2백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 정착을 피해 이주한 유대인 인구도 적지 않았는데 러시아 제국 출신 이민 중 일반적인 러시아인 정교회 신도는 극소수였고 상당수가 볼가 독일인이나 유대인이었다.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등에 흩어져 있던 폴란드인들도 아르헨티나로 대량 이민했다. 1차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2차대전 시기까지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50만여 명의 인구가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는데 이 가운데 45% 정도는 루테니아인정교회동방 가톨릭을 믿는 우크라이나인이나 벨라루스인, 일부 루신인러시아계 폴란드인이었다. 폴란드인 이민의 경우 아르헨티나 내 스페인계나 이탈리아계와 같은 로마 가톨릭을 믿기 때문에 종교적인 충돌이 적었지만 우크라이나계의 경우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과 가톨릭 사이에 알력이 심했고 1940년대에 들어서야 교회가 제대로 건설될 수 있었다고 한다. 벨라루스계의 경우 미국의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계 미국인 혹은 미국 아슈케나짐 사회로 그대로 흡수된 것과 다르게 아르헨티나에는 상술한 것처럼 정교도 러시아인 이민자가 적었고, 폴란드에서 정교회 차별을 피해 건너온 벨라루스인 이민자가 더 많았기 때문에, 벨라루스계 고유 정체성이 보존되었다. 러시아계는 적은편이지만 러시아 내전하고 소련 시절의 탄압을 피해 이민을 왔으며 주로 la pampa주하고 entre ríos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흑인 후손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혼혈로 동화되면서 사라졌다. 아르헨티나 역시 브라질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흑인들이 노예무역으로 유입되었고 아르헨티나 독립 직전과 아르헨티나 독립 직후의 통계를 보면 부에노스 아이레스 인구의 1/4에서부터 1/3 가량을 흑인이나 흑인혼혈이 차지하고있다는 통계도 나올 정도로 흑인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즉, 아르헨티나 건국 초기때까지는 백인국가로써의 정체성을 지닐려고 해도 다수의 흑인들이 엄연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았기에 백인국가로써의 정체성을 내세우기 힘든 상황이었다는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흑인남성들을 군대로 보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역사 초기에는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탓에(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연합전쟁, 삼국동맹전쟁과 팜파스 전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많은 흑인남성들이 죽어 흑인들의 성비는 엄청난 여초현상을 띄었고 그러한 상황속에서 흑인 여성들은 새로 이주해온 백인 이주민과 결혼하면서 흑인들의 자손들은 흑백혼혈이 되었으며 세대가 지날수록 압도적인 수를 지닌 백인들과 혼혈이 지속되어 외형적으로 백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백호주의적인 이민정책을 펼치면서 흑인들의 유입은 상당기간 차단된 상태였고 거기에다가 원주민만큼은 아니더라도 흑인들을 걸끄러워하던 풍토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흑백혼혈인들을 점차적으로 백인으로 간주했으며 결과적으로 세대가 지날수록 흑인 조상을 가지고있는 살마도 백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되어 잊혀지게 된것이다. 반면에 브라질은 동북부 지방의 흑인-흑백혼혈 인구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7] 유럽계 인구 대량 이주 이후에도 흑백혼혈 파르도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다. 브라질 역시 원래 인구밀도가 희박했었다가 유럽계 이민을 받았던 남부 3개 주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아르헨티나인들과 외양이 대동소이하지만, 원래부터 인구가 많았던 동북부로 가면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외형이 많이 달라진다.
그뿐만 아니라 아랍계유대인 등 중동계 혈통의 민족들도 거주하고 있다. 1891년부터 1920년까지 367,348명이 레반트 지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정착하였다.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이 시리아계 아르헨티나인으로 대통령이 되기 이전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폴란드나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인구 상당수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나치 독일 집권 이전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피난한 유대인 인구도 적지 않았다.
한국 교민들도 적지 않은 편인데, 교민들이 처음 이민왔던 1960년대에는 한국이 아직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던데 반해 아르헨티나는 가난한 사람도 하루 한끼는 소고기를 먹었던 나라로 이 당시에 한국과 아르헨티나간의 소득차가 커서 이민에 메리트가 컸지만[8]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며 국민소득도 한국에 추월당함에 따라 상당수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개요 항목에 상술된 아르헨티나 국적법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출생한 2세대의 경우 한국에 와서도 아르헨티나 이중 국적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20만명 정도의 중국계 그리고 6만명 정도의 일본계도 거주하고 있다.
해외 디아스포라로는 주로 미국으로 갔으며 아르헨티나계는 2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옆나라 칠레에 8만5천명 스페인에 7만명 이스라엘에 5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2.1. 메스티소


