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공
[clearfix]
1. 개요
고려의 임시 국왕. 고종의 아들이자 원종의 동생. 본명은 왕창(王淐), 작위는 안경공(安慶公). 그 때문에 안경공 창(淐)이라고 불린다.
권신 임연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원종이 양위하면서 잠시 보위에 올랐다. 굳이 재위 기간을 따지자면 1269년 6월 ~ 11월. 하지만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는 고려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묘호와 시호가 추봉된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아래의 생애 문단 참조.
2. 생애
1253년, 몽골#s-1의 인질로 갔던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이 "태자나 안경공이 입조하면 군사를 물린다더라"고 전해왔다. 이에 최항은 결사 반대했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막대해지자 그 해 12월 사신으로 보내졌다.
1254년 1월 몽골 장수 아무칸(阿母侃)의 군사를 접대하여 군사를 물리게 하고 몽골로 가서 몽케 칸을 만난 후 8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오랑캐 풍습이 물들었다면서 굳이 하룻밤을 육지에서 머무르고 입었던 옷을 태운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강화도로 들어왔다. 이후 1257년, 1259년, 1265년에도 몽골과 교섭하였다.
몽케 칸을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가 있다. 몽케 칸은 처음에는 안경공 왕창이 그 전에 인질로 간 영녕공 왕준의 동생이라고 여겨서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런데 민칭(閔偁)이란 자가 사실을 고발해서 영녕공이 고려의 왕자가 아니라 친척임을 알았다. 물론 영녕공은 자기가 국왕의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고 박박 우겼으며(...) 그와 함께 온 참지정사 최린도 '왕의 친자(親子)는 아니지만 왕의 사랑하는 자식(愛子)이니 그게 왕의 아들이라는 뜻임'이라며 콤비로 우겼다(...). 당연히 몽케 칸은 증거를 가져오라며 그 전에 고려에서 몽골에게 보낸 표문을 읽어 보았는데 정말로 표문에도 친자식(親子)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愛子)라고 쓰여져 있었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 몽케 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불문에 부친 채 넘어가야 했다.[출처]
권신 임연이 교정별감 김준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뒤 원종마저 노리려고 하자 원종이 급히 양위를 해 왕이 되었다. 원종은 상왕이 되었고, 동시에 임연은 교정별감이 되었다. 그리고는 몽골에는 원종이 위중하여 양위했다고 알렸다. 하지만 당시 몽골에 갔다가 귀국하던 세자 충렬왕이 이 사실을 알고 급히 몽골로 돌아가 몽골에 알렸기 때문에, 임연은 다시 원종을 복위시키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후 충렬왕이 몽골군과 함께 귀국하게 되자 겁을 먹은 임연은 근심과 울분 속에 등창으로 죽었다. 아들 임유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권해서 환도를 반대했으나 몇 달 못가고 원종의 밀명을 받은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결국 조정이 강화도에처 출륙하는 동시에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100년간 이어진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지만 동시에 고려 왕실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반증하는 사례이다. 이후 영종은 다시 왕족의 삶을 누렸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이후 공양왕 3년(1391년)에 안경공의 기일을 맞아 공양왕이 안경공을 "영종(英宗)"으로 추존해 태묘에 제사지내려 시도했지만, 안경공은 형의 자리를 잠깐 빼앗았던 찬탈자일 뿐이라는 예조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게 되었고, 왕의 신분으로 복권되지 못한 채 고려가 다음해 멸망하고 만다.
안경공의 묘호와 시호는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에 다르게 기록되있다. 고려사절요엔 '''묘호''' "영종"과 시호를 올렸지만(시호는 미상) 신하들이 영 아닌것 같다고 해 무산됐는데 고려사 열전 안경공 왕창 조에는 그냥 "사후 '''시호''' "영종"을 추봉했다."라고만 나와있다.
3. 여담
재위가 하도 짧아서 특별한 일은 없지만, 최탄이 몽골에 투항해 서경(평양)을 포함한 고려의 60여성을 바치고 동녕부가 설치된 때가 이 때.
이 사람의 후손은 조선 초기의 왕씨 학살 과정에서도 어찌어찌 살아남아서(차남 왕청의 후손) 안경공파(安慶公派)를 이루고 있다.
[1] 개성왕씨 족보에서 계미년 8월생(1223년 8월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낮게 잡더라도 고려 원종의 출생이 1219년인 것을 보면 1219년 이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출처] 고려사 열전 12권 최유청 중 부 최린 부분