원주민 인구는 공식적으로 2% 내외에 불과하고 메스티소의 인구비율이 그리 높지 않지만 유전적인 조사결과에 의하면 인구의 상당수가 메스티소이다. 애초에 '''아르헨티나인의 문화 아이콘인 가우쵸부터가 메스티소''' 유목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르헨티나는 팜파스, 차코, 파타고니아, 티에라델푸에고 섬 일대에 분포하던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9]을 학살, 추방하면서 영토를 확장한 국가이고, 또한 이렇게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획득한 영토에 유럽계/중동계 이민을 심고,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원주민에 대한 차별을 일삼아서 메스티소였던 가우쵸들도 원주민 정체성보다는 백인 정체성에 더욱 가까워질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르헨티나에 이민 온 유럽인들 가운데 여성보다는 남성 비율이 더 많았으며, 유럽계 이민자 남성 상당수는 원주민 여성과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 후안 페론도 이러한 메스티소 가운데 한 명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서는 원주민이나 메스티소에 대한 차별도 많이 완화되었고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원주민이나 흑인들도 보기 쉬워졌기는 했다.[10]
네셔널 지오그래픽에서 2018년 인증한 통계로 하플로그룹 조사에 따른 추정에 의하면 오늘날 아르헨티나인들의 유전의 52%는 유럽계, 27%는 아메리카 원주민 계열, 9%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나머지 9%는 중동계나 아시아계에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일대 주민들 평균은 유럽계 유전자가 76% 정도로 압도적이었지만, 북서부 살타 주 주민은 유럽계 유전자가 33% 정도라고 한다. 다른 조사에서는 유럽계 혈통의 비율이 이보다 높게 나와서 최대 60% 후반까지 나오기는 하지만 이 조사들에서도 아메리카 원주민들 혈통을 가진 사람이 최소 20%를 넘는것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인구의 상당수가 메스티소인것은 변함이 없다.

3. 문화



3.1. 언어


대개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스페인어는 아르헨티나인들의 모국어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쓰이는 스페인어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스페인어와 달리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아 스페인 본토는 물론 다른 중남미쪽의 스페인어와 다른 구석이 많은 경우가 많이 있다.
중남미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마누엘 푸익이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루이스 보르헤스의 경우 세계 문학사의 거장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문학 외적으로는 원주민에 대한 비하적인 시각을 보유한 것으로 당시 시대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로도 평가되며, 마누엘 푸익은 초창기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이지만, 동시에 본국에서 우파 정권의 탄압을 받아 해외를 떠돌다 객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누엘 푸익의 삶은 비교하자면 또다른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거두였던 러시아계 미국인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소련을 혐오하면서도 고국 러시아를 계속 동경하고 그리워했던 것과도 매칭된다고도 볼 수 있다.

3.2. 종교


여타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국민들 대부분이 천주교를 믿고 있다. 개신교를 믿는 아르헨티나인들이 늘어나고 있고 무종교인 경우도 많은 편이다. 일부는 동방 정교회를 믿고 있다.

3.3. 식문화


옥수수, 감자를 주로 먹는 브라질이나 페루, 에콰도르 등 다른 남미 국가 사람들과 다르게, 전체 인구 중 유럽계 이민자 비율이 더 많았던 영향으로[11] 빵이나 파스타 등 밀가루 음식이나 소고기를 많이 즐겨먹는 편이다. 아르헨티나인들은 가우쵸의 소고기 사랑을 물려받은 걸로도 유명하다. 아르헨티나인들이 마테차를 즐겨 마시는 이유도 가우쵸들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워낙 먹을 게 남아돌던 나라였다보니, 음식의 맛 자체보다는 같이 식사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식사 분위기는 어떠한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1] 때문나 아르헨티나 출신인 프란치스코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국적 문제가 발생했으나(교황 선출 규정상 원 국가/바티칸 이중국적 신분인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될 경우 원래 국적은 자동으로 소멸하며 오로지 바티칸 국적만 남게 된다. 사유는 정치적 중립 준수.) 국적 포기가 불가능한 아르헨티나 현실상 특별히 예외로 인정하기로 했다.[2] 비교하자면 같은 시기 우루과이에는 유럽계 이민이 50만여 명에 달했으며, 브라질 역시 당시 이민 인구가 300만여 명에 달했으나 적응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인구 비율이 아르헨티나보다 더 많았다.[3] 물론 비교적 적었다는 얘기이지 사실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을 당시에 흑인들이 많이 유입되어서 독립 당시에는 인구의 상당수가 흑인이거나 흑백혼혈이었다.[4] 19세기 말 의학이 발전하면서 장거리 이민이나 파견을 나간 사람들의 사망률이 감소하고,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기간동안의 저임금 중노동, 인구 증가에 의한 토지부족, 민족주의 부흥에 따른 반유대주의 폭동 등으로 신대륙 이민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는데 당시 유럽인, 일부 중동인들의 이민 행렬은 미국과 캐나다 외에도 '''아르헨티나''', 브라질 남부, 우루과이, 칠레 등으로 향했다. 출처: 에릭 홉스봄 3부작[5] 러시아인은 드물고 대부분 볼가 독일인 혹은 유대인[6] 이들이 어째서 러시아에서 다시 아르헨티나 등으로 이민했는지 관련해서는 해당 문서나 아니면 재침례파 문서 참조[7] 인구가 중남미에서 가장 많았다[8] 특히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소고기를 먹을때 꼬리와 내장은 잡부위 취급해서 잘 먹지 않고 버리거나 애완동물에게 주기 일쑤였는데 고기는 특별한날에 먹거나 아껴먹었던 한국 교민들 입장에서 눈이 휘둥그레질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교민들은 남는 잡부위들을 싸게 떨이로 사서 설렁탕, 곱창, 막창, 꼬리곰탕등을 만들어 먹었다.[9] 테우엘체, 차루아, 과라니, 오나, 하우시, 마푸체 등. 특히 차루아족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버티지 못하고 멸족되어버렸다.[10] 원주민들의 경우에는 대다수가 볼리비아나 페루에서 온 경우이다. 처음부터 아르헨티나 땅에서 살던 원주민들의 경우 그나마 남은 이들도 엄청난 탄압에 시달리고 있다(마푸체족이 대표적).[11] 그런데 페루와 브라질, 에콰도르도 유럽계 이민자들의 이민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